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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터뷰] 황태연 교수가 말하는 ‘이문제무’(以文制武)의 비폭력 정치투쟁 

“땔나무꾼과 꼴꾼까지 만백성 일거에 분출했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
실패한 임병찬의 ‘투서’ 투쟁, 6년 후 3·1운동서 재현돼
소프트파워로 얻은 세계의 호응이 임정 수립에 동력 제공


▎황태연 동국대 교수는 “간디는 임병찬의 비폭력 총궐기 투쟁이 적용된 3·1운동으로부터 배워 인도에서 영국을 몰아내지 않았던가”라며 비폭력 정치투쟁을 높이 평가했다.
우리 민족사의 가장 찬란한 봉우리인 3·1운동이 올해 100주년을 맞는다. 거국적 3·1운동의 여파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3·1운동과 임정의 역사를 계승했음을 헌법에 명기해 놓았다. 3·1운동이 의미가 있고 또 성공적이었던 요인은 비폭력 정치투쟁이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100주년이 되도록 기이하게 보이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그 비폭력 정치투쟁이 가능했던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잘 해명이 안 되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곤 하는 점이다. 그런 가운데 무장투쟁이 최고이고 비폭력 정치투쟁은 좀 저급한 방식인 것처럼 은근히 폄하되기도 한다.

이런 잘못된 시각이 바탕에 깔려있다 보니 3·1운동이 중요하다고 말로는 떠들면서도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 3·1운동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1910년대에 전개된 독립운동의 역사조차 잘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3년 동안 한국근대사 관련 책 6권을 펴낸 황태연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동국대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는 그는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등을 잇따라 출간하며 한국근대사 연구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에서 3·1운동의 성공 요인인 비폭력 정치투쟁의 배경과 고종의 독살 과정 등을 상세하게 고증했다.

3·1운동이 거국적으로 일어나 성공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먼저 정신적 요인으로 고종의 죽음이다. 고종의 독살 소식이 전해지면서 만세운동이 거국적으로 확산됐다. 두 번째는 형태상의 요인으로 천도교(동학)의 전국 조직과 재정이 뒷받침됐다. 당시 전국 조직은 동학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대개 일제에 포섭된 조직이었다. 기독교는 아직 취약했다. 기독교 신도 수는 10만 명 정도였다. 동학은 적게 잡아도 200만 명(일제 추산)이고, 천도교 쪽 추산은 600만 명에 달한다. 그 중간의 300~400만 명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고종이 1907년 동학을 인정하고 합법화하면서 그 수가 더 늘었다.”

레닌 사회주의 혁명이 3·1운동에 끼친 영향 없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안창호, 둘째 줄 오른쪽 끝에 김구가 보인다.
윌슨 미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나?

“대중들에게는 거의 영향이 없었다고 본다. 일본 본토의 신문에서 일본인들이 자기들 걱정하는 얘기로 보도됐는데 이것을 본 일본 유학생들은 알았겠지만, 한반도에서는 거의 몰랐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제가 철저히 보도를 통제했다. 일제가 관할한 언론은 당시 영친왕 결혼 소식으로 도배를 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우리 민족 대표를 파견한다는 소식도 알려지지 않았나?

“그건 극비리에 진행됐으므로 대중은 전혀 몰랐다. 더욱이 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쟁의 책임과 영토 문제 등을 처리하는 회의였는데 일본은 당시 승전국에 포함돼 있었다. 당시 서울에 있던 많은 친일파 관료와 지식인들은 자신들도 일본과 함께 승전국에 포함된 것처럼 착각했을 수 있다. 파리강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는 일은 고종과 근왕세력에 의해 극비리에 진행됐다. 여러 가지 자료를 살펴볼 때 고종은 윌슨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두 가지 일을 추진했다. 하나는 미국에 유학한 최초의 여학사 하란사(1875~1919) 이화학당 교수와 함께 의친왕(이강)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는 것이다. 고종은 이 밀사를 통해 1882년 한·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상기시키고,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국병탄 시 일제 편을 든 미국의 대한 정책을 규탄하고 향후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관심과 지원을 약속 받으려는 계획이었다. 다른 하나는 고종 자신이 이회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경으로 망명을 감행하는 계획이었다. 이런 일들을 눈치챈 일제가 급기야 고종을 독살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이 1917년 일어났는데 그 영향은 없었나?

“좌파들 중에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3·1운동에 끼친 영향은 없었다. 오히려 1919년 당시엔 레닌의 붉은 군대의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혁명의 불꽃이 꺼지려는 판이었다. 한때 적군보다 백군이 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연합국들이 군대와 남은 무기를 러시아 백군에게 지원했다. 레닌의 홍군은 위기에 처한다. 레닌은 아직 해외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고 오히려 1922년 일제의 군대가 시베리아에서 철수할 때까지 자본주의 제국에 의해 군사간섭을 당하는 세계적 포위상황에 처해 있었다.”

