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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기획] ‘盧 서거 10주기’와 추모의 정치학 

노무현, 유시민 두 사람을 새롭게 보게 하다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여권 정책 혼선, 도덕성 위기 클수록 ‘盧 사람들’에게 기대 쏠려
서울 창덕궁 인근에 ‘민주주의 교육장’ 노무현시민센터 건립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23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1월 29일 정부대전청사에서 열린 ‘지방화와 균형발전시대 선포식’에 참석해 “지방화시대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선언했다. 이듬해 참여정부는 ‘행정중심복합도시’란 이름으로 세종시의 첫 삽을 떴다.

올 1월 29일은 노 전 대통령의 선언이 있은 지 꼭 15년째를 맞이하는 날이었다. 이날 오후 2시 세종시 어진동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는 노무현재단을 비롯한 유관 단체의 주관으로 국가균형발전선언 1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너 유시민이랑 사진 찍었어?”

“당연하지, 그러려고 왔는데. 자, 봐봐.”

행사 20여 분 전 기자가 행사장에 도착했을 땐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두 사람이 각자 찍은 사진을 확인하고 있었다. 미리 와 있던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기념 촬영을 했다는 데서 뿌듯함을 느끼는 듯했다. 행사장 방명록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유 이사장을 비롯해 이해찬 민주당 대표, 김경수 경남도지사, 성경륭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등 참여정부 내각과 청와대를 이끌었던 인사들의 명단이 빼곡이 차 있었다. 양승조 충남도지사와 이춘희 세종시장 등 인근 지방자치단체장들도 함께했다.

300석 규모인 장내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매년 노 대통령 추도식의 사회를 봐왔다던 박혜진 전 MBC 아나운서가 행사 진행을 맡았다. 유쾌한 분위기로 행사가 시작됐다. 다음 날에 드루킹 사건으로 법정구속되는 김경수 경남지사도 마이크를 잡았다.

“제가 멀리서 올라 왔으니 다른 분보다 길게 말해도 되겠지요?(웃음)… 오늘 아침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사업이 발표됐습니다. 경제성이 있는 사업만 통과되는 방식으로는 국가균형발전 어렵지 않겠습니까. 오늘 발표가 있도록 도와주신 이해찬 대표님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김 경남도지사의 인삿말에 참석자들은 박수와 함께 환호를 보냈다.

마침 이날 오전 10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정부는 24조1000억원 규모 23개 사업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하기로 확정했다. 노 전 대통령 국가발전선언 15주년 기념일에 정부의 예타 면제 결정이 내려진 셈이다.

환영사에 나선 유 이사장은 “노 대통령은 우리사회의 여러 분열과 갈등을 해소해서 국민을 통합하는 걸 필생의 과제라고 생각했다”면서 “균형 잡힌 사회가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 중에서도 행정수도 이전은 균형발전의 핵심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10년 뒤엔 盧의 죽음이 어떻게 기억될까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오른쪽)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1월 29일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가균형발전선언 15주년 기념행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유 이사장이 이끄는 노무현재단은 올해 또 하나의 중요한 사업을 앞두고 있다. 바로 노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사업이다. 어떤 단체나 기관이든 보통 10년, 20년 단위로 꺾어지는 해는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마련이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해 10월 취임식에서 노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구상을 밝히기도 했다.

“지난 10년간 추모와 애도, 위로가 재단의 중심이었다. 이제 그것을 넘어 확산하는 쪽으로, 정파의 울타리를 넘어 한반도 평화와 사회정의 실현을 원하는 분이면 누구든 껴안을 수 있도록 발전시켜 갈 것이다.”

