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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1부)] 고대 집권국가화와 불교 수용(2) 법흥왕과 이사부 

대전환 원동력은 군주의 치밀한 전략과 용단(勇斷) 

동맹국인 가야 전격 복속해 백제에 대한 우위 확보
정복국가 변신 성공 후 대외 팽창에도 ‘탄력’ 받아


▎‘대가야 체험 축제’에서 대가야 대 신라의 마지막 싸움을 재현하는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 시점은 역사 기록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삼국사기]는 법흥왕 15년(528)이라 하지만 [삼국유사]는 동왕(同王) 14년(527)이라 한다. 지금까지도 연구자들은 [삼국사기] 또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법흥왕의 불교 공인 시점을 528년 또는 527년으로 다르게 본다.

그런데 금관가야의 멸망 시점 역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서로 다르다. [삼국사기]는 법흥왕 19년(532)이라 하지만 [일본서기]는 동왕 16년(529)이라 한다. 이런 일은 527년부터 532년까지가 신라사는 물론 백제사·가야사·일본사에서 공히 대전환기였기에 나타난 결과다. 그 5년의 대전환 시기를 겪은 신라·백제·가야·일본은 각각의 입장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 기록을 남겼다.

예컨대 신라에서는 대전환의 주체와 결과를 신라 중심으로 기록한 반면 백제에서는 백제 중심으로, 일본에서는 일본 중심으로 기록했다. 그런 각각의 역사 기록이 훗날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등에 종합적으로 정리됐다.

따라서 현시점에서는 위 역사 기록을 통해 법흥왕의 불교 공인이나 금관가야의 멸망 시점을 확정하려 하기보다는 527년부터 532년 5년 동안 신라·백제·가야·일본에서 있었던 대전환의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파악된다면 신라사에서 법흥왕의 불교 공인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물론 금관가야의 멸망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도 보다 선명해질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527년 6월 일본 제27대 천황 게이타이(繼體)는 신라가 멸망시킨 임나(任那)의 남가라(南加羅)와 녹기탄(㖨己呑)을 부흥시키고자 게나노 오미(毛野臣)와 함께 6만 대군을 파견했다고 한다. 위 기록의 임나는 가야연맹이 있던 경남 지역을 통칭하는 말이다. 남가라는 금관가야로서 김해 지역에 있던 소국이며, 녹기탄은 탁기탄(啄己呑)이라고도 하는데 김해와 창원 중간에 자리한 진영 지역의 소국으로 이해되고 있다.

남가라의 원래 이름은 구야국(狗倻國)으로 초기 가야연맹을 주도할 때는 가라(加羅)로 불렸다. 그러나 구야국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고 국력이 약화돼 주도권을 상실했다. 그 결과 가야연맹의 주도권은 고령의 반파국(伴跛國)으로 넘어갔고, 반파국이 구야국을 대신해 가라 또는 대가야로 불리게 됐다.

반면 구야국은 남가라 또는 본가라로 불리게 됐다. 이런 사실로 보면 ‘가라’라는 용어는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한 소국을 지칭하던 일반용어로 ‘대표 나라’라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가(加)라고 하는 말에는 ‘대표’ ‘수장’이라는 뜻이 있고, 라(羅)라고 하는 말은 나라의 줄임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서기] 기록이 사실이라면 527년 당시에 이미 남가라와 녹기탄은 신라에 멸망당한 상태였다. 그래서 남가라와 녹기탄을 부흥시키기 위해 일본이 6만 대군을 파병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때 남가라와 녹기탄이 신라에 멸망당했는지, 또 이를 부흥시키기 위해 일본에서 대군을 파병하려 했는지를 놓고 한국과 일본 학자들 사이에 큰 논쟁이 있었다.

한국 학자들은 남가라와 녹기탄이 신라에 멸망당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현실에서 대군을 파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일축한다. 반면 일본 학자들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당시 임나 지역이 일본 영토였다는 뜻이 함축돼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상식적으로도 어불성설


▎2012년 공개된 전남 순천시 운평리 고분군 발굴 조사 현장.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할 수 있는 대가야계 유물이 출토됐다. / 사진:순천시
임나 지역이 일본 영토였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다. 현시점에서 일본 학자들의 ‘임나일본부설’은 설득력이 없다. 당시 일본에는 통일된 집권국가가 들어서기 이전으로서 일본은 가야연맹보다 조금 더 발전한 단계일 뿐이었다.

