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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터뷰] 이종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의 ‘역사 통합론’ 

“이승만에서 김원봉까지 임정기념관에 다 아우를 것” 

글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balance@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eon.minkyu.joongang.co.kr
녹취 정리 신재현 인턴기자
100년 전 임정의 통합정신 기려 左右 독립운동가 2000명 나란히 전시
이 위원장 조부 이회영은 ‘고종 망명’ 무산 후 임정 거쳐 아나키스트로


▎이종찬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위원장은 이념에 관계없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역사를 발굴 전시할 계획이다. 이 위원장 뒤에 걸린 사진은 경술국치 직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종찬의 조부 우당 이회영(왼쪽에서 네번째)의 6형제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누구보다 각별하게 맞이하는 이로 이종찬(83) 위원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현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을 맡고 있다. 아마 그만한 적임자를 찾기 힘들 것이다.

당초 그의 계획은 임정 100주년을 맞는 올해 4월 기념관을 준공하는 것이었다. 2015년부터 앞장서 준비해왔다. 그때부터 시작해 제대로 진행됐더라면 임정 수립일인 올 4월 11일에 개관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2015년 당시 이병기씨가 청와대 비서실장이었을 때였습니다. 이병기 실장을 찾아가서 말했죠. ‘2019년도에 준공되면 그때는 박근혜 대통령 임기가 끝났지만 그래도 지금부터 시작하면 결국 박근혜 대통령 업적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임정기념관 건립을 지금부터 시작하자’고. 처음엔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어요. 그런데 며칠 뒤, 보훈처장이 쓱 꼬리를 내리더군요. 다시 고려해 봐야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2년이 늦어졌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건립 지원을 받게 되었고, 2021년 8월 임정기념관 문을 열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종찬 위원장과의 대화는 1월 4일과 14일 두 차례 서울 종로구 신교동 우당기념관에서 진행됐다. 우당은 그의 할아버지인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1932)의 아호다. 우당은 1910년 경술국치 직후인 그해 12월 15세 된 아들 이규학을 포함해 40여 명의 가족과 함께 만주(지금의 지린성 류하현)로 망명, 독립군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이종찬의 선친 이규학도 신흥무관학교 2기생이다.

신흥무관학교가 없었다면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는 매우 빈약했을지도 모른다. 봉오동 전투의 대승이나 청산리 전투의 쾌거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돼 이뤄냈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끈 이들은 대개 평민 출신이 많았다. 당시 대표적 양반 가문이었던 우당의 6형제가 전 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우당의 바로 아래 동생이자 이종찬의 작은 할아버지가 임정 부주석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이다.

이종찬 위원장은 1936년 중국 상해에서 태어나 상해의 소학교에 다니다 해방 소식을 들었다. 우리 독립투사들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그의 성장시절과 겹친다. 1945년 해방을 맞아 백범 김구와 우사 김규식 등 임정요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려고 상해로 모였다. 당시 상해에서 찍은 사진이 전해지는데, 백범 바로 앞에 당당하게 서있는 10세 소년이 이종찬이다. 임정요인들은 미군에서 빌려준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고, 이종찬은 난민선을 타고 돌아와야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인생의 결정적 순간은 잘 잊히지 않는 법이다. 그 사진은 이종찬 인생의 역사적 순간이다. 그때 상해에서 임정요인들과 사진 찍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백범 선생을 직접 만나본 사람이 지금 우리나라에 얼마나 살아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그는 “집안에서 들어온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겠다”고 했다. 인터뷰에 응하는 소감으로 “중심 좀 잡자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는 말도 했다. “우리나라 역사가 이리저리 자꾸 흔들리고 있다.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흔들려야 하는지 되물으면서 우리의 중심을 잡자고 말하려 한다.”

“임정기념관 특정인을 영웅 만들 생각 없어”


▎이 위원장(앞줄 가운데 동그라미)이 10살때인 1945년 해방직후 상해에서 김구 등 임정요인들과 사진을 함께 찍었다.
임정기념관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옆에 지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신축 건물인가.

“물론이다.”

장소 선택엔 문제가 없었는지.

“큰 문제는 없었다. 장소가 괜찮다.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가 위치한 곳이다. 걸리는 것이 하나 있다면 부근에 있는 하늘다리다. 이건 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산과 연결해놓은 다리인데 눈에 아주 거슬린다.”

건물 규모가 어떻게 되나.

“지상 5층 건물로 만들어지고 있는데 아직 설계 중이다.”

