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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20)] 사막의 황금빛 고도(古都), 자이살메르 

천 년의 모래바람 견딘 무굴제국의 영광스런 도시여! 

김미루 사진작가
유목여인들의 관능적인 뱀춤과 힌두의 신비한 불 의식… 깊은 사막의 도시에 대륙 넘나드는 여행자들의 발걸음 몰려

▎칼벨리아 여인들의 고혹적인 의상과 춤사위. 전통적으로 뱀사냥을 주업으로 삼았던 이들은 뱀의 움직임을 춤으로 표현했다.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뚜아렉의 낙타경주처럼, 이곳 인도 타르사막 비카네르의 낙타경주에서도 낙타 주인이 직접 등에 올라타 낙타를 몬다. 중동의 낙타경주에서는 주인이 올라타질 않고 가벼운 노예아동 자키를 썼었다. 그러다 위험한 사고가 발생해 자그마한 로봇 자키를 등에 올려놓고 낙타를 뛰게 한다. 인도의 경우 보다 인간적인 전통문화가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낙타가 말처럼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까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충동을 느끼게 된다. 내가 한번 직접 낙타를 몰아보고 싶다는 충동이다. 그만큼 낙타의 질주는 경쾌하고 멋있게 보였다. 그러나 내가 질주하는 낙타를 몬다면, 결국 나는 추락할 것이고 발목뼈를 부러뜨리는 것으로 결말이 날 것은 뻔한 이치다. 챔피언이 결정되는 마지막 질주가 마감되는 순간, 스탠드 위에 있던 많은 관중이 우루루 경기장으로 몰려들었고, 잘 뛴 낙타들을 격려해 주었다.

이날 밤, 이 축제 프로그램은 사방에서 모여든 각기 다른 지역 인종들의 춤과 음악들의 공연으로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관능적이고 기억에 남는 춤은 칼벨리아(Kalbelia)라고 불리는 유목민족의 것이다. 이들은 영어로는 ‘스케쥴드 트라이브스(Scheduled Tribes)’라고 부르는 카스트에 속하는 집시인데, 우리말로는 ‘지정(指定) 카스트’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중국말로는 ‘표열종성(表列種姓)’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결국 전통 인도헌법상 규정된(지정된) 인도사회의 최하층 카스트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s)’과 동의어로 보면 된다. 인도말로는 ‘달리트(Dalit)’ -산스크리트어로 ‘깨진(broken)’의 뜻이다- 라고도 한다. 그러나 불가촉천민 중에 이 칼벨리아는 역사적으로 코브라 등 다양한 뱀을 생포하거나, 뱀의 독을 채취해 내다팔거나 하는 특수직업에 종사해 왔다. 인도에서는 어느 집에 뱀이 들면 이들을 부른다. 우리말로 하면 유능한 ‘땅꾼’들인 셈이다. 이들이 추는 칼벨리아춤은 경쾌하고 즐겁기가 그지없는데 주로 뱀의 동작에서 유래된 춤사위이며, 의상도 뱀의 문양과 관련이 있다.

낙타축제의 절정 수놓은 유목민들의 춤사위


▎낙타축제의 대미를 장식할 미녀 퍼레이드에 나가기 위해 인도의 전통복장을 입은 필자와 칼벨리아 무희.
칼벨리아의 여인들은 대체로 건강하고 예쁜 얼굴을 하고 있다. 흘러내리는 검은 스커트에 매우 다양한 색상과 문양을 수놓았고, 조그만 거울 조각들을 장식으로 쓴다. 그리고 또 많은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는가 하면, 구슬로 만든 머리장식에는 찬란한 술의 베일이 달려있다. 머리 꼭대기로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휘감은 정교한 의상이 움직이며 찰랑거릴 때, 그 모습이 어찌나 매혹적이고 최면적인지, 그 무용 전체 공연시간 동안 단 한순간도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춤은 대체로 11세기 초의 힌두 성자 고라크나트(Guru Gorakhnath)에까지 그 근원이 올라가는 매우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찬란한 전통도 이제 칼벨리아의 유니크한 삶의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점점 사라져 가고만 있다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21세기 인류사회는 위대한 전통예술의 원형을 다 잃어만 가고 있는 것이다.

