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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21)] 타르사막 한가운데의 결혼잔치 

‘강남스타일’ 리듬에 맞춰 시바의 춤사위를 펼친다! 

김미루 사진작가
인도의 사막에서 만난 발리우드식 군무와 한류 열풍
상류 계급의 마을은 폐허가 됐지만 생활 속 차별은 여전해


▎낙타의 리듬에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이 낙타에게 의지해 작은 그늘도 없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다.
아니켓! 그는 내가 여태까지 사막여행과 민박에 관해 계속 통신을 주고받았던 인물이었다. 나의 계획은 3일 동안의 사파리 여행에서 우선 작품사진을 먼저 찍고 난 후에, 사막 한가운데서 낙타를 키우고 있는 낙타양육사의 집에 가서 며칠을 더 머무는 것이었다. 결국 나의 자이살메르 여행 전체기간은 2주일이라는 시간이 허락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지역 환경에 익숙해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몇 마디의 질문과 응답을 교환한 후, 아니켓은 나에게 친근한 인간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날 밤에 열리게 될 그의 친척집 결혼식에 같이 가겠냐고 즉석초대를 했다. 나는 그 혼례 초청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것은 지역문화에 참여할 수 있는 참으로 좋은 기회였다.

해가 넘어가면 길거리에서 힌두식 혼례행렬이 시작된다. 아주 시끌벅적한 풍악과 함께 시작되는 이 행렬은 ‘바라아트(baraat)’라고 불린다. 거대한 나팔스피커가 부착된 한 작은 봉고트럭이 행렬의 선두에 서서 가는데 뒤쪽으로는 스포트라이트가 부착되어 색깔을 계속 바꾼다. 그 뒤로 100~2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차를 따라가는데, 춤을 추며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 행렬의 군중 한가운데 말을 탄 신랑이 우뚝 솟아 보인다. 신랑은 아주 밝은 오렌지색의, 머리 뒤로 긴 꼬리가 달린 터번을 쓰고 있다. 신랑은 왕자와도 같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눈부시게 화려한 금슬로 수놓은 흰 튜닉을 입고 군중 위로 떠밀려 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바라아트라는 행렬은 결혼식이 거행되는 곳으로 가는 신랑 측의 행렬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친영(親迎)예식(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러 가는 예식)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말을 타고 가는 것도 우리 옛 풍습과 다를 바가 없다. 이 행렬은 신랑의 가족, 친구, 이웃들로 구성돼 있으며, 이들은 가면서 춤추고, 노래 부르고, 웃기를 한 반 시간 정도 한다. 정말 흥미롭고 흥분되는 혼례의 킥오프(개시)인 것이다.

힌두 전통 혼인잔치에 초대받다


▎결혼행렬, 그리고 북치는 사나이. 우리의 장구와 비슷하고 장구채도 있다.
그 봉고트럭 바로 뒤에서 발리우드(Bollywood, 봄베이와 할리우드의 합성어. 인도 영화산업을 의미) 음악에 맞추어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남성이었다. 말을 타고 있는 신랑은 그 춤추는 남성들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주 아름답게 멋을 부린 여성들이 줄을 이었다. 물론 나도 뒷줄에 끼어 있었다. 그러니까 말 탄 신랑 앞뒤로 남성 행렬과 여성 행렬이 나뉘어 있는 것이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식의 고풍윤리가 인도 사회에는 아직도 지배적인 것이다.

