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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인문학자가 다시 쓰는 미래학 

일하지 않는 미래는 ‘디스토피아’다 

인간과 기술 ‘제로섬’ 관계면 4차 산업혁명도 요원
AI부터 가상현실까지 ‘인간의 시간’ 속에서 구상돼야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 아니다. 변화가 역동하는 가운데 인간의 역할이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미래를 인간의 시간으로 만들려면, 인간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구상해내야 한다.

사회주의의 몰락에도 여전히 칼 마르크스의 구상이 생명력을 갖는 비결도 여기에 있다. 인간을 대체하는 기계가 정신없이 들어서는 가운데, ‘노동하는 인간’을 모든 ‘―주의(主義)’의 가운데에 세운 것이다.

새로운 산업혁명을 목전에 둔 지금, [포스트휴먼이 온다]엔 미래를 다시 한 번 인간의 시간으로 만들기 위한 한 인문학자의 고민이 담겨있다. 학사부터 박사 학위까지 철학에 천착했음에도 인공지능과 인공생명, 가상현실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들을 능숙하게 요리해낸다.

저자는 책에서 다루는 미래 기술들이 지금 상태로선 “미래의 기술이 될 수 없다”고 강변한다. 그 미래 기술이 발전하는 궤적을 살펴보면, 인간의 삶과 행위가 제대로 고려되고 있지 못한 탓이다. 단적으로 인간의 신체와 관련된 기술은 신체를 이루는 각각의 기관을 낱낱으로 나눌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몸이라는 전체의 관점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한계는 세계적인 공학자 킴 비센티가 자신의 저서 [호모파베르의 불행한 진화]에서 언급한 두 유형의 키클롭스를 상기하게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기술에는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외눈박이 인문론자와 기술에 대해서는 알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모르는 외눈박이 기계론자말이다. 우리 모두는 눈 하나는 감은 상태로 떠돌고 있다.”

우리는 전체를 이해하는 교육을 등한시한다. 전체를 각각의 부분으로 쪼개서 분석하려 한다. 눈은 얼마든지 렌즈로 대체할 수 있다. 그 다음엔 인공근육, 종국엔 인공지능이다. 이때 인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기술의 대체재, 그것도 열등한 대체재로 전락할 뿐이다. 부분에 집착하는 접근법은 이렇게 기술과 인간이 맺고 있는 상호관계를 왜곡시키고 만다.

4차 산업혁명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노동과 맺는 관계가 왜곡됨으로써, 현재의 새로운 산업혁명을 추동하는 기술은 인간에게 일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인간의 노동은 기계의 그것과 하등 다를 바 없으며, 따라서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이 필요 없는 산업구조로 돌진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노동을 통해 미래로 향해가는 존재다. 노동의 박탈은 곧 미래의 박탈로 이어진다.

중독은 이렇게 미래와 단절된 인간이 극단의 권태에서 이르게 되는 병리적 현상이다. 인간의 노동을 4차 산업혁명의 ‘디스토피아’에서 구출하기 위해 저자는 ‘협력’을 말한다. 인간과 기계의 협력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논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인문학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에게 인문학은 과거를 담는 서재가 아니라 미래학의 방법론이다. ‘미래인문학’으로 명명하는 새로운 미래학을 통해 우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온전한 미래를 구상해볼 수 있다.

※ 김종규 - 성균관대 학부대학 초빙교수. 성균관대에서 서양철학(독일 현대철학·문화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하이브리드미래문화연구소에서 책임연구원을 맡고 있다.

201902호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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