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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2)] 군림 아닌 관용 택한 ‘정복영웅’ 스키피오 

로마 최대의 적 한니발도 제국의 품으로 

패장(敗將) 한니발 돌려보낸 ‘관용’, 대제국의 철학으로 원칙 없이 감정으로 접근할 땐 ‘내로남불’ 논리로 전락

시장(市場)은 자유롭다. 자유로울수록 물산이 몰린다. 제한이 많아지면 사람이 떠난다. 제국도 마찬가지다. ‘제국 시민’이 되는 요건에 제한을 둘수록 사람이 떠난다. 제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로마가 스키피오의 관용을 경험한 시간은 그래서 중요하다.


▎로마 아피아 도로 출발점에 인접한 스키피오가(家)의 무덤. 스키피오는 유배생활 도중 숨졌기 때문에 가족묘에 안장돼 있는지 여부가 확실치 않다. / 사진:유민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

지난해 말 3성(星) 장군의 자살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비운의 무장(武將)이란 점이다. 충(忠)과 성(誠)으로 평생을 바쳤지만, 정작 국가로부터 파렴치범으로 낙인찍힌 채 외롭게 세상을 뜬 비극의 주인공들이다. 적폐청산, 질투·모략·배신·증오가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세웠다.

스키피오는 기원전 236년에 태어나 53세 일기로 세상을 뜬 공화정 로마의 영웅이다. 종신황제가 등장한 제정로마는 기원전 27년부터 시작됐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자마(Zama) 전투에서 숙적 한니발을 꺾고 지중해의 로마시대를 열었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째로 장악하려던 한니발로부터 나라를 구한 것은 물론, 로마를 이탈리아반도 밖으로 눈뜨게 만든 장본인이다. ‘아프리카누스’란 이름은 아프리카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패권국 카르타고를 물리친 기념으로 얻은 것이다.

역사가들은 만약 스키피오가 없었다면, 지중해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 본다.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후 꽃피운 대제국 로마는커녕, 거꾸로 카르타고가 로마를 속국으로 지배하면서 지중해 대제국으로 나아갔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평가한다. 유럽, 아니 세계사가 달라지기에 충분한 순간을 스키피오가 지킨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출중하고 강한 산토끼라도, 떼로 덤비는 집토끼를 당해낼 수 없다. 영웅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대승리 이후 수많은 적들을 만나게 된다. 외부가 아닌 내부의 적이다. 승리의 월계관과 함께 로마로 돌아오지만, 인생말기에 파렴치범으로 몰려 자의반타의반 유배생활에 나선다. 로마를 구한 대영웅의 추락이다.

나폴리 박물관에서 만난 스키피오 청동상


▎1. 기원전 6세기 아테네의 독재자를 살해한 형제, 하모디우스(Harmodius)와 아리스토게이톤(Aristogeiton) 입상(立像). ‘힘은 곧 독재’라는 말은 두 형제가 정착시킨 공화정의 정치이념이다. / 2. 이탈리아의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 스키피오 청동상이 전시돼 있다. 공화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니발과 카르타고를 관용으로 대한 영웅의 강직함이 묻어난다. / 사진:유민호
영웅 스키피오를 만나고 싶었다. 한국 3성 장군의 자살 소식 때문이기도 했다. 때마침 나폴리에 머물고 있었기에 스키피오를 찾아갔다.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이다. 전 세계에 하나뿐인 스키피오 청동상을 만날 수 있다. 스키피오가 살았던 공화정에선 ‘강한 권력은 곧 독재자’로 해석했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공공의 적’ 리스트에 올랐다.

원조 공화정인 고대 그리스의 조각들을 보자. 조각의 주인공은 신이나 영웅, 평범한 전사(戰士), 철학자나 시인으로 한정된다. 정치가 얼굴 조각은 금기다. 조각은 상징이 되고, 상징은 권력이 응집되는 저장소가 될 수 있다. 지중해와 에게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알렉산더 대왕 조각은 인간으로서가 아닌, 죽은 뒤 신으로 추앙돼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공화정 당시 스키피오 조각은 전무하다.