남성들은 대부분 근대적인 그러니까 서구식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셔츠를 입고 정장 수트를 그 위에 걸친 사람도 있고 걸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젊은 사람들은 블루진을 입은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여성들은 예외 없이 특별히 장식된, 그리고 아주 정교하게 수놓은 사리(saris)를 몸에 휘감았다. 어느 사회든지 여성이 전통의 담지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입은 사리는 구슬이나 작은 거울쪼가리가 천 위에 꿰매져 있기 때문에 사리 그 자체가 매우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은과 금으로 만든 보석 장신구를 목이나 손목에 잔뜩 감았고 또 얼굴에는 화장을 짙게 했다. 여성들이야말로 축하의 경의를 복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 복장을 갖추고 늠름하게 등장하는 신랑.
나는 인도에 오기 전에 인도 문화를 이해하려고 많은 발리우드 영화를 리서치했는데, 예외 없이 주인공이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하면 군중 전체가 싱크로나이즈드된 동작으로 폭발적인 춤의 공연을 벌이곤 했다. 나는 이런 광경이 인도 영화 특유의 코미디라고만 생각했다. 실제 삶에 있어서는 일어날 수 없는 아주 광열적인 동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타르사막 한가운데 있는 평범한 지역민의 혼례 행렬에서 정확하게 영화와 똑같이 일치된 동작의 춤사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아주 유명한 영화들로부터 대중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춤사위를 혼례라고 하는 축제의 기회에 신나게 발현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노래가 바뀌면서 여성들이 끼어들기 시작하고, 여성들끼리 서로 감싸고 돌면서 그들의 손목을 코브라머리처럼 오묘하게 돌리면서 격정을 표현하는 그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나는 보통사람들이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알콜은 공적으로 터부에 속한다) 이토록 군무 그 자체에 취해 환희에 빠져 들어가는 광경을 난생 처음 보았다. 우리 한국 사회는 춤이라는 사회적 일체감이 부족한 편에 속한다. 영고, 동맹과 같은 고대사회의 축제에서는 오히려 있었을지 모르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보통사람들의 군무가 생활화되어 있질 않다. 좀 애석한 느낌이 든다.

춤추는 사람들로부터 발현되는 에너지가 나를 흥분시켰다. 나 스스로 좀 취한 듯, 아주 자연스럽게 행복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나는 행렬의 도중에서 그들의 전통적 고수의 장구 리듬과 인도 특유의 음악에 아주 깊숙이 일체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건 또 뭔가? 아주 이색적인 리듬으로 색조가 확 바뀌더니 폭발적으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 것이다. 나는 이 노래가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뉴스를 들었을 뿐이다. 나는 강남스타일이 어떤 노래인지도 몰랐다.


▎결혼식에 참석한 귀부인들.
정말 이 광경은 완벽하게 나의 의식에서 차단되어 있던 충격파였다. 인도의 아주 편벽하고 외로운 타운에서 열리고 있는 결혼식에서 이런 노래와 춤을 경험한다는 것, 그들이 ‘강남스타일’을 한국말로 외치는 광경은 초현실주의 명화와도 같았다. 사람들은 그 노래가 나오자마자 그들은 모두 자기들 버전으로 춤사위를 펼쳤다. ‘한류’의 의미를 생전 처음 깨닫는 순간이었다.

결혼식장은 집안이 아니고 공적인 장소에 붉은 펠트를 깔아 설치한 옥외 뱅퀴트 홀이었다. 널찍한 공간 주변에 둘러쳐진 벽들은 빛나는 흰색 화학섬유의 주름진 휘장으로 덮여 있었다. 혼례가 이뤄지는 플랫폼은 높은 단상에 마련되었고 그 뒷면은 다양한 꽃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 인공적으로 만든 사각의 호수가 있는데 호수 주변은 흰 새틴 주름천으로 화려하게 장식되고 등불이 빙 둘러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좀 코믹한 것은 그 가짜 호수에 두 마리의 거위까지 놀고 있는 것이다. 이 거위는 백조를 구하기 어려우니 대신 갖다 놓은 듯했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원앙’과 같은 상징성을 지닌 것일 게다. 문명에는 항상 이런 공통적 특성이 나타난다.

나는 아니켓의 사촌 여동생을 새로 사귀었는데 영어를 잘했다. 스무 살 가량의 나이였고 ‘쿠키(Kuki)’라는 이름을 가졌다. 쿠키는 아주 상냥했고 열정적이었다. 나는 쿠키와 함께 하면서 아주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본격적인 혼례는 신부가 무개(無蓋)의 1인승 가마(4명이 든다)를 타고 식장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양가의 식구들이 스테이지 위에서 만난다. 동시에 궁전과 같은 건물 위로 밤하늘에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궁전 건물에는 두 개의 망루가 있고 그 위로 양파 같이 생긴 지붕이 있다.