가야연맹의 경우 당시 경남 지역에 산재한 10개 내외의 소국(小國)들이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구성했지만, 대가야는 대표 소국이었을 뿐 가야연맹을 통합한 집권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본 역시 왜왕(倭王)이라 불리는 세력이 일본 열도를 대표하는 정치체이기는 했지만 왜왕 이외에도 수많은 호족(豪族)이 산재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게이타이 천황이 6만 대군을 임나에 파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도 통합하지 못한 왜왕 세력이 한반도의 임나 지역을 영토화했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게이타이 천황이 임나에 파병하려 했다는 [일본서기] 기록은 뒤 내용과 함께 검토할 때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게이타이 천황이 대군을 임나에 파병하려 하자 쓰쿠시(築紫)의 이와이(磐井)라고 하는 대호족이 신라의 사주를 받고 이를 방해하려 해 큰 전쟁이 벌어졌는데, 그 전쟁은 528년 11월 이와이가 패전해 죽으면서 끝났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쓰쿠시는 현재 규슈의 후쿠오카 지역이다. 즉 [일본서기] 기록은 527년 당시 후쿠오카 지역에 6만 대군을 파병해야 할 정도의 독립 세력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당시 6만 군대는 천황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이라 할 만하다. 그처럼 총동원해야만 했던 이유는 후쿠오카의 독립 세력이 그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후쿠오카의 독립 세력 같은 집단이 다른 곳에 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많은 독립 세력들 중 하나인 이와이에게 신라가 527년 즈음 적극적으로 밀착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의 천황 세력이 일본 전체를 통일하기 이전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527년 즈음 신라가 일본 문제에 적극 개입했음을 알려준다.

그 당시 신라가 일본 문제에 적극 개입한 이유는 백제와 가야 때문이었다. 백제는 개로왕 21년(475) 9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수도 한성을 함락당했을 뿐만 아니라 개로왕까지 살해되는 등 참패를 당했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했다.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백제·신라·가야 동맹


▎신라 진흥왕이 가야를 정복하고 세운 척경비(拓境碑). 경남 창녕에 있다.
문주왕을 이어 삼근왕 그리고 동성왕대(代) 초반까지 20여 년에 걸쳐 혼란을 수습한 웅진백제는 동성왕 20년(498)부터 광주·나주·강진 등 전남 지역으로 팽창을 시작했다. 당시 전남 지역에는 영산강문화권으로 알려진 독자적인 정치세력들이 있었는데, 웅진백제는 이들을 복속시킴으로써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의 손실을 만회하고자 했다.

백제의 전남 지역 복속은 가야와 신라 입장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백제의 팽창이 전남 지역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전남 지역을 복속시킨 백제는 곧이어 남원·하동 등 섬진강 유역도 복속시키고자 했다. 섬진강 유역을 복속시킨다면 그 다음으로 백제는 김해·창원 등 낙동강 유역을 복속시키려 할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신라도 복속시키려 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백제는 겉으로는 가야·신라와 동맹관계였지만 내부적으로는 가야·신라를 복속시키고, 그 힘을 바탕으로 고구려에 대항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백제의 팽창정책에 가야는 물론 신라도 크게 반발했을 것은 불문가지다.

섬진강 유역을 복속시키려던 백제 정책은 521년(신라 법흥왕 8, 백제 무령왕 21, 금관가야 구형왕 1, 일본 계체천황 15) 무렵 하동을 점령함으로써 완료됐다. 당시 남원·하동 등 섬진강 유역은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한 곳이었다. 그런 섬진강 유역을 점령함으로써 백제는 일본과의 교류에서 유리한 고지를 장악한 반면 가야연맹은 크나큰 손실을 입고 약화됐다.

가야연맹이 약화된 만큼 백제의 공격 가능성은 더 커졌고, 백제의 공격 목표는 진주·함안·창원·김해 등이 될 것이 분명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의 하동 점령을 막고자 분투하던 고령의 대가야는 부득이 신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22년 3월 가야 국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므로 법흥왕은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보냈다고 한다. 그때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낸 가야 국왕은 대가야의 이뇌왕(異腦王)이다. 이뇌왕이 법흥왕에게 혼인을 요청한 이유는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관련해 [일본서기]에는 게이타이 천황이 사신을 보내 하동 지역을 백제에 넘겨주자 분개한 가야가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었다고 기록돼 있다. 하동 지역을 게이타이 천황이 백제에 줬다는 기록은 물론 거짓이다. 하동은 백제가 무력으로 점령한 곳이었다.

