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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12)] 정몽주를 정신적 기원으로 삼은 조선의 역설(逆說) 

“정치와 도덕이 찢어지면 비극” 

김영수 영남대 교수
역성혁명으로 탄생한 조선, 성리학 이념 기초한 禮의 정치로 자율적 질서 작동… 이색·권근은 이성계 암살 모의에 휩쓸려 몰락, 정치로 갈라진 여말의 ‘정신적 형제들’

▎조선왕조는 국가와 가정에 관한 의례를 지극히 세밀하게 다뤘다. 얼핏 정치와 관련성이 적어보이지만 조선은 기본적으로 예로써 다스리는 나라였다. 사진은 종묘대제를 재현한 장면.
조선은 정치와 도덕을 같은 문제로 봤다. 고려에서는 정치는 그냥 정치였을 뿐이다. 13세기말 이념적 전환의 기원은 정몽주다. 그 상징적 사건이 1362년 1월, 제2차 홍건적의 난이 끝난 다음 발생한 정치적 비극이었다. 장군 정세운과 안우, 김득배, 이방실은 홍건적을 괴멸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들이었다. 그러나 승리 직후 모두 피살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그 배후에는 공민왕의 음모가 있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공민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수도를 포기하고 안동까지 도망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군 20만의 지휘권이 장군들 손에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스스로를 보전하려는 군주는 선하기만 해서도 안 되며, 필요에 따라서는 선인도 악인도 될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공민왕은 이 충고를 충실히 따랐다.

이때 26세였던 청년 정몽주가 받은 충격은 존재의 뿌리를 흔드는 것이었다. 그는 두 해전인 1360년(공민왕 9) 과거에 합격했다. 그때의 시험관이 바로 문관 출신 장군 김득배였다. 정몽주는 길가에 버려진 김득배의 시체를 수습하고 제문을 지었다. “아아 황천이여! 나의 죄가 무엇이며, 아아 황천이여!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것이 제문의 첫 구절이다. 피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곧바로 하늘을 향해 형이상학적 절규를 했다. “대개 듣건대 선인에게 복을 주고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림은 하늘이요, 선인을 상주고 악인을 벌함은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나 그 이치는 하나인즉,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기고(天定勝人),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人衆勝天) 하였으나,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김은 과연 무슨 이치며,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함은 또한 무슨 이치입니까?”([安祐傳]) 당대의 정치가들은 모두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해했다. 정치적으로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청년 정몽주는 이 사건을 하나의 형이상학적 사건으로서 체험했다. 역사와 천리, 정치와 도덕이 찢기는 비극을 목격한 것이다. 정몽주는 그것들이 이름만 다를 뿐 모두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나 그 이치는 하나”인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정치, 이 역사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세계관은 위기에 처했고 비통함에 절규했다. 고려에서는 이런 종류의 세계 감각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체험으로부터 정몽주는 조선의 정신적 기원이 됐다. 삶의 최후에, 순교로써 이 분열을 저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조선인의 도덕적, 정서적 샘물이 됐다.

‘禮治 국가’ 지향한 조선


▎사마천(오른쪽)은 [사기]를 통해 ‘권선징악’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대해 절규했다. 정치와 도덕이 일치해야 한다고 믿은 정몽주와 비슷한 가치관을 품은 것이다. 왼쪽 사진은 중국 고대사의 정수로 통하는 사마천의 [사기].
이색은 정몽주를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사실 정몽주는 조선의 형이상학에 직접 기여하지는 못했다. 이황은 정몽주가 “해동의 유종이신데, 후학이 불행히도 논저를 미처 보지 못하였고, 성균관에서 횡설수설하셨다는 말씀에 대해 우리가 그 실마리를 찾으려 해도 증거할 데가 없다”([臨皐書院祭文])고 말했다. 체계적인 글이나 저술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 그 역할을 대신한 게 권근이다.

