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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인터뷰] JTBC 드라마 'SKY캐슬' ‘상종가’ 배우 염정아·김서형 

“감수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네네, 감수할게요 쓰앵님” 

글 유주현 컬처&라이프스타일랩 기자 yjjoo@joongang.co.kr / 사진 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아갈머리’는 인간적인 면을 드러낼 중요한 대사”(염정아)
“'기황후' 배역 떠올리며 위엄 있게 누르며 연기”(김서형)


▎JTBC 드라마 [SKY캐슬]에서 염정아(왼쪽)와 김서형의 ‘카리스마 대결’은 극의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 사진:아티스트컴퍼니
지난 몇 달간 대한민국을 들끓게 했던 JTBC 드라마 [SKY캐슬]이 최종회 시청률 23.8%로 막을 내렸다. 비지상파 드라마 역사를 다시 쓴 기록적 수치다. 자녀를 둔 가정이라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왜곡된 입시경쟁’이라는 뜨거운 소재를 이제껏 본 적 없는 휘몰아치는 전개와 거듭된 반전의 ‘미스터리 스릴러’ 스타일로 풀어내 전 세대를 열광시켰다.

그 중심에 두 여자의 팽팽한 연기 대결이 있었다. 입시경쟁에 올인하는 ‘강남 돼지엄마’ 한서진 역의 염정아(47)와 미스터리에 싸인 ‘입시코디’ 김주영 역의 김서형(46).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드라마가 끝난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염정아는 여자 광고모델 브랜드 평판 1위에 올랐고, 김서형이 출연한 JTBC 예능 [아는 형님] 2월 9일 방송분은 해당 프로그램의 사상 최고 시청률(9.6%)을 갈아치웠다. 중년에 전성기를 맞은 두 배우의 오늘을 있게 한 건 무엇일까.

‘강남 돼지엄마’ 민낯 그린 배우 염정아 | “모임 나가면 ‘염정아 맞아?’ 생소해해요”


▎염정아는 딸에게 수십억원짜리 입시 코디를 서슴없이 붙이고,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 앞에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캐릭터 ‘한서진’ 역을 맡았다.
[SKY캐슬]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 ‘한서진’의 우아한 미소를 띠고 등장한 염정아는 시종 차분했다. 배우 인생 28년 만에 이런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는 처음이라면서도 “사실은 남의 일 같다”며 담담한 표정이다. “축하받는데 와 닿지는 않죠. 어제나 그제나 저는 똑같은 염정아인데 갑자기 더 좋아해주시니 좀 어색한 것 같아요.”

그가 맡았던 역할 ‘한서진’은 돼지 부속고기 음식점의 딸 ‘곽미향’이라는 과거를 철저히 숨기고 대학교수 가정이 모여 사는 ‘캐슬’의 우아한 맏언니로 군림하며 완벽한 아내와 엄마, 며느리를 연기하는 여자다. ‘3대째 의사 가문’의 위업을 달성하고자 딸에게 수십억원짜리 입시 코디를 서슴없이 붙이는 통 큰 여자이자, 자신을 방해하는 세력 앞에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무서운 캐릭터이기도 하다.

염정아는 영화 [장화홍련](2003)과 [범죄의 재구성](2004), 드라마 [로열패밀리](2011)에서 내공을 쌓아온 ‘쎈언니’ 캐릭터를 한서진으로 극대화해 보여줬다. ‘핏줄까지 연기한다’는 메소드(method, 극사실주의) 연기로 시청자들의 큰 공감을 샀다.

“악역이지만 합리화하려고 애썼어요. 안쓰럽단 생각도 많이 했죠. 한서진을 제가 먼저 이해해야 시청자에게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최대한 인간적인 면을 끌어내고 싶었어요. 평상시에 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정말 나를 건드리는 것들은 확하고 물어버릴 수 있는 여자라는 걸 거침없이 보여줘야 한다 생각했죠. 한서진 이면의 ‘곽미향스러움’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하지만 무엇보다 한서진 최고의 무기는 모성이었죠. 비뚤어진 모성이긴 하지만, 저 모성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공감할 테니까요.”

이 정도 몰입도의 드라마라면 배우도 잘 빠져나오지 못할 듯합니다.

