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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평양] 새해맞이 나선 김일성광장의 두 얼굴 

모란봉악단 군무에 환호, 사흘 뒤엔? 

박용한 북한학 박사
주요 악단 총출동, 불꽃놀이에 드론 쇼까지 선보여
사흘 뒤엔 ‘김정은 신년사’ 이행 결의하는 정치대회 열려


▎지난해 12월 31일 자정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2019 설맞이 축하 행사’. 인공기와 주체탑 등 상징물만 아니면 서울 광화문광장과 다를 바 없는 분위기다. / 사진:연합뉴스
시곗바늘이 0시 0분을 가리키자 화려한 폭죽이 하늘을 덮었다. 관중의 왁자한 환호성이 브라운관 너머까지 터져 나왔다. 서울 보신각이나 파주 임진각에서 열린 신년 행사가 아니다. 대동강을 끼고 있는 평양 김일성광장의 이색 풍경이다. 사실 북한은 2013년부터 올해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설맞이 축하 무대’를 개최해왔다.

북한에서 이뤄지는 전통적인 새해맞이 연례행사는 따로 있다. 주민들이 도심 한가운데 서있는 김일성·김정일 부자 동상에 헌화를 하는 것으로 새해는 시작된다. 올해도 변함없이 북한 주민들은 새해 아침 김 부자 동상 언덕에 줄지어 올라 허리를 크게 숙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김일성광장 행사가 익숙한 신년행사로 자리 잡았다. 어쩌면 관심의 우선순위는 이미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북한 당국에서도 처음으로 드론 쇼까지 선보이는 등 새해맞이 행사에 공을 들이고 있다.

평양의 축제는 새해 첫날을 앞둔 12월 31일 늦은 밤 전파를 탔다. 밤 11시 30분을 조금 앞두고 조선중앙TV는 김일성광장을 비췄다. “새해를 맞으며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되는 2019년 설맞이 축하 무대를 실황 중계해 드리겠습니다.” 평양 주민이 아니더라도 중계방송으로 북한 주민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전파를 송출했다. 그러나 공연 현장만 하겠는가. 김일성광장에는 구름처럼 모여든 수많은 평양 주민이 이미 자리 잡고 들뜬 분위기를 보였다.

북한 당국에서 꼼꼼하게 준비한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나왔다. 광장 한가운데 자리한 무대는 동서남북 네 방면 모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무대 양쪽에는 대형 LED 스크린을 설치했고 광장 한가운데 보조 무대도 마련해 더 많은 관객이 공연을 즐기도록 도왔다. 흰색 막대풍선을 흔드는 주민도 꽤 많이 보였다. 대동강 너머 보이는 주체탑만 아니면 월드컵대회 기간 동안 응원 인파로 넘쳐나는 광화문광장과 다를 바 없었다.

무대에 오른 출연자들이 노래와 율동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10명이 넘는 남녀로 구성된 출연진은 자정까지 노래를 불렀다. 때로는 길게 노래했고 어떤 노래는 한두 소절만 부른 뒤 빠르게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축제 분위기를 돋웠다.뮤지컬 배우처럼 초소형 무선 핀 마이크를 얼굴에 붙이고 나와 무대 곳곳을 누비며 노래와 율동을 자유롭게 선보였다.

평창올림픽 연상케 한 새해맞이 ‘드론 쇼


▎북한판 ‘소녀시대’로 불리는 모란봉악단의 공연이 설맞이 행사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고 있다. / 사진:조선중앙TV
이날 무대를 연 ‘어머니 당에 드리는 노래’를 비롯해 대다수 노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자나깨나 원수님 생각’이나 ‘어머니 우리 당이 원한다면’ 등 제목만 보더라도 충분히 그 내용을 알 만했다.

공연 말미에는 정치 선전 기능을 뺀 대중적인 노래도 흘러나왔다. ‘흥하는 내나라’는 “얼씨구나 좋다”와 같은 후렴구를 곁들여 민요풍으로 불려졌다. ‘김치깍두기 노래’와 ‘토장의 노래’는 한민족 음식 예찬을 주제로 삼았다. ‘철령아래 사과바다’와 ‘바다 만풍가’를 부르며 풍작과 만선을 기원하기도 했다. 부부의 정을 엿볼 수 있는 노랫말도 등장했다. “내 가슴에 노래처럼 정답게 안긴 사람… 아 내 사람 정다운 우리 집사람~.” 남성 가수가 다정한 목소리로 ‘우리 집사람’을 열창했다.

광장에 모여든 평양 주민들은 흥겹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카메라에 비춰진 이들은 각양각색으로 꾸미고 나왔다. 무대 앞은 화려하게 멋을 부린 젊은 여성들이 차지했다. 한복 입은 중년 남성과 군복 입은 군인도 보였다. 아버지 어깨에 올라 탄 아이들 손엔 ‘헬로키티’와 ‘러버덕’ 풍선이 들려있었다.

