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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유 전문기자의 대학총장 열전] 긍정과 겸손의 리더십 오연천 울산대 총장 

“장애물은 자신을 훈련시키는 도구, 자신과의 싸움에서 열정 놓아선 안 돼” 

■ 총장은 스타플레이어가 아닌 스타 나오게 격려하는 자리
■ 지역대학, 종합대학화 말고 특성·다양화로 난관 극복해야
■ 울산대, ‘샌드위치 교육시스템’으로 대학·현장 동반성장 중


▎오연천 울산대학교 총장은 청년들에게 “결코 열정을 놓아서는 안 된다. 실패와 좌절, 번민을 겪더라도 도전해야 한다”고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안테나를 길게 뽑은 검은색 관용차의 번호판. 경북 1가 1111, 전남 1가 1111…. 특이하다고만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권세가 느껴졌다. 1970~80년대 국립대 총장들이 타고 다니던 차량이었다. 총장들은 권세를 하사한 정권에 입맞추기 바빴다. 사립대 총장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학교 발전 고민보다는 재단의 눈치만 봤다. 그러면서 구성원들에게는 권위를 앞세웠다. 민주적·수평적 소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제 권위의 상징이던 총장의 이미지는 옛 이야기가 됐다. 총장이 학생·교수·직원들과 함께 호흡하지 않으면 설 곳이 없는 게 요즘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대 총장(68)을 지낸 뒤 2015년부터 사립대인 울산대의 리더가 된 오연천 총장의 긍정과 겸손의 리더십은 주목할 만하다.

오 총장과는 오랜 연이 있지만, 공식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서울대 총장 시절 “대학 안에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구성원이 많은데 총장이 스타처럼 나서는 게 옳지 않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했던 그였다. 하지만 스스로를 낮추고 지방대 총장으로 열정을 태우고 있는 오 총장의 교육철학과 인생관을 꼭 듣고 싶다고 청한 끝에 인터뷰가 이뤄졌다.

울산광역시 남구 대학로에 있는 울산대 정문에 들어서니 본관 오른쪽에 전광판이 있었다. 세계 대학평가 순위가 자막으로 흘렀다. 미국 US월드뉴스&리포터 12위, 영국 더(THE) 11위…. 세계 대학평가기관이 매긴 한국 대학 랭킹이다. 울산대의 발전을 한눈에 보여주는 숫자다. 본관 로비에 들어서니 오 총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 총장들을 많이 인터뷰했지만 직접 마중 나온 이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오 총장은 마음이 살갑고 따뜻했다. “지방살이가 5년째로 접어드는데 어떠시냐”고 묻자 “미력이나마 기여할 일도, 할 일도 많다”며 3층 총장실로 안내했다.

“상대방을 존중하며 격려하는 게 인간관계의 본질”

서울대 총장(2010년 7월~2014년 7월)을 역임하고 지방대 총장이 되셨습니다. 전례가 있었나요?

“딱 한 분 있었어요. 선우중호 총장입니다. 서울대 21대 총장(1996년 2월~1998년 8월)으로 일한 뒤 명지대 총장을 거쳐 광주과학기술원 총장(2008년 6월~2012년 6월)을 지내셨어요. 제가 처음은 아닙니다.”

그분하고는 성격이 다릅니다. 서울대 법인화를 이끈 장본인이신데 왜 울산대 총장이 되셨습니까?

“서울대 총장처럼 특정 공직을 지내면 ‘최소한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는 허상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서울대 총장은 공직이기 때문에 4년간 공직이라는 ‘모자’를 썼던 것이지요. 모자는 바람이 불면 날아가고 집에 도착하면 벗어야 합니다. 임시직이고 비정규직이지요. 서울대 총장을 하면서 배우고 경험한 것을 공적가치를 위해 잘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새 가치 창출에 이바지할 수 있는 역할이 부여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긍정의 자세로 이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서울대 총장과 지방대 총장은 다르지 않습니까?

“저는 지방대를 지방대라 부르지 않고 지역 대학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지방대가 지역에서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가치 평가가 다른 겁니다. 서울대 총장은 가만히 있어도 주목받지만, 지역대 총장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지역 대학의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총장의 역할이 뭐라고 봅니까?

