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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대기자의 ‘지성담론’] 데카메론 ‘정의란 무엇인가?’(1) 

‘을(乙)’이 이룬 민주주의가 ‘을’을 배신하는 아이러니 

‘국민’으로 뭉뚱그려진 이름 뒤에 차이와 대립은 은폐
사회적 약자는 계속 약자로 머물게 하는 사회로 고착


▎정의 공부모임인 ‘우리사회정의’ 멤버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양선희, 함돈균, 진태원, 도법 스님, 이남곡, 조성택, 강영진, 윤영호(존칭 생략).
장자(莊子)의 [대종사편]에는 말라버린 물가에서 물고기들이 헐떡거리며 서로 습기를 뿜어내거나 물기를 토해 맞은편에 있는 물고기를 구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이 광경에 대해 장자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가상하고 감동적이지만 강물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며 서로 모르는 척하며 사는 것에 비할 바인가.”

물고기가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물기라도 토해내며 물을 갈구하는 것은 물이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군가 강렬하게 갈구하는 것은 심하게 결핍돼 있거나 현실엔 없어서일 겁니다.

지난해 초, 종교인·학자·사회운동가·언론인 등 각계의 12명이 모여 ‘우리사회정의(우사정)’라는 공부모임을 결성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이 시대 우리 사회가 봉착해 있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정의’의 문제에 천착하여 ‘우리 시대 정의’의 실상을 드러내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정의에 이르는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모여야 했을까. 이 시대 지식인으로서 윤리학적으로 정의(定義)되는 정의(正義)에 대해선 책상에 둘러앉아 3박4일 동안 논할 수 있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는 동시대적이고 통속적인 정의의 담론과 현장에 대해선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해서였습니다.

한번 돌아보십시오. 지금 이 순간도 도처에서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러나 정의를 부르짖는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포악한 것일까요. 정의의 실체는 모호하고, 도처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적대하며, 정의의 이름 아래 고통 받는 사람들은 늘어나기만 합니다. 마치 ‘정의에 이르는 길은 폭력으로 얼룩져야만 한다’고 얘기하려는 듯이 말입니다.

도대체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정의란 무엇입니까. ‘우사정’엔 그동안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정의 실현을 외친 사람들이 모였지만, 첫 모임에선 명쾌하게 정의로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빙빙 돌았습니다. 우리는 정의를 말했지만 정의가 넘치는 모습,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이유는 지금 우리 시대가 마치 ‘정의가 말라버린 물가’와 같아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야 할 정의가 무엇인지, 왜 이렇게 정의를 갈구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정의가 말라버린 물가, ‘부정의’(不正義)의 현장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첫 주자로 스피노자 철학의 대가인 진태원 선생(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이 나섰습니다. 그는 최근 집필한 저작 [을의 민주주의]에서 이 시대를 관통하는 ‘갑을(甲乙) 구조’에 나타나는 부정의 문제에 천착하기도 했습니다. 진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모두 을이면서 갑의 순간엔 ‘갑질’을 한다


▎최근 [을의 민주주의] 저서를 펴낸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선 계약서상 계약당사자를 지칭하는 데 주로 사용됐던 갑(甲)과 을(乙)이라는 용어가 강자와 약자를 선명하게 가르는 사회구조적 언어로 부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갑을’은 차별과 착취, 무시와 배제, 대립과 같은 사회 부조리와 관련된 사회문제를 관통하는 담론의 중심을 이루는 말이 되었습니다.

‘을은 누구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 장애인 혐오, 다문화 혐오 등 각종 혐오의 피해자가 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많은 소수자와 약소자들. 프랜차이즈 본사의 ‘갑질’ 피해자인 영세 프랜차이즈 가맹점주와 알바생. 교수의 횡포에 시달리는 많은 대학원생. 서울 중심의 나라에서 차별과 소외의 대상이 되는 지방 주민들….

