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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53일 만에 침몰한 ‘동로마 제국’ 비잔틴 

‘설마’ 방심이 낳은 3중(重) 성벽의 몰락 

‘천 년 버틴 철옹성 뚫리겠나’ 심리에 위기 징후 간과
‘설마 북한이 대화의 판 깰까’ 순진한 희망 경계해야


▎콘스탄티노플의 서쪽 방어선을 맡았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모습. 오스만 제국 전까지 유럽대륙을 유린했던 어떤 이민족도 이 성벽을 넘지 못했다. / 사진:유민호
이스탄불 폴피로게니투스 궁전(Palace of the Porphyrogenitus). 대제국 비잔틴의 1100년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곳이다. ‘블루 모스크’라 불리는 술탄아메드 사원(Sultan Ahmed Mosque)에서 북쪽으로 5㎞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항상 공사 중이지만, 올해 초 들렀을 때는 깨끗한 모습으로 맞아줬다. 붉은 벽돌로 세워진, 20여m 높이의 궁전이다. 비잔틴은 벽돌을 주된 건축재로 썼다. 두꺼운 대리석을 썼던 고대 그리스나 작은 대리석과 벽돌을 함께 쓴 고대 로마와는 판이하다. 내부 시설은 본 적이 없지만, 바깥은 큰 장식도 없이 소박하다. 청빈한 스타일의 전형적인 비잔틴 건축물이다.

비잔틴 제국은 서기 330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현재의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기면서 성립됐다. 고대 로마제국과 구분하려는 목적에서 현대의 학자들이 이스탄불의 옛 이름이었던 ‘비잔티움’을 붙였다. 우리 역사로 치면 ‘한성백제’라는 작명과 비슷하다. 천도(遷都)한 뒤엔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기리는 의미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꿨다. 이곳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비잔틴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스러질 때까지 장장 1123년 동안 유럽문명의 본산으로 군림했다.

시간을 1453년 5월 28일 심야로 되돌려보자. 대제국 비잔틴이 멸망하기 하루 전이다. 운명인지, 비잔틴 최후의 황제 이름도 콘스탄티누스 11세다. 44세에 황제에 올라 비잔틴 멸망 때까지 4년간 최고통치자로 군림했다. 5월 28일은 비잔틴 최후의 심야회의가 열린 날이다. 콘스탄티누스 11세가 회의를 주관했다. 1453년 4월 6일 시작된, 오스만 제국의 비잔틴 공격 52일째 되던 날이다. 폴피로게니투스 궁전에 참모와 군인 수백여 명이 참석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지친 듯,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전해진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마지막 연설이다. 말은 안 했지만, 참석자 모두 최후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연설이 끝난 뒤 황제는 아야 소피아(Hagia Sophia)로 이동했다. 당시 비잔틴 국교 그리스 정교의 총본부로, 오늘날 가톨릭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San. Pietro) 대성당에 해당된다.

수천 명의 시민과 함께 엄숙하고도 비장한 심야 미사가 이뤄졌다. 신의 축복을 기원하는 기도 소리와 함께 결사항전 결의가 다져졌다. 결코 항복이 아니다. 미사가 끝난 뒤 황제는 시민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모든 잘못이 자신의 부덕에서 생긴 것이라며 모두에게 용서를 빌었다. 황제·군인·시민·수도승 모두 예외 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손에 완전히 넘어간 것은 다음 날인 5월 29일이다. 오스만 군 10만여 명의 병력이 성안에 몰려들어오면서 대학살이 시작됐다. 방화와 함께 아비규환 피바다로 변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멀리서 오스만 터키의 국기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봤다. 황제는 두 마리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무거운 예복을 벗고 주변 사람들에게 외쳤다. “나의 목을 잘라 줄 크리스천은 없는가?” 비통한 울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주변 참모들은 이미 오스만 군에 의해 몰살된 상태다. 혼자 남은 황제는 오스만 군에 몸을 던졌다. 칼을 휘두르며 혼자서 싸우다가 쓰러진다. 비잔틴 시민에게 기억된 황제의 마지막 모습이다. 살해된 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매장됐기 때문이다.

15세기 황혼에 접어든 대제국 비잔틴의 실상은 일신(一身)의 노쇠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보통 중년에 들어서면서부터 건강 관리에 들어선다. 보여주기 위한 몸이 아니라, 나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용할 만한 도구로서의 몸이다.