아직 설계 중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임정기념관 건립공모 안에 대하여 공모업체 간의 다툼이 생겨 가처분 신청이 들어갔지만 1월 10일 법원에서 가처분 기각판결이 나와서 공모에서 입선한 업체가 다시 작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건립위원들이 이 공모 안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를 담기에는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아서 시정 방안을 찾고 있다. 아마 이 시정방안을 입선된 기업에서 설계에 반영하게 될 것이다.”

선택된 장소는 원래 무엇으로 이용하던 곳인가.

“서대문 의회가 있던 곳인데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겼다. 서울시에서 이 계획을 위해서 200억원을 썼다. 서대문 의회를 다른 데로 보내야 하니까.”

건물이 아무리 근사하게 지어져도 그 내용물이 형편없으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종찬이 가장 역점을 두는 것도 기념관의 내용물이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통합의 정신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인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만들 때의 정신도 통합이었다고 했다.

임정기념관 건립의 기본 콘셉트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임정기념관 건립을 진행하면서 어떤 특정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웅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은 이미 각자 기념관을 가지고 있다. 백범기념관, 우당기념관 등 여러 곳이 있다. 그러니까 임정기념관만큼은 특정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어선 안 되고 임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영웅으로 하면 너무 많지 않은가.

“임정기념관은 그 어려웠던 독립운동 시기에 정열을 바친 모든 사람을 기념하겠다는 의미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한시준 단국대 교수한테 임정에 참여했던 사람 수가 대략 얼마나 되는지 물어봤다. 2000명 조금 안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이분들을 모두 영웅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기록에 남아있는 대로 사진이면 사진, 그림이면 그림을 다 찾아서 전시할 계획이다. 우리 건립위원이 프랑스 레지스탕스박물관을 찾아갔었다. 1388명 되는 레지스탕스들의 이름을 전부 다 게시해놨다고 하더라. ‘드골’의 이름을 더 크게 붙여놓지 않았고 다 똑같은 비중으로 게시해놨다. 우리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독립운동 참여자들을 이렇게 예우해야 일본에게 ‘우리는 너희들에게 끝까지 저항했다’는 말을 할 수 있다. 모든 역사를 다 찾아내려는 계획이다. 이념에 관련 없이 이승만에서 김원봉까지, 모든 사람을 다 담고 싶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서 의열단 김원봉까지 다 담는다면, 우파와 좌파를 모두 포괄하겠다는 뜻인가.

“맞다. 임정기념관 건립위원장을 맡은 후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씨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은 분명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때부터 우리나라 대통령이었는데 왜 1948년부터 대통령이었다는 이야기가 자꾸 들리는가.’ 다른 사람들한테 휩쓸리지 말라고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당시 이승만 대통령 관련 기사도 많은데 왜 자꾸 딴소리에 휩쓸리냐’고 하니까 아무 말 안 하더라. 그러면서 이승만 대통령에서 김원봉까지 다 임정기념관에 포함시킬 것이라고 말하니 공감하는 듯했다.”

김원봉을 포함한다는 것은 어떤 얘긴가.

“김원봉까지 임정기념관에 담는다고 하니까 경북 성주에 사는 사람이 연락을 해왔다. 지금까지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고 한다. 한지성이란 분의 양자 되는 사람이었다. 알아보니 한지성(韓志成)은 광복군으로 인도-버마 지역에서 영국군과 합동 작전을 수행한 파견대장이며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安恭根)의 사위다. 해방 후 한국에 돌아와 있다가 월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동안 이 집안은 숨어 지냈다. 한지성이 1·4 후퇴 때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 기록이 있는데 그 이후 기록은 확인이 안 된다. 성주 사는 그분의 질문은 이런 한지성 같은 사람도 임정기념관에 포함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의 대답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그분을 만나러 성주에 갔다 왔다. 이런 식으로 숨어있는 모든 임정 사람들을 밝혀내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꽃피워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 선대들이 저렇게 모두 격렬하게 저항했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두 사람의 위인으로 그쳐선 안 된다. 윤봉길, 이봉창 등 위인들은 아주 위대하다. 하지만 이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활동하다가 실패해 일본에 붙잡힌 사람들도 많다. 즉 끝까지 싸운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 이야기가 숨겨져 있으면 우리나라에는 윤봉길, 이봉창 외에는 의사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러면 안 된다. 찾아보면 의사들의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 이야기를 다 밝혀내야 한다는 것이다.”

