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3)] 로마, 도시와 국가를 초월한 제국 

로마가 낳은 중산층 지중해 도시문화 꽃피워 

인구 증가와 노예가격 상승, 영양학이 풍요와 진보를 이끌어
넓은 영토에 기초한 농업 생산력 증대, 문자·인프라·단일화폐로 거대시장 형성


▎로마 제국의 영광을 말해주는 콜로세움. 서기 80년 티투스 황제 시절 완성된 원형 극장이다. 수용인원은 5만 명 이상이었다.
21세기 로마는 역사적 유물을 간직한 이탈리아의 수도로 각인된다. 유럽의 런던이나 파리, 베를린과 경쟁하는 로마는 검투사 대결의 혈흔을 간직한 콜로세움으로 세계 각지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북부는 유럽이지만 남부는 아프리카에 가깝다고 빗댈 정도로 남북 대립이 심한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는 딱 중간에 위치한다. 선진적 밀라노와 봉건 스타일 나폴리의 중간이다.

로마는 또 기독교 신앙의 심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여 년 전 서남아시아 팔레스타인의 유태인들 사이에서 탄생한 기독교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제국의 수도 로마에 와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포교에 나섬으로써 보편종교(universal religion)로 부상할 수 있었다. 가톨릭교회 세계 본부인 바티칸은 아직도 로마의 중심에 하나의 주권국가를 형성하고 있다.

로마를 조금 확장해 생각하면 사람들은 유럽에서 장화처럼 길게 생긴 국토를 가진 이탈리아를 생각한다. 이탈리아는 현재 유럽 대륙에서 독일과 프랑스 다음으로 커다란 경제대국이다. 이탈리아하면 한국에선 패션이나 예술, 관광을 먼저 떠올리지만 실제 이탈리아 수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은 기계 산업이다. 그만큼 이탈리아는 음식과 관광이 유명할 뿐 아니라 더해 독일·프랑스· 영국과 어깨를 겨누는 산업 선진국이라는 뜻이다.

부국굴기의 세 번째 행선지로 다루는 고대 로마는 도시와 국가를 초월하는 제국이다. 화려한 과거가 누적된 도시인 로마, 또 강한 선진국 이탈리아, 이 두 개념을 모두 뛰어넘는 거대한 제국을 말한다. 지리적으로 이 제국의 출발점은 로마란 도시였고, 제국의 중심은 이탈리아 반도였다. 실로 고대 로마는 현대의 영국·독일·프랑스·스페인은 물론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포함하는 거대한 영토의 제국이었다.

로마는 그야말로 유라시아 대륙 서반부에 만들어진 최초의 ‘천하통일(天下統一)’ 대국을 이룬 것이다. 물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도 유럽과 아시아·아프리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다. 그러나 로마만큼 체계적으로 제국을 형성한 뒤, 장기간 지배하면서 향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반을 다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건립한 것은 기원전 753년이다. 로마도 그리스처럼 ‘왕들의 시대’를 경험한 다음, 기원전 509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로마 공화정을 유지한다. 그즈음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는 물론 점차 유럽 대륙과 지중해 전역으로 지배의 범위를 넓혀가는데 성공한다.

칼 마르크스, “로마는 노예 착취 경제”


▎[자본론]을 통해 자본주의의 소멸을 예견한 칼 마르크스. 그는 고대 로마를 노예 착취 경제라 규정했지만 이를 반박하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아우구스투스가 부상하면서 로마의 정치체제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뀐다. 이후 유명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476년까지 황제의 통치는 지속됐다. 물론 과거 그리스의 영역이었던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비잔틴이라는 이름으로 15세기까지 유지됐다. 일반적으로 고대 로마 문명을 말할 때는 공화정과 제정을 포괄하는 기원전 5세기부터 서기 5세기까지의 1000여 년을 지칭한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지중해를 포괄하는 거대한 지역을 로마의 이름으로 1000년 동안 지배했다는 사실은 대단한 업적이다. 서로 경쟁하는 도시 국가로 분열됐던 고대 그리스와 비교해 봐도 로마 제국은 하나의 중심으로 힘을 집중시키는 능력을 보인 셈이다. 이후 유럽을 하나로 통일한 사례가 없다는 사실은 로마 제국이 얼마나 예외적인 존재였는지를 보여준다.

