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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일본, 일본인(13)] 일본인 최초의 세계일주 존 만지로의 기개(氣槪) 

가장 중요한 시기에 국가 나아갈 방향 잡아준 조타수 

최치현 숭실대 겸임교수
무인도에서 살아남아 美 본토 상륙한 뒤 웅지 펼쳐… 외부 충격에 유연한 그들은 역사 속에서 촘촘히 연결돼

▎1902년 영국과 일본이 맺은 동맹을 풍자한 그림. 남성과 여성으로 형상화된 영국과 일본이 취하고 있는 포즈는 당시 서양과 동양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52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을 이끌고 내항(內港)하기 1년 전이다. 취조관인 요시다 분지(吉田文次)는 표류 귀국민 3명의 조사에 난항을 겪었다. 그들은 일본어를 잊어 버린 탓에 제대로 말하지도 쓰지도 못했다. 그러자 요시다 분지는 난학(蘭學)에 조예가 깊고 네덜란드어를 아는 화가 가와다 쇼료(河田小龍)에게 취조 임무를 맡긴다.

일본 시코쿠(四國) 섬 말단에 있는 도사번(藩) 가노파(狩野派: 일본 역사상 최대의 화파) 소속 화가 가와다 쇼료. 그는 번의 집정인 요시다 도요(吉田東洋)의 명을 받아 미국에서 11년 만에 고치(高知)로 귀국한 존 만지로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다. 쇼료는 번의 보호 속에서 상류계급 대우를 받았다. 집은 화실을 겸하고 있었으며, 사숙(私塾)도 열었다.

만지로를 조사한 뒤 쇼료가 지은 책이 [효손키라쿠(漂巽紀畧)]다. 남동쪽에 표박(漂泊)한 기록이라는 의미다. 손(巽)은 팔괘(八卦) 중에서 남동쪽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에서 볼 때 그 방향에는 미국이 있다. 요즘 말로 치면 [미국 표류기]다. 이 책은 쇼료가 직접 미국에 다녀와서 지은 책이 아니다. 성(姓)도 없는 만지로라는 도사의 어부가 11년 동안 미국과 전 세계 바다에서 유랑하다 돌아온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만지로의 지식에 흥미를 갖게 된 쇼료는 번의 허가를 얻어 만지로를 자택에 기숙(寄宿)시킨다. 쇼료는 일본을 떠나기 전 무학(無學)이었던 만지로에게 일본어의 읽고 쓰기를 가르쳤고, 대신 만지로에게 영어를 배웠다.

소료는 만지로가 말하는 이국(異國)의 이야기에 경악한다. 증기선, 거대한 군함, 철도, 전신 등 과학기술의 격차에 일본이란 나라의 장래를 불안하게 느꼈다. 그는 만지로에게 들은 지식에 지도·풍물 등의 삽화를 곁들여 [효손키라쿠] 4권을 지었다. 본서의 서문에는 작자의 생각을 덧붙이지 않았을뿐더러 문학적 각색도 하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 삽화도 만지로의 그림을 바탕으로 그려져 있다.

다만 사실의 취사(取捨)는 작자의 재량이다. 이 책은 도사 번주에게 헌상(獻上)됐고, 그 후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국에 관한 정보 유포가 금지되는 가운데에도 많은 사본이 만들어졌다.

전편에는 풍향, 배의 진행 방향에 대해 상세하게 기재돼 있다. 또한 세계 각지 사람의 습속(習俗), 도시의 모습에 대해서 세밀하게 묘사했다. 만지로의 스케치를 토대로 그렸다는 삽화는 마치 사람이나 동식물을 실제로 보고 그린 듯한 느낌을 준다. 다만 해마, 증기 기관차의 그림 등은 예가 없었던 탓인지 정확성이 부족하다. 취조관 요시다 분지는 [표객담기(漂客談奇)]를 출판했다.

[효손키라쿠]라는 책과 존 만지로라 불리는 사람은 메이지(明治)의 여명을 여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당시 표류는 죽음을 의미했다. 살아 돌아올 확률은 1% 미만이었다. 그러나 만지로는 무인도에서 살아남았고 미국 본토에 상륙해 미국식 교육까지 받은 뒤 배를 타고 세계를 일주했다.

