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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1부)] 고대 집권국가화와 불교 수용(1) 법흥왕과 이차돈 

결단과 희생 발판 중고(中古)시대 꽃피우다 

신명호 부경대 교수
단군조선 등 초기 국가 건국 무렵부터 한국사(史) 시작돼…삼국 중 가장 약했던 신라, 불교 공인 후 집권국가로 변신

고조선 이후 반만년 한국사는 몇 차례의 대전환을 겪으며 현재에 이른다. 대전환을 미리 준비했거나 아니면 주체적으로 선도함으로써 새 시대를 개척한 주인공들이야말로 반만년 우리 역사의 진정한 영웅이다. 21세기 들어 한국은 또 다른 대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첫 번째로 신라의 집권국가 형성 및 불교 수용을 주도한 영웅들을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 대전환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중국화와 유교 수용이며, 세 번째 대전환은 근·현대 시기 서구 근대화와 기독교 수용이다. 이렇게 ‘한국사 대전환기의 영웅들’은 반만년 한국사의 대전환을 선도한 영웅들을 거시사적(巨視史的)으로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대전환의 의미와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중국 허베이성 친황다오에 위치한 갈석산의 전경. [사기]에는 “연나라는 발해와 갈석산의 틈새에 하나로 모이는 곳으로, 동북으로는 오랑캐와 접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오랑캐는 동이, 즉 고조선이다.
한민족의 유구함과 적응력을 상징하는 말로 ‘반만년 한국사’보다 더 적절한 용어를 찾기 힘들다. 실제로 한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을 면면히 이어 왔으며, 격변기마다 한민족은 극적인 대전환에 성공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반만년 한국사’라는 말은 반만년 전쯤 우리 조상들이 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해 초기 국가를 만들기 시작한 단군왕검 시대를 한국사의 기점으로 삼았을 때 성립되는 용어다. 따라서 ‘반만년 한국사’라는 용어를 보다 엄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하기 이전, 우리 조상들은 어디에서 살았으며, 또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런 인식이 있어야만 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한 이후의 ‘반만년 한국사’가 갖는 특징과 의미가 보다 선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은 저 멀리 시베리아의 바이칼호 주변 또는 대흥안령 북쪽 지역에서 살다가 요서·요동·만주·한반도 등지로 이동해 정착했다고 한다. 바이칼호는 힝가이산맥과 더불어 광활한 몽골고원의 중심부에 자리하는데 몽골고원을 동몽골과 서몽골로 구분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바이칼호를 경계로, 그 동쪽으로부터 대흥안령 안쪽 부분이 동몽골이다. 대흥안령 너머의 동쪽은 이른바 만주 벌판이다.

그러니까 ‘반만년 한국사’라는 용어에는 반만년 이전 동몽골에 거주하던 우리 조상들이 그곳을 떠나 요서·요동·만주·한반도로 이주해 정착하고 단군조선을 비롯한 초기국가를 만들기 시작한 때로부터 한국사가 시작됐다 뜻이 함축돼 있다. 물론 우리 조상들이 동몽골에 거주하기 이전에는 또 다른 거주지가 있었다. 그곳이 정확이 어느 곳이고, 언제 또 왜 그곳을 떠나 동몽골로 왔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연구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 년 전쯤 빙하기가 끝나면서 지구 전역에 대홍수가 빈발했다. 그 대홍수를 피하고자 인류는 유라시아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파미르고원 쪽으로 몰려들었다. 대홍수가 끝난 후 파미르 고원에 몰려들었던 인류는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그때 우리 조상들은 파미르 고원의 동쪽에 자리한 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거쳐 바이칼호 주변 또는 대흥안령 북쪽으로 이동했다. 알타이산맥부터 바이칼호 서쪽 지역은 곧 서몽골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 년 전쯤에 우리 조상들은 파미르 고원에 거주하다가 대홍수가 끝난 후 그곳을 떠나 서몽골을 거쳐 동몽골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동몽골을 떠나기 이전에 서몽골과 동몽골에서 수천 년을 지냈다는 뜻이 된다. 길게 잡으면 1만 년 전부터 반만년 전까지 대략 5000년을 몽골고원에서 지냈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1만 년 전부터 반만년 이전의 시기는 인류사에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데 그 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몽골고원에 거주했던 것이다. 몽골고원은 초원지역이고, 그곳에서 발달한 문화는 유목부족 문화다. 추운 날씨와 부족한 강우량 때문에 몽골고원에서는 농경문화가 발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석기시대 몽골고원에 거주하던 부족들은 유목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들의 주류 사상은 샤머니즘이었다.