역사의 상상에서 로마 제국이 전투력으로 독보적 존재였다면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낙후된 고대 세계의 상징이었다. 고대 그리스는 해양세력의 전형으로 지중해의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무역 제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존 힉스와 같은 경제학자는 1968년 출간된 [경제사의 이론](A Theory of Economic History)에서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가 상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상업경제의 모델을 통해 근대 경제에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반면 고대 로마는 중앙에 권력을 집중하는 군사 제국이었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이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했던 ‘자급 경제’(subsistence economy)라고 학자들은 이해했다. 19세기 칼 마르크스와 같은 영향력이 강한 사상가는 고대 로마의 경제를 기본적으로 노예 착취 경제로 생각하는 틀을 만들었다. 전쟁을 통해 공급한 노예들이 생산을 담당한 덕분에 로마는 군대를 동원해 계속 제국을 확장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는 시각이다.

20세기 막스 베버 또한 로마 경제의 정체(停滯)라는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베버가 마르크스와 다른 점은 고대에도 일부 자본주의적 행태가 존재했다고 봤다는 것이다. 베버는 고대사회가 노예 노동에 의존하더라도 외부의 부를 중앙으로 흡수하는 ‘정치적 자본주의’가 존재했다고 생각했다. 또 순수 상업에만 의존하는 자본주의의 유형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물론 당시의 정치·상업자본주의가 근대에 등장하는 산업자본주의와는 다르지만 말이다. 베버도 제한적 고대 자본주의가 경제발전을 가져오기는 무리였다는 입장이었다.

마르크스나 베버처럼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과학의 선구자도 사실은 제한된 자료와 지식으로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을 고대 로마에 투영했을 뿐이었다. 적어도 1980년대까지 로마 제국에 대한 현대인의 경제 지식이란 여러 곳에 흩어진 드문 자료를 종합해 내리는 결론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 40여 년 동안 고고학의 발전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졌다. 커다란 발견은 두 가지다. 우선 고대 로마 시대의 경제 수준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아 사람들은 비교적 풍요로운 삶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천년에 걸친 시간대에서 로마 경제는 계속 정체했던 것이 아니라 한동안 발전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퇴보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고고학의 증언, ‘로마는 가난하지 않았다’


▎제국 로마의 전성기 때 번성한 도시들을 점으로 표현했다. 로마는 이 인구를 감당할 농업 생산력을 갖추고 있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이런 추정은 고고학의 기술적 발전으로 특정 지역의 주거 형태와 토지 이용 상태를 추적하기가 용이해지면서 가능해졌다. 현재까지 제시된 연구를 종합해서 살펴보면 이탈리아반도의 인구는 기원전 3세기부터 불어나기 시작해 계속 늘어나다가 갑자기 서기 2세기부터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인구 증가는 경제적 풍요를 반영하는 지표다.

혹자는 이탈리아 반도가 제국의 중심이기에 다른 지역에서 노예를 끌어와 인구가 늘었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동시대의 라인강 유역이나 영국처럼 제국의 주변에서도 비슷하게 인구 증가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로마 제국의 전체 인구는 서기가 시작될 무렵 6000만 명 수준까지 증가한 것으로 보이며, 일부 학자는 1억 명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근대에 돌입하기 전까지 같은 지역에서 이 정도의 인구 밀도를 발견할 수 없다. 로마 제국의 경제발전이라는 현실은 인구로 봤을 때도 명백해진다.

