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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대기자의 VIP 인터뷰(1)] 정인보 비사(秘史) 공개한 강신항 교수 

“위당은 유학 떠난 게 아니라 서간도로 독립운동하러 갔다” 

[한글로 쓴 사랑, 정인보의 어머니] 출간… 역사자료 다수 수록
일본 패망, 우리나라 독립 확신 갖고 끝까지 창씨개명 거부

VIP는 ‘매우 중요한 사람(very important person)’의 약자다. 하지만 VIP는 ‘매우 큰 영감을 주는 사람(very inspiring person)’, ‘매우 혁신적인 사람(very innovative person)’의 약자도 될 수 있다. 김환영 대기자의 ‘VIP’ 인터뷰에서는 우리 삶에 울림을 주는 이들을 만나 진솔한 얘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 편집자 주


▎강신항(오른쪽)·정양원 명예교수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위당 정인보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위당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우리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나오는 역사적 인물이다. 이렇게 나온다. “학자(1893~1950). 아명은 경업(經業). 자는 경시(經施). 호는 위당(爲堂)·담원( 園)·수파(守坡)·미소산인(薇蘇山人). 상하이(上海)에서 박은식, 신채호와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해 동포 계몽에 힘썼으며,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일본 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저서에 [조선사 연구] [담원 시조] [담원 문록] 따위가 있다.”

위당 선생은 국문학자·사학자·언론인·시조작가다.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들’을 선정한다면 위당은 반드시 포함돼야 할 인물이다. 연세대학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1년 제2인문관을 위당관(위당 정인보 선생 기념관)으로 지정했다. 1990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됐다.

조선시대에 17명의 재상을 배출해 명문으로 손꼽히는 동래 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박은식·신규식·김규식·신채호 등과 함께 1912년 7월 상해에서 동제사를 조직했다.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식민사관에 맞서 ‘민족 얼’을 강조하는 조선사 연구를 확립했다. 해방 후에는 국학대학 초대 학장, 감찰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50년 7월 납북돼 그의 정확한 기일조차 알 수 없다. 평양 재북 인사릉 정인보 선생 묘비에는 ‘조국통일상수상자’라고 적혀있다.

위당의 사위인 강신항(89) 성균관대 명예교수(국문학)가 최근 [한글로 쓴 사랑, 정인보의 어머니]를 출간했다. 강신항 교수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은 국문학자·수필가다.

[한글로 쓴 사랑, 정인보의 어머니]는 정인보 선생이 어머님과 주고받은 편지, 그가 지은 4대 국경일 노랫말과 고려대·동국대·연세대 등 대학 교가(校歌) 가사의 사진을 수록한 책이다. 이사하다가 다락에서 발견한 자료다. 자료가 삭는 등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족끼리라도 돌려보자는 차원에서 비매품으로 만든 책인데 요청하는 분들이 많아 곧 일반 서점에 출시된다.

위당 선생을 중심으로 강 교수와 가족 이야기를 들었다. 위당의 4남4녀 중 셋째 딸인 정양원(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박사와 강신항 교수의 ‘러브 스토리’도 들었다. 강신항 교수를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자택에서 인터뷰했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책을 낸 동기는?

“제 나이가 1930년생, 90세다. 아내는 ‘연상의 애인’이라 91세다(웃음). 오늘도 지인이 돌아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살아 있는 동안에 후세를 위한 자료가 될 책은 다 내자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제가 좀 게을러서 원고를 못 넘기고 있는 책도 있다. 1950년 7월에 장인이 납치당한 이후로 아내가 2, 3년 동안 눈물로 쓴 글이 있다. 그것도 내려고 한다. 그것도 다락에서 찾았다.”

정양원 교수와는 어떻게 만나셨는지.

“우리는 서울대 국문과 동기동창이다. 우리 집은 아버지께서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원래는 충청도에서 12대째 내려오는 농민이었다. 내자는 ‘우러러도 못 보는’ 저 높은 집 따님이었다. 우연히 대학 동창이 되다보니 늘 공부도 같이 했다. 동갑인 줄 알았는데 한참 지나고 보니까 저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그런데 되돌릴 수도 없고(웃음).”

천생배필 정양원 교수는 같은 과(科) 동기동창


▎위당 정인보가 어머니에게 쓴 친필 서신. / 사진:강신항
당시만 해도 여학생이 많지 않았을 것 같다.