나는 이방인이어서 가까이 가서 볼 수가 없었지만, 신부와 신랑은 서로의 목에 엄청나게 화려하고 큰 화환을 걸어주었다. 그리고 스테이지 한가운데 화염이 피어오르는 항아리가 놓이고 그 주변을 둘이서 같이 서약을 하면서 일곱 바퀴를 돌았다. 두 사람의 손목은 끈으로 묶여 있었다. 제식이 끝나자, 하객들은 뷔페 영역으로 가서 음식을 먹었다. 다양한 야채튀김과 카레와 밥이 공양되었다. 쿠키는 나를 불러 내가 충분히 맛있게 먹었는지를 확인한 후, 숙소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었다.

자이나교의 극단적인 평화주의의 모순


▎쿠키네 집 옥상에서 바라본 성밖의 자이살메르 시가지.
다음날, 나는 자이살메르 성채 안의 골목길들을 자유롭게 걸어 다녔다. 그리고 쿠키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녀는 그녀의 집 옥상에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식이라고 하지만 매우 빈약한 것이었으나, 그 꼭대기에서 성채 밖 타운의 모습이 시원하게 잘 보였다. 쿠키는 나에게 토마토소스의 스파게티를 가져왔는데 완벽하게 이탈리아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인도카레의 맛을 벗어난 토마토소스의 풍미가 매우 신선했다. 나는 그녀가 미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결혼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발리우드영화가 추구하는 낭만성과는 전혀 반대로, 그녀는 중매결혼에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쿠키는 자기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할 수 있는 나이 많은 남성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외형적으로 보면 쿠키는 매우 근대화되었고 서구화된 여성이었지만 나에게 아주 쿨하게 말했다. 로맨스 따위는 일없다고, 자기에게는 중매결혼이 최선이라고.

쿠키에게 점심식사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이나교의 최대사원을 방문하러 걸어갔다. 들어가려는데 월경 중인 여인은 입장하지 말라는 팻말이 보였다. 물론 이런 팻말을 무시하고 나는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도 내가 월경 중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정해놓은 나름대로의 룰을 지켜주기로 했고, 자이나사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월경 상태로 그 사원에 들어가는 것은 그 사원을 부정(不淨)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두고두고 생각해보아도 이러한 계율은 내가 알고 있는 자이나교의 특성과 비교해 볼 때도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자이나교는 이 지구 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종교라 말할 수 있다. 일체의 살생을 금하기 때문에 채소의 뿌리도 뽑지 못한다. 뿌리를 죽일 뿐 아니라 주변의 미생물이나 벌레까지 다 죽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적으로 떨어지는 식물의 열매만 먹고 산다. 보통 채식주의자라 말하는 사람들보다 채식의 단계가 훨씬 높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주의 간판에도 불구하고 자이나교도 여성이나 여체에 관한 관념에 있어서는 타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월경 출혈은 부정하고 폭력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생활 속에 뿌리내린 차별의 잔재


▎내재봉소에서 맞춘 힌두식 의상을 입은 필자.
그들이 고대사회에서 어떠한 해부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월경 피는 몸의 미생물을 죽이는 폭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이를 생산하기 위한 창조적인 생성 기능의 한 단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이나교의 어떤 종파는 남자의 나체수양을 해탈의 첩경으로서 권장한다. 성기를 노출하고 완전히 발가벗은 상태로 수련한다.

그렇다면 여성에게도 똑같이 나체수련을 권장해야 할 텐데 여성의 나체수련은 금지된다. 발가벗은 여성은 남성의 성기를 발기시키고 남성의 해탈에로의 길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여성은 남성의 해탈의 방해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한국의 여성해방론자들이 들으면 격노할 이야기들이지만, 그 논리적 정당성을 떠나서 문화적 습성이나 종교적 전통과 관련된 이런 관념들은 정말 고치기가 힘든 것 같다. 그렇다고 과격한 안티테제만을 제시한들 문제 해결은 점점 복잡해진다.