물론 인구가 늘어나면 개인은 오히려 가난해질 수 있다. 그러나 로마의 몇 가지 지표들은 개인의 생활수준 역시 2세기까지 꾸준히 상승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서기 1~2세기에 노예의 공급이 풍부했지만 가격은 계속 상승했다. 노예 가격은 일반적으로 기초 생존을 보장하고 난 뒤 미래의 노동이 가져올 현재의 가치를 의미한다. 노동 공급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노동 가격의 상승은 경제발전을 뜻한다.

보다 이해하기 쉬운 지표는 고고학이 밝혀내는 그 당시 사람들의 영양 상태다. 이는 동물 뼈의 분량으로 고기 섭취를 예측하는 방법인데 여기서도 제국의 기반인 이탈리아나 점령당한 지역 모두 고기의 소비량이 늘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로마 제국 각지의 해변에서 볼 수 있는 생선 양식장이나 생선염장 시설도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채소와 과일의 소비량도 늘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 로마인들은 그 이전의 사람들보다 훨씬 잘 먹고 건강한 삶을 누렸으리라 짐작할 만한 증거들이 속속들이 밝혀진 것이다.

과연 로마 제국 사람들이 이렇게 예전보다 더 잘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부자들이 노예를 착취해서만도 아니고, 또 제국 중심 이탈리아가 주변부를 수탈해서만도 아니다. 실제 당시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구가 늘어나고 개별 소비량도 증가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1인당 국민소득이 늘어난 셈이다.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맬서스의 함정’을 벗어나야 한다. 인구가 늘어나도 식량 생산이 그보다 빨리 증가하지 않으면 두당 식량 소비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함정 말이다. 이런 함정에 빠지다 보면 일명 ‘드브리스 농민 모델’이 등장한다. 경제사학자 드브리스(Jan de Vries)는 인구가 증가해 식량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면 농민들이 생산한 작물을 시장에 내다 팔지 않고 모두 스스로 소비해 버린다고 설명한 바 있다.

우리는 고대 바빌로니아와 그리스 편에서 이미 고(高)부가가치 농산품이 이런 함정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보았다. 서남아시아 바빌로니아에서는 야자대추가, 그리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포도와 올리브가 이런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같은 도시국가는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을 수출해 곡식을 수입했다. 국제 분업으로 발전을 이룩하는데 성공한 사례다.

로마 제국은 이들보다 더 광범위한 차원에서 맬서스의 함정을 벗어난 경우다. 국제 분업은 제국의 중심만 발전시킨 것이 아니었다. 로마 지역이나 이탈리아뿐 아니라 제국 전역에서 포도와 올리브 농사가 일반화됐기 때문이다. 같은 면적의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 포도나 올리브는 다른 곡식보다 5배 정도의 열량을 생산할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빵뿐 아니라 포도주를 마시고 올리브기름을 먹는 식생활로 전환만 한다면 같은 면적에서 5배나 많은 칼로리를 생산해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게다가 당시 시장 가격으로 같은 칼로리라면 곡식에 비해 올리브기름은 두 배, 포도주는 다섯 배의 액수였다. 이는 간단히 말해 같은 면적에서 농사를 지을 때 곡식보다 올리브나 포도를 키워 기름과 술을 만들면 10~25배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는 의미다. 물론 곡식 농사보다 올리브와 포도나무 농사는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입해야 한다. 생산 과정도 노동집약적이지만 남는 장사였던 것이다. 따라서 포도와 올리브는 로마 제국 경제 부흥의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수도 로마의 전성기 인구는 100만 명


▎이탈리아 남부의 폼페이 유적. 이곳에는 500개 이상의 도시 엘리트 가문이 존재했다.
중산층이란 무척 현대적인 사회계급의 개념이다. 중산층 중심의 사회란 마르크스가 비난했던 초기 자본주의를 넘어 20세기에나 들어와야 등장하는 개념이다. 처음에는 소수의 부자 부르주아와 다수의 무산계급 프롤레타리아가 대립하는 것이 자본주의였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이 되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양극의 사이에 중산층이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형식으로 진화했다.