그럼에도 스키피오 청동상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나폴리다. 현대에 와서 그럴 듯하게 짜깁기해낸 동상이 아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들어선 후인 서기 1세기 경에 제작된 걸로 추정된다. 폼페이(Pompeii)와 함께 베수비오 화산이 분화하면서 화산재에 묻힌 헤르쿨라니움(Herculaneum)에서 발견된 까닭이다. 나폴리 동쪽 12㎞ 지점에 있는 베수비오 화산은 서기 79년 크게 분화해 로마에서 가장 번영했던 도시들을 집어삼켰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2층, 헤르쿨라니움 유물관에 들어갔다. 박물관 부지는 원래 아폴로 신전이었던 자리였다고 한다. 필자의 주관적 기준이지만, 세계 최고의 ‘진짜’ 조각품이 전시된 곳이다. 양이 아닌 질로 승부를 건다면 파리 루브르나 런던 대영제국 박물관도 따라갈 수 없는 인류 최고의 전시관이다. 헤르쿨라니움은 나폴리에서 남동쪽으로 18㎞ 거리에 있다. 폼페이와 더불어 화산재로 덮여져 있다가 18세기 말 발견됐다.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발굴해 나폴리에 옮겨진 상태다.

현지에서 발굴된 50여 점의 조각이 고고학 박물관 2층에 들어서 있다. 전시관 입구에 세워진 10여 개의 여성 청동상은 관람객의 이성과 감성 모두를 빨아들일 정도로 인상 깊다. 스키피오 두상은 현지에서 발굴된 다른 조각들과 함께 전시돼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영혼이 느껴진다. 예술의 진가는 오래, 구체적으로 살필 때 나타난다.

청동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키피오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신념과 카리스마가 강하고, 판단력이 빠른 인물로 느껴진다. 한번 결정하면 그대로 실천하는 타입이다. 제작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영웅 스키피오에 대한 로마인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청동상을 볼 때 주목할 점은 전쟁영웅으로서만이 아닌 인간 스키피오가 가진 ‘특별한 심성’에 관한 부분이다. 라틴어로 ‘클레멘티아(Clementia)’, 즉 관용이 포인트다. 내편 감싸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정복지의 외국인을 내편과 동일시하는 관용이다. 클레멘티아는 로마정치의 특징이자 통치철학이기도 하다. 일본 여류작가 시오노 나나미(塩野七海)의 역사소설을 통해 더더욱 유명해졌지만, 로마 대제국의 성공비결로 ‘항상’ 거론되는 것이 바로 클레멘티아다. 스키피오는 그러한 로마 정신을 창안한 주역이다.

제국 로마는 정치적 의미로서의 클레멘티아를 이해할 수 있는 본보기다. 인류 역사를 보면, 불과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패전은 곧 대살육’이었다. 전쟁에 지는 순간, 재기와 복수의 가능성이 있을 만한 모든 부분을 깡그리 제거한다. 성인 남성은 기본적으로 전부 처형이다. 여자는 종이나 창녀로, 어린이는 노예로 팔려나간다.

2000여 년 전 로마는 다르다. 전쟁에 패한 뒤라도 로마법을 따르는 한, 그대로 살려둔다. 지배층도 손대지 않는다. 그냥 생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로마 사회 안에서 돈도 벌고 출세도 할 수 있다. 부분적 제약은 있지만, 인종·역사·종교·문화에 관계없이 기존의 로마인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치구조로서의 관용이다. 과거의 적이라도 군인으로서 충성을 다하면 일정 기간 뒤 로마시민이 될 수도 있다. 미군 복무가 끝난 뒤 미국 시민권을 얻는 식의, 아메리칸 드림의 원조가 로만 드림(Roman Dream)이다.

대제국 정치철학의 공통분모, ‘관용’


▎1. 프랑스의 화가 조셉 노엘 실베스트르의 1890년 작품인 ‘야만족에 의한 로마의 함락, 410년’. 벌거벗은 서고트족 병사가 서로마를 침략하는 모습을 그렸다. / 2. 세월호 유족을 사찰한 혐의로 검찰 수사 중 투신 사망한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의 안장식이 지난해 12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서 진행됐다.
아프리카 출신 황제의 탄생은 로마의 관용이 어떤 것인지를 증명해주는 최적의 예다. 미국에서는 2008년 버락 오바마가 출발점이지만 로마에서는 서기 3세기 초 이미 아프리카 출신 황제가 네 명이나 등장했다. 당시 아프리카는 로마의 속국, 즉 식민지에 해당된다. 행정상 식민지지만 로마에 충성할 경우 황제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사실 관용은 시오노 나나미만이 아니라 역사학자 모두가 공통적으로 꼽는 대제국 정치철학의 공통분모다. ‘엠파이어(Empire)’란 호칭을 가진 모든 나라에서 통용되는 통치이념이 관용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칭기스 칸의 몽골,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제국, 술탄의 오스만 제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영제국, 그리고 현재의 팍스 아메리카에 이르는, 한 시대를 호령한 엠파이어의 공통분모다.

