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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14)] 피비린내 진동한 이성계式 적폐 청산 

우왕의 처형은 고려 멸망의 전주곡… 

귀족·권신 숙청해 왕조 울타리 허문 우왕의 전략적 오류
공양왕이 끌어들인 이색도 탄핵… 이후 군제개혁 통해 통제력 강화


▎조선시대 태종의 어가 행렬 재현 행사.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은 고려 멸망을 이끌어냈고, 사병 해체로 갓 태어난 조선의 안정화를 완성한 인물이다.
1389년 9월말,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며 이들을 제거해도 좋다는 중국의 외교문서가 도착한 이후 2개월간 고려 정국에 폭풍이 몰아쳤다. 먼저 9월에 갓 출범한 정몽주의 연립정부가 위기에 처했다. 이성계파는 더 이상 이색파 및 외척 세력과 공존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색파의 핵심 인물인 이숭인과 권근이 탄핵, 유배됐다. 11월 중순, 이성계를 암살하고 우왕을 복립하려는 김저사건이 터졌다. 사건의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사건에 이색 등 문신그룹과 변안열을 중심으로 한 무장그룹, 그리고 외척과 왕족들이 연루됐다. 사건 발생 후 단 3일 만에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했다.

이로써 위화도회군 이후의 권력투쟁이 사실상 완결됐다. 이성계파의 완벽한 승리였다. 역성혁명으로 가는 길에 놓인 주요 장애물은 모두 제거됐다. 그러나 뜻밖에도 공양왕이 상당히 완강하게 저항하고 정몽주가 이에 가세함으로써 상황이 다소 유동적으로 바뀌었다. 1391년 한해는 공양왕과 정몽주가 이성계에 반대하는 제2전선, 즉 고려왕조를 지키는 마지막 저지선이 형성된 시기였다.

1391년 5월 윤이·이초사건이 발생했다. 이성계파는 이를 계기로 마지막 저지선을 돌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몽주 역시 이에 저항하며 최후의 반전을 시도했다. 그것이 실패하고 정몽주가 피살되자 모든 저항이 끝났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이성계파는 김저사건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를 정리하고자 했다. 그것은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 우왕과 창왕의 처형, 둘째 이성계에 반대하는 문신·무장·외척 세력의 제거, 셋째 군권의 일원화, 넷째 개혁의 완성이다.

우왕·창왕 처형의 정치적 함의


▎1970년 제2한강교 입구 녹지대에서 정몽주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정몽주의 죽음으로 고려의 국운도 다했다.
1389년이 가기 전에 우왕·창왕이 처형됐다. 왕은 군림하든지 죽는 것이다. 12월 8일(壬寅) 윤소종의 동생인 사재부령 윤회종이 우왕과 창왕의 처형을 주장하자, 공양왕은 여러 재상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말이 없었다.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이성계가 마지못해 “이 일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이미 강릉에 안치시켰다고 중국 조정에 알렸으니 중도에 변경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신 등이 있사오니, 우가 비록 난을 일으키고자 한들 무슨 걱정이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중국에 보고한 내용과 달리 조치를 취할 수 없고, 설사 우왕이 반격을 꾀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당장 처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물론 이성계의 본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재상들조차 두려워하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잠시 보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공양왕이 적극적으로 나서 “우가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스스로 죽음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성계의 입장에 찬성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로서도 만약의 경우를 걱정한 것이다.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이 처형을 명하는 교서를 작성했다. 지신사는 조선의 도승지로서, 왕명의 출납을 맡는 비서실 수장이다. 이런 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상황이 바뀌면 자신의 생명은 물론 일족의 운명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행은 이색파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혁명파에 동조한 것도 아니다. 지신사로서 사관을 겸한 그는 사초에 이성계가 죄 없는 우왕·창왕·변안열을 죽였다고 썼다.