반면 하동을 상실한 가야가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었다는 기록은 사실이다. 522년 3월 가야 국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가야 국왕에게 시집간 여인은 신라 왕녀(王女) 즉 왕의 딸이라고 한다. 그 기록이 정확하다면 이뇌왕에게 시집간 여인은 법흥왕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법흥왕은 자신의 딸을 수행할 시종을 100명이나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수많은 시종이 따라오자 이뇌왕은 그들을 가야연맹에 소속된 소국들에 골고루 나눠 배치했다.

당시 가야연맹에 소속된 소국이 10곳 정도이므로 10명 안팎의 시종이 각 소국에 배치됐을 것이다. 이뇌왕이 시종들을 가야연맹 소국에 골고루 나눠 배치한 이유는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는 동시에 신라와의 혼인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가야연맹의 소국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 나라에 배치된 신라 시종은 곧 신라 국왕을 대신하는 존재이자 이뇌왕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522년을 기점으로 기왕의 백제·신라·가야 동맹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522년 이전에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즉, 고구려를 주적(主敵)으로 삼아 백제·신라·가야가 동맹한 형태였지만 522년 이후 신라와 가야가 혼인동맹을 맺고 백제를 주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부국강병과 국력 통일 위한 승부수… 불교 공인

이 같은 상황 변화에 백제는 더 이상 임나 지역으로 팽창하지 않고 현상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자칫 임나 지역으로 더 팽창하다가는 북쪽의 고구려는 물론 남쪽의 가야와 신라 모두가 적대국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523년 5월 무령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성왕이 즉위하게 되면서 백제는 당분간 팽창정책을 추구하기 어렵게 됐다.

신라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24년 9월 법흥왕은 남쪽 국경지역으로 순행해 국토를 개척했는데, 당시 가야 국왕이 와서 조회(朝會)했다고 한다. 그때의 가야 국왕은 대가야의 이뇌왕일 것이다. 이뇌왕은 만에 하나라도 법흥왕이 국토 순행을 빙자해 남쪽으로 왔다가 갑자기 낙동강 너머의 가야 소국들을 급습할까 우려해 그것을 방지하고자 왔을 것이다.

법흥왕은 이뇌왕의 체면과 함께 신라 남쪽의 현실을 고려해 낙동강 너머의 가야 소국을 급습하지 않았다. 즉 522년에 체결된 신라와 가야의 혼인동맹이 백제의 팽창도 견제하고 나아가 신라의 가야 습격도 방지했다는 뜻이나 같다. 다시 말해 대가야 이뇌왕의 혼인동맹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던 것이다.

혼인동맹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527년 즈음부터 신라가 갑자기 가야·일본을 상대로 강경책을 폈기 때문이다. 527년 6월 신라가 규슈 쓰쿠시의 대호족인 이와이를 사주해 전쟁을 일으키게 한 것이 일본에 대한 강경책이었다. 신라가 그렇게 한 이유는 가야 소국과 일본의 연계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즈음 신라는 가야 소국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신라는 522년 이래 지속된 현상유지 정책을 파기하고 527년 즈음부터 공격 정책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당시 가야를 놓고 백제와 신라가 벌이던 현상유지 정책이 오래가지 못할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가야의 힘이 강력해져도 파기될 것이 분명했고, 백제의 상황이 변해도 파기될 것이 뻔했다. 그런 상황에서 신라가 아무 대책 없이 세월을 보내다가는 오히려 가야나 백제에 반격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신라는 대대적인 체제개혁을 통해 강국으로 거듭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백제는 이미 집권국가로 변신한 상황이었고, 가야는 연맹 상황이었다. 반면 신라는 연맹을 넘어 집권 국가로 변신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라의 체제개혁이란 백제를 능가하는 집권국가로 변신하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없었다. 동시에 가야연맹이 백제에 정복되지 않게 막아야 했는데, 최선은 신라가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야연맹을 분열·약화시키고, 또한 약화된 가야연맹이 일본이나 백제의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고립시켜야 했다. 나아가 신라가 가야연맹을 정복하려면 궁극적으로 백제와의 전쟁도 각오해야 했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은 그런 배경에서 추진됐다.