“저는 원래 잘 빠져나오는 편이에요. 보통 돌아서면 잊어버리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캐릭터가 제 삶에 뭘 더하는 것도 빼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별개인 것 같아요. 예전엔 역할에 잘 들어가질 못해서 슬픈 장면에선 실제 제가 슬펐던 일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이제 경험이 많아지면서 연기에 노하우가 좀 생긴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항상 겁나긴 해요. 중요한 신(scene) 앞두고는 고민도 많이 하고 예민해지죠. 다만 담담한 척하는 거예요.”

한서진이란 가면 뒤에 곽미향이 있었는데, 배우라는 가면 뒤에 인간 염정아가 있겠죠.

“저는 일터를 떠나면 평범한 주부예요. 한서진보다는 영화 [완벽한 타인]의 ‘수현’과 더 가깝죠. 설정상 한서진은 심지어 요리까지 잘해요. 너무나 완벽하게 모든 걸 다 해내는 여자인데, 저는 그러지 못하거든요. 좀 어리숙한 면도 있고. 그런데 낯을 가리는 성격이다 보니 다소 차가워 보인다는 얘기도 들어요. 알면서도 잘 안 고쳐지죠. 그래도 동네 엄마들 모임은 꼭 가서 최대한 편하게 행동하려 해요. 그 사람들은 ‘저 언니가 TV 나오는 게 너무 신기하다’고 할 정도죠. 모성의 힘일까요.”(웃음)

‘아갈머리’ 실감나게 뱉으려 연습 또 연습


▎염정아는 다음 행보와 관련해 “([SKY캐슬]을 계기로) 들어오는 작품 수가 많아져서 선택 폭이 넓어진 점이 너무 좋다”며 활짝 웃었다. / 사진:아티스트컴퍼니
[SKY캐슬]의 인기 요인 중 하나는 한서진과 김주영, 즉 염정아와 김서형 두 ‘쎈 언니’의 연기대결 한바탕이었다. 입시 지옥에 영혼을 팔 것인가를 놓고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처럼 끊임없이 기싸움 하며 맞붙는 두 여자의 대립이 막판까지 드라마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쎈 언니’ 카리스마로 사랑받았는데, 원래 카리스마 있는 성격인가요.

“그냥 털털한 성격이에요. 그런 연기를 계속하다 보니 쌓여서 나오는 거죠. 뭐든지 자연스러운 게 최고라 생각해서 다른 노력은 안 해요. 제가 불편하면 보는 사람은 더 불편해 보일 테니까요. 어차피 내 안에 가진 모습 중에 그런 면도 있을 테니 그걸 끌어내는 것이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얼굴에 메이플 시럽을 뿌릴 수 있는 모습이 어딘가 잠재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연기는 쾌감이 남다르겠어요.

“내 입으로 뱉을 수 없는 말을 캐릭터 통해 뱉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것도 소소한 재미 아닐까 싶어요. 사람 얼굴에 대고 ‘아갈머리를 찢어버린다’는 얘길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한서진의 입을 빌려서 하는 거지.(웃음) ‘아갈머리’는 혼자 연습도 많이 했어요. 보통 감정적인 대사들은 연습 때 감정을 써버리면 안 되니까 말만 입에 붙여놓고 감정 넣어서 연습을 잘 안 하거든요. ‘아갈머리’는 여러 가지로 해보며 제가 제일 편하게 할 수 있는 톤을 열심히 찾았어요. 인간적인 면을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대사니까요.”

한서진과 김주영 중에 누가 더 센 여자일까요.

“(오)나라씨나 (윤)세아씨가 ‘한서진이 더 세다’고 얘기하는데 처음엔 인정 못했어요. 항상 저는 김주영에게 반론을 제기하러 갔다가 거꾸로 현혹당해서 ‘네 쓰앵님’ 하고 나왔거든요.(웃음) 근데 엔딩을 보니 결국 김주영은 극복하지 못했고 한서진은 극복하고 행복을 찾았으니, 결과적으로 제가 더 센 것 같네요.”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나고픈 마음도 있을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한 가지 이미지에 대한 불만도 많았어요. 그런데 이제 와 보니 불만 가질 필요가 없더라고요. 그 모습이 좋으니까 좋아해 주시는 거겠죠. 사실 저는 운 좋게 다양한 역할을 해봤어요. [완벽한 타인]이라든가, 영화 [카트]도 결이 많이 달랐죠. 평범한 소시민 역할이었는데, 메이크업도 안 하고 살도 찌우고 얼굴에 기미를 그리기도 했지만, 다양한 이미지를 해보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염정아는 1991년 제 35회 미스코리아 선으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같은 해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지만 벼락스타로 뜨진 못했다. 그러나 그의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면 공백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20대에 대스타가 된 배우들이 가물에 콩 나듯 얼굴을 내미는 행보와는 대조적이다.