권근은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을 저술했다. 이 저작들은 한국 최초의 성리학 연구서다. 그중 [예기천견록]은 한국 유학의 독자성을 수립한 최초 저술로 평가된다. 경전의 학습을 넘어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실은 오랫동안 [예기]를 재정리하고 싶어 한 이는 이색이었다. 그는 이것이 주자의 유업을 잇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자는 [예기]의 한 부분을 떼어내 [대학]이라는 텍스트를 만드는 데 멈췄다. 이색은 평생의 바람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권근에게 “네가 그것에 힘써라”고 당부했다.([태종실록] 4년 11월 28일) 권근은 정치적으로 불행했던 1391년 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예기]의 정리에 몰두해 초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1405년 이 책을 완성했다. 이처럼 조선 정신의 첫 철학적 기초는 권근이 놓았다.

왜 그토록 [예기]에 심혈을 기울였을까? ‘예치국가’가 조선의 이상적 국가상이기 때문이다. 처음 조선왕조실록을 읽을 때 제사나 사신맞이 등 국가의례가 지극히 세밀하게 기술돼 있어 의아함을 느꼈다. 정치와 아무 관계도 없는 내용이 왜 이리 길게 언급된 것일까? 왕의 일과 중 제사는 왜 이리 많을까? 예치국가란 기본적으로 예로써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이다. 현대 한국인에게 법치는 이해하기 쉽지만, 예치는 어렵다. 몸으로 실감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가 무엇인지는 시대마다, 나라마다 생각이 다르다. 정치란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social values)’이라는 이스턴(D. Easton)의 정의가 일반적이다. 돈, 권력, 명예처럼 인간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을 배분하는 기능인 것이다. 이 가치들은 모두가 원하기 때문에 항상 부족하다. 자연상태로 두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필연적이다. 그래서 국가를 만들어 분배하고 권위적으로, 즉 강제력을 가지고 보장한다. 여기에는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도 없다. 정치와 종교, 학문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이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근대 정치관의 특징이다.

조선인은 정치를 보다 종합적인 관점에서 본다. 정치와 형이상학이 분화돼 있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하지만 현실정치는 결코 형이상학으로 포괄되지 않는다. 조선인은 정치를 교화와 형정으로 이원화시켜 이해했다.

첫째, 교화의 정치를 보자. 정도전은 “천지는 만물을 생성시키는 것으로 본심을 삼으니, 이른바 만물을 생성시키는 마음이 바로 천지의 큰 덕인 것이다. 인군은 천지가 만물을 생육시키는 그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아서 불인인지정(不忍人之政)을 행한다”([조선경국전] ‘正寶位’)고 말했다. 올바른 정치란 만물을 생성시키는(生物之心) 천지의 마음을 본받아 행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주자에 따르면, 성인은 지성으로 천지의 화육을 도움으로써 우주의 생성에 참여한다.(惟至誠贊天地之化育 則可與天地參者也)([주자어류] 권 18 ‘大學五或問下’ 傳五章)

둘째, 형정의 정치를 보자. “천지는 만물에 대하여 봄에 생육시키고 가을에 살육시키며, 성인은 만민에 대하여 인(仁)으로써 사랑하고 형(刑)으로써 위엄을 보인다.” 정치도 그렇다. 그러나 “살육하는 것은 그 근본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고, 위엄 보이는 것은 그 생존을 보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인이 형을 만든 것은 형에만 의지하여 정치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형으로써 정치를 보좌할 뿐인 것이다. 즉 형벌을 씀으로써 형벌을 쓰지 않게 하고, 형벌로 다스리되 형벌이 없어지기를 기하는 것이다.”([조선경국전] ‘憲典’ 총서) 공자가 “정령으로써 인도하고 형벌로써 다스린다면 백성들이 처벌은 모면할지라도 수치심이 없고, 덕으로써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린다면 수치심도 있고 감화도 받게 된다”([논어] 위정3)고 한 것도 같은 뜻이다.