“스스로 스타플레이어가 되려 하지 말고 교수와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줘 그들이 스타플레이어가 되도록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수들의 미래가치를 높이고 제약점을 풀어주고 자유롭게 연구하도록 지원해야 스타 교수가 나옵니다. 스타플레이어는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지 않아요. 대학의 가치는 단기 성과가 아닌 중장기적 가치 창조에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교육관이 궁금합니다.

“인간을 존중하며 끊임없이 격려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격려하는 것이 모든 인간관계의 본질입니다. 상대방이 하는 일을 이해하는 것, 그 일이 잘되기를 성원하는 것, 어려움을 겪을 때 내 역량의 범위에서 나누거나 위로하는 것이 격려입니다. 그게 리더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오 총장은 사표로 삼을 만한 총장을 예로 들었다. 미국 하버드대의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James Bryant Conant) 총장이다. 코넌트는 1959년 총장 취임 후 하버드대 입학생을 분석했더니, 95%가 하버드대 졸업생 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세습화된 기성 엘리트를 새로운 엘리트로 대체하고자 입시제도를 개혁했다. 그러자 1960년대부터 가능성 있는 다양한 인재가 입학했다. 오 총장은 “하버드가 새로운 능력 있는 인재를 배출하면서 오늘날 미국의 힘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총장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1970년 공업입국 표방한 정주영이 울산대 설립

오 총장에게 본격적으로 울산대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2015년 3월 울산대 총장에 부임한 그는 연임이 결정돼 3월부터 새로운 4년의 임기를 시작한다. 고민도, 구상도 많은 게 당연했다.

울산대는 어떤 대학입니까?

“본관 1층 로비에서 보셨듯이 고(考)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공업입국 실현을 위한 기술인력 양성을 내걸고 1970년 설립했습니다. 공과대학으로 출발해 85년 종합대로 승격했어요. 90년에는 의과대를 신설했고 97년에는 울산대병원을 개원했습니다. 현재 9개 단과대, 6개 대학원에 1만6000명이 재학 중입니다. 신입생 3000여 명 중 50%가 울산, 40%는 영남, 10%는 타지역 학생입니다. 지역 특수성이 강하죠.”

울산대 본관 로비에는 ‘정주영 아산 회장’의 흉상과 친필 휘호가 있다. “담담한 마음을 가집시다. 담담한 마음은 당신을 굳세고 바르고 총명하게 만들 것입니다. 아산 정주영”이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오 총장은 서울대 1학년 때 정주영 회장을 만난 적이 있다. 학생회장을 맡았는데 교양과정부 강당에 피아노가 없자 직접 50만원을 모금해 피아노를 비치하던 과정에서였다.

“당시 정몽준(경제학부) 학우에게 부친(정주영 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죠. 그래서 정주영 회장을 만나 피아노가 필요하니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50만원 중 반을 다른 곳에서 마련해 오면 반을 주겠다고 하시더군요. 정성혜(식물학과) 학우에게 부탁해 부친인 정일권 총리를 뵙자고 청해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25만원을 보내주셨어요.”

오연천은 즉시 정주영 회장을 찾아가 25만원을 보여줬다. 그랬더니 “너 참 기특하구나. 쉽게 구해 올 줄 몰랐는데…”라고 하면서 25만원을 줬다는 것이다.

울산대는 ‘샌드위치 교육시스템’이라고 알려진 영국형 산학협동 교육으로 유명합니다.

“모태는 영국 차관이었습니다. 1960년대 당시 영국은 조선 산업이 활황이었는데 영국에서 실험 장비도 지원했다고 합니다. 당시 대학을 설립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격려도 큰 몫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졸업식 때 ‘영국 대사상’이 주어졌던 것은 영국 대학과의 협력으로 울산대가 출범했다는 배경을 말해줍니다. 초기에 뉴캐슬대 출신이 많아 교류가 활발했고 그 영향으로 샌드위치 교육시스템을 국내에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샌드위치 교육시스템이란 현장 융합형 실천 교육을 말한다. 이론과 실습, 실습과 이론을 반복하는 교육이다. 울산에는 중공업·석유화학·자동차 등 3대 산업이 있다. 그런 장점을 살려 현장에 즉각 투입 가능한 인재를 양성해 현장과 대학의 갭을 줄이는 시스템이다. 대학 따로, 현장 따로가 아닌 같이 가는 열린 교육이다.