요즘 신문·방송·SNS에는 이 시대 자행되는 온갖 종류들의 ‘갑질’ 이야기로 도배가 되어 있다시피 합니다. 작년 한 해 동안 나온 ‘갑질’과 ‘을들의 참상’에 대한 고발만 해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죠. 재벌의 갑질에 피해를 입은 을의 이야기, 의사 교수의 횡포에 시달린 수련의들의 이야기, 제빵 프랜차이즈의 제빵기사와 가맹점주 이야기, 치킨 프랜차이즈 가맹점 이야기, 위험한 작업 현장에서 사망한 비정규직 노동자에 관한 이야기, 사회 각 분야의 성폭력을 폭로하는 미투(me too)의 물결….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들, 을이라 지칭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통속적으로는 일명 ‘갑질’이라는 용어로 뭉뚱그려 통용되는 각종 혐오와 폭력과 무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들여다보면 갑질의 대상이 되는 을은 대부분의 국민 또는 시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우리 자신’ 말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대다수는 어느 순간 을의 지위에 놓여 있고, 또 어느 순간엔 갑이 되기도 합니다. 갑과 을의 신분과 지위는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비정규직은 을이고, 정규직은 갑이다’라고 일괄적으로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 갑과 을은 대상과의 관계를 지칭하는 언어이며, 모두에게 갑과 을의 순간이 교차합니다.

때론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을이기도 하고, 정규직이지만 여성으로서의 을이기도 하며, 또는 여러 종류의 경쟁과 압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정규직으로서의 을이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을의 지위가 중첩되면서 ‘을의을’ 혹은 ‘을중 을’로 추락하기도 합니다. 일용직 노동자로서의 을이면서 여기에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이주노동자 내지 불법체류자로서 또는 성적 소수자로서 가중된 을의 지위에 놓여 있는 경우 우리는 ‘을중을’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을과 을중 을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라도 식당에 가선 식당 종업들 앞에서 갑이 되고, 전화로 응대하는 감정노동자들을 향해 모멸의 말을 쏟아놓고, 순경이 비위를 상하게 했다고 파출소를 때려 부수는 갑질을 하는 경우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갑과 을은 신분처럼 타고난 것도 아니고, 고정된 것도 아니며, 순간순간 자기 안에서 자리바꿈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 대다수인 을들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협력해 불공정한 갑을 관계 개선을 요구하고, 이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물론 많은 지식인·활동가·시민들은 갑질에 맞서 투쟁하고 여성·장애인·성적소수자 등 특정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인권운동을 펼칩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을에 대한 혐오와 폭력, 무시와 배제는 머뭇거림 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조금 더 현미경을 들이대볼까요. 노동자 해방을 주장하는 노조 내에서도 여성 차별과 성추행 문제가 제기됩니다. 조교와 대학원생에게 일상적으로 갑질을 하는 진보적 지식인에 대한 고발도 있습니다. ‘대의’를 위해 소수자인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갑질은 덮어두도록 강요됩니다. 자유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다면서 누군가를 배제하고 주변화 시키는 일은 서슴없이 일어납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 모두를 무시당하는 을로 계속 살도록 하는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보면 갑을 문제는 단순히 특수한 상황이나 특수한 사회적 영역에서 나타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는 ‘드문 일’ 혹은 ‘주변적인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오히려 정치·권력·문화적으로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누군가의 희생과 주변화를 전제하며, 갑을 관계가 강화되는 쪽을 향해 달리고 있는 듯합니다.

갑을 관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달리는 한국 사회


▎지난해 6월 전공 교수의 상습적인 갑질과 폭언, 성희롱과 관련해 제주대 학생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해당 교수의 파면을 요구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불평등과 억압을 딛고 올라서서 평등과 자유를 추구해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민주화,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 과정이 을들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은 을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로 근대사를 돌아보건대,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전도되고, 민족해방 투사는 새로운 독재자로 역전되었으며, 각종 해방 투쟁의 결과는 모든 국민의 승리가 아닌 ‘우리 편의 승리’로 축소됐습니다.