한민족에 강한 영향 미친 ‘유목과 샤머니즘’


그러므로 한국의 과거 역사 1만 년 중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반만년을 우리 조상들은 몽골고원에서 유목부족으로 살았으며, 샤머니즘을 주류 사상으로 믿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과거 1만 년 중에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오래 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문화 배경은 유목과 샤머니즘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렇게 반만년 가까이 몽골고원에서 샤머니즘을 믿으며 유목부족으로 살던 우리 조상들은 대략 반만년 전후로 동몽골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해 요서·요동·만주·한반도 등지에 정착했다. 그 뒤에도 동몽골에서 만주·한반도로 이주가 여러 차례 이어졌다. 만주와 한반도는 몽골고원과 비교해 따뜻하고 강우량도 넉넉했으므로 농경문화를 발달시키기에 적합했다.

따라서 요서·요동·만주·한반도에 정착한 우리 조상들은 기왕의 유목문화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농경문화를 발달 시켰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농경문화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기왕의 유목문화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요컨대 과거 1만 년의 한국사 중에서 첫 번째 대전환은 유목문화에서 농경문화로 대전환이었으며, 그 대전환은 대략 반만년 전부터 시작됐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한국사(史)상 첫 번째의 대전환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전환을 추동(推動)한 요인과 함께 저지한 요인도 두루 고찰해야 한다. 유목문화에서 농경문화로 추동 요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자연환경이었다. 농경을 주생업으로 삼기 위해 가장 필요한 조건은 역시 농지와 더불어 기온 및 강우량이기 때문이었다. 반만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정착한 요서·요동·만주·한반도는 농경에 적합한 기온과 강우량이 갖춰졌을 뿐만 아니라 토지 역시 기름졌다. 이런 자연환경에서는 유목보다는 농경이 훨씬 유리했기에 당연히 농경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두 번째의 추동 요인은 지정학적 위치였다. 과거 수천 년간 동아시아에서 유목문화와 농경문화를 구분하던 경계선은 만리장성이었다. 만리장성 남쪽의 농경문화는 이른바 중국의 유교문화권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정착한 요서·요동·만주·한반도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부분에 해당하는 동시에 만리장성의 북쪽과 남쪽을 포괄한다. 이와 같은 지정학적 위치에서 요서·요동·만주·한반도에 농경문화를 추동하게 한 지정학적 요인은 바로 만리장성 남쪽의 유교문화였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추동 요인은 정치적 요인이었다. 반만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만주·한반도에 정착했을 때 그곳이 무주공산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이미 선주민도 있었고, 뒤이은 이주민들도 있었다. 선주민이나 이주민들은 유목지역에서도 유입됐지만 농경지역에서도 유입됐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 유입됐든지 만주·한반도에 정착한 이후에는 농경민으로 전환되는 것이 대체적인 추세였다. 이 같은 추세를 인식하고 유목문화에서 농경문화로 전환을 주도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등장하는 것 역시 자연스런 추세였다. 즉 만주·한반도의 농경민화한 주민들의 요구를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으로 수렴하고자 분투한 지도자들이 곧 농경문화로 대전환을 추동한 정치적 요인이었던 것이다.

단군조선은 한국사 최초의 집권적 국가


▎신라 제23대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골품제 등 각종 정치·사회제도를 정비했다. 법흥왕의 능이라고 전해져 오는 경주시 효현동의 고분(사적 제176호).
반면 농경문화로의 대전환을 저지한 요인 역시 자연환경·지정학적 위치 및 정치적 요인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만주·한반도는 전체적으로 동몽골에 비해 따뜻하고 강우량도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전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만주 지역 중에서도 흑룡강성 같은 곳은 동몽골 못지않게 추워 농경이 쉽지 않다. 그런 곳에서 곧바로 농경문화로 전환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만주·한반도 중에서 만리장성 이북에 해당하는 지역은 여전히 유목에도 편리했다. 그래서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송화강 하류 또는 흑룡강성 하류에 거주하는 여진족들이 부족 단위로 두만강 유역이나 압록강 유역 심지어 요하 유역까지 이동해 거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따라서 동몽골 지역에서 남하해 만주·한반도에 정착했다고 해서 곧바로 농경문화로 전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두 번째 저지 요인은 지정학적 위치였다. 만리장성 남쪽의 유교문화가 만주·한반도의 농경문화를 추동한 지정학적 요인이었다면, 반대로 만리장성 북쪽의 유목문화는 만주·한반도의 농경문화를 저지한 지정학적 요인이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저지요인은 정치적 요인이었다. 동몽골에서 이주해 온 유목부족들은 오랜 세월 초원에서 형성된 정치문화를 갖고 있었다. 부족 단위로 분권화한 정치문화가 그것이었다.