조선 건국 후 [고려사]를 편찬할 때, 이 사초가 문제가 됐다. 모든 사람이 후환이 두려워 사초를 빼거나 고쳐서 제출했지만, 이행만은 그대로 제출했다. 조준이 그 사초를 보고 이성계에게 알리자, 이성계는 사초를 가져오게 해 직접 열람했다. 분노한 이성계는 “변안열은 죄주기를 청하자 공양왕이 문득 목 베기를 허가했으므로, 내가 미처 이를 중지할 것을 청하지 못하였다. 우와 창 부자는 백관과 나라 사람들이 합사(合辭)하여 목 베기를 청하므로, 공양왕이 이를 윤허했다. 나는 처음부터 살해할 마음이 없었는데, 작은 선비(小儒)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개탄했다.([태조실록]태조2년 1월 12일)

이 일로 이행은 곤장 100대를 맞고, 가산을 적몰당하고 울진에 귀양갔다. 그러나 이성계는 1년 뒤 그를 석방했다. 정종대에 이행은 계림윤에 임명됐고, 태종대에는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예문관 대제학은 문한의 종장으로, 문신으로서 가장 명예로운 직책이다. 세종은 이행의 손자 이자(李孜)를 양녕대군의 사위로 삼도록 했다.([세종실록] 세종 7년 5월 6일) 또한 이행이 죽자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행의 학문과 절개를 인정한 것이다.

최영의 충성심이 부른 자충수


▎서울 종묘에 있는 공민왕 신당. 이성계가 처형시킨 고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인지, 신돈의 아들인지를 놓고 조선시대까지 격론이 벌어졌다.
정당문학 서균형이 강릉에 파견돼 우왕을 참수했고, 예문관 대제학 유구는 강화에 가서 창왕을 참수했다. 이제 이성계파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고려왕조가 존재하는 한 이제 그들의 행위는 용서될 수 없었다. 당시 창왕의 나이는 10세에 불과했다. 인생과 정치를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었다. 그가 선택한 삶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삶은 운명이었던 셈이다. 그 운명은 역사의 배경이자 조역이었고, 그것이 끝나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한 인간에게 이것은 부조리한 것이다. 사실 많은 삶이 이런 것인지 모른다. 창왕, 우왕이 그렇고, 오이디푸스도 그렇다.

우왕의 나이는 25세였다. 10세에 즉위해 14년간 왕위에 있었다. 태생이 불행했으며, 왕 아닌 왕이었다. 이인임 등 귀족세력에 제압된 그는 생명을 부지하고자 광인이나 광대처럼 살았다. 주야로 산야를 배회하고, 멋대로 사람을 죽이고, 술과 노래, 섹스에 탐닉했으며, 참새를 잡고 거리를 달리며 시정잡배처럼 유치한 놀이에 열중했다. 그런 삶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비루하고 텅 빈 삶에 대한 자학이자, 외양상 왕을 절대자로 받들면서도 사실은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경멸한 귀족들에 대한 풍자였다.

우왕은 1388년 최영과 연합해 무술정변을 일으켜 그런 귀족들에게 철저히 복수했다. 수천 명이 처형됐고,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도 예외가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역설적이었다. 왕조를 보호할 울타리가 모두 없어져 그 자신이 처형되고, 고려가 멸망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윤근수도 그런 역설을 지적했다.

“최영이 혁폐도감을 설치하여 모조리 죽여서 한 집에 죽은 자가 각각 천여 명씩이나 되니, 이에 상하가 통쾌하다 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 서로 경축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왕실이 점점 외롭고 우익(羽翼)이 꺾여 지고 쇠잔해져서, 드디어 떨쳐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목은과 포은이 데리고 일을 같이 한 자들은 이숭인과 김진양 등 약간이니, 모두 초야에서 나온 백면서생에 지나지 못할 뿐이었다. 때문에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니, 이런 것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된다.”([연려실기술] 태조조고사본말 중)

이렇게 보면 우왕과 최영이 결국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실마리를 만든 것이다. 정치는 정의 하나만으로 재단하기엔 복잡한 일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우왕은 자신을 부정하고 멸시한 왕실과 귀족, 나아가 왕조에 복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려왕조에 충성을 다하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 최영에게는 역설적 결과였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이인임이야말로 오히려 무너져 가는 고려왕조를 지탱한 최후의 기둥이었다. 이인임이 계속 집권했다면 고려는 껍데기만이지만 존재 자체가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우왕은 왕씨였는가?


▎고려의 충신 최영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무민사. 최영의 딸은 우왕과 혼인했다.
우왕의 일생에는 애정이 결핍돼 있었다. 1371년 신돈이 처형됐을 때 그는 7세였다. 신돈이 기르던 그를 공민왕은 명덕태후의 거처로 옮겼다. 그의 생모는 신돈의 비첩 반야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실제로 돌본 것은 유모 장씨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본명은 김장(金莊)으로서 노비출신이었다. 나주 호족으로서 동지밀직, 경상도도순문사에 오른 김횡이 그녀를 신돈에게 바쳤다.