노쇠(老衰)는 만성적으로 진행된다


▎유일하게 남은 것으로 추정되는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초상. 15세기 양피지에 그린 황제 9명의 수채화 중 일부다.
그런데 운동을 하려해도, 50대 이후부턴 여러 장애물이 나타난다. 류머티즘·허리통증 같은 ‘큰’ 이유가 아니라, 무시해도 될 만한 ‘작은’ 장애가 곳곳에서 생겨난다. 자연히, 러닝머신도 멀리하게 된다. 철봉이나 바벨을 통한 상체 단련 운동도 마찬가지다. 손가락 사이의 힘줄이 약화되면서 악력(握力)이 급감한다. 뭘 잡고 움직이기가 힘들어진다. 어깨나 팔 전체가 아픈 것이 아니라, 손톱 손마디 같은 부분적 장애다. 운동 전부를 중단하게 된다. 뼈와 신경에 부담을 덜 주는 수영에 나서려 해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중년부터 시작되는 피부 알레르기다. 면역성 저하에 따른 것으로, 수영장 내 청결용 화학제 탓에 물에 들어갈 수가 없다.

급성도 있지만, 중년 대부분의 경우 만성적인 상태에서 건강을 잃는다. 때문에 작고 사소하지만, 몸에 이상이 왔을 때 빨리 정확히 알아채는 능력이 중요하다. 인지·자각 능력이다. 손가락 마디가 왜 아픈지, 발가락 끝이 왜 결리는지, 수영장에 다녀오면 왜 밤잠을 설치며 긁어대는지…. 작은 장애가 왔을 때 ‘설마’ ‘일시적’ ‘좋아지겠지’ ‘나만은 예외’라는 식으로 넘기기 십상이다. 큰 변화가 오면, 누구나 예외 없이 화들짝 전면대응에 나선다. 이미 늦었다. 작을 때 고쳐나가야 한다. 진지하고도 적절한 대응은 상황을 예민하게 인지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1100년 비잔틴 대제국의 침몰도 그 같은 만성적 고집과 태만의 결과다. 누구나 쉽게 알아챌 수 있는 ‘큰 것’이 아니다. 미묘하고도 혼동하기 쉬운 ‘작은 변화’가 쌓여가면서 서서히 가라앉았다. 특히 외부에서 생기는 변화에 무심해지면서 큰 것이 와도 ‘설마’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일상사로 변해 간다. 그 과정에서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를 향한 칼부림만이 난무한다. 갖가지 명분을 붙여 내부 비리 폭로자도 배신자로 몰아세워 처단한다. 모든 것을 편한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무시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지도에서 사라지게 된다.

비잔틴 몰락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스만 터키의 강력한 군사력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아니라, 이미 멸망 500여 년 전부터 시작된 비잔틴의 무능과 상황 오판이 만들어낸 결과로서의 몰락이다.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성벽은 비잔틴 최후의 날을 실감할 수 있는 최고의 현장이다. 난공불락 성벽으로, 무려 1100년간 대제국 비잔틴을 지켜온 수호신이다. 훈족·아바르족(Avars)·아랍·러시아·불가리아로부터의 무려 20여 차례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지만, 오스만에 당하기 전 함락된 것은 단 한 차례에 그친다. 같은 크리스천인 유럽 십자군에게 당한, 13세기 초반의 비극적 역사다. 황금에 눈이 먼 제4차 십자군이 성지 예루살렘이 아닌, 비잔틴에 쳐들어오면서 벌어진 흑(黑)역사다. 잊기 쉬운데, 적은 항상 내부에 있다. 함락된 것이 아니라, 비잔틴 스스로가 문을 열어주면서 벌어진 상황이다. 따라서 외부의 힘에 의해 함락된 것은 1453년이 최초이자 마지막이다. 도대체 어떤 성이었기에, 철옹성으로 무려 1100년간 군림할 수 있었을까.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이스탄불 외곽에 ‘아직도’ 남아있다. 총연장 5.7㎞에 달하는 유적이다. 주목할 부분은 ‘성(城)’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잔틴은 왕족과 귀족의 피난처로 활용될 성을 만들지 않았다. 길고도 높은 성벽을 만들어 수십만 명이 함께 살 수 있는 모두의 공간을 제공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남북을 횡단하는, 콘스탄티노플 서쪽 방어선에 해당된다.