해가 떨어지자 또 하나의 매우 인상적인 공연이 선을 보였다. 밤시간을 종료하는 퍼포먼스로서 시드 공동체 종족(Sidh community: 라자스탄 비카네르 지역에 살고 있는 특수한 카스트)’의 불춤(fire dance)이 펼쳐진 것이다. 처음에는 완전 백색의 장포(長袍)를 입고 짙은 노란색의 터번을 두른 한 그룹의 남자들이 나타난다. 마당에 피운 캠프파이어의 높은 화염이 좀 잦아들면, 그 거대한 불구덩이를 지팡이로 쑤셔대면서 그 위로 휙휙 날아다닌다. 그리고 그 캠프파이어 부근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단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선 불이 활활 타오르는 놋쇠사발이 놓여 있어 악사들을 환히 비춘다. 가장 권위 있게 보이는 한 노인이 백색 장포를 입고 커다란 사발 모양의 장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데, 마치 우리 경기민요에서 길게 뽑는 후렴처럼 들린다. 매우 신성한 종교적 챈팅(chanting)인 것 같다. 그 옆에 또 한 사람이 앉아 양손에 든 두 개의 조그만 놋쇠종을 부딪혀 반복적인 리듬을 형성하고 있는데, 제법 소리에 품격이 있다.

불 위를 걷는 거룩한 의식


▎낙타축제에는 아름답게 치장을 한 낙타들을 출연시켜 다양한 재주를 뽐내기도 한다.
초장에 불 위로 날아다니는 불춤은 잠깐 있으니 매우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불 위로 막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나는 내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이글거리는 붉은 목탄들은 아직도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데도 그 위를 분명하게 맨발로 밟고 지나가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정상적인 속도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그리고는 또 맨손으로 악사의 테이블에서 타고 있는 숯덩어리를 집어 손바닥에 놓고 그것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춤을 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손바닥에서 불이 활활 타는 것 같고, 어둠 속에서는 화염이 공중에 떠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신기하고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타오르는 숯덩어리를 입에 넣었다가 노오란 불꽃들을 토해내곤 한다.

막장에 이르자, 음악의 템포가 빨라지면서 총 8명의 춤꾼이 붉은 숯밭에 뛰어들어가서, 여신(餘燼)을 찬다. 그들은 정말 맨발로 잔화(殘火)를 차내면서 잿구름을 지어내고 찬란한 불꽃들의 폭발을 어두운 공중 위로 펼쳐낸다. 그들의 춤이 완성되었을 때, 아무도 불에 데인 사람이 없었다. 나는 하도 신기해서 도대체 이들이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사람들의 대답은 이들은 영적인 사람들이며, 불로써는 다치는 법이 없다고 했다.

나중에 나는 이들 시드 공동체 종족사람들은, 자스나트(Jasnath Ji Maharaj)라고 하는 16세기의 시드 구루(Sidh Guru)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며, 이 불춤은 그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상징하는 한 거룩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눈으로는 처음 보았지만, 실상 불 위를 걷는 보행의 과시는 수천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희랍에서 중국까지, 그리고 베카섬의 사와우 종족, 희랍정교회, 폴리네시아의 종족들 등등) 신념과 용기의 테스트로서, 그리고 사회적 결속력의 제식으로서 존재해 왔다.

어떻게 이들이 화상을 안 입는가에 관한 것은 내게 여전한 미스터리다. 과학적 평론에 의하면, 숯 위에 덮인 재가 열전도율이 낮고, 발바닥이 닿는 시간 동안 충분히 화상을 입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될 수도 있다는 여러 가지 설도 있다. 그래서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유혹을 느꼈으나, 어려서 무당을 흉내 내다 작두에 올라탔다가는 반드시 베인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고, 하여튼 용기를 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집에서 그런 짓을 해본다는 것은 진실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

낙타축제의 백미, 미녀 퍼레이드에 서다


▎몸집이 거대한 검은 털 낙타는 털을 짧게 잘라 기하학적 무늬를 음각하듯 새겼다.
2013년 1월 28일, 바로 비카네르 낙타축제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축제의 마지막 판인 미녀퍼레이드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전에, 나는 오래된 학교건물로 초대됐다. 그리고 외국인 미녀들을 위한 드레스룸으로 사용되고 있는 한 교실로 갔다. 그 교실에는 축제용 의상들로 넘쳐났고, 인도식 화장대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역의 아가씨들이 우리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화려한 의상을 입혔고, 얼굴에 온갖 화장품을 발랐다. 내가 혼인의상을 입은 인도의 인형처럼 보일 때까지. 나는 평소 화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참 어색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화장을 그냥 재미로 받아들였다. 다른 외국인 여성들도 같이 짙은 인도식 화장을 했다. 서로의 모습을 보며 같이 웃으면서 사진을 찍곤 했다.