그간 출연한 작품을 세보니 50편이 넘어갑니다.

“두 아이를 연년생으로 낳으면서 2년 정도 쉬었어요. 저한텐 굉장히 길게 느껴졌죠. 아이 키우는 나름의 행복도 느꼈는데, 한편으론 제가 계속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내 일을 빨리 하고 싶고,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었죠.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역할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어디서든 제가 하고 싶은 역할,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할 수 있는 것이 우선이었죠.”

이전에도 ‘인생 작품’이 있었죠.

“영화 [장화홍련] 이전엔 특별할 것 없는 연예인이었어요. [장화홍련]을 계기로 배우로 인정받게 됐어요. 대중으로부터도 그랬고, 저 스스로도 그랬죠. 이 작품 전에는 제가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 했어요. 현장에서 김지운 감독님이 저를 관찰해서 끌어내준 부분들이 많았죠. 이후에도 훌륭한 감독님을 많이 만났어요. 덕분에 30대를 원 없이 보냈죠.”

‘예술적 동반자’란 감독의 말에 감동


▎염정아는 2003년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영화 [장화, 홍련]으로 연기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SKY캐슬]의 조현탁 감독도 많은 걸 끌어내 주셨나요.

“[장화홍련] 때와는 다르죠. 저도 나이가 한참 많고 경험도 많이 생겼잖아요. 감독님이 ‘예술적 동반자’란 말씀을 해주셔서 감동했는데, 정말 소통이 잘된 것 같아요. 그전에 드라마 [마녀보감]을 같이 하면서 신뢰를 쌓았거든요. 잘된 작품은 아니었지만, 현장에서 본 감독님 모습과 작품 만듦새에 신뢰가 가서, ‘조현탁 감독이 부르면 무조건 같이 해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연출을 이렇게까지 잘해주실 줄 몰랐어요. 오재호 촬영감독님도 빼놓을 수 없죠. 배우가 어떤 연기를 해도 감정을 100배, 200배 시청자에게 전달되도록 카메라로 표현해 주셨거든요.”

다음 행보가 부담스러울 수 있겠습니다.

“부담은 없어요. 다음 작품도 이전과 똑같은 기준으로 제가 하고 싶은 걸 선택하겠죠. 다만 들어오는 작품 수가 많아져서 선택 폭이 넓어진다는 게 너무 좋은 일 아닐까요.”

그러면서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마땅히 할 작품이 없어서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충무로 영화판이 남성영화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중년 여배우들이 설 자리가 좁아졌다는 얘기다.

“작년에 영화 [완벽한 타인]을 하기 전까지 일이 없었어요. 모든 여배우들이 똑같이 그런 이야기를 한 시기가 있었고 지금도 그렇죠. 지금 저희는 [SKY캐슬]을 운 좋게 했고 연달아 작품이 나와서 그런데, 여배우 역할 자체가 예전보다 많이 없어졌거든요. 우리 드라마만 보셔도 알겠지만 잘하는 배우들이 많은데, 작품이 없어서 쉬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워요. 중년 배우들이 할 역할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김서형과 작품으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요.

“예전에 같은 회사에 있을 때 젊은 감독들을 위해 재능기부하는 ‘초단편영화제’에 각자 다른 작품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자주 만나면서 친해졌죠. 이번에 서형이가 너무 잘해 줬어요. 한서진이 김주영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들을 시청자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전달을 잘한 것 같아요. 제가 겁났던 순간들에 시청자도 같이 겁났을 것 같고, 제가 김주영에 대해서 가슴 아팠던 부분들도 같이 가슴 아프지 않았을까요.”

김주영의 사무실 세트가 공포스러웠다고요.