법 아닌 관계로써 작동된 질서


▎향음주례는 한 해 동안 소홀했던 사람들을 초청해 예를 갖추고 술과 음식을 나눴던 향촌의 의례다. 조선은 성리학의 이념을 공유하고 그 질서에서 조화를 이뤘다. 그 덕에 소규모 관료조직으로도 통치가 가능했다.
덕과 예의 정치가 교화의 정치이다. 덕의 정치는 백성을 먹이는 것(養民)이고, 예의 정치는 백성을 가르치는 것(敎民)이다. 예란 인간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이다. 그 본질은 무불경(毋不敬)이다. 한 그루의 나무부터 인간, 신에 이르기까지 만물을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는’ 태도인 것이다. 즉, 관계론의 철학이자 행위이다. 그런데 예는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부모가 다르고, 형제가 다르고, 이웃이 다르고, 임금이 다르고, 귀신이 다르고, 나라에 따라 다르다. 수준에 따라서도 다르다. 집안의 예(가례)가 있고, 고을의 예(향례)가 있고, 나라의 예(왕조례)가 있다. 일에 따라서도 다르다. 가례에는 4례(관혼상제)가 있고, 왕조례에는 5례(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가 있다. 그래서 예는 구별 짓는 것이다. 주자는 예를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라고 했는데, 절문이란 마디와 꾸밈의 뜻이다. 경우와 상황에 맞추어(마디) 적절하게 행위 하는 것(꾸밈)이다. 또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라고 했는데,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의 법식과 규칙이다. 개인의 몸가짐부터 국가의 제도, 하늘과의 관계까지 포괄한다.

고을의 예인 향음주례를 보자. 향음주례는 매년 음력 10월 길일을 택해 전국적으로 행했다. 지역 관아의 수령이 학당에 술과 음식을 마련하고 노인과 효자, 유덕자를 모신다. 서민도 참여했다. 예법에 맞춰 수령이 노인과 효자, 유덕자에게 술잔을 올리고, 향약을 읽었다. “나라에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화목하고, 이웃끼리 잘 지내고, 서로 가르치고 규제해서 잘못이 있거나 게으름을 피워 삶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사람들이 충성하고, 효도하고, 화목하고, 잘 지내면, 국가의 질서는 그것으로 끝이다. 더 할 일이 없다. 권근에 따르면, [예기]의 현실적 목표는 “현자로 하여금 감히 지나치지 않게 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노력하여 예에 미치도록 하는 것”(賢者不敢過 不肖者企而及)이다. 누구나 예의 울타리 안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듣건대, 공자는 향음주례를 보고 왕도 정치가 쉽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정사는 조정에서 보고 풍속은 민간에서 보아야 한다. 정사가 미치는 바는 얕지만 풍속에서 얻어지는 것은 깊기 때문에 남의 나라를 잘 살피는 자는 반드시 민간을 먼저 본 다음에 조정과 저자를 보는 것이다.”([국조보감] 정조 21년 1월)

조선왕조가 그처럼 소규모의 관료조직에 의해 유지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국가가 법률과 강제력을 가지고 질서를 만들기 전에, 개인과 가족, 마을에서 이미 자율적 질서가 작동하고 있었다. 전국에 분포된 양반과 사족이 성리학의 이념을 공유하고, 이 질서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교화와 형정을 결합해 정치를 구성한 것은 현실적으로도 매우 효율적이고 강력한 방법이었다. 공자는 난세를 종식할 방법론으로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자”(克己復禮)는 테제를 제시한 바 있다. 말 그 자체만 보면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비전이다. 하지만 예의 위력을 알면,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 비전인지 알 수 있다. 그람시의 문화적 ‘헤게모니(hegemony)’, 푸코의 ‘에피스테메(epistēmē)’, 쿤의 패러다임도 모두 같은 말이다. 지식은 곧 권력이다. 섬세하지만 사실은 가장 강력한 권력이다. 가장 강력한 권력투쟁은 전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위화도회군 뒤의 정치적 논쟁에서 형이상학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3년상이나 효 같은 예가 메인 이슈를 이루고 있다. 예치주의 프로젝트는 이미 조선건국 전부터 시작됐다. 이처럼 이성계파와 이색파 지식인들은 정신적 형제들이었다. 정치적으로 갈렸을 뿐이다.