승리한 자는 지배자(갑)가 되었고, 조력한 국민들은 그대로 을로 남는 상황. 누구도 ‘을로서 을을 해방’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 가운데 사회적 약자들은 계속 약자로 남는 사회의 갑을 구조는 견고해졌습니다. 민주화가 을의 해방으로 연결되지는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왜 그동안 숱한 민주화와 해방 투쟁을 벌이면서도 진정한 을의 해방을 실현하지 못한 것일까요. 우리는 갑과 을의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해 간과해버렸던 것은 아닐까요. 갑을의 문제를 나의 문제와 분리해버린 현실, 스스로 을임을 자각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꺾여 있는 상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저는 우리 모두를 ‘동질적 인간’으로 묶어버린 ‘국민’이라는 개념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까 합니다. ‘국민주권’이라는 말은 문재인 정부의 키워드죠. 하지만 우리는 기억합니다. 어느 정권이나 ‘국민’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국민은 누구입니까?’

‘국민’. 한국 현대사에서 국민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한편에서는 독재정권에 순응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수동적인 집단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중이라는 말과 더불어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주의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과거 군사정권의 독재자들도, 야당의 정치지도자들도 모두 ‘국민’을 앞세우고, ‘국민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위선과 독재마저도 정당화했습니다.

‘국민’의 이름으로…동질성의 개인의 격차 묶어


▎지난해 12월 태안화력 운송설비 점검 중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고 김용균 씨를 추모하는 기자회견에서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처럼 국민은 통치를 받는 대상이라는 수동적 의미도 있고, 저항적이고 민주주의적 성격도 있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순응’과 ‘저항’이라는 양극단의 개념을 포괄하는, 미묘한 개념이라는 얘기까지 했습니다. 이젠 이 개념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을 대표해 말하기에는 한계가 많다는 점을 얘기하려고 합니다.

우선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려는 ‘저항’이라는 개념으로서의 국민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나 작년의 촛불집회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1조를 가사로 노래한 ‘헌법 제1조’가 널리 사랑을 받았습니다. 국민이라는 말이 갖는 저항적·민주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죠. 국민의 이름으로 권력에 저항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저항의 측면을 강조한 이 대목에서도 국민은 개개인이 아닙니다. 동질적 가치로만 뭉쳐진 존재입니다. 국민이라는 개념이 함축하는 ‘동질성’은 새로운 시대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담는 데 한계를 보입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을 한 덩어리로 뭉쳐놓는 ‘동질성’은 실제 국민을 구성하는 계급적·성적·지역적 차이와 대립을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도 들 수 있겠군요.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 및 사회화가 산출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10 : 90’, ‘1 : 99’ 같은 숫자로 표현되어 왔습니다. 이 숫자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극소수의 부자들(1 혹은 10)이 점점 더 많은 부를 차지함에 따라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99 혹은 90)은 줄어드는 몫을 둘러싸고 더욱 치열하고 가혹한 경쟁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에서 늘 피해자 내지 패배자의 위치를 강요당하는 것은 경제적·사회적 약소자들입니다. 여기서 1과 99, 10과 90을 ‘국민’이라는 한 단어로 묶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국민’이라는 동질적인 기표는 그 내부에 존재하는 갑과 을의 사회경제적 격차라는 문제, 이것에 기반을 둔 지배와 착취의 문제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감추고 있습니다. 또한 국민이라는 말의 전체성에는 다양한 개인들 및 소수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차별이 식별되고 정정될 여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이들(가령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국민은 국민이되 2등 국민으로 차별받고 무시당하고 있으며, 이것이 갑을 관계라는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주권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갑을 관계가 산출하는 폭력과 불평등, 무시와 차별, 배제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민주주의와 정의의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등한 자유 이념과 시민들의 공동선