3·1운동은 비폭력 정치투쟁이란 형식이 주목을 받는다. 비폭력 정치투쟁보다 무장투쟁으로 일제와 맞서는 일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둘 다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다. 둘 다 중요하지만 1919년 3·1운동 당시 역사를 바꾸는 데에는 무력투쟁보다 비폭력 정치투쟁이 더 중요했다. 상해 임정은 3·1운동의 열기가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3·1운동 이전까지 의병투쟁을 통해 너무 많은 희생이 있었다. 여력이 없었고 젊은이들이 성장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다시 또 무력투쟁을 하면 피바다가 될 것이었다. 비폭력의 소프트파워 투쟁으로 전환한 이유다. 국제적인 여론으로 보아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무렵에 무력투쟁은 각광 받기 힘들다. 비폭력 투쟁이었기에 세계 여론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열기가 임정을 만들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 장소가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뀐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폭력이 발생해 희생자가 속출할 걸 염려해서 태화관으로 간 것이다. 점잖게 선언하려는 것이었다. 그 효과가 없었다면 모르지만 태화관에서 했어도 엄청나게 큰 효과가 있었는데 그걸 왜 문제 삼는가. 민족대표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과 그 후손들은 33인이 높게 평가되는 것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또 사회주의자들처럼 3·1운동의 의미를 축소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

민족대표 33인이 모두 평민 출신이란 점도 주목해야할 것 같다.

“대한제국 때 이미 신분 차이가 없어졌다. 다들 국민적 소속감을 가지고 일어났다. 오히려 지금의 연구자들 시각에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는 어떻게 평가하나?

“손병희의 행태를 놓고 시비를 걸 수도 있는데 그런 시비는 손병희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손병희는 1894년 동학 2차 봉기 때 스스로 총을 들고 싸우다가 피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인물이다. 3·1운동의 지도자로서 그는 동학 봉기 때의 그 피바다를 다시 펼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역사적 결단을 내릴 위치에 있었다. 그는 힘을 보존하면서 투쟁하는 방식을 택했고, 더 결정적 시기가 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역사의 현장에 있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조심스러움이 그에겐 있었다. 오늘날 그런 현장에 없던 관찰자들이 쏟아내는 무분별한 발언을 가려서 봐야 한다. 태화관을 기생집이라고 어처구니없게 비하하거나 왜 안 싸우려고 했느냐는 등 시비를 거는 시각은 문제가 있다. 북한에서는 무장투쟁론만 강조하면서 3·1운동을 비하하는 데, 남한이 그런 북한의 역사관에 영향을 받아선 곤란하다.”

3·1운동의 비폭력 정치투쟁의 전범이 된 것은 무엇일까. 황태연이 주목한 것은 둔헌(遯軒, ‘돈헌’으로도 읽음) 임병찬(1851~1916)이 쓴 [관견(管見)]이다. 임병찬은 고종과 순종 두 황제로부터 모두 거의밀지(擧義密旨)를 받은 유일한 의병장이었다. 최익현 의병장의 제자로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고종과 순종의 밀명을 받고 1912년 임병찬이 조직한 전국적 비밀 독립운동단체가 ‘대한독립의군부’다. 대한독립의군부의 ‘비폭력 정치투쟁’ 전략서가 [관견]이다.

1913년 11월에 작성된 [관견]은 일종의 팸플릿처럼 만들어져 전국적으로 배포돼 읽혔다고 한다. 3·1운동의 비폭력 투쟁의 원형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모두 11편으로 나눠 서술했는데 ①‘논(論)천하대세’ ②‘논(論)시국형편’ ③‘지기(知己)’ ④‘지피(知彼)’ ⑤‘천시(天時)’ ⑥‘제승(制勝)’ ⑦‘정산(定算)’ ⑧(대한독립의군부 관제를 담은)‘요인(料人)’ ⑨‘요사(料事)’ ⑩‘비어(備禦)’ ⑪(운영규칙을 담은)‘부하별록(附下別錄)’ 등으로 구성돼 있다.

임병찬의 [관견]은 어떤 책인가?

“임병찬은 3·1운동과 해외 독립투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관견]을 써서 고종태황제에게 상주해 재가를 받았다. 당시의 정세판단과 투쟁방략이 담겨 있는 이 [관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교적 정확하게 당시 정세를 파악했고, 우리의 역량과 일본의 전력을 비교하고 나서 ‘이문승무(以文勝武)’ 또는 ‘이문제무(以文制武)’의 비폭력 정치투쟁을 승리의 전략으로 제시했다. 즉 문력(文力)이 비록 유약할지라도 무력(武力)의 강하고 굳음을 누를 수 있다는 책략이다.”

한날한시 전국 360여 곳에서 국권반환 투서


▎3·1운동의 비폭력 정치투쟁 전범을 제시한 [관견]의 저자 임병찬 의병장.
[관견]에 나타난 임병찬의 문제의식은 이런 것이다. ‘지금 왜군들은 백전(百戰)의 병졸과 지정(至精)의 무기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연무(鍊武)하지 않은 병졸만을 가지고 촌철도 없으니, 만약 지금 싸움의 승부를 내야 한다면 관중과 제갈량이 다시 살아 와도 백전백패할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적을 눌러 이길(制勝) 것인가?’ 부드러움이 굳음을 누를 수 있고, 약함이 강함을 누를 수 있다는 방책은 이런 판단 아래 나온 것이다.