권근·이색의 몰락, 연립정권 붕괴


▎지난 7월 강화도에서 팔관회 행사를 재현했다. 팔관회는 고려 시대 최대의 국가행사였다. 그러나 이성계 암살 모의 사건이 벌어진 1389년의 분위기는 엄혹했다.
권근의 학문은 가문의 영향도 컸다. 권근의 증조부 권보(權溥, 1262~1346)가 그 전통을 세웠다. 권보는 한국 굴지의 명문인 안동 권씨의 실질적 시조이다. 그는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15세에 성균시 장원을 하고, 18세에 과거에 합격했다. 충렬왕부터 충목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고, 22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다. 13년간 인사를 맡으며 벼슬을 팔아 큰 재산을 모았다. 학문적 소양이 깊어 가학(家學)을 확립했다. 사위 이제현은 권보의 학문에 대해 “항상 글 읽기를 좋아하여 늙도록 쉬지 않았다. [은대집(銀臺集)]에 주석을 다니, 보는 자들은 그 학문의 넓음에 탄복하였다”고 평했다.([묘지명]) [은대집]은 고려시대 학사원 관리들의 시문을 모은 책이다. 권보는 아들 권준과 함께 64명의 효자 이야기를 모은 [효행록]도 간행했다. 이제현은 이 책의 모든 이야기에 노래 형식의 찬(贊)을 붙이고, 권근은 주해와 후서(後序)를 썼다. 한 가문의 땀과 정성이 모여 완성된 것으로서, 가문의 학문적 능력을 과시한 것이다. “우리 문정공이 나이 80여 세에 여러 책을 널리 상고하고 손수 편집하여 이 [효행록]을 만들었으니, 그 학문에 부지런하여 늙어도 쉬지 않음이 이러하였다.”(권근, [효행록후서]) [효행록]은 조선시대의 스테디셀러였다. ‘효’ 문제에 관한 한 안동 권씨 가문과 경쟁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권보는 한국 최초로 성리학 저서를 간행토록 했다. “일찍이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하니 동방의 성리학이 권보로부터 시작되었다.”([고려사]) 한국 성리학의 계보는 안향에서 시작해 백이정, 권보를 거쳐서 이제현→이곡→이색→정몽주, 정도전, 권근으로 이어졌다. 안동 권씨 가문과 직접 관련된 사람이 권보, 이제현, 권근 세 사람이나 된다.

이숭인을 옹호한 권근의 입장은 비장했다. “전하께서 만약 저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모두 그대로 시행하시고, 옳지 못하다고 여기신다면 해당 관청으로 넘겨 제가 이숭인과 파당을 지어 주상을 속인 죄로 다스리게 하소서. 제가 차라리 이숭인과 더불어 무거운 질책을 같이 당한다면 비록 죽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이숭인이 모함으로 죄를 받는 것을 보고도 지위를 탐내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침묵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이숭인전]) 그러자 간관은 다시 상소를 올려, 이숭인의 행위가 왜 불효이며 권근의 주장이 틀렸는지 상세히 논박했다. 또한 죄를 은폐한 권근의 죄가 더 크다고 비판했다. 권근도 유배됐다. 그들의 정치적 불행은 이제 시작이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이숭인은 장살당했다. 권근도 더 버티지 못하고 투항했다. “권근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이색·정몽주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문장과 학술이 당세에 으뜸이었으나 혁명 후에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청론(淸論)에서 버림을 받았다. (…) 계룡시(鷄龍詩)를 한 번 읊자 갑자기 개국공신이 되었으니, 애석하다. (…) 그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끊이지 않고 계속 융성했으므로 사람마다 양촌, 양촌 하여 마치 덕행이라도 있는 사람 같지만 그가 명예를 훔친 짓은 너무 심하다고 하겠다.”([동사강목] 경오년 공양왕 2년)