“그 세트에서는 사담도 못 나누겠더군요. 둘이 눈만 마주치면 리허설부터 시작했어요. 현장에서 서형이 눈을 보면 빨려 들어 갈 것 같았죠. ‘예서는 멘탈이 약한 아이입니다. 어머니,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라고 하면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나 이제 끝난 거지, 최면 걸린 거지’ 그렇게 되더군요. 또 ‘감수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라고 하면 ‘네네, 감수할게요 쓰앵님’ 하고 분위기에 압도돼 버렸어요. 그 사무실 세트만 가면 분위기 자체가 묘한데, 저는 손님이지만 거기 매일 있었던 서형이는 힘들었을 거예요. 장소 자체가 음침한 기운이 도니까요. 서형이가 눈물도 많고 마음이 약하거든요. 쫑파티에서도 저는 노느라 못 봤지만 혼자 울었다는 소문이 있더군요.”(웃음)

김서형 눈빛에 ‘감수할게요 쓰앵님’ 절로


▎염정아는 김서형의 연기에 대해 “(김서형이) ‘어머니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라고 하면 최면 걸린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결말에 많은 시청자가 아쉬움을 표했는데요.

“‘한 가정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하는 게 작가님의 바람이라 들었어요. 저에게도 와 닿는 결말이었고요. 드라마 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죠. 초등학생인 우리 아이들도 지금까지는 남들 하는 만큼 다 시켰는데, 가끔 힘들어하거든요. 우리 어릴 땐 학교 끝나면 가방 집어던지고 놀았는데 요즘 아이들은 각자의 학원으로 가는 걸 보면서, 이 슬픈 교육현실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싶기도 해요. 이런 현실에 아이들이 상처받는다고 생각하면 엄청 심각한 문제잖아요.”

결국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한서진이 ‘자식이 실패하면 쪽박인생’이란 대사를 했었는데, 저는 공감 못했지만 한서진 같은 엄마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하니 짠하고 안타깝더군요. 저부터 좀 바뀌지 않을까 싶어요. 마음으로는 아이들 위주로 생각하는 노승혜 같은 엄마를 추구하면서도 ‘할 건 해야 한다’는 주의였거든요. 진진희처럼 갈팡질팡하는 면도 있었는데, 이제 방향 자체를 다잡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감당할 수 없는 입시코디’ 배우 김서형 | “김주영의 심연, 이 악물고 버텨냈죠”


▎김서형은 목표를 위해서 살인도 서슴지 않는 입시 코디 ‘김주영’ 역을 맡았다.
시종 한서진의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던 염정아와 달리, 사슴 같은 눈매의 반려견 ‘꼬맹이’를 안고 나타난 김서형은 다소 흥분한 상태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김주영 쓰앵님’의 가면은 온데간데없고, 자기 포장에 익숙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인간 김서형이 있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여배우들 설 자리가 좁지 않냐’는 질문을 하기에, 왜 배우를 남녀로 구분해야 되냐는 답을 하다가 요즘 많이들 쓰는 단어를 썼을 뿐이거든요. 이걸 좀 써 주실래요?”

‘SKY캐슬’ 이후 대중의 관심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겠죠.

“이상하달까? 어떻게 해야 되지 싶어요. 저희도 드라마가 이렇게 잘되리라곤 예상 못 했거든요. 출연 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기도 하고요.”

앞으로의 행보가 조심스럽겠어요.

“부담이 되죠. 저에 대해 좀 다른 기대치들이 생긴 것 같아서요. 지금까지도 열심히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더 생산해 내야 될까 싶어요. 저희도 방송 모니터하고 알게 됐지만, 연출과 영상, 세트까지 스태프들의 노력이 배우를 돋보이게 했거든요. ‘이렇게 잘 찍으면 현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더 잘해야 하는 거냐’고 농담 섞인 투정을 부리기도 했죠.”

김주영이라는 악마 캐릭터를 어떻게 합리화하고 소화했나요.

“합리화할 순 없었어요. 김주영은 결국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인까지 저지른 여자니까. 엄마에 대한 연민은 있었죠. 김주영 또한 한서진처럼 자기 욕심을 자식에게 투영했던 엄마고, 캐슬 엄마들보다 먼저 겪은 셈이잖아요.”

현대물과 안 맞는 표현, 사극 같은 어투로 소화


▎2013년 방영된 MBC 드라마 [기황후]에서 김서형은 ‘기승냥’(하지원 분)을 견제하는 ‘황태후’ 역할로 출연했다. 그는 “이때 경험이 김주영의 분위기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 사진:MBC
김서형은 2월 9일 JTBC 예능 프로그램 [아는 형님]에 출연해 한껏 망가지는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 어두운 기운에 싸여있던 ‘김주영 쓰앵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도대체 김서형은 어떤 사람일까.