왕위에 오르자 우왕은 그녀의 은혜에 보답했다. 많은 재산을 하사한 것은 물론, 1376년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책봉했다. 국대부인은 왕의 외조모, 또는 왕비의 모친이나 조모에게 하사하는 정3품의 칭호이다. 왕실 여성을 제외한 여성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칭호였다. 1377년에는 글을 내려 “옛날에 어머니가 불행히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 내가 어리고 약했으나 오직 네가 조심해서 보호하여 부지런히 했기 때문에 진실로 오늘의 경사에 이르렀으니, 잊지 못할 은혜를 두텁게 하고자 한다”(<고려사> 우왕 3년 11월)고 치하했다. 그러나 그녀는 1379년 우왕을 대리한 이인임과의 권력투쟁에 패해 처형됐다. 이때 우왕은 “이 여자가 나를 길렀으니 곧 나의 어미이다. 아들이 그 어미를 어찌 살리고자 하지 않겠는가?”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또 울면서 “그대들이 이미 나를 임금으로 삼았으니, 내가 한 사람의 유모를 구하지 못하겠느냐. 그녀를 놓아 보내고 다스리지 말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었다. 노국공주가 공민왕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였던 것처럼, 유모 장씨는 우왕이 이 세계에서 발견한 유일한 영혼의 안식처였다. 그것이 사라지자 그는 극도로 잔인한 인간으로 변모했다.

그런 우왕을 마지막까지 감싼 것은 최영의 딸 영비(寧妃)였다. 우왕이 처형당할 때 영비는 몸을 날려 그를 구하려고 하였다. 어떤 읍리(邑吏)가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겨 막았다. 그러자 영비는 “너 같은 것이 어찌 감히 내 몸에 손을 대어 더럽힌단 말이냐”라고 크게 꾸짖고 소매를 찢어 버렸다. 주위에서 보는 자들이 위축됐다고 한다.(<임하필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그러나 그녀와 우왕의 인연은 매우 짧다. 그녀가 우왕의 비에 봉해진 것은 1388년 3월이었다. 그해 1월 무진정변으로 최영이 전권을 장악하자, 우왕은 최영의 딸과 혼인하고자 했다. 그것이 왕권을 지키는 최선의 방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최영은 자신의 딸이 서녀임을 들어 극력 반대했다. 결과적으로 이 결합은 불행한 것이었다. 위화도회군이 발발해, 그녀의 궁궐 생활은 불과 3개월 남짓으로 끝났다. 최영이 체포돼 유배되자, 6월 들어 회군파 장군들은 영비의 출궁(出宮)을 요청했다. 그러자 우왕은 “만일 영비를 출궁케 한다면 나도 마땅히 함께 나갈 것”이라고 고집했다. 장군들은 그들을 모두 강화로 보냈다. 우왕이 죽자 영비는 “10여 일간 먹지 않고 밤낮으로 울며, 밤에는 반드시 시체를 안고 자며, 쌀을 얻으면 번번이 정하게 찧어서 전(奠)을 드렸다”고 한다.([고려사절요])

우왕이 죽을 때 자신이 진정한 왕씨, 즉 용의 자손임을 증명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왕 씨의 혈통을 받은 자는 왼쪽 겨드랑 밑에 금비늘 세 조각이 있다고 하였다. 신우가 강릉에서 죽고 신창이 강화에서 죽을 때에 모두 이 표적이 있었다고 한다. 차식(車軾)이 고성군수(高城郡守)가 되었을 때, 양사언(楊士彦)의 장인 이시춘(李時春)이라는 자는 나이가 70이었다. 매양 말하기를, 그의 증조모가 강릉에 살았는데 나이가 거의 90세였고, 자기 나이 12살 때 선왕(先王=우왕)이 그곳에서 참형을 당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가봤더니, 왕이 형벌을 받을 임시에 여러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왕씨는 본래 용의 후손이다. 왼쪽 겨드랑 아래에 반드시 세 개의 비늘이 있어서 대대로 표적을 삼는다’하고, 드디어 옷을 벗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왼쪽 겨드랑 아래에 과연 세 개의 비늘이 있었는데, 금빛이며 크기가 동전만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슬퍼하였다 한다.”([연려실기술] 태조조고사본말 중)