훈족조차 피해 돌아갔던 3중 성벽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군대가 테오도시우스 방어벽을 뚫고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성공했다. 당시 오스만 군대가 돌파한 성문(오른쪽) 옆에 그날의 일을 기록한 표식(왼쪽)이 달려있다. / 사진:유민호
서로마에서 완전히 분리된, 동로마 제국으로서의 비잔틴 역사는 395년부터 시작된다. 일곱 살 나이로 황제에 오른 테오도시우스 2세가 서로마와의 ‘완전한 이혼’에 나선 인물이다. 직접 단행한 것이 아니라, 섭정 정치를 통한 결정이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테오도시우스 2세 때 완공된다. 독립된 나라로서의 동로마에 세워진 두 번째 방어벽이다. 원래 작은 규모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만든 성벽이 있었지만, 도시가 확장되면서 바깥쪽에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들어서게 된다. 역사학자들은 현재의 이스탄불을 에워싼 남쪽과 북쪽 바다에 면한 곳을 콘스탄티노플 성벽, 육지인 서쪽 바깥쪽 방어선을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라 부른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최종 완성된 것은 413년이다. 2019년을 기준으로 하면 1606년 전의 고대 유적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당시의 모습이나 구조를 지금도 실감할 수 있다. 성벽 주변만이 아니라, 성벽 위에 직접 올라가 둘러볼 수 있다. 물론, 방어용 시설도 산보와 더불어 직접 체험할 수 있다. 터키 유적·유물의 매력이지만, 로마 유적지와 달리 거의 대부분 무료로 개방된 상태다. 돌아다니는 동안, 왜 난공불락 성벽이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이스탄불 구시가지에서 순환열차를 타고 15분 정도 서쪽으로 가다보면 보인다. 톱카피(Topkapi) 역이 최적의 출발지다. 21세기 들어 성벽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건축사에 흥미가 있는 사람만이 간간이 들린다. 필자의 경우 성곽 주변에 사는 터키인들과의 생활이나, 대화도 겸해 찾아간다. 터키 방문길에 항상 들르지만, 올해도 다시 찾았다. 비잔틴 역사만이 아니라, 이스탄불의 내면과 터키의 속살도 이해할 수 있다. 1000원 수준의 로컬 푸드도 곳곳에서 즐길 수 있다. 길게 이어진 성벽은 과거로 연결되는 시간여행 무대이기도 하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왜 철옹성으로 불렸는지는 단 한 번의 산보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전 세계 어떤 성벽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특별한 축조기술을 만나게 된다. 로마이래 집적된 성벽기술의 총아라 볼 수 있다.

전체로서의 구조, 각론으로서의 성의 강도가 아주 특별하다. 성벽은 모두 57개의 대형 타워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다. 콘크리트를 써서 30m 높이로 쌓아올린 타워는 망루(望樓)와 함께 군수품과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겸했다. 비잔틴의 콘크리트는 로마의 콘크리트보다 한층 더 강하다. 부서진 성벽을 손으로 만져봤지만, 모래조각 하나 허물어지지 않을 만큼 여전히 강력하게 붙어 있었다.

후방 30m, 전방 20m 높이로 이어진 2중 방어벽은 난공불락 성벽의 핵심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후방과 전방 2중벽 사이에는 폭 10m 정도의 도로가 들어서 있다. 전방 성벽 앞에도 폭 10m 정도의 도로가 접해있다. 더불어 전방 도로 바로 앞에는 폭 20m에 깊이 10m에 이르는 인공운하가 들어서 있다. 운하 안쪽으로도 높이 1.5m의 낮은 벽이 세워져 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3중성벽’으로도 불리는 이유다.

성벽을 공략하려면 먼저 폭 20m 깊이 10m의 운하를 ‘무사히’ 넘어야 한다. 이어 다시 폭 10m의 도로를 건넌 뒤, 높이 20m 성벽 공략에 나서야한다. 성벽을 넘었을 경우, 다시 내부에 들어선 폭 10m 도로를 건너야한다. 이어 마지막으로 다시 높이 30m의 성벽을 타넘어야만 한다. 도보·수영·등산으로 이어지는 모든 작전이 총동원되는 셈이다. 비잔틴은 그 같은 적의 도발에 맞서, 성위에 서서 아래를 공격하기만 하면 된다. 통상 공격으로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넘어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성벽은 대제국의 기상과 세계관이 압축된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 같은 건국의 초심(初心)과 이념은 시간이 흐를수록 퇴색돼 간다.

