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최치현의 우리가 몰랐던 일본, 일본인(15)] 삶의 진실을 언어로 자아낸 다네다 산토카 

우리가 분노하는 사이 봄은 여름 속으로 도망치고 

평범한 행복보다 가슴 설레는 인생 찾아 나선 ‘일본의 김삿갓’
인간이 져야 하는 두려움·고독 속에서 자신만의 자유를 갈망


▎다네다 산토카는 조선 후기 방랑시인 김삿갓에 비유될 만하다. 김삿갓 탄생 기념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이 김삿갓 복장으로 산길을 걷고 있다.
보통 사람은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현실이라는 한계가 늘 구속하기 때문이다. 여행은 돈의 문제가 아닌 용기의 문제라고 한다. 어렵게 길을 떠났더라도 어떤 구체적 목적을 얻으려 한다.

여행에서 굳이 뭔가를 찾아야 하는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심지어 나 자신을 만나고 와야 여행의 목표를 이루는 것일까? 여행을 떠나는 구체적 목적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며 인간의 밑바닥에 흐르는 고독과 두려움에 맞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응시한 시인이 있다. ‘일본의 김삿갓’이라 부를 수 있는 방랑의 하이진(俳人) 다네다 산토카(種田山頭火, 1882~1940)다.

세상을 등진 술고래는 자신의 무능함마저 매력으로 바꿨다. 그에게 인생의 보람은 삶의 진실을 언어로 자아내는 일이었다.

걷다가 머물면 마시고, 취하면 시를 썼다. 그는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현실, 이를테면 가족이나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자신만의 힘과 보폭으로 걸어갔다. 그에게 종교는 걷는 일이었고, 예술은 하이쿠(俳句)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홀로 살아가기 어렵기에 집단을 이뤄 서로 기대며 산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사회·국가다. 하지만 현대는 고독한 인간들이 점점 많아지는 추세로 간다. 스스로 택한 고독이야 많지 않겠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인간은 고독한 개인으로 환원되고 만다.

결국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가장 무거운 짐은 혼자서 짊어져야만 한다. 누가 나를 대신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본인이 아니면 누구도 대신 들어주지 않는다.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명쾌하게 하는 사람은 사기꾼이 확률이 높다. 인생에 명답(名答)은 있을지라도 정답은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불안이라고 설파한다.

고독을 사회적 낙오자들이 겪는 질병으로 인식하고 부지런히 관계망을 구축하던 한국에도 최근 들어 ‘혼술’ ‘혼밥’이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고독에 순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1인용을 별도로 파는 고깃집도 생길 정도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단어들이 일상용어로 쓰였을 만큼 ‘고독순응사회’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술을 혼자 마셔도, 여행을 혼자 떠나도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메이지(明治, 1868~1912)시대를 시작으로 다이쇼(大正, 1912~1926) 낭만시대를 거쳐 쇼와(昭和, 1926~1989)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방랑시인 다네다 산토카는 인간의 고독에 맞섰다. 홀로 탁발(托鉢)하며 길을 떠났고 독백처럼 길가에 널린 말들을 주워 담으며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한 하이쿠를 지었다.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자 끊임없이 공부하고 사색하는 사람도 있고, 심산유곡에서 면벽수도를 행하는 도인도 있다. 산토카는 그저 걸었다. 진리 같은 것이 그 길의 끝에 있으리라 믿지 않았지만 걸었다. 불안의 시대에 그는 피하지 않고 홀로 걸으며 세상과 일대일로 맞짱을 떴다. 그의 벗은 가난·피로·외로움 같은 것들이다. 어쩌면 문학은 인생 패배자들의 욕망 분출구인지 모른다.

소년 시절 어머니 잃고 ‘지옥’을 경험


▎술과 언어의 축제를 즐기다 간 시인 다네다 산토카.
그는 새로운 하이쿠 운동(New Haiku Movement)의 대표 주자였다. 계어(季語)나 5·7·5 운율이라고 하는 하이쿠의 정형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리듬감을 중요시하는 ‘자유율 하이쿠’를 읊었다.

그렇다고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구일률(一句一律)이라는 내재율이 있다. 하이쿠 잡지 [층운(層雲)]을 창간한 산토가의 스승 오기와라 세이센스이(荻原井泉水, 1884~1976)는 자신만의 내면세계를 자유롭게 노래하며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을 모토로 잡지를 만들었다.