“강하고 카리스마 있는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다시 돌아올 때는 많이 웃으려고 해요. 근데 사실 저는 정적인 사람이고 내성적인 부분이 많거든요. 의외로 여성스럽다는 말도 듣고 겁도 많아요. 여리기 때문에 다치지 않으려고 많이 웃어도 보고 강해 보이려고도 하죠. 3년여 전 영화 [봄]에서 맡았던 캐릭터가 ‘김서형스럽다’고 느꼈어요. 제가 이렇게 내성적이고 정적이면서도 자유롭고 외향적이고 강함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 캐릭터거든요.”

“감수하시겠습니까” “OO를 집으로 들이십시오” 등 독특한 대사톤이 인기를 끌었는데요.

“처음 대본 받았을 때 현대물과는 좀 안 맞는 표현들이 많았어요. 전에 드라마 [기황후]에서 황태후를 연기한 적이 있는데, 그 느낌이 오더군요. 당시 위엄 있게 누르면서 연기했던 기억을 살려서 준비했어요.”

이런 역할에 몰입하다 보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겠어요.

“저는 제 자신과 연기를 딱 분리하지 않는 스타일이거든요. 오히려 흡수하려고 노력하죠. 이번에 많이 울었어요. 이런 강한 역할들은 빠져나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당시에 견디고 버텨내는 게 문제거든요. 김주영은 한서진이 자식에게 투영하려고 하는 욕망을 이미 겪고 시작한 인물인데, 김주영의 베일에 싸인 과거를 상상하며 그려야 하는 게 내 몫이었으니까요. 김주영이란 여자를 알다가도 모를 것 같은 김서형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울고 싶고 모르겠고,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고 싶었죠.”

김주영과 전혀 다른 성격 같은데.

“배우가 자기 성격 갖고 모든 캐릭터를 할 순 없죠. 배우라는 직업은 그래서 팔색조가 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배우 김서형은 그동안 습득한 캐릭터로 성장해온 부분이 크죠. 사회생활 통해 알게 되는 것보다 캐릭터 통해 알게 되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캐릭터 통해 인생 공부를 한달까요. 드라마가 끝나도 그 사람에 대해 더 고민하면서 시간 보내기도 해요. 이 사람이 얘기하고자 했던 게 이런 것 아니었을까. 여운 두면서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것이 되기도 하죠. 그렇게 캐릭터가 가진 좋은 지점을 습득해 왔어요. 김주영도 악역인 걸 떠나 카리스마나 멋짐 같은 매력은 습득을 하고 공부가 됐죠. 김주영뿐 아니라 그 전의 모든 캐릭터를 공부했기에 김주영을 풍부하게 그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오디션이라도 맘껏 볼 수 있었으면”


▎김서형과 염정아는 [SKY캐슬]에 출연하기 전 의도치 않은 공백기를 겪어야 했다. 김서형은 “동료들에게 작품으로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 사진:아티스트컴퍼니
김서형도 1992년 미스코리아 출신이다. 1994년 KBS 공채 탤런트로 연기에 입문했다.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2008)에서 표독한 악역 ‘정애리’를 소화해 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2년 전엔 조연으로 출연했던 영화 [악녀]가 칸 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다. 그러나 칸에 진출한 이후 되레 활동을 쉬어야 했다.

“1년 넘게 쉬었어요. 쉬고 싶어서 쉰 게 아니라 마땅히 할 게 없다고 하니 쉬어야 했죠. 그래서 작년에 어떻게든 일을 하려고 네 작품이나 했어요. 그러다 오히려 [SKY캐슬]을 놓칠 뻔했죠. 심신이 지친 상황이었거든요.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다는데, 제가 카리스마 강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을까 덜컥 겁이 나더군요. 그래서 사실 [SKY캐슬] 출연을 두 차례 고사했어요.”

배우란 직업도 화려하지만은 않겠죠.

“쉴 때 가장 힘들어요. 배우가 1, 2년 쉬다 보면 우린 그냥 백수거든요. 저는 혼자 살면서 스스로를 부양해야 하는데, 1년을 쉬면 주변에서는 돈을 쌓아놓고 있냐고 하죠. 저도 돈을 아껴 쓰다가 없으면 못 나가고 그래요. 배우도 다른 직업인과 똑같아요.”

중년 여배우로서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은 아쉬움은 없나요.

“여자배우여서는 아닌 것 같아요.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제작자들이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오디션이라도 보고 싶은데 선입견을 갖고 안 만나 주니까요. 배우들은 맡은 역할을 열심히 임할 뿐인데, 그걸로 이미지가 굳혀졌다고 얘기하면 답답하거든요. 제가 캔디 역이 안 어울릴지 기회도 안 줘보고 어떻게 아나요.