그는 개화기, 가장 중요한 시기에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잡아준 조타수 역할까지 하게 된다. 사람의 운명은 참 묘하다. 그가 일본에 있었다면 무지랭이 어부로 인생을 마쳤을 텐데, 조난(遭難)이라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만나면서 개성학교(開成学校, 현 도쿄대) 교수까지 된다. 일본에는 대단한 행운이라고 봐야겠다. 만지로는 봉건체제라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일본인들에게 드넓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친절한 안내자가 된다.

조난자에서 부선장으로… 큰돈 벌어 귀국


▎1. 일본 최초라는 타이틀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존 만지로. / 2. 존 만지로가 쓴 알파벳.
존 만지로(나카하마 만지로, 中浜万次郎, 1827~1898)는 분세이 10년(1827년) 도사의 나카하마, 지금의 고치현 도사 시미즈시 나카하마에서 가난한 어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9세 때 부친을 여읜 만지로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다.

덴포 12년(1841) 14세였던 만지로는 동료들과 함께 고기잡이에 나섰다 조난당한다. 며칠 동안 표류한 뒤 폭풍과 구로시오(黑潮) 해류에 휘말려 일본에서 남쪽으로 750㎞ 떨어진 무인도 도리지마(鳥島)에 표착(漂着)한다. 예로부터 바다의 고속도로 같은 구로시오에 휘말리면 세상 끝까지 떠내려 간다는 말이 있다.

그 섬은 신천옹(信天翁, albatross)이라 불리는 큰 바다새가 사는 섬이었다. 동굴에서 거주한 만지로는 바위 웅덩이의 물을 마시고 신천옹을 잡아 먹으면서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다. 만지로 일행은 표착 143일 후 미국의 포경선 존 하울랜드호에 의해 구조된다. 이 만남이 만지로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다.

당시 일본은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던 터라 외국 배가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설령 만지로 일행이 귀국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목숨 부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존 하울랜드호의 선장 휘트필드는 만지로만 배에 남기고 나머지 4명은 하와이에 내려줬다. 만지로의 영특함에 흡족해 하던 휘트필드 선장이 도미(渡美)를 결심한 만지로를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포경업은 석유 산업이 본격화되기 전, 기름을 채취하는 최첨단 산업이었다. 페리 제독이 일본에 와서 개항을 요구한 것도 포경 선단(船團) 보호에 한몫을 했다. 고래의 고기만 먹는 일본인들은 기름만 짜내고 고기를 버리는 미국인들에게 아연실색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포경선에서 향유고래 한 마리를 잡아서 이틀 동안 40통의 기름을 제조했다고 한다. 만지로의 고향 도사에서는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일곱 마을이 나눠먹었다. 그렇게 고래를 잡으면서 만지로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배 이름을 딴 존 만이라는 애칭을 붙여준다. 만지로는 일본인 최초로 미국 본토에 발을 들여놓았다.

1843년 5월 7일 만지로가 미국 본토 동해안의 모항인 뉴베드포드에 도착한다. 페리 제독이 일본에 흑선을 이끌고 나타나기 10년 전, 존 하울랜드호의 출항 3년 7개월 만으로 만지로가 구출된 지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였다. 만지로는 휘트필드 선장의 양자로 매사추세츠주 페어헤븐에서 함께 살았다. 학교에서 영어·수학·측량·항해술·조선기술 등을 배웠다. 만지로는 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학업에 힘썼다.

4년이 흘러 졸업한 후 포경선 프랭클린호에 선원으로 취직해 매사추세츠에서부터 항해를 시작했다. 그는 하푸너(작살 다루는 사람)로 시작했지만 부선장에까지 오른다. 이때 하와이에 들러 옛 동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는 몇 년간 항해를 거친 후 일본으로 귀국을 결심한다. 귀국 자금을 벌기 위해 만지로가 향한 곳은 골드러시(gold rush)가 한창이던 캘리포니아였다. 금광에서 70일 동안 일해서 얻은 자금 600달러로 배를 구입해 하와이의 표류 선원들에게 갔다. 프랭클린호에서 3년 일해 번 370달러에 비하면 큰돈이었다. 이윽고 일본을 향해 출항했다.

미·일 간 조약 체결의 숨은 공로자


▎1. 가와다 쇼료의 저서 [효손키라쿠]의 표지. / 2. [효손키라쿠]에 실려 있는 삽화. 작가가 직접 보고 그린 듯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만지로는 가에이 4년(1851년) 사쓰마 번령의 류큐(현 오키나와현)에 상륙한다. 만지로 일행은 반쇼(번의 심문소)에서 심문을 받고 사쓰마 본토로 보내진다. 사쓰마번과 나가사키 부교쇼(奉行所)에서 장기간에 걸쳐 심문을 받은 뒤 무죄 방면 판결이 내려진다.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이들이 일본어를 잊어 버린 탓이었다.