국내 대학 중 산학협력교육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기 현장실습 제도가 잘 운용되고 있습니다. 현장 융합형 실천 교육이죠. 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 등 글로벌 기업에서 학생들이 인턴십을 통해 실무 능력을 키웁니다. 산업현장 노하우를 가진 기업체 임직원을 산학협력 교수로 임용해 산업 현장을 대학의 교육·연구에 투입하고 있어요. 다른 지역의 대학들은 우리 대학 같은 교육을 하고 싶어도 주변에 기업이 많지 않아 어렵죠. 우린 938개 기업과 ‘가족’ 관계를 맺고 있어요.”

가족관계 기업 938개, 국내 산학협력교육 최고 모델


▎오연천 울산대 총장이 1월 29일 교내 본관 로비에 마련된 정주영 울산대 설립자 흉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938개 지역 기업체와 가족관계를 맺고 있다는 게 흥미롭네요.

“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SK에너지·에쓰오일(S-Oil) 등 유력 기업이 망라돼 있습니다. 특히 전국 대학 중 처음으로 현대중공업과 함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고급 인력 양성프로그램(Digital Transformation)을 도입했습니다. 빅데이터와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컴퓨팅,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을 집중적으로 교육합니다. 거기서 키운 인력은 조선 분야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석유화학 등 전 산업에 배치됩니다.”

울산대의 산학협력교육 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교육부의 사회맞춤형 산학협력 선도대학(LINC+) 육성사업, 대학 특성화(CK, University for Creative Korea)사업, 창업선도 대학사업과 대학중점연구소 지원사업, 기초연구실 지원사업, 대학일자리센터사업, 조선해양산업 퇴직인력 활용 전문인력 양성사업, 산학연협력 기술개발사업 등을 진행 중이다. 주로 이공계 중심으로 운영된다. 특히 서울 아산병원은 울산대의 협력병원으로서 바이오 분야 융합연구의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제2 캠퍼스도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17년에 울산시 남구 두왕동 울산 산학융합지구에 완공했어요. 울산대 도약의 상징입니다. 기업체와 국가기관 연구소와 교육·연구·취업을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낼 겁니다. 울산테크노파크와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등이 입주했어요. 우리 대학에서는 첨단소재공학부와 화학과가 옮겨 갔습니다. 첨단 강의실과 연구 장비를 갖춘 실습실에서 이론과 실습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울산대의 강점은 뭔가요?

“기술 이전 성과가 뛰어납니다. 전국 20위권으로 지역적으로 보면 월등한 성과입니다. 조선대·영남대 다음인데 포스텍(포항공대)도 그리 높지 않아요. 의과대의 경우 우리 대학 출신의 평판이 환자들에게 좋아요. 의대 졸업생 중 개업의가 많지 않고 봉직 의사 비율이 높은 것도 특징입니다. 우리 대학 의대가 공공의료 분야의 인재양성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울산대가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자율적이고 책임 있는 인간이 되도록 가르쳐 가치 창조에 일조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대학 1, 2학년 때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목표에 대해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존재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기반교육을 강화하는 이유입니다. 거점 지역대학인 울산대는 산업인력 양성과 가치실천형 인재 양성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대학이 이공계 중심입니다. 인문사회 분야는 어떤가요?

“대학의 존재가치와 목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보편성과 특수성이죠. 제가 몸담았던 서울대는 ‘학문 선도’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며 후속세대 양성에 기여하는 국가적 역할을 합니다. 울산대의 존재가치는 보편성의 토대 위에서 특수성을 접목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지역의 산업 특수성에 포커스를 맞춰 인재 양성에 기여하는 지역적 가치와 산업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궁극적으론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울산대의 인문사회·기초분야는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기반이 될 수 있는 본원적 역량을 강화해주는 역할을 맡습니다. 인문사회분야와 이공계를 연계하는 발전 로드맵을 만들어 정착시키고 있습니다.”