부족 단위로 분권화한 정치문화에서는 최고의 기득권 세력이 바로 부족장이었다. 그들의 기득권을 조정하기 위해 부족장들은 중대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함께 모여 합의안을 도출해내는 전통이 있었다. 몽고의 쿠릴타이가 바로 그것이었다. 부족 단위로 분권화한 정치문화 그리고 쿠릴타이로 대표되는 부족장들의 합의제도 등은 집권 국가를 추구하는 세력에게는 가장 먼저 타파해야 할 유습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추동 요인과 저지 요인 중에서 추동 요인이 승리한 결과가 바로 한국사상 고대 집권국가의 출현이었다. 단군조선은 반만년 한국사에서 최초로 확인되는 집권적 국가다. 뒤이어 등장하는 부여·고구려·백제·가야·신라 역시 고대의 집권적 국가이다. 이들 집권적 국가 중에서 대전환을 가장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최종 승리를 쟁취한 국가는 신라였다. 따라서 반만년 한국사에서 첫 번째 대전환인 유목부족에서 집권국가로의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역사는 바로 신라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신라 역사에서 집권국가로 대전환을 상징하는 국왕은 법흥왕이다. 서기 512년에 지증왕을 뒤이어 신라 제23대 국왕으로 즉위한 법흥왕의 이름은 모즉지(牟卽智) 또는 무즉지(另卽知)다. ‘모즉’ 또는 ‘무즉’은 이름이고, ‘지’는 존칭이다. 그러니까 법흥왕은 생전에 ‘모즉님’ 또는 ‘무즉님’으로 불렸던 것이다. ‘모즉’ 또는 ‘무즉’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법흥왕을 원종(原宗)으로 번역했는데 ‘모즉’이 ‘원(原)’으로 번역되고, ‘지’가 ‘종(宗)’으로 번역된 것이었다. ‘원(原)’은 언덕·근원 등의 뜻이므로 ‘모즉’ 또는 ‘무즉’은 ‘언덕’ 또는 ‘근원’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법흥왕은 생전에 언덕처럼 듬직한 분이라는 뜻에서 ‘모즉지’라고 불렸을 듯하다. 어쩌면 법흥왕의 덩치가 언덕처럼 큼직해서 일 수도 있겠다.

실제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흥왕은 7척 장신이었다고 한다. 신라 때 사람 이름은 신체적 특징이나 개성 등을 참조해 짓는 일이 많았다. 예컨대 이사부와 거칠부의 경우 이사부는 ‘태종(苔宗)’으로, 거칠부는 ‘황종(荒宗’으로 번역되는데 이사부는 ‘이끼’ 같은 개성을 가졌기에 ‘이끼님’이라는 뜻에서 이사부이고, 거칠부는 거친 개성을 가졌기에 ‘거친 님’이란 뜻에서 거칠부다.

6부 연맹에 포위된 임금의 승부수

법흥왕이 즉위하던 당시 고구려 국왕은 문자명왕이었고, 백제 국왕은 무령왕이었다. 고구려 문자명왕은 장수왕을 뒤이어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국왕이었다. 고구려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남하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에 대항해 백제와 신라는 433년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했다. 당시 만주와 한반도의 최강대국은 고구려였고 그 뒤를 이어 백제·신라·가야 순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의 직접적인 군사위협에 노출된 신라는 생존을 위해 백제와 동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제동맹의 주도권은 백제에 있었다. 백제는 신라·가야는 물론 일본, 중국 양무제 등과도 연합해 고구려에 대항하고자 했다. 그 전략이 성공해 무령왕 때는 한반도 이남의 판세를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이 신라에는 호기이기도 했고 위기이기도 했다. 백제의 주도권이 강화될수록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안전해지기는 하지만 반대로 백제에 대한 예속이 심화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법흥왕은 나제동맹을 깨고 홀로 설 수도 없었으며, 고구려에 밀착할 수도 없었다.