당시 불교 공인을 추진하던 법흥왕이 “아! 내가 부덕한 몸으로 대업을 계승했는데, 위로 음양의 조화가 부족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환락이 없으므로 만기(萬機) 여가에 석씨풍교(釋氏風敎-불교)에 마음을 두고 있으나, 누구와 더불어 일을 같이할까”라고 탄식했다는 기록은 법흥왕의 불교 공인 추진이 궁극적으로 ‘백성들의 환락’을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백성들의 환락’이란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가능했다.

당시 신라 상황에서 부국강병은 국론과 국력의 통일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가능했고, 그 국론과 국력의 통일을 위해서는 사상의 통일이 필요했다. 그런 판단에서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아가 법흥왕은 가야 정복을 향한 특단의 조치를 준비했다. 그것이 바로 가야에 대한 현상유지 정책에서 공격 정책으로의 전환으로 나타났다.

가야연맹·일본 분열 유도는 백제 겨냥한 포석


▎1. 금관가야의 영토이던 경남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방제경(倣製鏡). 가야가 고대 일본 문화의 원류지임을 밝혀주는 유물로 평가된다. / 2.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무덤(경남 산청 소재)으로 전해지는 돌무덤.
이와 관련해서는 [일본서기]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일본서기]는 이와이와 게나노 오미의 전쟁에 뒤이어 가야와 신라의 혼인동맹을 기록했는데, 혼인 후 가야 국왕은 신라 왕녀와의 사이에 아이까지 뒀다고 한다. 그 아이가 바로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로 알려진 월광태자였다.

그런데 언제인지 모르지만 가야연맹 소국에 배치한 시종들에게 신라 의관(衣冠)을 착용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명령의 주체가 누구인지 불분명하지만 전후사정으로 볼 때 법흥왕이 유력하다. 그런 법흥왕의 처사에 분개한 아리사등(阿利斯等)이 사신을 보내 시종들을 신라로 송환했다. 그러자 법흥왕은 가야 국왕에게 신라 왕녀를 송환하라 요구했고, 그 결과 혼인동맹은 깨지게 됐다.

아리사등은 창원에 있던 탁순국(卓洵國) 칸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신라 의관 착용 명령에 창원의 탁순국 칸이 크게 반발했고, 그런 반발에서 법흥왕의 신라 의관 착용 명령은 탁순국을 일차 공격목표로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창원의 탁순국은 김해의 남가라나 진영의 녹기탄보다 서쪽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신라가 탁순국을 공격하려면 녹기탄과 남가라를 지나야 했다.

결국 탁순국이 신라의 공격 목표가 됐다는 것은 녹기탄과 남가라도 공격 범위에 들었음을 뜻한다. 또한 탁순국 바로 서쪽에는 함안의 안라(安羅) 가야가 있었다. 요컨대 신라는 녹기탄·남가라·탁순국·안라 등 서로 인접한 4개 소국을 우선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들 4개 소국은 신라에 대항하고자 대가야 중심의 가야연맹에서 탈퇴하고 남가야 연맹을 맺었다. 이런 일련의 사실들로 볼 때 신라 의관 착용 명령, 아리사등의 신라 시종 강제 송환, 신라와 대가야의 혼인동맹 파기, 남가야 연맹 형성, 이와이와 게나노 오미의 전쟁 등이 연쇄적으로 일어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 같은 연쇄사건의 발단은 신라 의관을 착용하라는 법흥왕의 명령이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법흥왕의 명령은 가야 공격을 염두에 둔 고도의 전략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뇌왕은 신라 왕녀와 혼인한 후 아이까지 뒀다고 한다. 몇 년 간은 혼인동맹이 유지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법흥왕이 가야연맹 소국에 배치한 시종들에게 신라 의관을 착용하라 명령했다고 하는데 앞뒤 문맥으로 볼 때 그 시점은 527년 즈음이 유력하다.

법흥왕이 신라 의관 착용을 명령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규슈 이와이와 결탁한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가야연맹과 일본을 분열시키기 위해서였지만 궁극적으로는 백제와의 전쟁에 대비해서였다.