[관견]에 나타난 구체적인 투쟁 전술은 어떤 것인가?

“부드러운 소프트파워 투쟁은 구체적으로 ‘투서와 전화걸기’인데, 중요한 것은 한날한시에 전국 360여 곳에서 일제히 국권반환을 요구하는 투서를 하고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목표는 이런 선도적 비폭력 정치투쟁의 소란을 통해 ‘땔나무꾼과 꼴꾼’까지 망라한 만백성을 일거에 ‘용동(聳動)’케하는 것이다. 대한독립의군부의 지도부들이 모여 전국 각 군(郡)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를 계산해 투서 일자를 선정했다.

임병찬은 대한독립의군부의 전국 조직을 완성하고 각 지역의 대표까지 선정하고 고종에게 보고해 비준을 받았으나 조직의 확산 과정에 동지 김창식이 일제 경찰에 붙잡힘으로써 조직이 발각됐다. 임병찬을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대한독립의군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이미 배포된 [관견]의 비폭력 정치투쟁 전략은 뜻있는 국민들의 의식 속에 살아남았다. 한날한시에 전국에서 일제히 분출하는 방식이 6년 후 3·1운동에서 그대로 펼쳐졌다.”

임병찬은 체포된 뒤 총독과 일본정부 총리대신과의 직접 면담을 요구하며 항쟁하다 다시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며 몇 차례 자결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1916년 끝내 병으로 순국했다.

한국근대사에서 흠 없는 사람 찾기 힘들어


▎탑골공원에 있는 3·1운동 기념 조형물.
임병찬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있는데.

“폭력혁명만을 중시하면서 임병찬의 비폭력 정치투쟁을 비판하는 이들은 당시 정세와 전력 평가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임병찬과 손병희처럼 전쟁의 현장에서 고투하는 사람의 조심스러움을 함부로 폄하해선 안 된다. 1912~1919년 간의 독립운동은 무력투쟁에 치중하기보다 독립전쟁기지의 확보, 독립군 양성 등이 중요한 때였다. 이런 시기에는 비폭력 정치투쟁이 유일하게 효과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간디는 임병찬의 비폭력 총궐기 투쟁이 적용된 3·1운동으로부터 배워 인도에서 영국을 몰아내지 않았던가.”

임병찬이 1894년 동학 봉기 진압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 것은 어떻게 보는가. 동학 지도자 김개남 체포에 개입돼 임병찬은 전혀 재조명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근대사에서 흠 없는 사람 찾기 힘들다. 그만큼 어려운 시기였다. 어느 개인을 탓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실수를 했다. 예를 들어 매천 황현만 해도 그렇다. 황현이 친일파 박영효를 좋게 묘사한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박영효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일종의 ‘문명개화’ 마인드인데 그걸 일본에 의존해야한다는 식이었다. 일본이 우리를 먹으려고 한 점을 못 본 것이다. 일제에 붙어 호의호식한 박영효의 실체도 보지 못했다. 충정공 민영환은 어떤가.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여하고 돌아와서는 그 역시 친일 행보를 보였다. 일본 공사관 기록에 그는 일본의 1급 공작대상으로 설정돼 있다. 친일파 이완용은 너무 천해서 일본이 활용할 중심인물로 삼기 힘들다고 보고 민영환 중심으로 친일파를 모으려고 했던 것이다. 손병희조차도 흠이 없다고 볼 수 없다. 한때 일본에 망명해 있으면서 친일화된 측면이 있다. 귀국해서는 러일전쟁 때 일본을 돕기까지 했다. 우리가 일본을 도우면 일본도 우릴 도울 줄 오판했는데 강제 병합을 당한 후 정신을 다시 차렸다. 항일 투쟁의 영웅 안중근도 한때 동학 진압군이었음은 알려져 있는 얘기다. 그렇게 다 실수를 많이 했던 시대가 우리 근대사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고종의 밀명을 받아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함으로써 불멸의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 그 이전의 오판은 이 장거로 다 사(赦)하고도 남을 것이다.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한 손병희가 없었다면 3·1운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민영환과 황현은 을사늑약과 병탄 직후 각각 자결하는 결기를 보임으로써 항일 독립투쟁의 기치를 드높여 자신들의 죄를 사했다고 본다.”

한국근대사의 인물 평가 기준을 다시 세워야할 것 같다.

“어떤 인물을 한 가지 일로 비난하고 칭찬하기는 어렵다. 긴 안목으로 봐야 한다. 민영환·황현·안중근·손병희 등은 한때의 오류를 다 사해줘야 할 만큼 큰 업적을 남겼다. 끝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친일파의 대오에 넣으면 안 된다. 임병찬도 그렇게 봐야 한다.”

-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 철학박사 balance@joongang.co.kr

201903호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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