그러나 조선 후기 학자 남극관은 “신우에게 용의 비늘이 있었다고 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무식한 사람들의 허황한 이야기이니, 더욱 깊이 따질 가치가 없는 것이다”라고 일소에 부쳤다. 우왕이 공민왕의 혈육이 아니라는 주장은 조선시대 내내 뜨거운 감자였다. 그것이 조선 건국의 핵심 명분이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정몽주를 비롯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운곡 원천석의 견해가 정론으로 인정받아 왔다. 이황이 그런 태도를 취했다. “퇴계의 편지에도 ‘국가가 만세를 지난 뒤에는 마땅히 운곡의 논의에 따를 것이다’ 말한 것이 있고, 상촌(象村) 신흠도 말하기를 ‘신우와 신창의 일은 마땅히 원천석의 것을 참 역사로 삼아야 된다’ 하였다.”([연려실기술] 태조조고사본말 중)

공양왕과 이성계의 일치된 이해관계


▎고려 말의 대학자인 이색의 초상화. 명나라까지 명성을 떨칠 정도로 학문이 깊었다.
고려 정부는 두 왕의 처형에 대해 명의 사전 허락을 받지 않았다. 이성계도 이 점을 꺼림칙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간관들은 첫째, 1389년 9월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는 천자의 조서가 있었다는 점, 둘째, 이들을 죽이는 것은 춘추의 법에 따르는 것으로서 난신적자는 누구나 먼저 벨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셋째, “풀을 뽑으면서 뿌리를 뽑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명분과 현실, 모든 면에서 빨리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공양왕과 이성계는 운명공동체였다.

이와 함께 우왕비왕설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첫째, 우왕의 공식적 어머니로 공포된 순정왕후 한씨의 묘 의릉(懿陵)을 철거했다. 공양왕이 즉위해 11월 19일(갑신) 태묘에 이를 고했을 때, 관련 기관에서는 이미 한씨의 신주를 철거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이색은 “이 일은 그 종말을 보장할 수 없으니 아직 천천히 하라”고 반대했다. 우왕비왕설의 진위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씨는 [고려사]에 공민왕의 후비 열전에 실려 있지 않다. 공민왕은 암살되기 불과 1주일 전에야 이미 죽은 궁인 한씨를 우의 어머니로 공포했다. 당시 한 씨는 불교식으로 화장되어 봉은사(奉恩寺) 송림에 매장된 상태로 무덤도 없었다. 우왕은 즉위 직후 한씨에게 순정왕후란 시호를 올리고, 우왕 2년(1376)에 한씨의 유골을 수습해 의릉에 장사지냈다. 죽은 한씨는 말이 없었지만, 그녀의 이름과 유혼, 유골은 정치적 정당성의 소품으로서 온갖 형태의 옷을 바꿔 입었고, 치열한 정쟁의 대상이 됐다. 역사의 밖에서 보면, 이런 정치적 행위란 도깨비짓이나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국가 또는 왕조의 운명을 좌우하는 권력의 향방이 달려 있었다.

둘째, 우왕비왕설과 관련된 인사들에 대한 조치가 취해졌다. 먼저 김속명이 복권됐다. 공민왕의 친모인 명덕태후의 어머니는 김속명의 증조부 김련의 딸이었다. 명덕태후는 김속명에게 당고모인 셈이다. 성품이 강직해 직언했기 때문에, 이인임 등 권신들이 꺼려했다. 우왕 2년, 반야가 밤늦게 명덕태후궁에 들어가 자신이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재상과 대간·원로들이 궁궐 앞 흥국사에 모였다. 이때 김속명은 “천하에 아비가 누군지를 밝히지 못한 자는 간혹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어미를 밝히지 못하는 경우는 내 아직 들어보질 못했다”고 탄식했다. 명덕태후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자 했던 이인임은 그를 죽이려고 했다. 사주를 받은 간관이 “최근 흥국사에 모여 의논할 때 김속명이 해서는 안 될 말을 입에 담아 큰 불경을 저질렀으니 국문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바랍니다”라고 탄핵했다.([김속명전]) 명덕태후의 구원으로 목숨을 건진 김속명은 문의현에 유배됐다가 10년 뒤인 1386년 죽었다.