“국문과에 21명이 입학했는데 여학생이 넷 있었다. 그때는 9월에 학년이 시작하기 때문에 9월 5일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연구실에서 했다. 여학생 넷 중에서 제일 못생긴 여자가 한 명 있었다. 히죽히죽 웃는 여학생이었다(웃음).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남학생·여학생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접촉이 없었다. 길거리에서 여학생들을 마주치면 골목으로 도망가는 시절이었다. 대학에 오니까 한 반에서 공부하게 된 거다.”

일반인이 잘 모르는 위당의 면모는 어떤 게 있는가?

“이번에 책을 낸 이유하고도 관련됐는데…. 사람들은 위당 선생을 주로 한학자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말을 참 사랑하신 분이셨다. 80년, 90년 전 글이지만, 위당이 자당님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그의 우리말 사랑을 알 수 있다. 당시 상류층 할머니들이 집 안에서 어떤 말을 쓰셨는지도 알 수 있다. 우리말의 변천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다.”

위당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게 있다면?

“1910년에 우리나라가 망하니까 북경으로 유학을 갔다고 하는데, 유학 간 게 아니다. 이회영 선생의 독립운동 기지인 서간도의 추가가(鄒家街)로 망명을 떠나신 것이다. 19세 때였다. 그 다음에는 상해로 가셔서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났다. 그때 신해혁명(1911)으로 중국이 뒤집혔는데 무슨 유학인가. 위당은 망명을 세 번 갔는데, 두 번째 가실 때는 생어머니가 만주까지 따라 가셨다. 독립군 빨래도 하시고 손이 터지게 일하셨다. 상류층 할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위당 정인보 평전: 조선의 얼](김삼웅 지음)을 보면, 위당 선생이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중시하는 양명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변절하지 않았다고 나와 있다.

“양명학도 그렇지만, 교유관계의 영향도 컸다. 벽초 홍명희 같은 분들과 젊었을 때부터 친했다. 해방 이후에 친해진 게 아니다. 지도적인 인물들이 창씨개명을 할 때, 위당은 1945년 1월 편지 배달도 안 되는 전북 익산군 산속으로 도망갔다. 처음에는 창동(옛 경기도 양주군)으로 가서 숨었다. 그런데 창동이라는 동네가 참 재미있는 동네다. 해방 후에 보니까 김병로·홍명희·송진우 등 유명한 분들이 거기서 다 나왔다.”

위당 선생은 일본이 망하고 우리나라가 독립한다는 확신이 있었는가?

“그렇다. 1938년부터 우리말로 강의를 못하게 하니까 연희전문을 그만두셨다. 그때부터 7년 동안 참 가난하게 살았다. 태평양전쟁(1941~1945)이 발발했을 때도 시국을 보는 눈이 달랐다. 일본이 점점 더 득세할 것이라고 본 사람도 있었지만, 위당이나 고하 송진우와 같은 인물은 일본이 망한다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친일 안 했기에 북한에서도 애국지사로 인정”


▎강신항 성대 명예교수가 출간한 [한글로 쓴 사랑, 정인보의 어머니] 표지. / 사진:강신항
이승만 박사의 삼고초려로 초대 감찰위원장을 지내지 않았나?

“중화민국 정부의 영향을 받아 우리 정부 수립 후에 감찰위원회를 만들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빼놓고 전부 파면할 수 있었다. 임영신 상공부장관과 조봉암 농림부장관이 독직 사건에 걸렸다. 사실 큰 문제는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조봉암 장관은 공금으로 관사를 수리했다. 임영신 장관은 뇌물을 받았다. 1949년 6월 감찰위원회에서 두 분을 파면했다. 감찰위원회 권한이 너무 크다고 본 이승만 대통령이 ‘국장 이하만 손대라’고 했다. 이에 위당은 ‘나는 송사리 잡으려고 여기 와있는 게 아니다’며 사임했다. 그러니까 48년 7월에 임명돼 1년 만인 49년 7월에 그만두신 것이다. 그후 감찰위원회는 격이 완전히 낮아지고 힘을 쓸 수 없게 됐다. 이러한 역사를 요즘 학자들도 잘 모른다.”

위당은 북한으로 끌려갔는데.