비잔틴으로 쇄도하는 위험 신호


▎난공불락 테오도시우스 방어선. 높은 2중벽과 앞뒤의 장애물로 인해 1100년 동안 방어에 성공한, 유비무환 비잔틴 건국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킬레스건(腱)에서 보듯, 어디에나 약점은 있다. 철옹성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어떻게 함락됐을까. 19세의 나이에 술탄에 오른 메흐메드 2세가 답이다. 일명 ‘정복자 메흐메드(Mehmed the Conqueror)’로 통하는 터키 역사의 영웅이다. 면밀한 준비 끝에 콘스탄티노플 포위공격에 나서 비잔틴을 멸망시킨 인물이다. 이탈리아 서로마를 포함할 경우, 비잔틴으로 이어진 로마 전체의 역사는 무려 1500여 년에 이른다. 메흐메드가 보여준 용기와 지략이야말로 장구한 대제국을 사라지게 만든 이유다.

메흐메드는 희한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다. 불과 12살 나이에 술탄에 올라 4년간 통치를 한 뒤 물러났다가, 다시 19살 때 다시 술탄으로 재등장한다. 아버지가 술탄 자리를 포기하는 과정에서 생긴, 믿기 어려운 역사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결코’ 나이가 아니다. 나이로 통치능력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시대착오의 증거다. 12살, 19살에 걸쳐 두 번이나 술탄에 오른 메흐메드는 남다른 비전과 리더십을 갖게 된다. 19살에 술탄에 다시 오르는 즉시, 모든 힘을 비잔틴 함락작전에 동원한다.

오스만 입장에서 보면, 비잔틴은 겁쟁이 금수저로 비쳐진다. 술탄이 강력한 군사력으로 비잔틴을 괴롭히면 곧바로 엄청난 조공을 바쳤다. 메흐메드 이전의 술탄은 그 같은 조공에 ‘충분히’ 만족했다. 십자군을 제외할 경우, 성벽을 넘어선 나라가 없었다는 점도 조공에 만족한 이유 중 하나다. 엄청난 병력을 동원한다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상태에서의 차선책이다. 성벽 함락에 실패할 경우, 오스만의 존립도 어렵게 된다.

메흐메드는 달랐다. 처음부터 비잔틴 함락을 머리에 그린 채 통치에 들어간다. 비잔틴과의 화해를 통한 조공외교 찬성자도 조용히 쫓아낸다. 비잔틴도 바보는 아니다. 술탄의 정적들이 보내오는 내부 정보를 통해 메흐메드의 야심을 듣게 된다. 직접 사절단을 파견해 의중을 떠보지만, 19살 십대 소년의 망상 정도로 축소 해석한다. 왜란(倭亂)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무시한 조선통신사 김성일(金誠一)의 오판에서 보듯, 과거의 술탄보다 돈과 여자를 더 좋아하는 ‘소황제’ 정도로 분석한다. 조공의 액수를 높여서 메흐메드에게 보낸다.

술탄은 자신의 야망을 철저히 숨긴 채 군사작전에 들어간다. 성벽을 넘을 수 있는, 비밀병기가 핵심 중 하나다. 자국의 조언자들보다 외국의 전문가들의 식견에 귀를 기울인다. 헝가리 브라소프 출신의 군사지략가 오르반(Orban)은 메흐메드가 가장 아낀 인물이다.

오르반은 대포 제조 전문가이다. 철옹성을 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박살내자고 제안한다. 길이 8m, 무게 19t에 달하는 초대형 철제대포를 개발해 메흐메드에게 바친다. ‘다르다넬레스 대포(Dardanelles Gun)’라고 불리는 전대미문의 최신 병기다. 15세기 초는 화약이 막 전쟁에 도입된 시기이다. 그러나 무게 544㎏에다 지름 75㎝에 달하는 엄청난 대포 탄환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던 시기였다. 대형 대포를 통해 발사되는 탄환의 최대 사거리는 1.6㎞다. 부딪칠 경우의 파괴력은 특별하다. 두께 2m에 달하는 테오도시우스 성벽도 간단히 뚫을 수 있다. 헝가리 천재에 의한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비잔틴 함락에 활용된 것이다.