프랑스의 저명한 로마학자 벤(Paul Veyne)은 [그리스-로마 제국]이라는 저서에서 ‘중산층’의 존재를 논의한다. 일반적으로 로마 사회의 신분제를 분석할 때는 귀족이라 할 수 있는 ‘파트리키’와 자유인이자 평민인 ‘플레브스’로 나눈다. 그러나 벤은 대다수의 자유인 가운데 중산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간 플레브스’(Plebs media)가 존재했으며 이들은 ‘가난한 플레브스’(Plebs humilis)와 대비됐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회적 구분이 중요한 것은 농업 중심 사회에서 존재하는 파트리키/플레브스의 계급적 대립이 로마 제국의 경제발전 이후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중산층/빈곤층의 대립으로 전환됐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나 고린도 전서에 등장하는 기독교인들은 전형적인 로마 제국 중산층의 모습이다. 귀족은 아니지만 자신의 주택과 작업장, 일터를 소유하며 여행도 다니는 중산층 말이다.

로마 제국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문화를 꽃피웠다. 제국 안에 도시의 수가 2500여 개에 달했으며 이탈리아에만 400개가 넘었다. 그리스에서 시작한 도시 문화를 지중해 전역으로 확장한 셈이다. 이들 도시에는 대단한 규모의 공적 건물들이 지어졌다. 신전과 포럼(포럼은 시장의 기능을 수행했다), 극장과 경기장, 공중목욕탕 등은 로마 제국 도시의 스타일과 정체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도시는 유럽 서북부 영국의 론도니움(런던)부터 서남아시아 시리아의 사막 팔미라까지 비슷한 모습을 자랑했다.

로마 제국에서 10~20만 정도 인구 규모를 갖는 도시는 6개 정도 있었고, 20~50만 인구 규모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서남아시아의 안티오크 세 군데였다. 제국의 수도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인구 100만에 달하는 인류 사상 최대 도시를 형성했다. 이 규모는 중국 송나라 시대나 19세기 초 영국 런던이나 일본 에도에 와서야 다시 도달하는 엄청난 수준이다. 반면 중세가 되면 로마라는 도시의 규모는 인구 3~4만 정도로 대폭 줄어든다. 고대 황금시대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수준이 아닌가.

중산층보다 귀족의 노예가 부유했다


▎로마의 작가이자 정치가인 키케로의 흉상. 로마의 중산층은 키케로의 글을 소비했다.
로마는 이처럼 제국을 넓히면서도 늘어나는 인구를 고열량 작물을 통해 먹여 살렸고 도시의 그물을 만들어 평화롭고 안정적인 태평천하를 구가했다. 로마의 도시들은 성벽을 쌓지 않아도 될 정도로 평화로운 세상에서 열린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제는 주변부에 대한 착취와 노예 수탈만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고대 로마 제국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날 때가 됐다. 인구가 집중된 대도시의 삶이라는 것은 사회 분업이 고도로 발달된 생활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은 상공업을 천박하게 여겨 발전이 더뎠다고 해석해왔다. 실제 그리스와 로마에서 명예로운 활동은 전쟁과 정치였고 문학과 예술이었다. 상공업은 내놓고 자랑할 만한 활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많은 고대 문명처럼 로마도 물질적 욕심이란 인간성을 녹슬게 하는 부정적 요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의 파트리키 귀족은 노예를 활용해 상공업이나 사업을 추진했다.

이런 관점에서 도시 폼페이를 사회적으로 분석한 자료는 무척 흥미롭다.

이 도시에는 강한 권력의 귀족 가문이 100개쯤 있었는데, 실제 유사한 규모의 저택을 가진 가문은 500여 개에 달했다는 것이다. 이 귀족들의 저택은 10여 명 정도의 가사 노예를 부릴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이는 도시의 엘리트를 형성하는 100여 개의 가문을 제외하고도 400여 개의 가문이 상당한 부를 누리며 생활했다는 증거다.