여담이지만, 역사학자 가운데 한족(漢族)이 통치했던 중국을 ‘엠파이어’라 부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한국에서는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족 중국과 몽골 중국은 전혀 다르다. 한족이 주도한 송나라·명나라는 관용과 무관한, 한족만의 나라다. 몽골은 다르다.

관용의 최고 모델로, 왜 로마가 가장 먼저 떠오를까? 무엇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관용통치를 시행한 대제국이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즉흥적·일시적·개인적 차원의 관용이 아닌, 국가적·장기적·조직적 차원의 정책이었다는 점에서 로마가 특별하다.

흥미롭게도 로마에는 클레멘티아라는 여신도 존재했다. 용서·자비·복구·부활·인내의 여신으로도 통하는 클레멘티아는 기원전 44년 종신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에 의해 로마신에 오른다. 이후 로마의 번영과 함께 모두가 추앙하는 여신의 자리에 오른다. 신이 증명해주는, 대제국의 원칙이자 철칙으로서의 관용이다.

스키피오가 ‘로마 클레멘티아’의 출발점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 유명 뮤지엄에 가면 반드시 볼 수 있는 명화, ‘스키피오 레거시(Legacy)’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스키피오 관련 역사에 기초한, 특히 두 장면에 관한 일화가 그림의 주된 소재로 다뤄져왔다.

먼저 [스키피오의 관용(The Clemency of Scipio)]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최근 이탈리아 비센차(Vicenza) 미술관에서도 발견했지만, 포에니 전쟁의 일화를 소개하는 그림이다. 카르타고를 점령한 뒤 셀티베리안(Celtiberian) 지역의 공주가 잡혀온다. 당시 상식으로는 최고사령관을 위한 노예나 첩으로 제공될 터였다. 스키피오는 공주가 이미 혼약자가 있는 여성인 것을 알고 그대로 풀어준다. 다른 로마군인들에게 손도 대지 못하도록 명령하면서 공주의 하인들도 함께 풀어준다.

로마 스타일 용비어천가 그림처럼 보이지만, 2200년 전 상식에 비쳐보면 달라진다. 당시 전쟁의 목적은 국가와 목숨 보전이란 측면과 더불어, 승리한 뒤의 전리품 획득에 있다. 이기면 돈·인간·동물·땅·건물·보석·그릇 등 현지의 모든 것을 독차지할 수 있다. 카이사르가 전쟁에 연전연승한 이유는 승리 후 전리품 배분이 공평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한니발이 패한 이유도 전리품과 연결해 풀이될 수 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자마는 카르타고 근교였다. 자국에서 벌어진 전투였던 탓에 이겨도 약탈해서 얻어낼 전리품이 마땅치 않았다. 특히 한니발의 군대는 아프리카 곳곳에서 차출된 용병으로 채워져 있었다. 쉽게 말해 이들은 봉급 외에 가져갈 상여금이 없었던 셈이다. 동기부여가 없으니 전쟁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스키피오는 그 같은 한니발 군대의 약점을 알고 일부러 적의 심장부 공격에 나섰다. 따라서 아름다운 공주를 그냥 풀어주는 것은 기존의 관행이나 상식에 어긋나는, 전혀 다른 리더십으로 받아들여졌다.

스키피오의 관용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이집트 누비아(Nubia) 왕자의 사촌에 대한 사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스 시인 페트라크(Petrarch)가 남긴 글에 기초한 그림으로, 스키피오가 철창에 갇힌 청년에게 자유를 주는 식으로 묘사돼 있다.

관용은 동정심 아닌 원칙을 정하는 일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이 소장한 대리석 로마군 군상 조각. 군사력은 고대 로마의 기본적인 파워다.
로마 역사와 관련해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관용 상실=로마 멸망 원인’으로 보는 사관(史觀)이다. 외부에 대한 관용정신이 사라지면서 로마가 망했다는 얘기다. 지나친 역사 왜곡이다. 로마의 관용은 지상명령이 아니다. 패자에게도 기회를 주지만, 로마에 끝까지 반항할 경우엔 철저히 대응한다.