권근의 상소가 올라가자, 이색은 사직했다. 이유는 중국 사행 시 이숭인이 부사였고, 그가 “중국에서 물품을 매매한 사건으로 하여 규탄을 받고 귀양갔으므로 이색이 내심 불안해 서면으로 퇴직할 것을 청하였다.” 또한 “이색이 평소에 이숭인의 문장을 사랑하였으므로 이렇게 거듭 상서하는 것은 그를 구원하려는 데 뜻이 있었다.”([이색전]) 이색은 장단에 있는 별장으로 떠났다. 창왕은 중관을 두 차례 보내고, 또한 찬성사 우인렬과 지신사 이행까지 도합 네 차례나 사람을 보내 사직을 만류했다. 그러나 이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창왕의 운명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실제로 불과 두 달 뒤 폐위됐다. 이색이 그런 정황을 모를 리 없다. 그러므로 이색의 행보는 복합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상황이 일변했으며, 이성계파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젠 대의를 위해 죽든지, 항복하든지 아니면 조용히 물러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는 이 혼탁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물러나는 방법을 택했다. 이해 12월 7일쯤 쓴 시를 보자.

표전 올려 북궐(北闕)을 떠나자 원망이 일어났고
나라 걱정에 남대(南臺)로 가면서 화가 싹텄다오
그저 술에 흠뻑 취해 풍광과 하나 되면 그 뿐
혼자 공연히 느티나무 치받고 죽을 필요 있나
([목은시고] ‘長湍吟, 현령 문군이 내방하다’)


북궐은 고려 조정, 남대는 명나라 남경으로, 1388년 10월, 감국을 요청하러 명나라에 사행을 갔다 온 일을 말한다. 공양왕 즉위 후 이성계파는 이색의 사행이 “신창을 명나라에 입조시킴으로써 신우를 맞아다가 왕위에 올리려던 계획”이었다고 비판했다. 또한 이것이 “미수에 그치자 이숭인이 탄핵을 받았다는 것을 빌미로 장단현으로 돌아가서 사세를 관망했다”고 탄핵했다.([이색전]) ‘느티나무 치받고 죽는다’는 것은 중국 춘추시대의 역사(力士) 서예(鉏麑)의 고사를 말한다. 그는 주군 진영공(晉靈公)이 충신 조돈(趙盾)을 죽이라고 명하자 스스로 느티나무에 머리를 받고 죽었다. 이색은 절의나 만사를 잊고 그저 술에 취해 자연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소회를 피력한 것이다. 그러나 이색이 개성을 떠남으로써 연립정권의 붕괴는 이제 기정사실화됐다. 이성계파는 이숭인, 권근을 제거함으로써 이색 일파의 입지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성계 암살 미수 사건의 전말


▎노란 조끼를 입은 프랑스 시민들이 유류세 인상 등, 마크롱 대통령의 일방통행식 정치에 항의하고 있다. 조선식 예치와 달리 법률과 강제력에 의한 정치는 현실적이지만 지지율이 굳건하지 못하다. /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마침내 우왕과 창왕이 제거됐다. 이색의 우려는 사실이 됐다. 1389년 11월, 최영의 생질인 전 대호군 김저(金佇)와 최영의 일족 전 부령(前副令) 정득후(鄭得厚)가 이성계를 암살하고 우왕을 복립시키려다 발각됐다. 김저와 정득후가 비밀리에 우왕을 만나러 가자, 우왕은 “답답하게 여기서 손도 못 쓰고 죽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역사 한 사람을 얻어 이시중을 죽일 수 있다면, 내 뜻을 펼 수 있겠다”고 말했다. 또한 “내가 평소부터 곽충보와 사이가 좋으니, 그대가 가서 계획을 세워 이성계를 제거한다면, 나의 뜻은 성취될 수 있다”고 하며, 검을 전하며 팔관회 날 거사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곽충보는 이성계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우와 창의 제거를 인정하겠다는 황제의 전문은 권근에 의해 이미 반개혁파 인물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권근은 이 전문을 사전에 열어보고 창왕의 장인인 이림에게 알렸다. 공양왕 즉위 후 대간에서 올린 상소를 보면, 이성계는 우왕 대에도 “평소 충의를 마음에 품고 항상 가짜 조정 때문에 부심했으나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1389년 9월 “황제의 글을 보고서야 개연히 반정할 뜻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계책을 내어 대의를 부르짖고 큰 계책을 정하여서 전하를 받들어 바른 왕통을 회복하였으며 종묘가 제사를 이어갈 수 있게(血食) 하였다”([이림전])고 한다. 중국의 승인을 받은 이성계는 이미 우왕과 창왕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반이성계파에게 위험은 임박했고 시간이 없었다.