이들 성공한 가문의 대부분은 주인을 도와 사업의 비서·회계·대리인 등의 역할을 담당했던 노예들이었다. 노예는 저축을 통해 해방의 비용을 지불한 뒤 자유인이 될 수도 있었다. 달리 말해 로마 사회는 노예에게도 급격한 신분 상승이 가능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체제였다는 것이다. 요즘도 재벌의 비서가 자영업자보다 한몫 챙기기 수월하듯이 로마 시대에도 중산층보다는 귀족의 노예가 성공하기 더 쉬웠던 모양이다. 이 정도 신분 상승의 개방성은 이후 중세사회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풍요와 번영을 가져온 로마의 비결로 확고한 법체계를 꼽을 수 있다. 로마 민법은 그 이후 만들어진 유럽 대륙 근대법의 토대를 이루었다. 특히 로마는 다른 고대사회에 비해 강한 소유권을 정립했다. 토지에 대해 사용권(usus), 임대권(fructus), 처분권(abusus) 등을 구분해 제시했던 것이다. 토지를 직접 활용하거나 빌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사고파는 권리까지 확고하게 법으로 보장한 셈이다. 또 모든 계약을 쉽게 체결하고 이행하도록 국가에서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어 시행했다. 로마 제국은 민법뿐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도 법치의 형태를 취했다.

지식사회와 발전국가 모델로 제국을 유지


▎로마는 근교 저수지에서 식수를 끌어올리는 상수로를 건설했다. 최고 80㎞에 달하는 수로도 존재한다.
위에서 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통합성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로마 제국](Empire gréco-romain)이라는 표현을 책 제목으로 강조했다. 레슬링에 그레코로만형이 있듯이. 로마 제국은 분명히 그리스의 문화적 유산과 정치적 전통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와 로마 사이에는 확실한 규모의 차이가 존재한다.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의 수출 사례가 그랬듯이 법치나 행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식량을 수입해 아테네 시민을 먹여 살리는 문제와 로마 시민을 지원하는 문제의 본질은 같았지만 규모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로마는 20만 명의 남성 시민에게 400㎏의 곡식을 매달 33㎏씩 나누어 배급했다. 시민은 개인 배급증서를 들고 45개의 배급소 가운데 한 곳에 가서 식량을 받아야 했고, 로마시 정부는 이를 행정적으로 관리해야 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지 않도록 하루 평균 150여 명씩 30일로 나누어 배급을 진행했다.

로마는 또 군부를 운영하기 위해 30만 명에 달하는 장정(壯丁)의 기록을 관리해야 했다. 특히 서기 107년 직업 군인 제도가 정착하기 전에는 누가 얼마만큼의 재산을 갖고 어떤 건강 상태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따라서 로마는 5년에 한 번씩 인구와 재산을 조사하는 센서스 제도도 운영했다.

로마 제국은 드넓은 영토를 일률적으로 관리하는 행정체계를 갖췄던 것이다. 이처럼 배급을 진행하고 재산과 군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가 문맹을 깨고 문자를 통해 기억을 관리하는 ‘지식사회’로 진입해야 한다. 로마의 ‘중산층’은 세네카·키케로·바로 등의 유명 작가들이 겨냥하는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했다.

또한 로마 제국의 정부는 사회의 경제활동에 결정적인 인프라 제공에 적극 나선, 효율적 ‘발전국가’의 모델이다. 로마 정부는 제국의 전역에 길을 닦았다. 그러면 사람들은 길 주변에 농장을 만들어 도시 시장에 농산품을 갖다 파는 일에 집중했다. 정부는 또 항만을 건설해 지중해 해운을 지원했고 거대한 창고를 지어 물류가 원활하게 작동하는데 기여했다. 로마 시대에 만든 수로(水路)는 근대가 될 때까지 지중해의 많은 도시에 물을 공급하는 기능을 지속했다.