기원전 73년에 터진 검투사 출신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좋은 예다. 수십만 명까지 규합한 대규모 반란이었지만, 마르쿠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에 의해 진압된다. 반란군에 대한 처벌은 잔인했다. 반역의 가능성을 뿌리째 뽑는다. 포로로 잡은 6000여 명 전원을 로마의 대동맥 아피아(Appia) 도로에서 처형했다. 로마를 거부하는 모두에 대한 경고이자 교훈으로, 10m 간격으로 6000명 모두를 십자가형에 처한다. 예수가 그러했듯이, 십자가형은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섬뜩한 형벌이다. 6000명 모두 죽은 뒤에라도 시체에 손을 못 대도록 명령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수년 간 아피아 도로 전체에 퍼져나갔다고 한다.

로마의 추락은 3세기 들어 본격화된다. 이후 훈족과 게르만족에 의해 서기 476년 로마가 사라질 때까지 국정이 엉망이 된다. 황제 암살은 일상적 사건으로 변해간다. 이 과정에서 변칙 적용된 것이 관용이다. 로마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관용이 아닌, 불법, 부정부패에 대해 둔감한 ‘관용 만능시대’가 망국의 배경이 된다. ‘이현령 비현령’ 식의 엉터리 클레멘티아가 로마를 멸망시킨 것이다.

‘스키피오=클레멘티아’로 통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니발 처리 문제에 있다. 자마전투에서의 승리한 뒤 스키피오가 보여준 관용이다.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제의한 휴전을 받아들인다. 당시 참모들 모두가 나서 휴전 없이 당장 카르타고를 초토화시키자고 주장했다. 한니발 처형이 영순위인 것은 물론이다.

스키피오는 반대한다. 카르타고가 한니발이 아닌 다른 인물에게 넘어갈 경우 로마에 대한 반격이 다시 이뤄질 것이라 본다. 물이 끓을 때 주전자 위에 작은 구멍을 내줘야한다. 한니발에게 힘 빠진 카르타고를 맡기는 것이 로마의 장래를 위해 좋다고 판단한다. 한니발을 살려두고, 카르타고 공격도 중단한 채 로마로 돌아간다. 패자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과 전리품 획득이 당연시되던 당시 상식으로 본다면 너무도 이례적 결단이었다.

한니발을 살려두는 과정에서 스키피오는 로마 정치에서 소외된다. 로마시민들로부터는 영웅대접을 받지만, 정적들의 비난과 함께 52세 때 수뢰 혐의로 탄핵된다. 사형까지 갈뻔했지만 자발적인 유배생활로 마감된다. 당시로선 변경이었던 나폴리 근처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병사한다. 로마를 떠난 지 2년 만이다.

‘불관용’으로 포장된 한국의 ‘내로남불’


▎스키피오 장군은 한니발을 꺾으면서, 또한 한니발을 용서하면서 로마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렸다. 지하에 마련된 스키피오 가문 무덤으로 내려가는 입구가 보인다.
‘제로 톨러런스(Zero Tolerance)’

최근 외신을 통해 자주 접할 수 있는 말이다. ‘무관용 원칙’이란 말로 익숙하다. 일정한 선을 긋고, 선을 넘어서면 ‘예외 없이’ 법적 책임을 묻는 원칙이다. 동정 같은 사적 감정이 통하지 않다. 얼마나 배가 고팠기에, 오죽하면 그런 짓까지 했을까? 무관용 원칙을 세운 사회는 ‘배가 고팠기에’ ‘오죽하면’에 무게중심을 싣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면책해주지 않는다. ‘그런 짓’ 자체가 중요하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 기준이다. 어떤 사람은 한 끼만 안 먹어도 난리가 나겠지만, 세 끼 아니 사흘 간 굶어도 끄떡없는 사람도 있다. 주관이 아닌 객관이다. 가난하기에, 나이가 많기에, 독립유공자이기에, 민주투사이기에, 싱글맘의 아들이기에…. 그런 개인적 논리가 안 통한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명암은 교차된다. 다양성은 글로벌 시대의 상식이자 정당성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양성 속에 잠재된 ‘나만은 예외’라는 식의 핑계에 있다. 약자논리가 그중 하나다. 경제적·사회적 약자니까 선을 넘어도 ‘대충’ 봐주는 식이다. 법에는 어긋나지만, 약자로 지냈거나 살아가는 어려움을 감안해 대충 넘어가는 식이다. 한국식으로 얘기하면, 흙수저라는 이유로 대충 선을 넘어도 된다. 문제는 흙수저의 개념이 어정쩡하다는 부분이다. 계약직을 흙수저라 부를 경우 실업자와 외국인 노동자는 어떻게 부를까? 전부 흙수저로 나설 경우, 금수저는 과연 얼마나 될까? 3세, 4세까지 이어진 재벌을 금이라 친다 해도, 지방의 중소기업 사장은 흙과 금 어디에 속할까?