그러나 페스티벌에 나가기로 했을 때, 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인행렬은 이날 오후 늦게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나는 이 축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낙타의 탤런트 쇼와 그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선보이는 경연이 진행될 동안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아침 일찍 미녀옷을 입었고 화장을 해버렸으니 하루 종일 내가 해야만 하는 중요한 과업을 짙은 화장을 하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입고 있는 옷이 행동에 거추장스럽다는 사실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외관은 내가 요구하지 않은 많은 거추장스러운 요청을 끌어당겼다.

처음에 몇 명의 젊은 청년이 그들과 같이 사진을 찍자고 요청했을 때는 나는 순진하게 그들의 요구에 응해 주었다. 그러나 이내 너무도 많은 다양한 남성이 내 주변으로 몰려들어 같이 사진을 찍자고 요구했다. 나는 곧 난폭한 남성들의 파도 속에 떠밀려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떤 자들은 나의 드레스를 잡고 늘어졌으며, 어떤 자들은 내 팔을 잡아당기거나 떠밀거나 했다. 나는 도망가려고 발버둥쳤으나 그럴수록 더 많은 남성이 큰 구경이나 난 듯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남성들의 발에 밟혀 죽을 것만 같았다. 이때, 구원의 빛이 나타났다. 다행스럽게도 이 광경을 쳐다본 히투가 개입하여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촌스러운 사람들의 무례를 막아 주었던 것이다. 그는 안전하게 나를 군중으로부터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때부터 나는 군중 곁으로 가지 않았고, 낯선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오로지 메인 쇼를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데만 집중했다. 낙타 후보들은 아주 밝은 색깔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빨강, 노랑, 핑크, 초록, 황색, 청색의 구슬, 꽃, 거울조각, 종, 술로 만든 치장들을 몸통부터 다리 끝까지 휘둘렀다. 매우 현란하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떤 낙타들은 몸털을 염색해서 그린 그림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낙타의 모습은 한 마리의 거대한 몸집의 까만 낙타였다. 이 낙타의 피부 그 자체는 회색이다. 그런데 털은 새까맣다. 그러하기 때문에 털을 깎으면 회색의 바탕이 드러나기 때문에, 깎지 않은 털의 모양으로 온갖 패턴을 만들고, 전신에 아름다운 예술품을 창조해 놓았다. 도장으로 치면 남겨놓은 까만색의 털이 양각이 되는 셈이다. 양각의 까만 털로 다양한 모양이 연출되었는데, 꽃문양, 소용돌이문양, 기하학적 문양, 그리고 앵무새, 공작새, 말, 코끼리, 사슴, 그리고 사람 등의 다양한 동물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원시인의 동굴벽화를 연상케 하는 위대한 예술이었다. 그 탁월한 장인솜씨와 디자인감각은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일으켰다. 그런데 더욱 더 나를 놀라게 만든 사실은 양각방식에 대한 나의 탐색의 결론이었다. 그 낙타이발사는 이 전체 예술을 단 한 개의 녹슨 가위 하나로 만들어낸 것이다.

화려하게 치장한 낙타들의 서커스


▎조련사의 구령에 따라 앞발을 세우고 다양한 재주를 선보이는 낙타.
낙타들의 탤런트 콘테스트 부문에 이르러서는, 낙타가 한 마리씩 조련사에 의해 원형무대 위로 끌려 나왔다. 끌려 나온 낙타는 좁은 무대 위에서 조련사의 훈령에 따라 춤을 추기도 하고 다양한 복종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옆으로 눕기도 하고, 누운 배 위에서 조련사가 물구나무를 서기도 한다.