이림의 아들 이귀생이 실토한 김저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지난해 10월에 우인열이 먼저 변안열의 집에 도착하고, 제가 아비 이림을 따라 이어서 당도하자, 변안열이 이림에게 ‘이을진, 이경도, 곽충보 등을 시켜 이시중을 살해한 후 우인열은 왕안덕, 우홍수 등과 함께 여흥으로 가서 신우를 맞아 온다는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하니 우인열이 말은 하지 않고 빙긋이 웃었다.”([이림전])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실패로 돌아갔다. 곽충보가 밀고했기 때문이다. 그는 청주인으로 평민 출신이었다. “본래 시정(市井)의 사람으로서 지나치게 국은을 입어 벼슬이 추부(樞府)에 이르렀다”([정종실록] 1년 6월 15일)고 한다. 그는 고려 우왕대 이후 왜구 전투에서 활약했다. 위화도회군 때 개성 전투에서는 최영을 체포했다. 조선 건국의 원종공신이기도 하다. 원종공신은 대개 이성계 휘하의 무인들로, 이성계는 “내가 장수가 되었을 때부터 오랫동안 휘하에 있으면서 힘든 일에 종사하고 적군을 방어하여서 험하고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했다. 또한 1392년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고 했을 때 연합해서 “소장(疏章)을 올려 정몽주와 그 당여들에게 죄주기를 청하여 간사한 계획을 와해시켰다.”([태조실록] 태조 1년 10월 9일) 1403년(태종 3), 곽충보가 죽었을 때, 태종은 그가 “일찍이 왜구를 막아 여러 번 싸워 승첩의 공이 있고, 또 부왕 때 복사(服事)하여 수고한 지가 오래니, 마땅히 은례(恩禮)를 가하여야 한다”고 말했다.([태종실록] 3년 4월 1일) 이를 보면, 곽충보는 이성계 휘하의 군대에서 입신한 인물이다. 우왕이 어떻게 그런 곽충보를 신임했을까? 물론 곽충보가 만약 암살자였다면 최적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뛰어난 무재에, 이성계가 전혀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축일(丁丑, 11월13일), 김저와 정득후가 밤에 이성계의 집을 찾아 갔다.([고려사절요]) 팔관회 하루 전에 기습한 셈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문객에게 잡히자 정득후는 목을 찔러 자결하고, 김저는 체포돼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 이튿날 (戊寅, 11월14일) 이성계는 집에 머물고 팔관소회에 참석하지 않았다.([고려사]) 팔관대회는 매년 11월 15일 개성에서 열리는 가장 큰 국가적 행사로서, 소회는 그 하루 전 개최된다. 14일 순군만호부와 대간은 김저를 번갈아 문초했다. 김저는 “변안열, 이림, 우현보, 우인열, 왕안덕, 우홍수가 공모하여 여흥왕(驪興王, 우왕)을 맞이하는 데 내응하려고 하였다”고 진술했다. 이들의 인적 구성을 보면 최영, 이인임, 이색 그룹, 그리고 외척과 무장들이 결합한 형태이다. 이성계 그룹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모든 세력이 연합한 것이다. 이림은 외척이다. 우현보는 이인임 일파이자, 이색 노선의 옹호자였다. 우현보는 1383년(우왕 9) 임견미, 도길부, 이존성와 함께 정방제조가 돼 인사를 좌우했다. 임견미, 염흥방은 이인임 세력의 핵심 인물이고, 도길부는 이인임의 사위, 이존성은 종손이다. 그는 위화도회군 뒤 전제개혁 때 이색을 지지했다. 또한 혈통 문제로 인해, 정도전은 그에게 큰 원한을 품고 있었다. 우홍수는 우현보의 맏아들이다. 변안렬, 우인열, 왕안덕은 뛰어난 무장들이다.