세이센스이는 자신의 새로운 하이쿠 이론을 위해 자유(自由)·자기(自己)·자연(自然)을 강조했다. 괴테나 쉴러 등 유럽 문학에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필연적으로 일본적 감성과 서양 표현주의의 조합이었다. 바로 산토카는 하이쿠 잡지 [층운]에서 오자키 호사이(尾崎放哉, 1885~1926)와 함께 간판 하이쿠 시인으로 활약한다.

이 두 사람 하이진의 공통점은 술과 방랑이다. 목표점은 “진전(進展)한 나의 시를 쓰고 죽겠다”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시대는 틀을 깨는 단계에 와 있었다. 그들은 피를 토하듯 말을 쏟아냈다. 그들의 말 속에는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고독이란 존재가 드러난다. 자신을 극단적 상황으로 몰아간 절심함 속에서 정형의 틀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산토카는 무의미한 세상에서 홀로 술과 풍성한 언어로 축제를 즐기고 간 시인이다. 술과 여행을 사랑한 쇼와시대의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로 불린다. 산토카는 여행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길 위의 수도승이다. 그러나 바쇼의 여행처럼 예술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탁발을 하면서 받은 시주(施主)로 술을 사고 술에 취해 해롱거리는 파계승이었다.

그의 자유율 하이쿠의 특징은 일체의 기교와 형식을 배제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다. 체면이나 명성, 평가 같은 것을 모두 버리고 내려놓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예술보다는 인간의 혼, 기교보다는 말 자체로 어둠 속에서 자신만의 진실을 잡아내는 동작이 그의 시였다. 정착에 대한 동경과 방랑의 유혹, 사랑의 갈구와 고독의 유혹 사이에서 그는 늘 남들이 가지 않은 길만을 택한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그는 큰 길에서 밀려난 밑바닥 인생이었지만 세상의 좁은 문을 박차고 나와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그에게는 그를 가둘 수 있는 틀은 없었다. 그는 걸어서 길을 만들어 갔다. 그의 시에는 길에 관한 시가 많다. 인생을 길에 비유하며 끊임없이 걸었던 이유도 길을 걷는 행위 자체를 인생이라 파악했기 때문 아닐까?

산토카의 본명은 다네다 쇼이치(種田正一)다. 야마구치현(山口懸) 호후(防府) 대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 촌장을 지냈다. 아버지는 첩을 끼고 게이샤 놀이를 즐겨하다 가산을 탕진했고, 이에 괴로워하던 어머니는 산토카가 열 살 때 집 우물에서 투신자살했다.

우물에 모인 사람들은 고양이가 떨어졌다며 산토카를 쫓았다. 하지만 그는 어른들 발 사이로 어머니의 시신을 목격하고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엄청난 충격을 경험한 산토카는 이후 상처받는 일이나 괴로운 일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는 소년 시절 인생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어머니를 잃고 지옥을 경험한 남자였다. 평생 그의 하이쿠에서 뿜어져 나오는 쓸쓸함은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지 모른다.

산토카는 호후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와세다대에 입학한다. 그러나 22세에 신경증 때문에 중퇴하고 귀향한다. 당시 산토카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한 뒤 재기를 위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을 팔았다. 그는 아버지와 주조업(酒造業)을 시작한다. 그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10대 중반부터 하이쿠와 친숙해 있던 산토카는 28세부터 산토카(山頭火)라고 자칭한다. 마음속의 불길을 어떻게 폭발시킬까 하며 기다리는 머리(頭)에 불(火)을 인 산(山)이라는 뜻이다. 불가(佛家)에서 산토카는 죽은 사람을 다비(茶毘)하기 위한 불길이다.

아무튼 엄청난 아호(雅號)다. 그는 번역·평론 등 문예활동을 개시한다. 31세에는 하이쿠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해 하이쿠 잡지에 시를 게재한다. 34세에는 실력을 인정받아 하이쿠지의 편집자가 된다.

“운수(雲水)로 살며 하이쿠를 지으리라”


▎산토카는 구마모토에서 자살을 기도했다. 료칸(旅館)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구마모토의 정겨운 풍경.
사업적으로는 가산을 정리해 아버지와 함께 개업한 다네다 주조장이 도산한다. 술이 부패하는 등 2년 연속 큰 실패를 맛봤다. 빚더미와 미움과 쓸쓸함만을 남겨준 아버지는 가출한다.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지로는 남의 집 양자로 간다.