낙타가 링 위에서 두 발을 번갈아 높이 들면서 바닥을 내려치면 낙타를 치장한 작은 종들과 장식들이 울리면서 멋들어진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떤 낙타는 그 작은 무대 위로 올라가서 실상 자신의 네 발의 균형을 잡기도 어려운 형편인데 한 남자가 그 발굽 사이로 드러누워 있는데도 그 남자를 전혀 다치지 않도록 네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그 민첩한 감각과 서커스적인 묘기를 과시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또 하나의 낙타는 앞의 두 발을 동시에 하늘로 치켜세우는 묘기를 보였다. 낙타는 이미 말보다도 키가 큰데, 두 발을 같이 들어올리니 그 거대한 높이는 태산과 같았다. 이런 동작을 반복하다가 그 낙타는 뒷다리를 굽히지 않은 채 앞다리만을 굽혀 땅에 엎드려, 앞다리의 관절로 기는 동작을 했다. 조련사가 옆으로 누우라고 할 때까지!

이러한 낙타의 동작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즐겁긴 했지만, 도무지 이렇게 비자연적인 동작을 어떻게 이 거대한 동물에게 학습시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조련사는 단지 낙타 목에 걸린 두 개의 끈만을 사용해 별로 완력을 쓰지 않고 부드럽게 낙타를 다루었다. 대부분의 낙타는 조련사의 지시를 불평하지 않고 따랐다. 단지 한 마리가 입을 크게 벌리면서 신음소리를 내면서 거품을 뿜어댔다. 그 낙타는 자기가 군중 엔터테인먼트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행복하지 않은 감정을 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낙타의 감정은 나중에 내가 미녀 콘테스트 스테이지 위에서 느꼈던 감정과 매우 유사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낙타처럼 많은 일을 해야 하지는 않았다. 그냥 몇 번 워킹을 하고 사람들이 내 드레스와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돌아주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좀 별난 서커스의 원숭이가 된 것처럼 느꼈다. 이 축제의 미녀 스테이지 부분은 내 기억으로부터 쉽게 지워졌다. 그때는 이미 관중들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이, 아까 난폭한 남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트라우마적인 사건의 기억과 함께 지겨워졌기 때문이다.

낙타축제의 여흥을 뒤로 하고 사막의 중심으로


▎제이살메르에서 묵은 게스트하우스. 하벨리 양식의 건물로 무굴제국시대의 고전적인 건축양식이 돋보인다.
그날 저녁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우선 얼굴의 화장부터 시원하게 물로 벗겨냈다. 내 피부가 있는 그대로 숨을 쉬게 만든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편안한 비카네르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를 더 머물기로 작정했다. 하루를 푹 쉬면서 건강을 회복하고, 나의 다음 목적지인 제이살메르(Jaisalmer)에서 해야 할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이살메르는 사막의 한가운데 깊숙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이 여행의 주요목표인 사진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사막 사파리를 가기 위한 여러 투어 가이드들을 찾아내기는 했으나, 그 중에서 나는 사하라여행사라는 가이드를 선택했다. 우선 그 이름이, 내가 가려는 곳이 사하라사막이 아니라 타르사막이었기 때문에, 좀 어색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여행사는 온라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리뷰 점수가 매우 높았고, 명성이 있는 회사 같았다. 그 회사의 창업자는 ‘미스터 데저트(Mr. Desert)’라고 불리는 지역 유지였는데, 그는 그 지역의 낙타 사파리 비즈니스를 개척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역사람들에게 그는 말보로 담배, 코카콜라 CF에 출연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그에 관해 좀더 알아보니 그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실제로 그 비즈니스를 계승한 사람은 스무 살 난 그의 아들 아니켓(Aniket)이었다. 아니켓은 나의 이메일 문의에 매우 정중하고 신속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아들 팀과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니켓에게 나의 여행을 조직해 달라고 부탁했다.