▎지난해 5월 조양호 일가 퇴진과 갑질 근절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는 대한항공 직원과 시민들.
이젠 우리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하는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는 갑을의 구조를 중심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이러한 과제는 단순히 보편적인 민주주의 정치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해왔습니다. 보편적이면서 독특한, 독특하면서도 보편적인 정치만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곧 근대 민주주의 및 정치의 기본 원리인 모든 사람의 평등한 자유를 넘어서 각각의 사람들의 독특한 정의(singular justice)에 관심을 기울일 때, 사회 각 분야에서 자행되는 갑질의 문제, 을과 을 사이의 대립의 문제를 적절하게 사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을의 민주주의’라고 명명하겠습니다. ‘을의 민주주의’는 간단히 말하면, 링컨 대통령의 말로 잘 알려져 있는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 곧 “국민(인민)을 위한, 국민(인민)에 의한, 국민(인민)의”라는 경구의 의미에 대한 재해석의 시도, 또는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선언하려는 시도라고 저는 이미 저의 책 [을의 민주주의]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을의 민주주의는 우선 을을 위한 민주주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듯 우리 사회(아울러 세계의 많은 지역과 국가들이)는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면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민족주의적 또는 국민주의적 배타성과 충돌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 곧 우리가 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사회적 안전 메커니즘의 약화와 해체 속에서 각자도생의 생존경쟁 논리를 강요받으면서 불안정한 노동과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사회 질서는 민주주의 공동체의 원리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평등한 자유의 이념 위에서 시민들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을 존재 이유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숨진 고 이한열군을 추도하는 인파가 서울시청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렇다면 을의 민주주의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따라 세계와 사회가 재편되면서 생겨난 많은 을들을 보호하고 배려하기 위한 정책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라고 규정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그들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각자 존엄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고, 시민으로서의 평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적인 대안이나 정책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가령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 최악의 실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을 위한 실업대책,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주거·육아·복지 제도 확충, 질병과 가난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빈곤 노인들을 위한 정책, 차별과 모욕·배제에 시달리는 성적 소수자들·여성들·이주자들을 위한 인권 보호 정책 등이 을을 위한 정책의 사례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공화국의 이념에 걸맞은 사회가 되는 데 이런 정책들은 실로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시행을 요구하는 것들입니다.

갑의 이해관계가 관철되는 입법부


▎불법 파견 논란이 일었던 제빵 프랜차이즈의 제빵기사들 모습.
그러나 이런 정책들을 모두 실행한다고 해서 ‘을의 민주주의’가 달성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이에 그치게 된다면, 그때 을의 민주주의는 을을 그냥 약소자의 처지, 피통치자·피억압자의 처지에 놓아두게 되며, 따라서 (용어 모순적이게도) 일종의 후견적인(paternalistic) 민주주의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약소자로 머물러 있는 약소자들을 위해 ‘윗분들’이 알아서 대안을 마련하고 정책을 집행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따라서 우리가 좀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을의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들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인가를 묻는 데 그치지 않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을에 의한 민주주의, 을의 민주주의는 어떤 것인지 질문해봐야 합니다.

‘을의 의지와 목소리가 잘 대표되고 있는 민주주의’.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을의 민주주의’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현대 민주주의는 대부분 대의민주주의 체제로 운영됩니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국민(인민)의 의지를 잘 대표하고 그 목소리를 정책과 제도에 잘 구현할 수 있는 대표자들을 공정하게 선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잘 감시·통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대로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과 불만이 제기된다면, 이는 이러한 대표자들이 국민 전체, 특히 대다수 을의 의지와 이해관계를 대표하기보다는 권력자나 재벌을 비롯한 소수의 갑의 이해관계와 의지를 구현하고 집행하기 때문입니다. 무소불위 재벌의 권력을 비판하고 그것을 견제하거나 감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그것을 위한 입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입법부 자체가 재벌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더욱이 세계화 시대 국민국가는 세계시장의 압력에 항상적으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으로 인해 을의 이해관계와 의지가 입법 및 정책 과정에 반영되기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개혁적인 정책이나 입법을 추구하려 할 때마다 정치·경제계와 언론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치열한 세계 시장의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가 경쟁력을 높여야 하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려면 국민 경제의 중추를 이루는 대기업들의 경제 활동을 국가가 뒷받침해야 한다.”

이런 논리가 어느덧 개혁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을에 의한 민주주의, 을의 목소리와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 더욱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을의 민주주의’는 곧 약소자로서 을을 배려하고 보호하는 정책과 제도만 또한 을의 이해관계와 의지를 잘 대표할 수 있는 대표자들을 선출하고 통제하는 과정만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을들 자신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모색하는 것이 ‘을의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관심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좁은 의미의 ‘을의 민주주의’는 주체로서의 을들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라고 정의하는 게 적절할지 모릅니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집니다.