산토카는 야반도주나 다름없이 처자를 데리고 하이쿠 동호인의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규슈의 구마모토(熊本)로 건너갔다. 도쿄 지인들의 도움으로 고서점 가라쿠다(雅樂多, 후에 액자점)를 구마모토 시내에 개업하지만 이 역시 실패한다. 그로부터 얼마 뒤, 양자로 갔던 남동생이 빚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산토카는 다시 한 번 삶에서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길이 막힌 산토카는 하이쿠에 대한 꿈과 직장을 찾아 가출하듯 단신 상경해 도서관에서 근무하게 된다. 하지만 38세 때 처가의 압력으로 아내와 이혼하게 된다.

40세에는 신경증 때문에 도서관에서 퇴직한다. 다음해인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극적으로 살아남았고, 도쿄를 떠나 구마모토 전처의 집에서 더부살이한다. 42세에는 구마모토 시내에서 만취한 상태로 전철을 가로막고 급정거시키는 사건을 일으켰다. 사실상 생활고로 인한 자살 미수(未遂)사건이다.

전철에서 넘어진 승객들은 화를 내며 그를 에워싼다. 현장에 있던 신문기자들이 그를 구한 뒤 조동종(曹洞宗) 보은사(報恩寺)라는 절에 보낸다. 이 일이 인연이 돼 산토카는 출가하게 되고, 밭에 씨를 뿌린다는 뜻의 코호(耕畝)라는 법명으로 개명한다.

그는 43세에 교외의 미토리 관음당의 당수가 됐다. “나는 운수로 살고 하이쿠를 지으며 가족을 버릴 것이다.” 운수는 행운유수(行雲流水)로 떠다니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떠도는 수행승을 가리킨다. 그가 속한 조동종의 개조(開祖) 도겐(道原, 1200~1253)은 “해탈은 수행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이라며 해탈을 추구한다는 사명을 버리는 순간 비로소 사람의 마음은 잡념에서 해방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탈을 추구하지 않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오로지 좌선을 하는 지관타좌(只管打坐)를 설법했다. 산토카의 수행 방법은 도겐과는 다른, 오로지 걷는 일이었다. 1926년 4월 산토카와는 닮은 듯 다른 표박(漂迫)의 하이진 오자키호사이가 4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산토카는 호사이의 작품 세계에 공감했다. 법의와 삿갓 차림으로 철발(鐵鉢, 쇠로 만든 바리때)을 들고 구마모토에서 서일본 각지로 여행했다. 이 행걸(行乞)여행은 7년 동안 계속됐으며, 그때 많은 하이쿠가 탄생한다.

“오늘도 아침부터 행걸, 마을에서 50리 정도 걷는다. 걷고 있으면 하이쿠가 온천수처럼 솟아난다. 한 곳에 머무르기보다 나는 걸어서 여행하는 것이 역시 어울리는지 모른다.” _[산토카 행걸기(山頭火行乞記)]

처음 향한 곳은 오이타(大分). 규슈 산지를 나아가는 산토카는 여행 초기의 흥분을 노래했다. 여행지의 심산유곡 밀림의 건강함이 느껴진다. 가도 가도 싱싱한 세계의 푸르디 푸른 이미지가 넘쳐난다.

곧이어 츄고쿠(中國) 지방에서 구걸하고, 46세의 나이로 헨로(遍路)라 불리는 시코쿠(四國) 88곳을 순례한다. 쇼토섬에서는 그가 좋아했던 호사이의 무덤을 찾았다. 1930년(48세) 첫 번째 방랑을 마치고 글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자 과거의 일기를 모두 태운다. 기록도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에게 기록과 시작(詩作)은 일상생활이었다. 이 짧은 자유율 하이쿠에서도 무상한 바람이 분다. 일순간에 재가 되는 것은 일기나 인간이나 매한가지다.

“곧은 길이라서 외로워라”

1932년, 50세를 맞은 산토카는 육체적으로 행걸 여행이 어려워지자 하이쿠 동호인들의 도움을 받아 야마구치(山口) 현 작은 초암(草庵)에 들어간다. 고츄안(其中庵)이라 명명했다. 유다(湯田) 온천과도 가까운 이곳에서 7년 간 안정된 생활을 한다. 여전히 주벽(酒癖)은 심했다. 처음에 이웃들은 그를 떠돌이 승려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이름 높은 하이진이 산토카를 칭찬하고, 고츄안에서 열린 시회에 다수의 하이쿠 동호인이 모이자 점차 그를 대하는 태도가 누그러졌다.