이날 나머지 시간과 그 다음날 동안 나는 자이살메르 성채의 안팎을 다 자세히 돌아다닐 수 있었다. 자이살메르 인구의 6%만이 성채 안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자이살메르 경제적 활동의 대부분은 성채 밖의, 주요시장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막 생활에 대비해 나는 적당한 민속의상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니켓이 낙타사진 이후 일반가정에서 생활하는 패밀리 스테이를 예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 혼자 토속의상을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디서 무엇을 사야 할지도 몰랐을 뿐 아니라, 말 못하는 외국인이라는 것이 들통 나면 지역민이 입지도 않는 의상에 엄청난 가격을 매겨 바가지를 씌울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니켓의 사무실로 가서 그에게 나를 시장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이상하게 아니켓이 매우 주저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뭐냐고, 주저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이와 같이 답하는 것이었다. “정말 도와드리고 싶죠. 그런데 제게는 오토바이 한 대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여자가 뒤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소문을 내게 마련이죠. 저는 아직 미혼이걸랑요.”

아니켓은 브라만 카스트에 속한다. 브라만이라고 꼭 잘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고귀한 정신상태를 유지하는 영적인 카스트로서 인지되고 있다. 힌두교의 성직자들은 모두 이 카스트 출신이다. 그의 가정교육은 매우 보수적인 듯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우리나라 개화기 때 아주 작은 시골마을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였다. 하여튼 나는 그를 설득시켰고, 그의 오토바이를 타되, 그를 잡지 않고 최대한 직업상 이방인을 수송하는 일로 보이게끔 하겠다고 약속했다.

전통을 지키며 공존하는 힌두와 무슬림


▎힌두인 내재봉소에서 옷을 만드는 여인.
결국 아니켓은 나를 적당한 민간 내재봉소(여염집에서 재봉틀로 삯바느질을 하는 곳)로 데려다주었다. 지역민 여인이 많은 천을 쌓아놓고 원하는 치수대로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성품은 없었다. 아니켓은 그의 누이들이 좋아하는 내재봉소 아주머니에게 날 데려다주었다. 그 아주머니는 나의 치수를 척척 재더니 천을 고르라고 한다. 나는 빠알간 색깔의 얇은 비단 시폰과 두꺼운 비단 새틴 두 종류를 골랐다. 얇은 것은 윗도리와 머리 베일로 쓰고 두꺼운 것은 더 짙은 색인데 치마로 쓴다. 둘 다 같은 색조였고 가장자리에 금박 장식이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진짜 비단이 아니고 모두 폴리에스테르 계열이다. 그 아주머니는 저녁 늦게 오면 옷이 돼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맞춘 것은 힌두 드레스였다. 실상 내가 사막에 가서 머물 곳은 무슬림 패밀리였다. 무슬림들 특히 여성들은 힌두 여인이 입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옷을 입는다. 그래서 무슬림 옷을 맞추려면 무슬림 장인에게 가야 한다. 무슬림과 힌두, 이 두 종교그룹의 차별은 옷 맞추는 것이나 시장 보는 것과 같은 삶의 일상성 속에서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나는 이 두 여인 그룹의 옷이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옷을 맞추면서, 아니켓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 차별을 인식하게 되었다.

첫째, 시골의 무슬림 여인들은 묵직한 순면의 까만 치마를 입는다. 그런데 치마가 아주 펑퍼짐하게 넓고 서양의 불룩한 페티코트와도 같다. 그런데 그 위로 매우 긴, 아주 심하게 수놓은 겉치마를 이중으로 걸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종족마다의 특색을 나타내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보석을 걸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석 치장이나 수놓은 겉치마를 안 걸쳐도 된다고 아니켓은 설명해주었다. 하여튼 보석을 많이 휘두른 여자는 다 결혼한 여인인 것이다.