마지막으로 로마 제국은 하나의 화폐 체제를 형성해 거대한 영토가 하나의 시장으로 발전하게 만들었다. 로마 화폐 체제는 잔돈으로 동전을 사용하고, 중간 단계에는 데나리우스(denarius)라 불리는 은화가 있었고, 고액권으로 아우레우스(aureus)라는 금화를 찍었다. 금화 하나면 보통 사람 1년의 식량 가치였다고 한다. 로마 제국 안의 화폐 사용은 중심 지역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주변의 소규모 거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가 받은 보상금인 은화 30냥은 당시 한 달 노동의 가치였다고 한다.

물론 문자를 통한 지식사회의 형성, 효율적인 중앙정부의 인프라 건설, 통일된 화폐를 사용하는 거대 시장의 부상 등도 모두 경제발전에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이들 변화는 모두 경제발전의 과정을 동반하는 현상으로 발전의 원인보다는 결과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초기, 기원전 3세기에 시작되는 인구 증가와 경제 발전의 근본 동력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로마의 쇠퇴는 기후변화 탓?


▎조셉 노엘 실베스트르의 작품인 ‘야만족에 의한 로마의 함락’. 410년 벌거벗은 서고트족 병사가 서로마를 침략하는 모습을 그렸다.
로마 제국 경제에 대한 전통적 사고를 바꿔 새로운 측면을 강조한 그로닝겐 대학의 용만(Willem Jongman)은 두 개의 가설을 내세운다.

하나는 로마 제국주의다. 앞에서 여러 번 지적했듯이 로마가 주변을 지배해 주변의 부를 흡수함으로써 초기의 경제발전이 이뤄졌다는 가설이다. 이 수탈을 통한 초기 축적은 마르크스나 베버가 봤던 고대 로마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이 초기 축적을 바탕으로 제국 전역에서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이제는 부정하기 어려울 뿐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현실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중심이 주변을 착취해서 발전했다면 주변의 인구나 경제수준은 타격을 입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주변 역시 중심과 마찬가지로, 심지어 로마의 지배 이전에 이미 인구 증가와 경제 발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주변 지역이 제국에 포함돼 착취를 당했다거나 혹은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렸다는 식의 논지는 모두 취약해지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초기 경제발전을 설명할 수 있을까.

세련된 이론으로 열심히 논쟁을 벌이는 수많은 학자들은 다소 실망이겠지만 간단한 기후의 변화가 부의 증대를 가져왔다는 가설이 상당히 유력하다. 하버드대 맥코믹(Michael McCormick)의 연구에 의하면 로마 시대는 초기에 기후가 따뜻해져 농업에서 혜택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경제를 분석하는데 적절한 기후는 기술 발전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 같은 생산 요소를 투입하더라도 더 많은 생산물을 얻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초기의 놀라운 발전과 마찬가지로 서기 2세기부터 나타나는 로마 경제의 쇠퇴기에도 기후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때부터 유럽의 날씨가 차가워지면서 농사도 더욱 어려워졌다. 덧붙여 2세기 안토니우스 역병(165~180년)으로 인구가 감소하면서 서로마 제국은 돌이키기 어려운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반면 4세기부터 동로마 제국은 다시 발전의 궤도에 오르는데 이 또한 같은 기후의 냉각화가 서남아시아에는 호의적으로 작용했던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로마 제국의 영광은 단순히 정치나 군사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고대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하나로 통일해 평화 속에 풍요를 누리게 했던 고대 부국굴기의 정점이다. 많은 경제사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이런 풍요로운 도시 문명은 근대 네덜란드나 영국에 이르러서야 다시 나타났다. 이렇게 보자면 근대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다시 시작된 것도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1903호 (2019.0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