산토카 시의 특징은 단순함에 있다. 말을 있는 그대로 잡아서 툭 던진다. 전혀 비틀지 않는다. 순간의 진실에 주목한다. 사유와 말과 행동의 일체화에서도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 예를 들면 가정·돈벌이 그리고 대부분의 편견을 다 집어던진 사람으로 속과 겉이 다를 수 없었다. 그의 말은 곧 그의 양심이자 인간 자체였다. 산토카는 사람의 마음에 깃든 고통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표현하지 않는 고통과 두려움과 고독을 말했다.

산토카에게 자극과 영향을 준 동시대 비슷한 연배의 시인들도 그와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층운]에 하이쿠를 발표하며 그와 쌍벽을 이루던 오자키 호사이는 ‘기침을 해도 혼자’라는 자유율 하이쿠를 읊으며 인간의 절대 고독을 노래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단카(短歌)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1886~1912)다. 26년의 짧은 생을 산 시인답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마음으로 이 일생을 마침이 옳지 아니한가”라며 시대의 우울을 읊었다.

일본의 개화기도 지금처럼 고독과 불안의 시대였다. 시인들은 그 시대를 온몸을 바쳐 살면서 비슷한 신음 소리를 각자의 방식대로 읊었다. 산토카의 대표적인 하이쿠는 유랑 시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まっすぐな道でさみしい
곧은 길이라서 외로워라


일반인은 ‘길이 곧다’는 것과 ‘외로운’ 것 사이의 인과관계를 알아내고 해석하려고 한다. 즉 “곧은 길이라 외롭다”고 읽어버린다. 그러나 산토카는 “곧은 길은 외로워라”고만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록 길이 굽어 돌아도 외롭기 때문이다.

끝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 길이 있다. 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를 먹고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앞날이 너무 훤히 보이지 않는가? 산토카는 이러한 곧은 길을 견딜 수 없어했다. 사람들은 길을 인생에 비유한다. 산토카의 길은 그저 걷는 길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너무 뻔하지 않은가? 그는 인생의 뭔가를 추구하기 위해서 걸었던 것이 아니었다.

“고통은 싸워서 이길 수 없으며 때려도 부서지지 않아”


▎강원도 영월에 있는 김삿갓의 묘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이미지를 연상할 수도 있다. 자신만의 길을 가기 때문에, 길동무도 없이 혼자서 가야 하기에 외롭다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인간은 외롭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도 폐부를 찌른다.

どうしようもないわたしが歩いている
어쩔 수 없이 내가 걷고 있다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걷는 이외의 것은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는 것이 인생 아닐까? 우리는 그저 목적 없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아무 목적도 없는데 곧은 길을 걸어가려니 외로운 것이다. 그 길은 끝나지 않는다. 길이 멈추기 전에 우리의 발걸음이 먼저 멈추기 때문이다.

산토카의 시에 나오는 길 위의 깨달음은 아마도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발견이 아닐까? 그렇게 단정하면 우리는 여러 속박에서 해방돼 나만의 보폭으로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발길 닿는 대로 길섶에 피어 있는 잡초에도 눈길을 주면서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는 자유는 자신만의 발걸음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 길에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남의 보폭으로 걷는다면 그것은 내가 갈 길이 아니다. 무(無)의 경지에 다다르는 문은 없다. 모든 곳이 길이며 무문의 관문을 지나가면 누구나 혼자서 그 길을 간다.

みんな嘘にして春は逃げてしま つた
모두 거짓이었다 하고 봄은 달아나 버렸다


거짓말은 잘 알지도 못하고 엉터리 정답을 편집하는 사람들이 만든다. 사랑하는 것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봄처럼 좋은 계절은 그냥 즐기면 된다. 크게 의미도 없는 일에 우리가 분노하는 사이 봄은 여름 태양 속으로 도망친다. 그 좋은 봄도 거짓말에 질려 달아나 버렸다.