자정을 앞두자 노래는 멈췄고 숫자 ‘9’를 나타내는 작은 폭죽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어 숫자는 ‘8’ ‘7’ ‘6’ 순서로 점점 줄어들었고 광장에 모여든 평양 주민도 동시에 외쳤다. 배경음으로 깔린 시계 초침 소리는 점점 커지면서 극적인 효과를 자아냈다. 이윽고 ‘0’에 도달하자 종소리가 울려 펴졌고 환호와 박수갈채로 광장이 미어터질 듯했다. 광장 상공 곳곳에서 불꽃이 펑펑 터지고 폭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평양 하늘을 화려하게 꾸민 불꽃놀이는 십여 분 동안 계속됐다. 폭죽을 비롯한 화려한 조명과 레이저, 웅장한 음악과 영상이 총동원돼 광장에 모여든 평양 주민을 매혹했다. 평소 카메라에 비춰진 평양 주민은 표정 없는 굳은 얼굴이지만 이날은 달랐다. 스마트폰을 들고 화려한 불꽃놀이와 공연을 담아내는 주민들의 설렘 가득 찬 표정은 서울 종로 보신각 주변을 에워싼 서울 시민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불꽃놀이가 끝나자 드론이 등장했다. 군집 비행에 나선 드론은 먼저 새해 ‘2019’를 형상화했다. 이어 자리를 바꿔 돌며 ‘새해를 축하합니다’라는 새해 인사를 전했다. 잠시 뒤 평양 시내 어느 곳에 있더라도 바로 읽을 수 있도록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기도 했다.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관중 사이에서 별안간 환호가 터져 나왔다. 여성 출연자 8명이 무대에 오르는 모습이 화면에 잡히면서다. 북한판 ‘소녀시대’로 불리는 모란봉악단이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맞아 한국을 다녀갔던 현송월 단장이 조직을 이끈다.

북한판 ‘소녀시대’ 모란봉악단에 열광


▎1월 4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김정은 신년사의 관철을 결의하는 군중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모란봉악단 여성 단원들은 모두 군인 신분인 만큼, 군복을 입고 나왔다. 어깨엔 장교 계급장을, 발목엔 가죽 각반(脚絆)을 찼다. 머리 모양도 단발머리로 통일했다. 군복 차림이라고 무대까지 경직되진 않았다. 화려한 율동과 노래로 무대를 더욱 뜨겁게 달궜다. 북한에서 모란봉악단 공연은 어디에서든 인산인해를 이룬다. 탈북 남성들을 만나보더라도 여성 단원 이름을 모두 줄줄 외우고 있다.

새해 첫날 축제는 자정을 넘어 30여 분 계속됐다. 축제의 하이라이트 격인 불꽃놀이는 예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김일성 전 주석 생일인 ‘태양절’이나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생일인 ‘광명절’ 또는 노동당 창건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 가끔 선보였다. 이례적이었던 행사는 변화하는 김정은 시대의 한 단면으로도 읽혔다. 각종 군 행사나 음력설·추석 같은 민족 명절에도 불꽃을 쏜다.

북한에서 ‘축포 발사’라고 부르는 불꽃놀이는 이제 기념행사 때마다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불꽃놀이 중계 방식도 예전과는 다르다. 행사 며칠 뒤 녹화 방송하던 관행을 바꿨다. 조선중앙TV는 지난해 4월 15일 김일성 생일을 맞아 열린 평양 대동강불꽃놀이(축포발사)를 실황 중계했다.

전력난 탓에 밤이면 어둠에 갇히던 평양이 달라졌다. AP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20일 평양 류경호텔 외벽에서도 조명쇼가 진행됐다. 삼각뿔처럼 생긴 105층 호텔 외벽에 10만 개가 넘는 LED 조명이 설치돼 화려한 불빛의 향연을 펼쳤다. 여기에도 폭죽이 등장한다. LED 조명을 통해 연출된 불꽃놀이 장면이나 ‘일심단결’ ‘기술혁명’ 등 선전 문구는 평양 도심을 밝히는 조명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류경호텔은 한동안 실패한 북한 경제를 상징했다. 1990년 대 중반 골조 공사 상태로 공사가 중단돼 흉물로 방치됐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와 외부 유리 공사를 시작했지만 속도는 더뎠다. 북한 당국은 지난해 정권수립 70주년 9·9절을 앞두고 외부 LED 장식을 마쳤다. 전력 사정이 좋아졌음을 방증한다.

북한 당국은 김 위원장 집권 이후 발전소 건설에 주력했다. 희천 1·2호 발전소, 청천강 계단식발전소, 백두산 영웅 청년 1·2호 발전소, 안변청년발전소(이상 수력발전소)를 새로 건설해 가동했다. 김 위원장도 틈틈이 발전소를 찾아 독려하기도 했다. 지난해 7월 어랑천 발전소 건설장 현지지도에 나선 김 위원장이 실태를 둘러본 뒤 호통을 치며 ‘격노’했다는 소식을 [노동신문]이 전했다. 그만큼 전력 확보에 공을 들였다는 얘기다.