‘아는 형님’에 나가니 예고편만 보고도 김주영과 너무 다르다는 댓글이 달리더군요. 꼭 예능 가서 뛰어야 내 여러 모습을 알아주나 싶어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알아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작품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그는 ‘여배우’란 직업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 열변을 토해냈다. “너무 흥분한 것 같다”며 숨고르기를 하더니, “어쨌든 꾸준히 일을 해왔기에 그 많은 것들이 쌓여서 김주영을 만났다”고 말했다.

“[SKY캐슬]은 모든 배우가 다 잘 보이는 드라마였는데, 김주영까지 잘 보였다는 건 대본·연출·영상·세트 4박자가 다 어우러진 결과라고 생각해요. 두 번 고사하고 안 했다면 이 시간이 없었겠죠. 드라마가 잘되려다 보니 모든 배우가 열심히 했고, 저도 숟가락 얹듯이 잘 된 것 같아요.”

특히 그는 염정아를 ‘캐슬의 버팀목’이라고 표현했다. 비교적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을 만났던 김주영과 달리, 캐슬의 모든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던 한서진의 빡빡한 스케줄을 힘든 내색 없이 잘 버텨 주었기에 모두가 힘을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착한 엔딩? 한서진도 결국 어머니이기에


▎[SKY캐슬]은 상류사회의 고상한 외면에 감춰진 ‘입시 지옥’을 그려내 호평 받았다. 지난해 12월 경기 수원시의 한 대학교에서 수험생들이 대입 논술고사를 치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염정아) 언니도 힘들었을 거예요, 김주영의 공간에서 만나면 리허설도 실제처럼 해야 했죠. 긴장감 있는 장면에서는 스태프까지 숨을 못 쉴 정도로 몰아붙이게 되거든요. ‘리허설만 해도 기를 빨린다’는 정도가 우리끼리의 사담이었죠. 대사 NG를 내도 멈추지 않고 흐름을 이어가야 했고, 카메라 감독님도 내내 핸드헬드로 감정을 쫓아와 주셨기에 그 숨 막히는 긴장감이 화면에 고스란히 담길 수 있었어요.

게다가 언니는 어른, 아역 할 것 없이 캐슬 사람들 전체와 부딪혀야 했거든요. 언니가 감기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힘든 내색 없이 잘 버텨주는 걸 보면서 ‘제가 뭐 한다고 힘들어하지’ 싶었죠. 언니한테 그런 얘기도 했어요. 언니 바라보고 있으면 힘들어도 기운 난다고. 언니가 대장처럼 버팀목이 돼줘서 고마워요.”

한서진도 악역이었지만 큰 사랑을 받은 이유가 있겠죠.

“일단 엄마니까요. 모든 엄마의 바라는 지점이 있었던 거겠죠. 난 아직 엄마는 아니지만, 내게도 ‘공부, 공부’ 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잖아요. 엄마가 자식을 위해 감수하는 부분들에 다들 공감하지 않았나 싶어요. 한서진과 김주영은 둘 다 자기 욕심을 자식에게 투영한 엄마였지만, 한서진이 결국 예서에게 검정고시를 보게 한 건 자식을 인정한 지점이거든요. 김주영은 살인까지 하면서 자식을 쟁취하려 했던 부분이 달랐던 거죠. 갑자기 회개하는 결말이 논란이었지만 결국 진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고, 그걸 정아 언니가 정말 잘 보여 줬다고 생각해요.”

공익광고 같은 해피엔딩 속 홀로 파국을 맞은 김주영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뭘까요.

“구치소에서 한서진에게 ‘당신도 나랑 똑같아’라고 말했어요. ‘곽미향’을 부정하기 위해 가족도 버렸던 한서진, 당신도 나랑 똑같다는 뜻이죠. 그 대사를 보면, 작가가 김주영을 통해 화두를 던진 것 같아요. 자식이 내 삶을 투영해 살아줘야 하는 게 아니라 자식은 자식대로 인정해 주는 게 맞다는 거죠. 한서진도 벌을 받아야 하지 않냐는 의견도 있지만, 한 가정이라도 살리고 싶다는 맥락에서 그런 결말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어요. 한서진은 결국 가족을 추스르길 바란 것 같아요. 대신 김주영이 벌 받으며 끝난 것이죠.”

201903호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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