2013년 1월 3일, 나는 비카네르를 오후에 떠나 밤늦게 제이살메르에 도착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역정거장을 수없이 서는 로컬 버스로 8시간을 가야만 했다. 사람들이 올라타고 내리는 가운데 버스 안의 분위기가 확확 바뀐다. 어떤 때는 몹시 붐볐다. 내가 버스에서 내렸을 때, 젊은 청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 이름을 ‘미라(Meera)’로 알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 나의 신분을 감추기로 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내 진짜 이름을 알면 요즈음은 매우 쉽게 나의 누드작품에 접근할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내 사진작업을 도와주어야 하는 나의 가이드도 곤란에 처해질 수가 있다. 어찌 되었든 지역공동체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르단에서 ‘누라(Noora)’라는 이름을 사용했듯이 나는 인도에서는 미라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치미(Chimmy)라 부르는 이 친절한 청년은 아니켓이, 나를 버스정류장에서 픽업해 게스트하우스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보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치미는 또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이들은 두 대의 오토바이 중 하나는 나를, 하나는 내 짐을 싣고 간다고 했다. 그런데 내 비싼 장비가 든 짐과 분리된다는 것에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나의 주저함을 느낀 치미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내 짐에 아무런 사고가 없을 테니 안심하라고 나를 설득했다. 오토바이에 매달려 질주하는 것은 새로운 도시에 당도하는 재미있는 웰컴 세리모니였다. 오토바이는 마치 우리나라의 옛날 염천교 다리 부근에 작은 돌로 포장된 울퉁불퉁한 길처럼 되어 있는 언덕 골목길을 끝없이 질주하며 올라갔다.

게스트하우스는 수라즈 빌라스 호텔(Hotel Suraj Vilas)라 불리는, 값이 허름한 시설이었다. 그런데 호텔이 들어선 건물은 하벨리(haveli)라고 불리는 16세기에 지어진 특수양식의 전통적 타운하우스였다. 그 돌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 안쪽으로는 코트야드가 있었고, 아치천정의 회랑과 창문들, 그리고 발코니를 형성하는 붉은 사암의 조각들이 크메르의 반테이 스레이(Banteay Srei)처럼 정교하기 그지없었다. 2층의 내가 묵을 방은 초라하고 지저분했다. 담요들은 오랫동안 빤 적이 없는 중국산 합성섬유였고, 오래된 목욕탕에는 벽도마뱀이 붙어 있었지만, 하룻밤 10달러짜리 호텔에서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전체 건물의 느낌은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장중한 세월의 무게가 빚어낸 예술이었고, 우리의 상식적 감각을 초월하는 거대한 그 무엇이었다.

무굴제국의 전통을 간직한 사막의 도시


▎게스트하우스의 침실 내부. 코발트블루의 두꺼운 커튼이 아치로 장식된 석조 건물과 조화를 이룬다.
나는 꼭 역사박물관의 한 모델인 찬란한 거실에서 자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침대는 꽃 모양의 장식적 아치들로 둘러싸여 있고, 모든 기둥도 전형적 무굴제국의 양식인 꽃 소재의 조각으로 장식됐다. 모든 아치 안쪽으로는 품격 있는 코발트 블루의 육중한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침실 외에 독립된 거실이 있었고, 거기에는 작은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독립된 사적인 발코니까지 딸려 있었다. 그것은 실제로 맨해튼의 그랜드 호텔 스위트룸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었다. 발코니를 걸어나가 보니, 길 건너 맞은편 하벨리의 아름답고도 정교하게 조각된 기하학 문양의 정면 머름중방 난간 위에서 졸고 있는 한 떼의 비둘기를 볼 수 있었다. 미국 같으면 그런 곳에는 비둘기가 못 앉도록 망을 쳤을 것이다.