화려한 불꽃의 이면에는 그림자도 있다. 북한 당국이 불꽃놀이 장면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주민들의 충성과 단결을 유도하지만 폭죽도 미사일처럼 공짜는 아니다. 북한이 불꽃놀이 행사를 한 번 여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30억~200억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생필품 공장에 공급돼야 할 전기가 평양을 장식하는 데 전용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화면에 비친 평양 주민의 낯빛이 북한 주민 전체의 심중을 대변한다고 보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폭죽이 솟아오르는 그 순간 김 위원장은 TV를 볼 수 없었다.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에 신년사 녹화 장소로 발길을 옮겼다. 축제가 열리는 김일성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노동당 본부청사 집무실에서 한 시간 정도 촬영된 신년사는 새해 아침 9시 중계됐고 노동신문 1면에도 실렸다.

매년 1월이면 모든 북한 주민이 신년사를 암기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신년사는 보통 1만 자(字)를 넘어서는 분량이라 신문 여러 장에 걸쳐 채워진다. 신년사를 암기하지 못하면 ‘생활총화’에서 비판 대상으로 몰린다. 북한 주민에겐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치대회 전후로 ‘청년 무도회’ 재미도


▎지난해 12월 30일 평양 개선문광장에서 열린 김정은 군 최고사령관 추대 7주년 기념 청년 무도회. / 사진:연합뉴스
북한 당국은 주민들이 신년사에 담긴 김정은 지시를 외우도록 ‘학습’과 ‘토론’ 을 유도한다. [노동신문]은 1월 6일 보도에서 ‘북한 전역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에 학습 열풍이 달아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당내에서는 표현 하나에 이르기까지 신년사를 자자구구 심장에 쪼아 박도록 하고 있다”면서 “지금 당, 근로단체 조직별로 김 위원장의 신년사 문답식 학습 경연이 진행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최근에는 태블릿 PC 등을 경품으로 내걸어 자발적인 경쟁을 유도하기도 한다.

축제가 열렸던 김일성광장도 분위기가 일변했다. 평양 주민은 축제가 끝난 지 사흘 만에 같은 자리에 굳은 얼굴로 모여들었다. 복장도 화려하지 않았다. 조선중앙TV를 비롯한 각종 매체는 “김정은 동지께서 올해 신년사에서 제시하신 강령적 과업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한 평양시 군중대회가 4일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북한에서는 신년사 발표 후 평양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군중대회를 연다. 신년사에서 제시된 올해 과업 실현을 다짐하고 이행을 독려하는 행사다.

이날 평양 보고대회에서 박봉주 내각 총리를 비롯한 당과 기관 간부들이 주석단에 올랐다. 김능오 정치국 후보위원 겸 평양시당위원장이 군중대회 보고에 나서 20여 분 동안 지루한 연설문을 읽어 내려갔다. 북한 당국이 지난해 채택한 경제발전 집중노선을 언급하며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우리식 사회주의 발전을 할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이어 각계각층 대표 여러 명이 토론에 나섰다. 토론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보조 연설에 가까웠다. 보고문과 비슷한 취지로 발언을 이어가다 구호를 외치고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한 시간 정도 이어진 보고대회는 ‘자력갱생’을 강조하는 결의문 낭독을 거쳐 “굳게 결의합니다”라는 외침으로 마무리됐다. 평양 주민들은 주석단 앞을 지나 광장을 빠져나갔다. 북한 군대 열병식에 나온 군인처럼 행진하면서다. 이날은 총 대신 각종 구호를 적은 선전 문구를 높이 들었다.

각종 군중대회에 동원되는 평양 주민들은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북한 전역에서 군중 동원이 이뤄지지만 특히 평양에서 더 많은 행사가 열리기 때문이다. 행사를 시작하기 몇 시간 전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시 외곽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대중교통이 미비한 관계로 낮에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고자 새벽부터 걸어서 이동한다. 김 위원장이 참석할 경우는 행사 전날 광장에 앉아 쪽잠을 자거나 밤을 새우기도 한다. 휴일로 지정된 경축일마다 군중집회가 열리다 보니 사실상 휴일이 없다는 푸념이 나올 법하다.

그러나 광장엔 평양 주민이 간직한 소소한 재미도 숨어있다. 군중집회 전후로 열리는 대규모 무도회가 그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군 최고사령관 추대 7주년을 기념하는 청년 학생 무도회가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은 지난해 12월 31일 보도했다. 한국의 청춘들이 즐겨 찾는 클럽 풍경과 다를 게 없다. 미사일에 쓰이는 화약이 때로는 폭죽으로 변모해 밤하늘을 수놓듯, 김일성광장에 모여든 평양 주민들도 개인과 당원의 삶을 오가며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 박용한 중앙일보 군사안보연구소 연구위원, 북한학 박사 park.yonghan@joongang.co.kr

201902호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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