부교쇼에서 막부에 보낸 보고서는 만지로의 생애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만지로는 대단히 예리한 자다.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에이 6년(1853년), 귀국 2년 후쯤 고향 도사로 돌아왔다. 그때 화가 가와다 쇼료를 만났고 [효손키라쿠]라는 책이 나오게 된다.

만지로가 도사번의 참정인 요시다 도요(吉田東洋)에게 외국 지도를 펼쳐놓고 열심히 설명할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소년이 있었다. 도요의 조카로 당시 15세의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다. 고토 쇼지로는 만지로에게 세계지도를 선물 받는다. 만지로는 고치 성하(城下)의 번교 교수관(館)의 교수로, 훗날 활약하게 되는 고토 쇼지로, 이와사키 야타로 등을 직접 지도한다. 일본 근세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젊은이들에게 만지로가 비전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만지로는 막부에 초빙돼 에도에 상경한다. 그는 지키산에타모토(直参旗本, 에도시대 쇼군 직속 무사)가 된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신분을 뛰어넘는 엄청난 출세였다. 그때 고향인 나카하마를 성으로 받아 나카하마 만지로라고 불린다. 이례적인 출세의 배경에는 페리 내항으로 인해 미국의 정보를 필요로 했던 막부가 있었다. 만지로는 번역과 통역, 조선 지휘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스파이 의혹 제기 등 권력 암투에 휘말린 끝에 페리 제독의 통역에서 제외된다. 이때 통역은 네덜란드 통역을 사이에 두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비록 뒤로 물러났지만 만지로는 미일화친조약의 체결을 위해 진력(盡力)한다.

만엔 원년(1860년) 만지로는 일미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 교환을 위해 막부가 파견한 해외사절단 자격으로 간린마루(咸臨丸)에 탑승한다. 간린마루에는 함장 가쓰 가이슈와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도 타고 있었다.

미국에 다녀온 후 만지로는 포경 활동, 교수, 해외 항해 등 분주하게 움직인다. 메이지 3년(1870년) 보불전쟁시찰단에 발탁돼 유럽에 파견된다. 뉴욕에 머물렀을 때 페어헤븐으로 발길을 옮긴 만지로는 20년 만에 은인인 휘트필드 선장과 재회한다. 하지만 귀국 후 만지로는 병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메이지 31년(1898년),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존 만지로와 처음 만난 것은 바쿠후의 군함부교(軍艦奉行) 대행인 가쓰 가이슈의 배려로 에도의 쓰키지(築地)에 있는 군함 조련소에 처음 갔을 때다. 두 사람은 가와다 쇼료를 통해 서로 알고 있었다. 군함 조련소의 다른 교관들은 모두 전통의상인 하오리와 하카마를 입고 있었지만, 만지로만은 서양 사람처럼 머리카락을 짧게 깎고 목닫이 옷을 입었다. 나이는 만지로가 료마보다 8세 많았다. 그는 오랜 미국 생활로 인해 영어가 편했다. 수업 중에도 말이 막히면 영어로 설명하곤 했다.

시바 료타료의 소설 [료마가 간다]에 보면 소설의 주인공인 료마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자주 가와다 쇼료를 언급한다. 또 더 큰 세상과 변하기 시작한 정세에 대해 이야기한다. 료마가 검술도장의 후계자인 주타로에게 말한다, “주타로, 나는 고향에서 가와다 쇼료라는 박식한 화가에게 이야기를 들었네. 미국에서는 나무꾼의 자식이라도 대통령이 될 수 있고, 대통령의 아들이라도 자기가 원한다면 옷 장사가 돼도 손가락질하지 않는다는 거야.”

‘강국’ 일본을 세운 이들에게 지대한 영향

훗날 재벌이 된 미쓰비시(三菱)의 창업자인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의 입을 빌려서도 쇼료의 이야기를 한다. “가와다 쇼료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미국·영국·네덜란드에서는 상인이 세력을 쥐고 있다는 거야. 무사 같은 것은 없고, 더구나 도사처럼 조시니 하는 계급도 없다는 것이었어. 미국 같은 데서는 쇼군을 선거로 뽑는데, 상인이라도 표를 많이 얻으면 쇼군이 된다는 거야. 이런 것을 볼 때 도사에서 조시니 고시니 하고 싸우는 것은 코딱지 같은 짓이 아니고 뭐겠나?”