홀로 서겠다고 하다가는 고구려와 백제 양쪽으로부터 공격당할 가능성이 높았고, 고구려에 잘못 밀착하다가는 백제보다 더 심각하게 예속될 수 있었다. 신라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백제 또는 고구려만큼 강국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려면 신라 역시 고구려나 백제처럼 집권국가로 거듭나야 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불교를 수용한 후 집권 국가로 변신하고 동북아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백제 역시 고구려의 뒤를 이어 불교를 수용하고 집권국가로 변신했다. 하지만 신라와 가야는 불교를 수용하지도, 집권국가로 변신하지도 못했다. 유목부족의 전통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에 하나라도 가야가 신라보다 먼저 불교를 수용하고 집권국가로 변신한다면, 신라는 가야에 정복당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법흥왕이 즉위했을 때만 해도 신라는 훼부(喙部), 사훼부(沙喙部), 잠훼부(岑喙部,) 본피부(本彼部), 사피부(沙彼部), 한기부(漢岐部)라고 하는 여섯 집단의 연맹체에 지나지 않았다. 연원을 따져 가면 신라의 6부 연맹체는 박혁거세 때 성립됐다. 경주 지역에 정착한 6개 집단이 연맹체를 구성하고 박혁거세를 연맹장으로 추대한 것이 신라사의 시작이었다. 신라를 구성하는 6개 집단의 지배자는 모두 칸(干)으로 불렸으며, 각자가 자신의 집단을 통치했다. 칸은 유목부족의 샤먼 속성을 갖는 왕이었으며, 칸 지배하의 집단은 독자적인 토템과 신앙을 갖는 부족이었다.

신라를 구성하는 6개 집단이 유목부족 전통을 가졌기에 당연한 현상이었다. 따라서 거서간·차차웅·이사금이라고 하는 6부 연맹장은 ‘대표 칸’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으며, ‘대표 칸’은 자신의 부족에 대해서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6부 연맹장은 6부의 대표자 회의 즉 칸들의 회의에서 선출됐는데, 그 회의가 바로 화백회의였다. 화백회의는 부족장 합의체로서 몽고의 쿠릴타이와 본질적으로 같았다.

신라의 6부 연맹체는 내물왕 때 김씨 집단이 훼부에 더해 사훼부까지 장악하면서 연맹장을 세습하고 마립간이라 불릴 정도로 성장했지만, 유목부족의 전통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법흥왕 즉위 때까지도 신라의 중요 사안은 6부 대표자 회의에서 합의·결정됐기 때문이다. 신라의 ‘대표 칸’은 지증왕 때부터 마립간 대신 매금왕(寐錦王)이라 불리기 시작했는데 매금왕은 마립간보다 조금 강화된 ‘대표 칸’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다. 법흥왕 역시 즉위 직후 매금왕으로 불렸다. 이는 근본적으로 유목부족의 전통이 법흥왕 때까지도 지속된 결과인데, 이를 타파하고 집권국가로 거듭나려면 무엇보다도 샤머니즘을 극복해야 했다.

칸들의 반대에 불교 공인은 물 건너가는 듯


▎삼국시대 당시 고구려·백제·신라의 치열한 전투를 묘사한 그림.
법흥왕은 재위 8년(521)에 중국 양무제에게 사신을 파견했다. 이 사건은 신라사에서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박혁거세 이래 신라에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내물왕 26년(381) 위두(衛頭)를 전진(前秦) 왕 부견(符堅)에게 보낸 것이 처음이었다. 부견은 고구려 소수림왕에게 372년 순도를 보내 불교를 전해준 왕인데, 그로부터 9년 후에 내물왕이 부견에게 사신을 파견한 이유는 불교 수용 때문이었을 듯하다.

하지만 그 이후 불교 수용과 관련된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 내물왕의 불교 수용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유목부족 전통을 중시하는 부족장들과 토착 신앙의 반발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신라의 몇몇 마립간이 불교를 수용하고자 시도했던 것이 간간이 역사 기록에 보이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521년에 법흥왕은 신라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게 됐는데, 그 대상이 바로 양무제였던 것이다. 양무제는 중국 역사상 불교를 가장 좋아한 황제로 정평이 나 있으며,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 황제였다. 그런 양무제에게 법흥왕이 사신을 파견한 이유는 불교 수용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법흥왕이 양무제에게 사신을 파견한 사실은 [삼국사기] [양서(梁書)] [양직공도(梁職貢圖)] 등에 보인다. [양서]에는 ‘보통(普通) 2년(521) 왕의 성은 모(募)이고 이름은 진(秦)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백제를 따라 특산물을 바쳤다’로 기록돼 있다. 당시까지 법흥왕은 중국에 사신을 보낸 적이 없었기에 백제 무령왕의 사신을 따라가게 했던 것이다. 그 정도로 법흥왕 때까지도 신라의 국제관계가 취약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양서]에 등장하는 ‘모진(募秦)’은 법흥왕의 이름인 ‘모즉’ 또는 ‘무즉’을 중국인들이 잘못 알아듣고 모를 성씨로, 진을 이름으로 기록한 것이었다. 법흥왕 당시까지 신라 국왕조차도 아직 중국식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법흥왕의 공식 칭호는 ‘모즉지 매금왕’일 뿐이었다.