무너진 것은 성벽 아닌 ‘설마’ 심리


▎두 차례에 걸쳐 술탄에 오른 메흐메드 2세. 항상 장미향을 맡는 군주로 그려진다. 군사만이 아니라, 외교·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젊은’ 리버럴 아츠형 술탄이었다. / 사진:유민호
다르다넬레스 대포는 15세기 탄생된 이래, 1807년 영국과의 전쟁 때까지 활용된, 터키의 국가적 프라이드이기도 하다. 비잔틴을 무너뜨린 세계 최대 대포라는 명성과 함께 현역으로 350여 년 동안 활동한 셈이다. 메흐메드는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앞서 철저한 준비에 들어간다. 먼저 비잔틴과 주변 크리스천 국가와의 차단이다. 비잔틴이 위험에 처할 경우 도와준 지원군의 통로는 현재 불가리아 땅이다. 육지를 통해 유럽지원군이 도착해 도와줬다. 메흐메드는 불가리아 주변 땅을 공략해 북부 통로를 차단한다. 이어 성벽을 지키는 앞바다, 보스포루스 해협 반대편에 작은 성 하나를 짓는다. 다르다넬레스를 사용하기 위한 최전선 기지다. 21세기 들어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는, 절경 속의 작은 성이기도 하다.

비잔틴은 메흐메드의 군사행동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그러나 결론은 무시와 방관이다. ‘설마’라 믿으며, 조공 액수를 높이려는 ‘겁주기 게임’으로 풀이한다. 황금 조공의 규모를 한층 더 높인다. 비잔틴은 6세기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가 최전성기다. 이후 계속해서 내리막에 들어선 나라다. 한때 세계 부(富)의 3분의 2를 가진 대제국으로 통했지만, 11세기 초 현재의 아시아 지역을 잃으면서 재력도 축소된다.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고 했던가. 내리막의 비잔틴이기는 하지만, 능숙한 외교와 중개무역을 통한 번영은 이후 수백 년 지속된다. 그러나 다르다넬레스를 앞세운 메흐메드의 야심 앞에 무릎을 꿇는다. 결국 공격 53일 만에 함락된다.

놀라운 것은 당시 비잔틴의 방어규모다. 5만 명 시민과 7000명 비잔틴 군인이 전부다. 그나마 7000명 군인 가운데 2000명은 외국 용병이다. 테오노시우스 성벽의 총길이는 26㎞다. 2중 방어벽임을 감안하면, 대략 10m 간격에 1.5명씩 지킨 셈이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10만 오스만 군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사생결단 정치’가 초래한 안보 불감증


▎이스탄불의 ‘파노라마 1453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마지막 날’ 기록화.
비잔틴은 자국의 군인보다, 상대적으로 돈이 적게 드는 용병에 의존한 나라다. 군인을 많이 보유할 경우 내부 반란에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은 무력축소론의 가장 큰 이유다. 군인들보다 그리스 정교 승려들이 더 많았던 곳이 비잔틴이다. 난공불락 성벽과 돈에 의존한 생존법에 상식화됐다. 젊은 술탄은 그 같은 생각을 무시했다. 성안에 있던 5만 명 가운데 2만 명이 살해되고, 3만 명은 전부 노예로 팔려갔다. 찬란한 그리스정교의 건축물들은 이슬람 모스크로 변해간다. 비잔틴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2019년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15세기 비잔틴의 재판(再版)으로 느껴진다. ‘설마’가 횡행한다. 통치 차원이 다르지만, 메흐메드와 김정은이 젊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르다넬레스 대포는 북한의 핵에 비견될 수 있다. 상식적이지만, 핵은 파괴력보다 심리적인 차원의 무기다. 다르다넬레스 대포는 한 발 쏘는데 무려 3시간을 필요로 했다. 많아야 하루 8발 발사가 전부다. 워낙 커서 정확도도 떨어진다. 사실 대포로 인해 파손된 성벽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은 곧바로 복구됐다. 파괴력이 아니다. 상상한 적도 없는 대포를 통한 ‘심리적 공포’가 비잔틴 성벽 안으로 밀어닥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적’ 피로감이 엄습했다.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크리스천 지원군도 오지 않았다. 대포소리는 성이 아니라, 절망으로 치닫는 정신무장 해제의 상징이었다. 부서진 성벽 복구를 게을리 하던 그 순간, 메흐메드가 뚫고 들어왔다.

15세기 비잔틴과 21세기 한국의 상황이 완전히 들어맞을 순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흐르는, 정신적·심리적 차원의 교훈은 똑같다. 언제부턴가 처단·처형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사가 대세로 흐르고 있다. 좋은 점은 더 좋게, 나쁜 점은 개선해서 교훈으로 삼는 것이 역사에 주목하는 이유일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산보를 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903호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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