527년 당시 가야연맹은 비록 대가야가 주도한 신라와의 혼인동맹에 참여했지만, 그 혼인동맹은 백제가 가야연맹에 공세를 취할 경우 언제라도 깨질 수 있었다. 따라서 법흥왕은 백제가 공세를 취하기 전에 선수를 쳐서 가야연맹을 와해 시키고자 신라 의관 착용을 명령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522년 혼인동맹 당시 법흥왕이 이뇌왕에게 준 시종 100명은 혼인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뇌왕은 그 시종들을 가야연맹 소국들에 또다시 선물로 줬다. 각 소국에 주어진 시종들은 당연히 해당 소국에 소속된 것으로 간주됐으며 복장 역시 해당 소국의 풍속에 따랐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527년 즈음 법흥왕의 명령에 따라 각 소국에 배치된 시종들이 갑자기 신라 의관을 착용하게 됐다. 이는 가야 소국들의 주권을 무시하는 처사로서 도발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법흥왕이 신라 의관 착용을 명령한다면 몇몇 가야 소국이 반발할 것은 불문가지였다. 신라에 반발하는 가야 소국들은 신라와의 혼인동맹을 주도한 대가야도 불신할 것이 뻔해 가야연맹 분열이 예상됐다.

실제로 신라 의관 착용 명령에 반발한 탁순국·남가라·녹기탄·안라가야 등은 대가야 연맹에서 탈퇴했다. 게다가 대가야 연맹에서 탈퇴한 소국들은 국력이 약하기에 백제나 일본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나 일본 중에서도 일본이 좀 더 안전하므로 당연히 일본에 구원을 요청할 것이 예상됐다. 바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법흥왕이 규슈의 이와이와 결탁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법흥왕이 신라 의관 착용을 명령하자 창원의 탁순국에서 반발해 시종들을 되돌려 보냈고, 법흥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혼인동맹을 파탄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명분으로 가야 소국들을 공격하고자 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게나노 오미는 규슈의 이와이를 제압한 후인 529년 3월, 게이타이 천황의 명령에 따라 남가라와 녹기탄을 구원하기 위해 안라로 갔다. 이는 신라의 공격에 직면한 남가라·녹기탄·탁순국·안라 등의 가야 소국이 도움을 요청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법흥왕은 그것을 핑계로 이사부에게 군사 3000명을 줘 남가라와 녹기탄을 공격하게 했다.

[일본서기]에는 당시 이사부가 다다라 벌판에 3개월 주둔하다 갑자기 수나라(須那羅)·다다라(多多羅)·화다(和多)·비지(費智) 등 4촌(村)을 습격했다고 기록돼 있다. 수나라는 ‘쇠나라’라는 뜻으로 김해이고, 다다라·화다·비지는 김해 주변으로 이해된다.

낙동강 하구 장악… 한반도 남부 주도권 쟁취

[삼국사기] 열전에는 이사부가 거도(居道)의 마희(馬戱)를 이용해 가야를 방심하게 했다가 습격해 정복했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가야가 금관가야인지 아니면 대가야 인지 또는 둘 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둘 다일 가능성이 높다.

거도의 마희란 들판에 말 떼를 모아놓고 달리게 하는 놀이인데, 거도는 이 마희를 이용해 놀이하는 척하며 우시산국(于尸山國-울산)과 거칠산국(居柒山國-동래)을 방심하게 만들었다가 급습해 정복했다. 이사부 역시 마희를 이용해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방심시켰다가 급습해 정복했다는 사실에서 당시 신라가 기마대를 이용한 기습 전략에 능숙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의 기마문화 또는 유목문화가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사부의 3000군대에 크게 당한 금관가야는 사실상 그때 멸망했다. 금관가야에 뒤이어 녹기탄과 탁순국도 이사부에게 멸망당했다. 신라는 낙동강 하구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의 국제정세를 주도할 수 있게 됐다.

반면 521년 영산강 하구에 이어 529년 낙동강 하구까지 상실한 가야연맹은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고 말았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그보다 3년 후인 532년(법흥왕 19)에 금관가야 구형왕이 왕비와 왕자 3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고 하는데, 그때의 항복은 어딘가로 피신해 있던 구형왕이 뒤늦게 항복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형왕의 셋째 아들 김무력이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이렇게 527년부터 532년 사이 법흥왕의 신라는 불교를 공인하고 금관가야·녹기탄·탁순국까지 정복함으로써 집권국가이자 정복국가로 대전환하고 본격적인 대외 팽창에 들어서게 됐다. 신라의 성공적인 대전환은 무엇보다도 법흥왕의 정확한 국제정세 인식과 과감한 결단 그리고 치밀한 전략 덕분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902호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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