“3·1운동의 자유의지가 촛불시위로 이어졌다”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한 좌파 독립운동가 김원봉.
10세 때 상해에서 임정요인들 환국할 때 그분들과 같이 돌아온 것인가.

“상해에서 온 건 맞지만 나까지 비행기를 타고 오진 못했다. 나는 상해에서 난민선을 타고 돌아왔다. 다른 방도가 딱히 없었다. 상해에서 어려운 시절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해·남경·중경 등을 옮겨 다녀야 했다. 임정 활동이 시작될 무렵 한때는 몇 천 명의 젊은이들이 임정에 참여하기 위해 상해에 몰려오기도 했다. 그래서 상해는 일종의 향수가 남아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임시정부는 단순한 임시정부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이 압축된 곳이었다.”

임정의 운영자금은 어떻게 모았나.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냈다. 예컨대 내가 들은 얘기로 윤보선·김철 같은 사람들 경우가 있다. 상해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김철의 경우는 전남 함평에 있던 전답을 전부 팔아 임정에 기부했고, 그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그의 부인은 독립운동에 자신이 걸림돌이 되지 않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런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은 런던 유학 가던 중 상해에 들러 자신의 유학비를 임정에 건네면서 임정에 참여했다.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윤보선에게 ‘당신 집에 돈 많으니 3000원만 가져오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윤보선이 한국에 들어오면 감시당할 위험이 크니까 당시 일본에 있던 자기 동생한테 ‘네가 아버지한테 말씀드려서 돈 좀 갖고 오라’는 편지를 썼다고 한다. 동생이 아버지한테 돈을 받아서 윤보선에게 주면 이 돈이 상해로 넘어갔다고 한다.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면서 일당 67센트 받은 사람들도 그 가운데 20센트를 교회 설립과 독립운동 자금으로 기부했다.”

자발적인 기부가 많았다는 뜻인가.

“3·1만세운동도 조직적인 움직임보다는 자발적인 움직임이 많았다. 우당 선생이 아나키스트였던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자유의지다. ‘내일은 천안에서 만세운동을 하고, 그 다음은 안동에서 운동을 펼쳐라’는 식의 명령이 없었다. 사령부도 없었고 다 자발적으로 행해진 운동이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천도교 조직, 개신교, 불교 조직도 있었지만 체계적인 명령하에서 이뤄진 운동이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IMF 외환위기 시절 금 모으기 운동을 펼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도 동기부여만 주어지면 자유의지는 불타오를 것이다. 어쩌면 촛불시위도 그중의 하나였다. 자유의지가 촛불평화시위로까지 이어졌다. 명령으로 이뤄진 게 아니니까 자유의사라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는 망명정부 아니다”


▎1920년 12월 상해에서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사진 가운데 꽃다발 목걸이 한 이)의 환영식이 열렸다.
3·1운동의 뜨거운 열기에 힘입어 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됐는데 그 성격이나 특징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국이라고 주장하려면 정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임시정부를 세웠다. 몇몇 학자들이 ‘국토·인민·주권이 없었는데 어떻게 정부라고 부를 수 있냐’고 말하곤 한다. 한가한 이야기다. 그건 마치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있는데 왜 밥 굶느냐, 나이프를 사용해서 빵을 먹으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다. 왜 배고파하냐, 라면이 있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나. 이건 그야말로 ‘임시’ 정부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비됐으면 임시정부가 아닌 정식정부지. 임시정부를 구성하려는 의지가 한 군데에 있었던 게 아니라 서울과 상해와 블라디보스토크 등 곳곳에 있었다. 그런 독립 정부에 대한 의지들이 다 합쳐진 결과, 한성임시정부를 모형으로 삼되 위치는 교통과 통신이 잘 되는 상해에 둔다고 합의했다. 처음에는 한국 사람이 더 많은 곳에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엔 상해로 모이게 되었다. 상해가 임시정부의 센터가 된 것이다. 이런 역사는 전례가 없다.”

전례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컨대 아일랜드도 독립운동을 한 나라다. 아일랜드에 ‘Irish Republic Army’는 있었다. IRA가 폭탄 던지는 등 여러 활동을 했다. 하지만 별도의 정부는 세워지지 않았다. 망명정부가 있기는 했지만 임시정부와는 엄연히 다른 존재다. 망명정부는 국내에 있다가 외세가 침략하면 국외로 나가 정부 역할하는 존재다. 폴란드 망명정부도 같은 맥락이다. 국내에서 수상을 했던 사람이 국외로 나가서 수상 역할하는 정부는 망명정부라고 한다. 임시정부는 망명정부와 다르다. 임시정부는 새로이 구성된 정부인데 세계 독립운동 역사상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3·1운동과 임정을 이끈 주요 인사들은 평민 출신이다. 그런 점에서 우당 선생 집안은 몇 안 되는 양반 가문이었다.