입시·등록금 획일화 4차 산업혁명 시대 역작용


▎2018 아시아대학총장회의에 초청받은 오연천 울산대 총장(연단 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한국의 대학-산업 간 파트너십 성공사례를 세계 대학 총장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오 총장은 대학 행정에 정통하다. 미국 뉴욕대에서 재정관리로 석·박사 학위를 했고, 재정 독립성과 운영 자율권이 핵심인 서울대 법인화를 이끌면서 서울대 내부 구성원은 물론 정부와도 긴밀히 소통했다. 특히 2011년 서울대 학생들이 법인화에 반대하며 학교본부를 점거하자 직접 현장을 찾아가 대화하고 공개토론을 통해 사태를 해결한 소통의 리더십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작금의 고등교육 문제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특히 10년째 이어지는 등록금 동결과 8월부터 시행되는 강사법, 그리고 입학금 폐지로 사립대들이 아우성인 상황이어서 오 총장의 입장이 궁금했다.

문재인 정부의 교육정책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입시·등록금·장학금을 표준화하고 획일화하는 것은 다양성 시대에 부작용이 많아요. 대학의 주체적 자율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지 못하면 안 되듯, 자율성 부여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정책을 수정해야 합니다. 대학의 자율을 규제하면 오히려 역작용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교육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있도록 교육부 장관을 자주 교체하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대학도 자기성찰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는 노력이 필요해요.”

등록금 문제가 핫 이슈입니다.

“정부가 등록금에 관여하는 것은 최소한에 머물러야 합니다. 대학에 대한 불신, 자세하게는 사립대에 대한 불신, 더 자세하게는 일부 사립대에 대한 불신에 기인한 것입니다. 일부 사립대의 어려운 단면을 일반화하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선량한 대학의 입장에서 문제를 풀고, 이러한 과정에서 정부는 교부금 형식으로 일반 재원을 지원해줘야 합니다.”

교부금 제도란 어떤 제도인가요?

“특정 사업에만 쓸 수 있는 목적성 지원금이 아닌 대학의 기본운영을 위해 대학이 자체적으로 쓸 수 있는 제너럴 펀드(general fund) 입니다. 사립대도 공적가치를 실현하고 있으므로 그 범위 내에서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최근 20여 년간 많은 기능형 대학을 종합대학화했던 게 문제입니다. 다양화·특성화로 가야 하는 데 ‘유니버설’로 가는 게 문제인 거죠. 지역 정치의 영향과 개별 대학의 확장 지향성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지역 발전과 상생하는 전공, 특화된 커리큘럼이 필요해요. 교수의 책임과 역할도 중요합니다. 4차 산업혁명의 니즈에 맞게 전공영역을 융합하고, 새로운 수요를 수용할 수 있는 학과와 전공을 개발해야 합니다. 융합·포괄형 교수가 많아야 대학이 삽니다.”

중학교 입학 재수, 서울대 교수 임용도 두 번 고배


▎1970년, 서울대 교양과정부 학생회장 시절. / 사진:울산대
서울대 교수와 총장, 그리고 울산대 총장으로서 성공 인생을 사는 그는 과연 실패를 경험하지는 않았을까? 그 역시 여러 번 실패를 경험했다고 했다. 중학교 입시에 떨어져 재수하고, 서울대 4학년 때 행정고시 1차 시험에 낙방했고, 졸업 때 학점이 모자라 한 학기를 더 다녔다. 서울대 교수직도 세 번 도전 끝에 임용됐다. “실패해보지 않은 인생은 성공하기 어렵다. 실패를 두려워 말라”는 게 그의 주문이다.

청년들이 취업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청년들의 미래는 무한합니다. 미래를 개척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은 청년의 특권이죠. 청년들이 품고 있는 잠재력은 대한민국의 가장 소중한 동력이기도 합니다. 요즘 청년들은 좌절을 많이 합니다. N포 세대란 자조도 나옵니다. 그러나 결코 열정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실패와 좌절, 번민을 겪더라도 도전해야 합니다. 난관을 극복하면 분명히 가치 있는 결실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이 만만치 않습니다.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이 가보지 않은 세계를 개척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미래를 개척하는 정신으로 협소한 국내 시장을 넘어 글로벌 무대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청년들의 창의적 노력을 유연성·개방성·다양성으로 무장한 융합적 사고와 결합해야 합니다. 꿈은 청년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고 청년들의 것입니다.”

교육이 뒷받침해야 하지 않을까요?

“공동체와 공존의 가치를 창출해야 합니다. 보편적 가치의 공유, 즉 공존(共存)·공화(共和)·공유(共有)에 가치를 두는 게 중요합니다. 고등교육의 나아갈 방향이기도 합니다.”