창왕 폐위, 역성혁명의 활시위 당겨지다


▎고려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자리하고 있다. 왼쪽이 공양왕의 묘이고, 오른쪽이 왕비인 순비 노씨의 능이다.
이성계파는 김저 사건의 관련자를 ‘변안열의 당’(安烈之黨)으로 불렀다.([왕안덕전]) 조민수가 제거된 후 이성계에 대항할 무장세력으로 변안열이 부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저 사건이 사실이라면, 주모자는 변안열인 셈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우왕이 강릉으로 추방되었을 때, 그는 “자신을 그르친 자는 변안열이라고 탄식”했다고 한다.([변안열전]) 또한 윤소종은 “홍영통, 우현보, 왕안덕, 우인열, 정희계 등이 변안열의 역모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김저의 진술이 나오자 우왕은 즉각 여흥에서 강릉으로 옮겨졌다. 15일(己卯)은 팔관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개성 시내는 연중 최대의 국가행사로 다소 들떴을 것이다. 그러나 개성 시내 분위기는 살벌하게 변했다. 군대가 흥국사 주위를 삼엄하게 호위하는 가운데, 이성계파 핵심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참석자는 이성계, 판삼사사 심덕부, 찬성사 지용기·정몽주, 정당문학 설장수, 문하평리 성석린, 지문하부사 조준, 판자혜부사 박위, 밀직부사 정도전이었다. 이른바 중흥 9공신이다. 이 회동에서 이들은 우·창 비왕(非王)설을 공식 확인하고, 황제의 칙서를 명분으로 창왕의 폐위를 결정했다. “우와 창은 본래 왕씨가 아니니 종사를 받들게 할 수 없다. 또 천자의 명도 있으니 마땅히 가왕을 폐위시키고 진왕을 세워야 된다. 정창군(定昌君) 요(瑤)는 신종의 7대손으로 그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고려사절요]) 논의가 끝나자 9인은 곧바로 공민왕의 정비(定妃) 궁에 나아갔다. 군대의 호위 속에서 모든 종친과 백관이 뒤따랐다. 정비의 교지가 내려지자, 창왕을 폐위시켜 강화부로 내쫓고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정창군이 즉위했다. 그가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다.

변안열과 김저가 언제부터 이 일을 추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하는 매머드급 정치적 변혁이 속전속결 초스피드로 이뤄졌다. 김저가 행동에 나선 지 단 3일만이었다. 예견된 사태였다. 그렇다 해도 너무 신속하고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사전에 철저한 준비가 없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저 사건은 “무인일에 잡히고, 그날 고문을 당하여 연관자들을 이야기하였는데, 그 연관자들에 대한 어떤 조사도 없이 바로 그 다음 날 왕을 쫓아내고, 새 왕을 옹립한 것이다. 저자거리의 그 어떤 살해 모의 사건도 이런 식으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하물며 왕을 폐위시키는 일에 있어 서랴!”(이형우, [우왕의 정치에 대한 일고찰], 2011, 161쪽)

처음에 김저는 혐의 사실을 부정했다. 그러자 가혹한 고문이 뒤따랐다. “칼로 발바닥을 몇 치 가량 째고 단근질을 하자 묻는 대로 모두 자복해 드디어 옥사(獄詞)가 성립되었다.”([변안열전]) 고문 아래 얻지 못할 진술은 없다. 물론 김저사건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변안열에게 그런 의사가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구체적 행동을 취했는지는 강한 의혹이 든다. 견디다 못한 우인열이 “대간이 번갈아 상소해 저를 탄핵하니 바라옵건대 저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 여생을 보존하게 하소서”라고 애걸하자, 공양왕은 “만약 스스로 쫓겨나겠다고 말하면 그것은 정말로 죄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우인열전]) 역성혁명의 활시위가 당겨진 것이고, 그 성공을 위해서는 피와 기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표명된 것이 ‘김저 사건’이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901호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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