한국의 근대화는 20세기 중반 이후 시작된 서구의 논리와 상식을 통해 진화돼 왔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선진국에서 통용되는 무관용 원칙은 아직 관심 밖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에는 무관용 원칙이 없다. 한국의 신문과 방송이 보도하는 사건 관련 인터뷰를 보면 핑계 백화점이 따로 없다. 사람을 살해한 용의자조차 그럴 듯한 핑계를 댄다. ‘내로남불’은 정치인만의 특권이 아니다. 사안의 경중만 다를 뿐 예외가 되기 어렵다.

나라 전체가 이런 저런 핑계로 날밤을 샌다. 왜 제로 톨러런스가 없을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제로 톨러런스를 둘러싼 기본적인 합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제로 톨러런스가 탄생된다 해도 법률적 해석이 아닌 정치적 논리로 풀어나가기 때문에 존립 근거 자체가 불투명하다.

상식적이지만 제로 톨러런스는 기존의 존재하던 톨러런스에 대한 수정에서 출발했다. 주목할 부분은 제로 톨러런스는 ‘무관용’이지 ‘불관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상대적일 뿐, 절대적 개념이 아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자면, 기존의 플러스 상태의 톨러런스를 전부 없앤 중립적 자세로서의 제로다. 불관용은 제로가 아닌, 마이너스 이하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복수와 적개심도 포함된다. 제로 톨러런스는 중립 상태에서 쿨하게 대응한다.

그렇다면 제로 톨러런스가 등장하기 전의 관용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시행됐으며, 어떤 배경과 의미로 통했을까? 글로벌 시대의 부작용으로 탄생된 것이 제로 톨러런스라 할 때, 그 이전의 세계 즉 관용이 존재하던 시대는 과연 어땠을까.

사실, 한국인으로 관용의 의미를 실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듯하다. 한국 역사 상 관용이란 단어를 떠올릴 만한 사건이나 장면이 당장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정(情)이 넘치는 나라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마이너스 관용만이 눈에 띈다. 3성 장군의 자살을 비롯해 2019년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상황을 보자. 정권이 바뀐다고 달라질까? 완장 주인만 바뀔 뿐, 한층 더 피비린내가 날 것이다. 한반도 안에서는 무관용 대신 불관용만 존재한다.

정신으로서 영원히 살아가는 대영웅

나폴리에서 스키피오와 만난 뒤, 연초에 곧바로 로마로 달려갔다. 로마 외곽 아피아 도로에 인접한 스키피오가(家) 무덤(Sepulcrum Scipionum)이 목적지다. 스키피오는 공화정 당시 명문가의 후손이다. 탁월한 웅변술도 주효했지만 막강한 집안이란 배경도 24살 청년을 한니발 대항마로 만든 이유에 해당된다.

2019년 신년 연휴 탓인지 스키피오 집안 무덤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나무로 덮인 넓은 터를 배경으로 한 공간으로 스키피오가 무덤은 지하에 들어서 있다. 밖에서 봐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지하에서 발견된 스키피오가 유물·유적은 전부 바티칸 뮤지엄에 옮겨진 상태다. 그러나 정작 스키피오 시신이 무덤 안에 있는지 아직 모른다고 한다. 나폴리 근처 리테눔(Liternum)에 무덤이 있다는 말도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 유배생활 끝에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대제국 로마의 아버지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지만, 자기 무덤 하나 없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사라진 것이다.

육신은 사라져도 스키피오가 남긴 정신, 즉 클레멘티아는 이후 수많은 대제국을 통해 면면히 계승돼왔다. 언젠가는 끝나겠지만, 한국에서 벌어지는 살벌한 현실을 종식시킬 평화의 메시지로서의 관용이다. 개인사(史)를 통해 실감할 수 있지만, 지나고 나면 누가 이기고 졌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베풀고 나눴는지가 최고의 덕목이자 가치다. 한국 땅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스키피오 출현을 기다려본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902호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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