오 총장은 클래식 음악 애호가다. 초등학교 때부터 클래식을 좋아한 이후 평생을 클래식 음악과 같이한다. 인터뷰 중 책상 위 노트북을 켜더니 모차르트의 바슨 협주곡을 틀었다. 기자가 음악을 들으며 인터뷰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클래식 음악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뭔가요?

“신문 읽기입니다. 하루에 6개를 읽습니다. 신문 안에는 세상과 세상에 대한 시각이 들어 있어요. 그리고 고전과 문화 탐방, 야생동물 관찰을 좋아합니다. (웃으며) 정치학과에 진학하지 않았으면 생물학자가 됐을지도 모르겠어요.”

오 총장의 신문 사랑은 남다르다. 초등학생 때부터 신문을 읽었고, 경기고 재학시절에는 영자지 편집장, 서울대 학생 시절에는 대학신문 기자를 했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뉴욕한국]의 기자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고 했다.

총장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충남 공주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3남4녀였는데 첫째 누이, 둘째 형님, 셋째 누이, 넷째 형님, 다섯째와 여섯째는 누이입니다. 큰 형님은 서울대 약대를 수석 합격했고 기업체 부사장을 지내셨습니다. 둘째 형님은 신경내과 의사인데 미국 뉴저지에 삽니다. 누이 네 분은 모두 초·중등교사였어요.”

저서를 보면 어머님에 대한 얘기는 많은데 아버님 얘기는 적네요.

“아버님은 교육공무원이셨습니다. 중학교 서무과장으로 일하다가 5·16의 여파로 실직하셨죠. 그래서 어머니가 하숙하며 생계를 책임지셨어요. 제가 학교에 들어갈 시점에 큰형님과 누님들이 경제활동을 하고 계셨고, 어머니께서 하숙을 치셨어요.”

오 총장은 어머니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어려운 여건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긍정의 모습이란다. “우리 집안의 경제적 기둥은 하숙생이다. 그들 덕에 우리 집안의 삶이 유지된다”라는 말씀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하숙생 중에 기억나는 분이 있나요?

“서울대 총장이 된 후 서울대 약대의 강삼식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우리 집 하숙생 중 한 명이었습니다. 강 교수가 하숙생이던 시절, 어머님께서 누님과 맺어주고 싶어 하실 정도로 칭찬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국비 변상하면서 택한 학자의 길


▎1월 29일 교내 본관 앞에서 만난 오연천 울산대 총장.
경기고 2학년 때 교풍확립대회를 주도했고, 천재라고 불리던 임지순 교수와 동기셨죠?

“그랬죠. 제가 사회적 불합리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사실 자서전에도 쓰지 않은 중요한 일이 하나 있어요. 고3 때 전국 고교 중 유일하게 경기고에서 3선 개헌 반대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주동했고, 당시 동양의 석학(Einstein)이라는 별명을 달았던 수재 임지순(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를 지냈고 현재는 포스텍 석학 교수)이 대표(figure head) 역할을 맡았습니다. 당시 경기고 이성조 교장 선생님이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였습니다. 5월쯤 2~3학년 학생들을 동원해 교실 문을 잠그고 농성에 들어갔으나 선생님들에게 진압됐습니다. 일주일가량 휴교했는데 그 여파로 당시 교장·교감 선생님이 모두 해직됐습니다. 언론 통제 때문에 보도는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징계도 받지 않았습니다.”

고3 때 그런 일을 겪었는데 어떻게 서울대에 붙었나요?

“당시 3선 개헌 반대 운동 주도로 대입 준비에 소홀한 탓에 고려대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입시제도가 바뀌었어요. 시험 과목이 전 과목으로 바뀐 거죠. 평소에 신문을 많이 읽고 상식에 밝았던 저는 그 덕분에 시험을 잘 치러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꿈이 무엇이었습니까?

“중학생 때부터 고교생 때까지 나세리즘(Nasserism)등 사회주의·민족주의 운동에 심취했어요. 그래서 대학에선 변혁가의 꿈을 좇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이 이상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3학년 때까지 강의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방황했죠.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맥락으로 가야 한다고 결심했어요. 사회변혁보다는 나 자신을 생각하기로 했고, 일단 공무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차선의 선택이었죠.”