다수의 약자가 소외된 ‘배제의 민주주의’


▎2019년 공공기관 채용정보 박람회를 찾은 학생과 구직자들. / 사진:연합뉴스
‘을은 누구인가?’

우리가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주자들, 성적 소수자들, 여성들, 청소년들, 소규모 자영업자들, 교수의 각종 뒤치다꺼리를 감당해야 하는 대학원생들, 빈곤 노인들, 또는 모든 것이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에서 늘 손해와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지방 도시 및 농어촌에 사는 사람들 등이 을인가?

만약 이들이 을이라면, 이들은 ‘을을 위한 민주주의’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의 주체라고는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각자 이해관계의 주체로서 압력 집단이 되어 각종 정책과 입법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이들을 을에 의한 민주주의의 행위자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역시 이들을 민주주의의 주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관계의 주체로서의 을들은 항상 자신보다 더 강한 다른 갑들의 이해관계에 밀릴 수밖에 없고, 따라서 약소자로 남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표현할 만한 길을 처음부터 차단당한, 이해관계의 주체로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수많은 을들, 그리하여 을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도 제대로 재현되거나 대표되지도 못하는 이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들이 이처럼 을로, 병으로, 정으로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민주주의, 모든 국민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의 을을 배제한 ‘배제의 민주주의’로 남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이해관계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을들이 민주주의의 주체로 인정받고 구성되는 길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을들을 주체로 하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더 깊이 탐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작업이 필요합니다. 먼저 누가 을인가의 범위를 정하고 을의 정체성을 밝히는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의 문제, 고전적 정의론의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는 분배의 문제와 현대 철학자들의 정의론에서 강조되는 인정(recognition) 등의 관점에서 다시 분석해봐야 합니다. 이 문제는 다음호에 계속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박스기사]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필자는 지난해부터 이 밑도 끝도 없는 화두를 잡고, 매달 한 차례씩 토론을 벌이는 공부모임에 참가했다. 불교·기독교 전문가와 법철학자·동양철학자·서양철학자·환경학자·문학평론가·언론인·의학자·변호사·사회단체 관계자 등 12인이 모였다. 이 모임을 ‘우리사회정의(우사정)’로 명명했다. 우사정은 도법 스님이 한 모임에서 던진 질문에서 시작됐다. “요즘 모두 정의, 정의하는데 도대체 정의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 있었던 강영진 대표는 늘 정의를 외쳤으나 실제로 정의를 정의(定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사회에서 정의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 전문가들을 찾아 나섰다.

필자가 일면식도 없던 강 대표의 전화를 받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에게서 정의에 대해 공부하자는 제안을 받고 깜짝 놀랐다. 실은 그 무렵 내 침대 머리맡 노트엔 온통 정의에 대한 메모가 가득했었다. ‘요즘처럼 주구장창 정의를 외치는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포악한가?’라는 것이 가장 큰 물음이었다. 이런 의문을 가졌던 사람들이 모여 모임이 시작됐다. 지난해 2월의 첫 상견례에서 정의를 토론하는 방식을 정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정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발제하고, 우사정 전체가 그 문제를 토론해 정의의 실체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윤리학적 정의론에 얽힌 정의가 아닌 동시대적인 ‘통속적 정의’의 실체를 찾아보기로 했다. 정의의 데카메론은 그렇게 시작됐다.

‘우리사회정의’ 멤버 : 도법 스님(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이남곡(인문운동가), 이정배(신학자, 전 감신대 교수), 강영진(한국갈등해결센터 공동대표), 김도균(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법철학 정의론), 양선희(중앙콘텐트랩 대기자, 소설가), 윤순진(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윤영호(서울대 의대 교수), 조성택(고려대 철학과 교수, 불교철학), 조용환(변호사, 법무법인 지평), 진태원(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서양철학), 함돈균(문학평론가)

※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일보 온라인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사회적·경제적 소외와 불평등 문제를 직설화법으로 다루는 칼럼으로 유명하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이며, 해박한 중국 역사와 고전 지식을 바탕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미디어)][적우(敵友):한비자와 진시황(나남)]등 중국 역사소설을 썼다. 서울대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201903호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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