설 연휴 직후 서울 신수동의 노무현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천호선 노무현재단 이사는 “추도식이 5월 23일이라 서거 10주기와 관련해 아직 이사회에서 결정된 바가 없다”면서도 재단 내부의 기류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대통령 서거 10년을 지나면서 이제는 추모에서 계승으로 방향을 전환하자는 분위기다. 옛날식으로 말하면 3년 탈상(脫喪)과 비슷하다. 내부에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4050세대는 정치인 노무현과 함께 성장해온 세대인 만큼, 그분에 대한 이해도도 깊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통령’으로 기억할 거다. 결코 긍정적일 수 없는 뉘앙스와 의미에 노무현을 가두게 되는 거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을 감성적으로 기리는 차원을 넘어서 그 정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또 실현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을 기리는 사업도 재단 차원에서 준비 중에 있다. 먼저 2월 말과 5월 말에 ‘노무현대통령기념관’과 ‘노무현시민센터’ 착공이 예정돼 있다. 노무현대통령기념관은 봉하마을 추모의집 부지에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질 예정이다.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건립추진단장을 맡고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를 총괄한다. 이호철 단장은 노무현재단에서 발행하는 [사람사는 세상] 송년호 대담에서 기념관의 콘셉트를 이렇게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은 저희에게 ‘내 가장 큰 업적은 당선 그 자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당선’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안타깝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돌아가셨는가’ 하는 부분도 강조를 하려고 한다.”

“알릴레오가 10주기 추모 사업의 시발점”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세워질 노무현대통령기념관 조감도. 올 3월 초 착공할 예정이다. / 사진:김해시
이에 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 단장에게 연락했으나, “단장직을 내려놓고 외국에 왔다”는 답만 돌아왔다. 재단 관계자에 따르면, 건축설계를 마무리하고서 중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워낙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분이라 놀랍지 않다. 하반기에 귀국하면 다시 복귀할 수도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기념관이 노무현의 지나간 역사와 외연에 치중했다면, 노무현시민센터는 그의 정신이 축약된 곳이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다. 창덕궁 옆 1772㎡(약 532평) 부지에 지하 3층, 지상 3층 규모다. 고재순 노무현재단 사무총장은 “시민민주주의 플랫폼을 목표로 200석 규모 공연장과 시민들이 방송할 수 있는 미디어센터, 시민참여 활동이 이뤄지는 코워킹스페이스 등이 들어선다”고 소개했다.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부가 사업예산의 30%를 보조한다. 역대 대통령들 중 이 법률을 적용 받은 이들은 박정희·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등 4명에 불과하다.

시민센터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당장 서울시청사 지하에 ‘시민청’이란 이름으로 다양한 시민참여 사업이 운영되고 있다. 노무현시민센터가 새롭게 필요한 이유가 뭘까. 센터 건립사업을 이끌고 있는 천호선 이사는 “건물을 짓는다는 건 대개 100년을 생각하는 일이지 않나. 그 100년 뒤에 노무현이 어떻게 평가받을지를 고민했다”며 말을 이었다.


▎‘노무현시민센터(가칭)’는 서울 원서동 창덕궁 옆에 지하 3층, 지상 3층 규모로 들어설 예정이다. / 사진:노무현재단
“반(反)독재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것과 민주주의자라는 건 굉장히 다른 이야기다. 노무현 대통령은 삼김(三金)으로 상징되는 총재적 정당 문화에 새로운 도전을 했던 사람이고, 국정운영에서의 소통을 강조한 사람이다. 오죽하면 ‘댓글 대통령’이란 말까지 들었겠나.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자 노무현’이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없이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지만, 노무현을 통해 더 잘 말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있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시민을 어떻게 길러내고, 또한 어떻게 조직해낼지 고민한 결과물이 노무현시민센터다.” 5월 말 시민센터 착공식에서 전달될 메시지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오는 5월 23일의 10주기 추도식은 경우에 따라서는 전에 없는 장면을 연출할지도 모른다. 노건호씨는 지난해 추도사에서 “10주기에는 북측 대표도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고재순 노무현재단 사무총장은 “오는 5월 추도식에는 정파를 초월해서 최대한 많은 분들을 초청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소통을 중시했듯이 그의 후예들도 온라인 상에서 활동이 활발하다. 재단의 유튜브 채널 콘텐트인 ‘유시민의 알릴레오’가 대표적이다. 유 이사장이 새로 취임하면서 12월부터 제작에 들어갔다. 재단의 한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과 참여정부 정책에 대한 오해를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의견이 강력하게 작동했다”고 말했다.