공양왕, 이색과 손잡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다원성과 차이를 정치의 본질로 여겼다. 그러나 조선의 사림정치는 정치와 신념을 구분하지 못했다.
우왕비왕설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인물은 조민수와 이색이었다. 창왕을 옹립했기 때문이다. 조민수는 이미 제거돼 영향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이색은 아직 건재했다. 김저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색은 이숭인에 대한 탄핵을 빌미로 정국에서 발을 뺐다. 그는 항의의 표시로 별장이 있는 장단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은 실질적으로 도피였다. 그는 가능한 한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김저사건으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마침내 공양왕이 즉위할 때 왕의 동생 정양군 왕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그런데 그 장소가 하필 장단이었다. 칼끝이 이색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이색은 더 이상 무심한 태도를 가장할 수 없었다. 이제 이성계와의 대결을 더 이상 회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색은 공양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명목으로 장단에서 나와 대궐로 나아갔다. 공양왕은 그를 내전으로 불러들이고 용상에서 내려와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평생을 한가로이 놀고 있었는데 오늘날 이 자리를 얻을 줄 생각하지 못하였다. 경은 나를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공양왕은 이색을 판문하부사, 변안열을 영삼사사, 그리고 심덕부를 문하시중, 이성계를 수문하시중, 정도전을 삼사우사에 임명했다. 이를테면 정치적 반대파를 아우르는 거국내각을 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이성계파의 입장에서 보면, 공양왕이 김저사건의 진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이색과 변안열이야말로 김저사건의 실질적 주동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양왕이 이성계파를 견제할 유일한 방법은 이색, 변안열과 연합하는 것뿐이었다. 공양왕이 즉위한 날 저녁, 공양왕의 사위 강회계의 부친 강시가 내전에서 이성계파를 믿지 말라고 충고한 것은 전기한 바 있다. 이를 알게 된 공신들은 왕에게 가서 “전하께서 만약 참소하는 말을 믿으시면 곧 신들에게 죄를 주시고, 만약 신들이 가짜 왕씨를 내쫓고 다시 왕 씨를 세운 공이 있다고 여기시면, 참소하는 사람에게 죄주어 상하로 하여금 틈이 없도록 하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했다. 양자택일을 하라고 협박한 것이다. 그러나 공양왕은 측근 신하를 돌아보며 잠잠히 아무 말도 없었다. 승인도, 거부도 하지 않은 것이다.

김저사건을 계기로 이성계파는 군권을 거의 독점했다. 하지만 명분이 매우 취약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우왕비왕설은 기반이 튼튼하지 못했고, 다만 위압적인 분위기에 눌려 모두 숨죽이고 있는 상태였다. 우왕은 외양상으로나마 무려 14년간 통치했다. 이성계는 물론이고 이성계파 다수가 그의 통치기에 관직에 있었고, 그런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더욱이 유학의 종장인 이색, 귀족세력의 대표인 이인임, 그리고 무장세력의 대표인 최영이 우왕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성계파가 우왕비왕설을 들고 나와 우왕·창왕의 제거를 주장한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신흠 역시 이를 이성계파가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지어낸 억지 주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정도전과 윤소종 등이 신우를 왕씨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충성한다고 하고, 왕씨라고 말하는 자는 반역자라 하는 논의를 부르짖어 조정을 혼란하게 하고 인심을 현혹케 하여, 드디어 문학과 덕행이 있는 선비들을 살육하고 입을 봉하게 한지 겨우 5년 만에 나라가 망하였다.”([상촌집])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이색을 굴복시키지 않고선 정치적 명분을 유지하기 힘들게 됐다. 더욱이 이색의 아들 이종학은 공공연히 “공민왕께서 이미 우를 강녕군으로 책봉하고 부(府)를 세웠으며, 또 천자께서도 우에게 작위를 주었는데, 이성계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공민왕의 명을 어기고 우리 여흥왕(驪興王=우왕)을 폐하느냐”고 고창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성계파는 공양왕에게 “이색 부자가 우의 부자에 붙었던 죄를 다스려 수많은 소인들의 음모를 근절시키지 않으신다면, 전하께서도 하루도 왕위에 편안히 계실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성계파의 반격, 이색파를 척결하다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기념해 만든 태조 어보와 보관함. 어보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이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현실정치는 기본적으로 힘의 세계이다. 그러나 적절한 명분 없이는 오래 지속할 수 없다. 개미와 벌의 집단생활은 유전자에 의존하지만, 인간은 상징에 크게 의존한다. 국가와 국기, 신, 그리고 역사적 내러티브가 그런 역할을 한다. 왕조의 역사에서 혈통은 거의 신 같은 지위를 갖고 있다. 조선 건국의 역성혁명에서 우왕비왕설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1389년 12월, 좌사의(左司議) 오사충, 문하사인 조박 등이 이색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는 이색을 종합적으로 비판한 최초의 상소였다. 그동안 이색은 일종의 성역이었다. 그만큼 그의 명성이 높았던 것이다. 그런 이색이 창왕의 옹립에 찬성하고 사전 개혁에 반대한 것은 이성계파로서는 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이 때문에 이성계파는 이숭인에 대한 공격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389년 5월 우왕비왕설을 승인하는 황제의 조서, 그리고 김저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이색을 탄핵하고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상소가 비판한 이색의 죄는 네 가지이다. 첫째, 1374년 공민왕의 사후 이인임이 우왕을 옹립할 때 도왔다. 둘째, 1388년 위화도회군 뒤 조민수에 찬성해 창왕을 옹립했다. 셋째, 이종학이 우왕, 창왕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다. 넷째, 변안열, 김저와 함께 우왕을 복위시키려 했다. 이로써 “왕씨의 종사를 영원히 끊어지게 하였으니, 그의 죄악은 천지ㆍ종사(宗社)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밖의 죄도 많다. 첫째, 이색은 우왕대에 이인임에게 붙어서 부귀를 보존했다. 그래서 이인임과 임견미, 염흥방의 매관, 매직, 매옥, 토지와 노비의 점탈에 대해 아무 비판도 하지 않았다. 둘째, 우왕의 사부가 되어 많은 상사를 받으면서도 그의 폭정을 바로잡지 않았다. 셋째, 우왕의 요동공벌에 침묵했다. 넷째, 사전(私田)개혁에 반대했다. 다섯째, 창왕의 장인 이임을 천거해 외척에 붙었다. 다섯째, 유종으로서 부처에 아부했다. 여섯째, 장단에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다가 공양왕의 즉위 후 판문하에 올랐지만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