만지로가 드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귀국하자 여러 사람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앞에서 언급한 사카모토 료마와 이와사키 야타로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이와사키 야타로는 만지로의 강의도 들었다. 만지로로부터 영어·해운·조선·보험 등의 지식을 배운다. 이와사키는 21세 때 에도로 유학가 아사카 간자이(安積艮斎)의 문인이 된다. 귀향 후 도사번의 집정 요시다 도요를 알게 됐고, 후에 고토 쇼지로와 친분을 쌓는다.

이와사키는 게이오 원년(1865년) 가메야마사츄(亀山社中)를 설립하고 운영을 료마에게 맡긴다. 게이오 3년(1867년) 4월 료마가 탈번(脫蕃) 죄를 벗게 됐다. 그러자 가메야 마사츄는 료마를 대장으로 한 가이엔타이(海援隊)가 되고, 그 회계를 야타로가 담당했다. 또 메이지 3년(1870년) 10월부터 쓰쿠모쇼 상회(九十九商会)의 지휘자가 돼 해운업에 종사한다. 이 상회는 메이지 6년(1873년)에 미쓰비시 상회(三菱商会)로 개명해 이와사키 야타로 운영의 개인 기업이 됐다. 이때 도사 번주 아마우치가의 미쓰가시와(三つ葉柏)의 삼각형과 이와사키가의 산가이비시(三階菱)의 마름모를 합친 미쓰비시의 마크가 만들어졌다.

가쓰 가이슈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 교환을 위해 막부가 파견한 해외사절단 존 만지로가 탄 간린마루의 함장이었다. 그는 분세이 6년(1823년), 메이지 32년(1899년) 에도막부 말기부터 메이지에 걸쳐 활약한 정치가다. 검술은 시마다 도라노스케(島田虎之助)에게, 난학은 나가이 세이가이(永井青崖)로부터 배운다.

이후 난학자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추천을 받았으며, 서양 병학을 닦아 사숙을 열게 된다. 만엔 원년(1860년)에는 간린마루에 승선한다. 이때 동승하고 있던 만지로로부터 영어와 미국의 지식 등을 배운다. 그후 군함 부교에 취임한다. 가쓰 가이슈는 메이지 원년(1868년),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만나 에도성 무혈 개성(江戸城無血開城)을 실현했다.

지금까지도 빛나는 ‘일본 최초’ 타이틀


▎미쓰비시의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
후쿠자와 유키치 역시 존 만지로와 함께 간린마루에 승선한다. 그때 미국에서 만지로와 함께 [웹스터 대사전]을 구입해서 돌아온다. 그는 덴포 5년(1835년) 출생한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게이오(慶應) 의숙의 창설자다. 19세에 나가사키에서 유학해 난학을 공부한다. 분큐 2년(1862년)에는 유럽 각지로 건너가기도 했다.

만지로로부터 전해진 미국의 민주주의 지식은 이타가키다이스케(板垣退助, 1937~1919)의 사상과 행동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타가키는 에도막부 말기부터 메이지에 걸쳐 활약한 정치가로 고토 쇼지로와는 소꿉친구다. 번의 요직을 역임한 그는 보신전쟁(戊辰戦争)에서는 신정부군의 참모로 활약했다. 유신 후에도 정부의 요직에 취임한다.

그러나 메이지 6년(1873년)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하다 신중론에 밀리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메이지 7년(1874년) 고토 쇼지로 등과 민선 의원 설립 건백서를 정부에 제출했지만 기각됐다. 또 애국공당을 결성하고 고치에는 입지사(立志社)를 설립한다. 그 후 자유민권운동을 추진해 나간다. 이타카키는 메이지 14년(1881년)에는 드디어 자유당이 결성돼 총리가 된다. 메이지 15년(1882년)의 기후에서의 유세 때 습격당해 부상한다. 그때 외친 말이 “이타가키는 죽더라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이다.