밤은 극도의 정적에 싸여 있었다. 아무런 소음도 없었다. 단지 길거리와 사원에 달려있는 인경이 바람에 나부껴 소연하게 딸랑거릴 뿐이다. 그리고 내가 서있는 발코니 밑 좁은 골목으로 정처 없이 걸어가는 한 마리 소가 석회암 블록을 밟는 소리가 뚜벅뚜벅 심심치 않은 리듬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 마술과도 같은 장면은 나를 타임캡슐의 다른 세계로 운반시켜 갔다. 그리고 주인 없는 소발굽 소리가 멀어지며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극도의 피로가 나를 덮쳤다. 나는 침실로 무너져 버렸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야 비로소 사람들이 왜 제이살메르를 ‘황금의 도시(the Golden City)’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모든 건물과 길거리포장이 누우런 사암으로 되어 있어, 타운 전체가 황금색깔로 빛난다. 아침은 옥상에서 먹게 되어 있는데, 옥상에서는 자이나교 사원을 포함해 가까운 옥상들의 풍경이 인상 깊게 전개된다. 그러나 나는 게스트하우스를 둘러싼 몇 개의 빌딩들, 그 너머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머름중방 위에 앉아있는 비둘기들.
도시가 보이지 않는 그 고립감이 처음에는 너무도 신기했으나, 나중에 동네를 걸어 다녀 보고서야 내가 숙박한 곳이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진 거대한 성채 안쪽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묵은 호텔은 거대한 성벽 안쪽으로 성벽과 붙은 곳이었기 때문에 몇 집 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밖은 성벽 아래로 난 절벽이었던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2013년) 이 제이살메르 성채는 평지에서 80m 정도 솟아오른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제이살이라고 하는 통치자에 의해 AD1155년에 완성된 것이다. 제이살이 이곳에 왕국을 세운 것에 관해서는 많은 전설이 얽혀 있다. 이 성채는 계속 강화되고 재건축됐는데, 그 위치가 실크로드상의 중요한 트레이드 루트의 한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이 성채는 라즈푸트(Rajputs)라고 하는 상당히 지위가 높은 전사카스트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방위시설이었다. 라즈푸트는 전사이며 또 상인들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중앙아시아, 인도, 페르시아, 이집트 등을 오가는 무역상들에게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번창했다.

900년 역사 간직한 실크로드의 ‘황금 도시’


▎사막 한가운데 웅장하게 솟아 있는 제이살메르 성채의 전경. 900년 전 실크로드의 중심 도시로 번영했던 곳이다.
지금 이 제이살메르 성채는 인도에서는 성채 안에서 실제로 생활하는 성민이 살고 있는 유일한 고성으로 유명하다. 이 성 안의 인구는 4000명 정도이며, 끊임없이 관광객이 유입되고 있다. 황궁을 비롯해 7개의 자이나교 사원, 그리고 아름다운 하벨리 양식 건물들과 거리들, 그 외에도 수없이 아름다운 역사적인 조각품들이 널려 있다.

성채 그 자체도 매우 인상적이다. 삼중의 입체구조로 되어 있고, 99개의 둥그런 성보(城堡)가 둘러쳐져 있다. 압도적으로 단단한 보루라는 인상을 준다. 나는 성보의 꼭대기에 기어올라가 그곳에 설치되어 있는 오래된 대포 옆에 앉아, 그 아래로 펼쳐지는 현대도시 제이살메르 시티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의 광막한 황야를 연상해 보았다. 이 성채 주변으로는 도무지 인간이 마을을 형성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불모의 광야였다. 그곳에서는 수십 마일 밖에서 쳐들어오는 적들을 쉽게 관망할 수 있으며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그토록 거대하고 돌올(突兀)한 석성, 9세기 동안의 모래바람, 지진, 수 없는 전쟁을 견디어낸 이 위대한 성채가 요즈음 근대화되면서 관광객들이 넘치고 수돗물이 공급되어 하수도시설이 엉망이 되고, 또 급증하는 인구의 근대적 요구를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여지없이 붕괴되어만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성채는 시급히 보수되어야 하는 위험지구로 설정되어 있다.

내가 꼬불꼬불하고 가파른 언덕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성채의 대문에 도착했을 때, 다양한 관광기념품을 파는 많은 행상이 지나가면서 소리를 지른다. “곤니찌와”, “니하오”, 그제야 비로소 나는 관광객이 된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대문을 지나고,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차들과 오토바이 택시가 가득한 네모난 광장을 가로질러 갔을 때, 빨간 글씨로 ‘사하라 트래블스(Sahara Travels)’라고 쓴 가게 간판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옆에는 ‘미스터 데저트’의 얼굴이 크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나는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키가 크고 늘씬하게 생긴 젊은 사람이 꼭 볼리우드(Bollywood: 인도영화계를 부르는 말. Bombay와 Hollywood의 합성어) 스타를 연상시킨다. 항상 선량한 소년 역할만 할 것 같은 청년이 나를 수줍은 듯한 미소로 맞이한다. 아니켓이었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901호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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