종교와 정치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견해 중 가장 편향적인 것이다. 거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가깝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래서 점점 더 신념이 확고해진다. 칼 슈미트(Karl Schmidt)가 정치를 적과 친구를 가르는 것으로 정의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색의 탄핵 사례도 그런 경우 중 하나일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정의와 진리를 추구할수록 더욱 그렇다. 조선 선조대 이후 사림정치가 피비린내 나는 당쟁으로 바뀐 것도 그 한 사례이다. 종교와 정치가 결합되면 최악이다. 정치가 언제나 파당화되고, 폭력의 경계선 위에 서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가 포퓰리즘에 의해 위협당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나 아렌트는 다원성과 차이를 정치세계의 본질로 생각했다. 정치의 시작은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너무 명백한 것이다. 이 사실이 부정될 때 전쟁과 전체주의가 시작된다.

사병 해체 노린 군권 일원화

이색에 대한 평가는 당파에 따라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이성계파는 이색이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첨하고, 거짓을 꾸며서 명예를 구하는 짓을 하더니, 마침내 또 다시 반복해 큰 죄를 짓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말선초에 이색의 명성은 확고했다. 주원장도 그의 이름을 알 정도였다. 조선시대에도 이색은 높은 추앙을 받았다. 조선 중기의 문인 박상(朴祥)의 시를 보자. “선정(先正) 한산군(韓山君)은 먼 세대 사람이건만(先正韓山世已遼) / 세상에서 썩지 않고 우뚝 서있네(人間不朽挺嶢嶢)” 그러나 이색과 이종학 부자는 유배됐다. 고난의 시작이었다. 두 달 뒤 이색은 국문을 당했으며, 조선 건국 뒤 이종학은 장살됐다. 조민수는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고, 삼척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이숭인, 권근도 유배됐다.

공양왕의 즉위 후 취해진 가장 중요한 조치는 군권의 일원화였다. 이는 장군들의 사병 형식으로 존재하는 군사력을 국가의 군대로 통합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고려의 군제와 국방 상황을 보면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볼 때, 군벌의 군사력을 해체시켜 이성계파의 통제 하에 두려는 것이었다.

이는 1389년 12월 조준의 위화도회군 이후 제5차 개혁상소를 통해 나타났다. 군제개혁을 통해 이성계파는 군권을 일원화하고 군사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잠정적인 것이었다. 이 과제는 조선 건국 뒤에도 미결 상태였다. 왕자의 난도 이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국가의 군대로 통합된 것은 태종대에 사병을 해체했을 때였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903호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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