무슬림 옷 가게에서 나는 세 가지의 다른 천을 선택해야 했다. 첫째는 스커트다. 스커트는 무거운 까만색의 순면 기지인데 그 위에 소용돌이 모양의 점박이선이 있고 그 사이사이로 핑크색의 둥근 꽃문양이 찍혀있다. 둘째는 가벼운 화학섬유로 된 셔츠(웃옷)인데 큰 꽃무늬가 박혀있다. 전체적으로 회색과 장밋빛으로 얼룩져 있다. 그리고 셋째로는 머리에 쓰는 베일인데, 아주 독특한 심홍색의 천으로 전체 색조와 맞추어 입는다.

버려진 브라만 도시에 깃든 전설


▎여정을 떠나기 전 낙타에게 물을 충분히 먹인다.
의상이 다음날 아침에 곧바로 완성된다기에, 그때 가보니 위에 걸치는 웃옷인 셔츠는 길게 무릎까지 내려오는 일종의 튜닉이었고, 소매도 꽤 길게 내려오는데 어깨는 약간 부풀려 있었다. 또 가슴 쪽은 주름이 잡혀 있었는데 전체 느낌이 아주 오래된, 품위 있는 옛 영국 블라우스와도 같았다. 앞쪽으로는 작은 종 하나가 귀엽게 달려있었다. 나는 이 지역의 내 재봉소 기술자들이 그토록 복잡한 디테일을 갖춘 의상을 단시간 내에 개별적 수치에 따라 완벽하게 만들어내는 그 정교한 손놀림에 대하여 경외감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러한 기술을 상실해가고만 있고, 인간적인 만남을 유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참 애석하기 그지없다. 힌두 의상도 무슬림 의상도 나에게 기막히게 잘 맞았다. 나는 대만족이었다.

2013년 2월 3일 아니켓은 타르사막으로 가는 몇 명의 다른 관광객과 나를 지프차에 태우고 출발하였다. 사막으로 가는 도중에 아주 특별한, 버려진 빌리지 앞에 차를 세웠다. 쿨다라(Kuldhara)라고 불리는 이 고스트타운은 13세기 실크로드 연변에 번창한 아주 부유한 브라만 카스트의 타운이었는데, 19세기 초에 버려지게 되었다. 사실 아무도 왜 이 마을이 버려지게 되었는지 그 정확한 사연을 알지 못한다. 전해 내려오는 민간 전설에 의하면 아주 사악한 자이살메르 성채의 영주가 있었는데, 이 마을의 수장의 딸과 강압적으로 결혼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브라만의 프라이드를 지닌 이 지역 사람들은 그 사악한 군주에게 항복하는 대신, 다함께 이 마을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아무도 이 마을에 살지 못하도록 저주를 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뒤로는 이 마을에 아무도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켓은 이 이야기를 조용하게 그리고 웅변조로 관광객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곳 지역민들이 이곳에 밤중에 있게 되면 유령들이 나타나서 사람을 쫓아낸다는 말을 한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 마을 전경이 잘 보이는 집 하나를 재건축해 이 집들이 원래 얼마나 멋있는 집들이었는지 그 양식적 특성을 보여주는데, 그 옥상의 정교한 탑모양 건조물에 앉아 있으면 돌더미와 부스러진 벽들이 지붕 없이 대지 위에 널려져 있는 모습이 음울하고 기괴하기 그지없다.

불과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번창했던 이 도시의 모습이 이렇게 음산한 흉가로 전락한 건 상전벽해라 할 만하다. 사실 이 잔재들의 모양으로 판단한다면, 이 마을은 집중적인 지진의 폐해로 이렇게 버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과학적 설명은 좋아하지 않는다. 인과적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 ‘설(說)’을 더 좋아한다. 로맨스와 미스터리가 있어야 지속적인 전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 부잣집 옥상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더 달렸다. 그리고 동물들을 먹이는 커다란 샘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나는 낙타양육사와 내가 예약한 여섯 마리의 낙타를 만났다. 아니켓은 나를 그 낙타양육사에게 소개했다. 그의 이름은 다디야(Dadiya)였다. 다디야는 매우 검고 햇볕에 다져진 거칠고 질긴 가죽 같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50이나 60세 이하로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의 나이가 43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좀 놀랐다.