“함께 망명한 6형제 중 다섯째이자 우당 바로 아래인 성재 이시영은 조선 말기에 과거시험에 합격해서 일찍부터 주요 관직을 맡았다. 을사늑약이 이뤄지는 1905년 당시 외교부 교섭국장이었다.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관직이다. 조약이라는 것은, 쌍방의 대표가 의견을 서로 교환해서 절충한 뒤, 문서를 만들어서 서로 도장을 찍은 뒤 교환한다. 그런데 을사늑약을 반대하던 성재는 외교조약의 문서 담당자임에도 현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을사늑약 문서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시영은 상해 임정에서 법무총장이었고, 해방 후 대한민국의 첫 부통령이었다. 조선시대를 거쳐 대한제국-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의 관직을 모두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다. 이시영 선생의 삶은 우리 근대사의 연속성을 입증한다. 시대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분은 대한제국,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을 부를 때 모두 ‘우리나라’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다 같은 나라인 것이다. 이분의 의식 속에서는 혼란이 없었다. 이시영 선생 하나로 우리 역사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대한제국-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의 연속성이 이시영 선생의 삶에 녹아있다는 통찰이 신선하다.

“역사는 연속된 것이다. 역사는 잘라낼 수도 없고 갑자기 생겨날 수도 없다. 그리고 우당 선생이 1918년에 고종황제의 북경 망명을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다. 북경에 행궁도 마련해 놓았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상황에서 우당은 독립운동의 불을 다시 당기려면 고종을 망명토록하여 전세계 반일감정을 고조시켜야 한다는 데 결론을 내리고 이를 은밀히 추진했다. 이와 관련 최근에 문서를 하나 찾아냈다. 중국의 산동성 교주만(膠州灣)에 있는 고종의 해외거처를 우리 외삼촌이자 고종의 최측근이었던 조남승이 은밀히 매각한 사실을 일본 영사관이 알아내어 본국 정부에 보고한 기록이다. 아마 이 가옥을 매각한 자금이 북경에 먼저 망명중인 조정구, 조남승 부자가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종의 북경 망명 추진과 독살


▎대한제국-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의 연속성을 입증하는 이시영 선생(사진 왼쪽)이 김구 주석과 자리를 함께 했다.
우당이 추진한 고종의 북경 망명이 성공했다면 일본 입장에선 그보다 더 큰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망명 추진과 고종의 죽음은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망명을 하는 사태가 되면 안되니까….

“우리 집안은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웠다. 즉 고종의 북경 망명 계획과 독살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배웠다. 고종은 당시 경운궁(덕수궁)에 포위당해 있었다. 일제가 경운궁을 포위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외가의 3부자가 고종이 말년에 가장 신임한 측근이었다. 우리 외할아버지 조정구(1862~1926)는 기로소비서장(耆老所祕書長)이었고, 그의 장남 조남승(1882-1933)은 비서승(祕書丞), 차남 조남익(1885~1924)은 시종(侍從)이었다. 헤이그 밀사 파견계획과 비밀 연락을 맡았던 이도 조남승 외삼촌으로 알고 있다. 이회영과 조남승이 고종의 북경 망명을 추진했다. 원래 우리 외가는 노론이고 우리집은 소론이었다. 당시 노론과 소론은 서로 통혼도 안 하던 시절이었는데 이 두 집안이 통혼하기 위해서 서로 결혼 방법을 찾았다. 이 결혼이 고종 망명과 직접 연관된다.”

이종찬의 외삼촌 조남승은 경복궁에 포위당해 있던 고종이 믿을 수 있는 최측근이었다. 그러니까 소론인 이회영과 노론인 조남승이 두 집안의 결혼을 논의했는데, 그 결혼과 함께 비밀리에 논의한 내용이 고종의 망명 계획이었다는 얘기다. ‘고종 망명 계획’은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과 조남승의 여동생 조계진의 혼담으로 포장됐던 것이다. 실제 두 사람은 결혼을 했는데, 그때 결혼한 두 분이 이종찬의 부모님이다.