여담이지만 이 관계자는 ‘알릴레오’ 작명을 둘러싼 일화도 전했다. 한 재단 직원이 지난해 말 크게 인기를 끌었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영국 록그룹 ‘퀸’의 명곡 ‘보헤미안 랩소디’의 가사 가운데 “갈릴레오는 거짓말쟁이였어(Galileo, Figaro)”란 대목이다. 물론 “그래도 지구는 돈다”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한 물리학자 갈릴레오에서 이름을 빌려왔다는 얘기도 정설처럼 전해진다. 퀸에 열광하는 2030세대 또는 4050세대에게 좀 더 친숙하게 접근하려는 의지의 일환으로도 풀이된다.

천호선 이사는 “알릴레오 시작과 함께 10주기 추모 사업의 시동이 걸린 셈”이라며 “콘텐트 운영 기간을 1년여로 잡고 있다”고 했다. ‘알릴레오’가 노무현정신을 ‘알리는’ 확성기 역할을 하리란 예고인 셈이다.

노무현재단, ‘비정치적 결사’라고 말하지만…


▎지난해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9주기 추도식에서 장남 노건호씨가 인사말하고 있다.
노무현재단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는 1월 4일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을 손님으로 초대한 첫 동영상을 올린 지 사흘 만에 50만 명을 돌파했다. 2월 15일 기준 구독자 수는 69만1000여 명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유시민 이사장이 대중을 상대로 가진 영향력을 통계로 입증한 계기가 됐다. 이 때문에 그가 극구 부인함에도 늘 대선 출마설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여권 내부에 내세울 만한 차기 리더십이 모호한 현실을 반영한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1월 29일 발표한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17.1%를 차지해 1위에 올랐다. 여권 유력 대선주자인 이낙연 국무총리 선호도는 15.3%를 기록했다. 하지만 여론조사 전문기관 알앤써치가 전국 유권자 1002명을 대상으로 2월 8~9일 실시한 차기 대선 주자 적합도 조사에서는 황 전 총리가 21.6%로 이 총리(14.8%)와 격차를 벌이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여권에서는 늘 유시민 이사장을 후보군에 거론한다. 본인은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빼달라“고 공식 요청한 상태이지만 황 전 총리 지지율이 오를수록 유 이사장의 ‘컴백’을 요구하는 여론도 증가할 수 있다.

노무현, 문재인 정부 출범에 힘을 보탠 여권의 한 원로는 “유 이사장은 여권의 핵심 지지기반인 친노, 친문 양쪽의 젊은층이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캐릭터”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유 이사장이 최근 들어 어느날 갑자기 대선주자로 부상했다고 말하지만 그건 뭘 모르는 얘기다. 그가 정치와 선을 긋고 살아서 그렇지 그에게는 늘 진보진영의 고정 지지층이 따라다녔다. 반면 여권 내 총리, 장관, 시장, 지사와 같은 자리에 있는 정치인들은 감투를 벗는 순간 지지율을 확 떨어진다. 따라서 유 이사장이 마음만 먹는다면 여권의 차기 주자로 입지를 도모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물론 대선에서 승리 여부는 시대가 결정하는 것이고.”

유 이사장은 요즘 대선과 선을 긋기에 바쁘다. 실제로 최근 사석에서는 “나는 정치를 하지 않아야할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자신의 굳은 결심을 피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국정지지율이 하강곡선을 긋고, 여권의 잠재적 주자들이 지금처럼 하나둘 씩 대열에서 탈락하는 사태가 오면 여권에서는 유 이사장에게 현실정치로의 복귀를 강력하게 요구할 공산이 크다. 오는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10주기 관련 각종 행사는 진보진영의 결집을 도모하는 계기가 됨은 물론 유 이사장에게 대한 대중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모멘텀을 제공할 수도 있다. 노무현재단과 유 이사장과 같은 재단의 인물들이 그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정치무대로 불려나올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201903호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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