만지로의 사후 35년이 지난 쇼와 8년(1933년)의 여름 어느 날, 도쿄에 사는 만지로의 장남인 도이치로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인의 이름은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였다. 사실 루스벨트의 할아버지 발렌 델라노는 만지로를 구조한 휘트필드 선장의 단짝친구이자 포경선 존 하울랜드호의 공동 선주였다. 소년 시절, 루스벨트는 조부에게 만지로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편지에는 워싱턴에서 이시이 기쿠지로(石井菊次郎) 주재 대사와 만났을 당시 만지로의 이야기, 어릴 때 들은 만지로의 이야기 등이 담겨 있었다. 예를 들어 휘트필드가 만지로를 매사추세츠주의 페어헤븐으로 데려와 학교에 보내고 교육을 받게 한 것이나 루스벨트 일가가 때로 만지로를 교회에 데려간 것 등이 적혀 있었다. 소년 루스벨트에게 만지로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만지로가 표류한 지 10여 년 후 또 한 명의 일본인이 표류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조지프 히코(1837~1997)라는 인물로 미국에 귀화한 첫 일본인이다. 히코는 에도막부 말기에 활약한 통역, 무역상, ‘신문의 아버지’라고도 불렸다. 13세 때 히코조 일행이 에도를 구경하고 돌아가던 중 엔슈나다(遠州灘)에서 폭풍우를 만나 바다로 내던져졌다. 51일간의 표류 끝에 미나미 도리시마(南鳥島) 부근에서 겨우 미국 선박에 구조됐으며, 그대로 선원들과 샌프란시스코에 머물게 된다. 미국의 대통령 피어스나 부캐넌과도 만났고 나중에는 링컨과도 회견했다. 그러나 영향력 면에서 만지로의 표류와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만지로는 일본에서 여러 가지 최초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일본 최초로 ABC의 노래를 소개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넥타이를 맸다. 처음으로 기차와 증기선을 탄 일본인이기도 하다. 만지로는 일본인 최초로 근대식 포경업에 종사했다. 일본인 최초로 미국의 골드러시 시기 금의 채굴에 종사했다. 만지로는 최초로 [신아메리카 항해술]을 일역(日譯)했다. 일본인 최초로 세계를 일주했다.

조선도 비슷한 사례 있었으나 신문명과 조우는 못해


▎요시다 쇼인의 밀랍인형. 에도의 막부 감옥에 갇혔을 당시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일본의 개국 초기, 만지로만큼 자신이 목도한 선진 문명·사상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 전체의 변화를 일으킨 인물은 없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만 봐도 만지로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만지로는 철저한 봉건사회의 밑바닥에서 시작해 엄청난 변화의 물결을 이끌어냈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인류의 모든 스토리에는 헤어짐, 성숙, 그리고 귀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만지로는 오디세우스처럼 일상성을 찾아 귀향을 시도했으나, 그의 귀향은 한 국가 전체의 시스템에 변화를 줬다.

만지로의 성공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밀항 기도, 쇼인의 제자들인 ‘조슈 파이브’의 영국 밀항 유학, ‘이와쿠라 사절단’의 공식적인 해외 방문 흐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상인들의 피를 이어받는 사카모토 료마는 가와다 쇼료를 통해 들은 합리적인 미국의 사고방식에 감동하고 푹 빠지게 된다.

그래서 료마가 신발을 신거나 권총을 들고 다니다가 만국 공법을 읽은 것은 가쓰 가이슈뿐만 아니라 그 전에 쇼료의 영향을 크게 받은 때문이다. 미국의 주식회사에 대해서도 들었음을 감안하면 카메야마사츄를 나가사키에 만든 의도도 이해할 수 있다. 고토 쇼지로와 손잡고 나서 도사상회를 운영하는 것이 미쓰비시의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였다.

샌프란시스코에 간린마루를 타고 건너갔을 때 만지로가 추천한 [웹스터 사전]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유]의 기초가 됐다고 한다. 역사 속의 그들은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만지로가 조난하지 않았더라면 료마의 [선중팔책]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유]도 미쓰비시도 없었을지 모른다. 현재의 일본이 전혀 다른 모습을 지녔을 수도 있다.

조선도 비슷한 시기 표류민들이 중국·타이완·류큐·필리핀·베트남까지 다녀온 기록을 남겼다. 홍어 장수 문순득(文淳得, 1777~1847)이 대표적이다. 시운(時運)이 맞지 않았던지 최첨단 문명과 조우하지 못했다. 표류민이 미국의 포경선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인도주의와 민주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세례를 제대로 받아 문명 개화를 이뤘을까? 자신의 주장과 권위만 앞세운 조선은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한 준비가 아직 덜 되지 않았을까? 외부의 충격을 최소화하며 유연하게 받아들인 일본이 부러운 이유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1901호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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