봄을 잃은 슬픔을 이렇게 표현했다. 계절이 바뀌는 시절에는 인생의 허무와 무상함을 더 쉽게 느끼게 된다, 산토카에게는 술 마시는 일만 남았다. 취하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었다. 봄도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는데 인간은 어떻게 이 부조리한 인생을 견디란 말인가? 언제까지 세상에 난무하는 거짓의 언어를 들으란 말인가?

酒はいつもうまいが、春の酒よりも秋の酒
술은 언제나 맛있지만 봄 술보다도 가을 술


산토카는 걸으며 술을 마시며 하이쿠를 지으며 살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헛되게만 살아온 찌꺼기 같은 인생이다. 거기에 끊임없이 술을 퍼부어 억지로 하이쿠를 우려냈을 뿐이다.” 그는 하이쿠라는 언어의 마법에 걸린 나머지 하이쿠에 인생을 걸었다. 그의 모든 행동은 하이쿠를 짓기 위한 욕망의 해소 장치였다. 인간의 슬픔을 가장 잘 드러낸 시인이 아닐까? 산토카는 인간의 고통을 피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고통을 알아라. 그러나 고통은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때린다고 부서지는 것도 아니다. 고통은 끌어안아야 비로소 누그러드는 것이다.”

산토카를 잘 표현해주는 것 세 가지는 사케, 불교 그리고 하이쿠다. 그의 불교는 일반 불교와 달라서 ‘걷는 불교’였다. 걸으며 탁발을 했다. 하루 양식을 얻으면 더 이상 구하지 않았다.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최소한의 것들만 추구했다. 이것이야말로 종교적인 자세가 아닌가?

그에게 인생 삼락(三樂)은 술·불교 그리고 하이쿠


▎김삿갓의 친필 서신.
지키기 어려운 계율에 속박당하지 않고 자신이 정한 최소한의 원칙들만 지켰다. 해가 뜨면 산수 경관 수려한 곳을 찾아 여행하듯 탁발을 떠나고, 시심(詩心)이 솟아나면 토해내 듯 읊조린다. 석양이 지는 저녁이 오면 여관에 짐을 풀고 하루를 정리하며 사케를 마신다. 산토카의 삼락(三樂)은 걷기, 술 그리고 시였다. 머물지 못하는 유랑자를 위로하기에는 걷기가 최고였고, 술은 가슴을 적시기에 잔을 들었으며, 시는 고민을 거둬 가기에 붓을 들었다.

내가 즐겁지 않았던 나날들
내가 걷지 않았던 날들
내가 사케를 마시지 않았던 날들
내가 하이쿠를 쓰지 못했던 날들


어린 나이에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고 도쿄에서의 대학 생활은 좌절 끝에 중퇴로 막을 내린다, 다네다가(家)의 몰락과 야반도주 등 산토카는 결정적인 운명의 갈림길을 맞이했다. 그는 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헤맸으나, 늘 이상과 현실은 엄청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언제나 그리운 도쿄는 멀리 있었다. 철도를 보면 피가 끓었다. 가족을 버리고 가출에 성공하지만 대지진으로 꿈은 산산조각났다. 구마모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만 또 견디지 못하고 출가하고 만다. 예술은 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 매료되는 행위라는 말이 있다. 확실히 빛과 어둠이 존재한다면 산토카는 어둠으로 끌려들어가는 사람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신음하듯 인간의 고통을 토해냈다.

산토카라는 시인에게, 수도승에게는 경건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는 심오한 깨달음을 얻으려 고난의 도보 수행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인간이 지고 가야 하는 두려움과 고독을 달래서 자신만의 자유를 찾으려 했다. 그는 평범하고 따분한 행복보다 가슴 설레는 인생을 찾아 나섰다.

‘꿈’과 ‘희망’과 ‘미래’를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요즘이다. 믿을 수 없는 것 투성이의 시대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자신만의 길을 만들고 보폭을 정해서 산토카처럼 걸어야 하지 않을까? 산토카는 걷고 또 걸으면서 술을 마셨다. 취하면 하이쿠라는 언어의 집을 지으면서 살았던 건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시의 세계로 도망친 비겁자가 아니라 성숙한 인간이었다.

아름답고 성숙한 인간은 고난과 역경을 배척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상황에 단호하게 대항하는 것에서 삶의 참된 가치를 느낀다. 산토카는 헛걸음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평생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곧고 하얀 길, 그 길에 오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가.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1903호 (2019.0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