그리고 보마(Bhoma)라 불리는 20대 후반의 젊은 청년이 우리 여행의 잡일을 도와주기 위해 동행하기로 하였다. 낙타에 안장을 얹고 내리고, 또 음식을 장만하는 일을 거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 시점으로부터 나는 나의 존재의 안전을 모두 이 두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다. 아니켓은 나에게 이 두 사람이 나의 모든 것을 안전하게 보살펴주리라는 점을 일러준 뒤 지프차를 타고 떠나갔다.

동물에게 물을 먹이는 곳은 가장자리가 시멘트 벽으로 둘러쳐진 매우 큰 둥근 풀이었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사막으로 더 깊게 들어가야 했다. 진실로 생각보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머나먼 여정이었다. 다른 관광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순결한 모래사막, 그래서 내가 자유롭게 사진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사막인의 여정은 오랫동안 낙타를 타고 가야만 했다.

낙타 등에 올라 사막인 체험


▎식사를 준비 중인 낙타몰이꾼들
우선 다디야는 내가 탈 아주 특별한 낙타를 골라주었다. 다디야는 서투른 영어로 내게 이 낙타만을 타야 된다고 설명해주었다. 이 낙타는 검은색으로 다른 낙타와 구분되었는데 아주 순하기 그지없어 다루기가 제일 쉽다는 것이다. 나 스스로 낙타를 몰아가며 긴 여정을 완수해야 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흥분의 도가니로 나를 몰아 넣었다. 그것은 나의 첫 경험이기 때문이다. 타지의 사막인들은 나에게 그런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내가 낙타의 등 위에 앉아서 여행을 시작한 것이 오전 11시였다. 그리고 중간에 한 빌리지에 멈춘 것이 오후 1시였다.

그러나 다시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나아가 수없이 작은 모래언덕을 헤치며 두 시간을 더 나아갔다. 아무 소리도 없는 광야에서 낙타 위에 앉아 4시간을 여행한다는 것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면서 꾸벅꾸벅 움직이는 낙타 등의 리듬에 내 몸의 흐름을 맞추어 나갔다. 좀 지나자, 다디야는 낙타가 행보를 빨리 하게 하기 위해서 목젖 있는 쪽으로 혓바닥을 차서 소리를 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들이 내는 소리에 가깝게, 낙타에게 명령하는 소리를 모방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그것은 헛수고였다. 그들의 소리는 매우 컸고 정확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낙타가 전혀 내 소리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낙타는 나에게는 관심을 표명하지 않고 오직 앞서가는 그룹과 그의 마스터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어쩌다가 낙타가 종종걸음으로 빨리 갈 때 흥분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 긴 여정은 도저히 즐길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 낙타의 흔들림에 어려서부터 적응이 되지 않은 사람은 허리와 다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나는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을 너무 많이 썼기 때문에 나중에는 완전 파김치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샌드듄(모레 언덕)이 바람을 막아주는 안온한 캠핑장소를 찾았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다디야와 보마는 낙타의 안장을 내렸고 저녁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풀어헤쳤다. 그리고 천을 한 장 모래 위에 펼치고 그 위에 물건들을 놓았다. 나는 마른 풀이나 나무를 불쏘시개로 쓰려고 모으는 척 했지만, 결국 일은 그들이 다 했다.

이 인도 사막에서의 캠핑여행은 내가 이집트나 요르단의 사막에서 경험했던 관광여행과는 비교도 될 수 없으리만큼 단순하고 원초적이었다. 인도의 사막이 가장 반문명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가스버너도 없었고 텐트도 없었다. 불은 현지에서 만들어내야 했고, 잠은 완전히 모래 위에 한 몸으로 자야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풍찬노숙(風餐露宿)이나 다름없었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902호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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