양나라에 다녀온 신라 사신이 법흥왕에게 어떤 보고를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불교를 기반으로 하는 양무제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서 번영을 구가하던 양나라의 실상을 자세히 보고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삼국유사]에는 법흥왕이 불교 사찰을 창건하려다가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자 “아! 내가 부덕한 몸으로 대업을 계승했는데 위로 음양의 조화가 부족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환락이 없으므로 불교에 마음을 두고 있지만 누구와 더불어 일을 같이할까”라고 탄식했다. 이 탄식을 들은 이차돈이 “신이 들으니 옛 사람은 나무꾼에게도 계책을 물었다 합니다. 신은 중죄를 무릅쓰고 아뢰고자 합니다”고 제안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대화가 오간 시점은 분명 신라 사신이 양나라에 다녀온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법흥왕은 양나라에 다녀온 사신의 보고를 받은 후 불교를 공인하려 했지만, 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것이었다. 당시 신라의 화백회의 전통으로 볼 때 법흥왕은 불교 공인에 관한 문제를 화백회의에 부쳤다가 거부됐다고 이해된다. 신라의 전통에서 화백회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따라서 법흥왕이 “누구와 더불어 일을 같이할까”라고 한 탄식은 ‘화백회의에서 불교 수용을 통과시킬 만한 인물 또는 계책이 있을까’ 하는 탄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기적에 압도돼 전격 수용


▎불교 수용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의 화상(畵像).
법흥왕이 “누구와 더불어 일을 같이할까”라고 탄식한 이유는 화백회의에서 불교 수용에 호의적인 칸이 없었다는 뜻이나 같다. 화백회의 칸들이 너나없이 불교 수용에 반대한 이유는 유목부족의 전통과 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전통과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일념에서 칸들은 신라가 집권국가로 전환하지 못하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때 오직 한 사람 이차돈만이 불교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호응했던 것이다.

이차돈은 이사부의 조카로서 김씨 집단의 일원이었다. 이사부는 법흥왕과는 4촌간이었으며 사실상 화백회의 대표자였다. 법흥왕의 불교 수용을 가장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을 인물이 이사부였다. 이차돈은 그런 이사부의 조카였으므로 출신으로만 본다면 그 역시 불교 수용에 반대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차돈이 불교 수용에 찬성한 이유는 당시 신라의 상황과 역사의 추세를 냉정하게 통찰했기 때문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하기 힘들다. 이차돈은 이사부의 조카이므로 성명을 ‘김이차돈’이라고 해야 하는데, 이차(異次)는 이름이고 돈(頓)은 미칭이다. 즉 이차돈은 ‘이차님’이란 뜻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이차’를 ‘염(厭)’으로 번역했는데 ‘염’은 고슴도치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차돈은 ‘고슴도치님’ 이라는 뜻이 된다. 아마도 이차돈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예리한 면이 있었던 듯하다.

그런 예리한 안목으로 이차돈은 화백회의의 여론을 뒤집으려면 누군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듯하다. 이차돈은 불교 수용을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각오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차돈이 “신은 중죄를 무릅쓰고 아뢰고자 합니다”고 했을 때 법흥왕이 “네가 할 일이 아니다”고 막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결심이 확고함을 알게 된 법흥왕은 이차돈과 짜고 명령 불복종으로 그를 참형에 처했는데, 그때 목에서 흰 우유가 한 길이나 솟았다고 한다. 바로 그 자리에 법흥왕은 백관들을 불러 참관하게 했다. 이차돈의 사형 현장을 참관한 백관들이 바로 화백회의 구성원인 칸들이었다. 아마도 칸들은 사람을 죽이는 공포 분위기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기적에 압도돼 불교 수용에 찬성했을 듯하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법흥왕 15년(528) 마침내 불교가 공인됐다. 이로써 신라는 오래된 유목부족 전통을 일소하고 새로이 집권국가로 대전환을 시작하게 됐다. 이 같은 사실을 중시해 [삼국유사]에서는 법흥왕 시기를 그 이전 상고(上古)와 구분하고 중고(中古)로 규정했다. 법흥왕의 결단과 이차돈의 희생을 발판으로 신라의 새로운 시대 즉 중고시대가 찬란하게 꽃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901호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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