“더 이상 고종도 망명 이외엔 길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본이 이걸 알아채고 고종을 독살한 것이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망명은 무산되었고, 고종의 독살 소식은 국민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국민들이 고종을 무능하고 바보로만 여겼다면 거국적 3·1운동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민주공화제도 그전에 이야기가 있었지만 확실하게 국민들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은 1919년 고종의 승하 이후인 것 같다. 국민들은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하고 순종이 즉위를 했지만 여전히 황제는 고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고종 사후 사람들이 이제 왕정은 끝났다고 여기게 된 결과 공화제가 대두했다.”

이종찬의 외할아버지 조정구는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제시한 작위와 은사금을 거절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한 명이었고, 두 차례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회영과 조남승의 비밀대화가 지금도 전해지는가.

“고종황제가 조정구, 조남승, 조남익 3부자를 통하여 이회영 및 상동교회 인사들과 채널이 가동되어 헤이그밀사 파견이 이뤄졌다. 이에 관한 외교 비사와 고종의 비자금 사용 내역 등 기밀문서 상자가 있었는데, 고종의 지시로 조남승이 처음에는 강화도, 그리고 다음에는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에 감추어 놓았었는데, 뮈텔 신부에 의하여 일본이 알게 되어 이 문서들을 다 압수해 갔다. 우리 집에서는 이 문서상자의 행방을 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런데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이 일본 외무성 자료실에서 숨겨놓은 문서목록을 발견했다. 이 문서는 일본정부가 작성한 문서가 아니라 고종의 문서를 일본이 탈취해 간 것이기 때문에 국회 도서관에서 그 소재를 파악 중이고 소재가 확인되면 일본측과 정식 외교 교섭을 진행할 예정이다.”

아나키즘 독립운동가의 복권


▎이 위원장의 친가 뿐 아니라 외가도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이 위원장 뒤로 그의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고종의 망명을 추진하다가 고종이 독살을 당한 이후 우당은 어떻게 했나.

“고종이 독살 당한 소식이 전해진 1919년 1월 21일 이후 사람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망명계획을 세운 핵심 측근이니까 대책을 세워야 했다. 우당은 2월 8일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신혼이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북경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3·1운동 직전인 2월 24, 25일쯤, 북경으로 떠나며 주위 사람들한테 ‘인산일(고종 장례식날)이 되면 큰 난리가 날 테니까 몸조심들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임시정부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지만 3월 1일의 봉기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상해 임시정부를 만들 때 우당이 핵심적 위치에 서있었나.

“연배는 우당이 제일 위지만, 임정수립 당시 가장 먼저 활동한 분은 애관 신규식(1879~1922)이었다. 그 후 안창호(1878~1938)가 미국에서 상해로 와서 임정업무를 총괄하며 각지의 임정을 통합하는데 주역을 했다.”

새로 나온 연구들을 보면 고종의 밀지 없이는 의병투쟁이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우당은 그 같은 고종에 대한 기억이 있었을 것 같은데.

“우당이 고종의 별입시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한제국 창건 당시 삼이 전매품이었다. 경기도 개풍군(開豊郡)에 양삼학교를 설립했고, 대량의 삼을 심었다. 삼은 보통 5년근이 좋은데 4년근을 일본의 낭인들이 난입해 도적질해 갔다. 이회영은 용산 마포 근처에서 삼을 실어가는 일당을 잡아 삼을 찾았다. 그리고 소송이 제기되어 일본측이 궁지에 몰리자 왕실을 압박하여 이용익 내장원경이 할 수없이 이회영에게 약간의 합의금을 받고 끝내자고하여 불만이 많았지만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 소송 과정에서 이회영은 별입시(別入侍) 주사로 임명되었다. 그 후 별입시로서 지방에 파견돼 고종의 은밀한 지시를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당 선생은 아나키스트로 알려져있는데, 왜 아나키즘을 선택했을까.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은 독립운동가 보훈에서도 다른 운동가와 비교하여 괄시를 받았다. 단적인 예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사람도 아나키스트 운동을 한 분들은 그다지 없다. 그러나 의열 독립투쟁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분들은 아나키스트가 많았다. 의열단, 다물단, 남화한인총연맹, 흑생공포단 등 많은 투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서훈 받지 못한 분들이 많다. 아나키스트들은 처음부터 국가로부터 반대급부를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싸운 사람들인데 훈장을 바라겠는가?”

201902호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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