오 총장은 서울대 대학원생 시절인 1975년 제17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에 합격해 총무처에서 근무했다. 공무원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으로 2년간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고선 사표를 냈다. 다시 뉴욕대 학생이 된 것이다. 당시 공무원 신분으로 지원받은 유학비용 1500만원 전액도 변상해야 했다.

행정고시에 패스한 전도유망한 청년이 일을 냈네요.

“공무원보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가, 소년시절 동경했던 서구 문명에 대한 동경을 실현하며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었어요. 부모님이 집을 팔아 변상비용을 대주셨어요. 무모한 결단이었지만 결과적으론 학자의 길을 가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유학 생활은 어땠습니까?

“김종량 한양대 이사장도 1년 정도 같이 공부했어요. 대학 강의 조교를 하면서 부족한 생활비를 벌려고 2년간 노점상을 했어요. 주말마다 경마장 벼룩시장에서 가방을 팔았는데 땡볕에 살갗이 다 타들어 갔어요.”

총장 승용차 직접 운전…자신을 낮추는 리더십


▎오연천 울산대 총장이 1월 29일 퇴근을 위해 승용차에 올랐다. 오 총장은 “재정상황이 어려운데 전담 운전기사를 둘 이유가 없다”며 출·퇴근시 직접 운전한다.
1980년대 초 미국 유학 시절, 그는 뉴저지주로 가는 링컨터널 진입로에서 교통사고를 냈다. 자신이 몰던 500달러짜리 구닥다리 차량이 벤츠 스포츠카 조수석을 들이받은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연천은 “정말 죄송하다. 저의 책임이다. 보험으로 처리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벤츠 운전자가 “다친 데 없느냐(Are you OK?)”라며 오히려 걱정하며 그냥 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 사건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갖는 평생의 교훈이 되었다고 한다.

뉴욕대에서 학위를 마치고 1983년 서울대 교수가 됐는데 그 후론 좌절이 없었던 것 같네요.

“그런 편입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나 자신을 낮추려고(discount) 노력했고,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나’의 문제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너무 겸손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허명·권세·돈 이런 것은 우주 전체로 보면 헛된 것일 수 있습니다. 경비 아저씨와 청소 아주머니와 눈을 마주치면서 ‘우리는 동등한 인간입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마음을 가집니다. 상급자로서 관대함을 보여주려는 게 아닙니다. 기관의 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고 그것이 행복입니다.”

인간 오연천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때로는 자신의 역량보다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액션이 필요한데 그 부분이 취약합니다. 가능성을 토대로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 전달을 못 합니다. 상대방에게 과도한 기대를 품게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천이 수반되지 않는 언약은 절제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죠. 반면 남과의 싸움이 아닌 나에게, 나를 증명하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에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오 총장은 항상 긍정적으로 사고한다. “장애물을 장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더 훈련시키는 도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평소 긍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누군가로부터 모욕을 당했을 때 긍정적 마인드로 생각하면 자기성찰의 기회가 됩니다. 자기성찰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상대가 파헤쳐준 약점을 보완할 수 있기에 오히려 고마운 일이 됩니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규칙적이고 절제된 생활을 유지합니다. 서울에선 못 걸었는데 여기선 하루 6㎞ 이상은 꼭 걸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귀경길에 오를 시간, 오 총장이 울산공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운전기사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직접 운전한단다. 4년 전 울산대 총장으로 부임했을 때부터 줄곧 그랬다니 놀라웠다. “학교에서 사택까지 20㎞ 정도 되는 데 문제없어요. 대학의 재정상황이 어려운데 전담 운전기사를 둘 이유가 없죠.” 오 총장은 직접 승용차를 운전해 공항까지 바래다줬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겸손의 삶은 허상이 아닌 일상이었다.

※ 양영유 교육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고려대 영어교육학과를 나와 한국외국어대에서 교육저널리즘으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30년 가까이 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교육데스크, 정책사회데스크, 사회1데스크, 행정국장, 사회에디터를 거쳐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마음은 따뜻하고 시선은 엄정해야 한다는 저널리즘 소신을 갖고 있다. 공저[한국의 파워엘리트]와 역서[멀티미디어 조직혁명]이 있다.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201903호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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