“이북 사람들은 자기들이 ‘인재 모시기 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피해자가 8만~10만 명인데, 친일파나 이런 사람들은 안 데려간 것 같다. 관리나 학자, 독립운동가 등 좀 괜찮은 분들만 데려갔다. 춘원 이광수에 대해서는 뭐라고 ‘변명’했느냐면, ‘말년에는 친일을 했지만, 전적(前績, 이전에 이뤄놓은 업적)이 좋아서 애국지사로 모셨다’는 것이다. 이광수씨의 아들들은 아버지 묘지에도 갔다 왔다.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니까. 1962년에 11월에 동아일보에서 납치된 인사들에 대해 ‘죽음의 세월’이라는 연재를 한 적이 있다. 거기 보면, 10월 24일에 묘향산을 넘어가다가 돌아가셨다. 묘향산 봉우리들은 최고봉인 비로봉(1909m)를 비롯해 1000m가 넘는다. 그 험한 고개를 넘는데 미군 폭격기가 폭격했다. 나중에 수습해 보니까 60분이 안 계시더라는 것이다. 저희들은 양력 10월 25일을 위당의 기일로 잡고 있다.”

북한 정부나 북한 국문학계의 위당 선생에 대한 평가는?

“우리가 90년 폴란드에서 이북 학자 일곱 분을 만났다. 거기서도 아주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친일을 한 번도 안 했기에 자기네들도 애국지사로 인정한다고 한다.”

위당은 4대 국경일(삼일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 노래를 작사하셨다.

“물론 그때 감찰위원장이라는 관직에 있으니까 공보처에서 위촉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력이 없으면 못하는 것 아니겠는가. 원래 이분이 시조도 짓고 노래에 소질이 있으셨다. 그런데 4대절 노래 중에서 제일 그래도 잘됐다는 게 다음과 같은 광복절 노래다. 여러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시적인 구절이라고 한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위대한 어른의 정신 잘 이어가는 게 중요”


▎평양시 외곽 용성구역에 위치한 ‘재북인사의 묘’에 세워진 위당의 묘비. / 사진:연합뉴스
교가도 많이 쓰신 걸로 안다.

“고려대 교가는 조지훈 시인이 교수가 되면서 바뀌었다. 다른 데는 다 그대로 있다. 그런데 조지훈 교수 아버지도 6·25 때 납치당했다. 이번 책에 이화여대 교가는 안 실려 있다. 원본이 분실됐다.”

현재 남아 있는 위당 저작의 원본은 분량이 어느 정도인가. 몇 개 박스 분량인가.

“아니다. 봉투 몇 개에 담긴 정도다. 위당이 읽던 한문 자료도 많이 분실됐다. 1·4후퇴 때 어떤 아는 집에다가 만 권쯤 되는 한적(漢籍, 한문으로 쓴 책)을 맡겼는데 사과 싸기에 좋겠다고 막 찢어서 썼다고 한다.”

친일을 거부한 위당은 가족에 가난한 삶을 물려줬다.

50년 10월에 우리 장모님하고 이 사람(정양원 교수)이 지금 서울 회현동 길거리에서 담배 장사를 했다. 52년에는 논산훈련소 앞에 가서 담배를 팔았다.

[위당 정인보 평전]을 보면 위당은 흠이 없다며 딱 하나 흠이 있다고 하면 벽자(僻字, 흔히 쓰지 아니하는 까다로운 글자)를 쓰셨고, 글이 좀 어려웠다고 나와 있다.

“한때는 약주도 좀 드시고 그랬다고 한다.”

위당 선생은 현대의 실학 연구를 정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호암 문일평을 내세우는 분들도 있다. 위당은 30년대에 조선학을 통해 당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조선시대 학자들을 발굴했다. 또 안재홍(1891~1965) 선생과 함께 [여유당 전서]를 교열·간행하는 등 위당은 우리나라 실학 연구 확립에 기여했다.”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강조할 말씀이 있다면.

“위대한 집안 어른을 모시고 있다는 게 영광이지만, 그 정신을 저희들이 잘 이어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56년 11월 제가 결혼할 때 오징어가 참 쌌다. 오징어와 막걸리, 쌀 세 가마로 결혼했다. 내자는 시집올 때 옷 두 벌 가지고 왔다. 그래서 요즘 혼인 때 돈 쓰는 사람들을 보면 저희들은 이해를 못한다. 그래도 저희는 (변변한) 가구도 없지만, 책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서울대 외교학과와 스탠퍼드대(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에서 공부했다. 중앙일보에 지식전문기자로 입사, 심의실장과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서강대·한경대·단국대 등에서 강단에 섰다. 지은 책으로 [따뜻한 종교 이야기] [CEO를 위한 인문학] [대한민국을 말하다: 세계적 석학들과의 인터뷰 33선] [마음고전] [아포리즘 행복 수업] [하루 10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말하다] 등이 있다.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201903호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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