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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분석 | 한국사회 대진단] 직접민주주의의 부활인가, 포퓰리즘의 대두인가 

‘왕이 없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현대판 신문고’ 국민청원제, 입법·사법권 무력화한 여론재판 변질
감성 여론에 국정 휘둘리면 정파 초월한 범국가적 비전 실현 어려워


▎대한민국을 뒤바꾼 촛불은 광장정치와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1. 직접민주주의를 정권 정당화 논리로 삼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정부’를 자임한다. 2016~2017년의 촛불을 한국 민주주의를 살린 ‘촛불 혁명’으로 찬양한다. 이런 단순논리를 따른다면 정권에 반대하는 행위는 촛불과 민주주의를 거역하는 망동(妄動)이 된다. 실제로 정권에 대한 비판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이런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문 정부가 촛불 정신을 독점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설령 촛불 정부라고 가정해도 민주다원사회에서 제기되는 합리적 비판에서 면책될 수는 없다. 촛불에 의탁하는 문 정부의 자기합리화 논리는 누적된 정책실패가 부른 국정 난맥 앞에 빠르게 퇴색하고 있다.

촛불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광장정치가 분출하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이 두드러졌다. 현실 권력이 보수에서 진보로 옮겨가면서 권력 지형도 요동쳤다. 정부여당이 50년 집권론을 넘어 100년 집권론을 꺼낼 정도였다. 그러나 엄밀한 정치학적 정의(定義)에 의하면 촛불은 혁명이 아니다. 촛불이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바꾸기는커녕 그 진행과정 전체가 철저히 현행 6공화국 헌법제도 틀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적 틀은 민주공화국의 근본이념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이다. 정치사상적 맥락에서 대한민국 헌법 질서의 근본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자유주의의 삼각 구도로 정립된다. 민심의 압도적 지지를 향유하며 출범했던 문재인 정부는 이 삼각 구도에서 민주주의를 가장 중시한다.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보다 민주주의를 정권의 최고 정당화 근거로 삼는다. 국민의 의사야말로 국정의 최종 잣대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들리는 현 정부 방식의 국민 주권론에는 심각한 맹점이 있다. 현대 민주주의가 공화주의 및 자유주의와 결합해 실제 내용을 갖게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직접민주주의야말로 참된 민주주의’라는 견해를 거듭 내비친 문 대통령이 전형적인 사례다.

실제로 청와대는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장(場)으로 국민 청원 게시판을 적극 활용한다. 디지털 혁명이 현대판 신문고를 가능케 한 것이다. 국가 현안 결정에서도 민심을 수렴하는 공론화 절차를 강조한다. 원전공론화위원회나 곧 출범할 국가교육위원회도 비슷한 맥락의 산물이다. 국정의 난관을 국민 여론을 동원해 돌파하려고 하는 일관된 행태를 보인다.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과 소통하려는 노력 자체는 바람직하다. 국민의 국정 참여는 시민의식의 활성화에도 보탬이 된다. 민심이 정부 정책에 실시간으로 환류(還流)된다면 행정의 관료화도 억제된다.

삼권분립의 근간 흔드는 여론정치의 독배(毒杯)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임금에게 모든 갈등 해결을 맡기는 현대판 신문고나 다름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 사진:국민청원게시판 캡처
그러나 국민청원으로 상징되는 직접민주제가 오용되거나 공론화 과정이 권력에 오염되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국정현안이 감성적 여론재판에 휘둘리고 중·장기적 국정과제의 지속성이 도전받게 된다. 국익에 필요하지만 민심을 거스르는 거국적 정책의 입안이나 추진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특정인을 겨눈 마녀사냥이나 특정 소수 집단을 겨냥한 ‘다수의 전제(專制)’가 현실화한다.

가장 큰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추동하는 직접민주제 방식의 여론정치가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위험성이다. 직접민주주의의 부활이라는 미명 아래 민주주의의 핵심인 삼권분립과 법치주의가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는 촛불 민심과 적폐 청산을 앞세워 사법부와 언론을 길들이고 시민사회를 순치시킨 후 입법부를 무력화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의 국가적 자살사태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국정 무능과 적대정치로 귀결하면서 나라가 황폐화하는 최악의 결과를 보여준다. 민주주의 아래서 ‘선출된 독재자’가 포퓰리즘을 숙주 삼아 상당한 인기를 업은 채 군주처럼 통치하는 국가들도 갈수록 늘어난다. 전 지구적 차원의 거대한 퇴행이 현재진행형이다. 다수 민중을 내세운 지도자의 전횡을 민주주의가 부추길 수 있다는 역설은 대중 민주주의의 최대 딜레마일 것이다.


▎‘촛불 정부’를 자처하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졌다. 지난해 3월 민주연구원 주최로 열린 개헌과 직접민주주의 토론회. / 사진:연합뉴스
한국의 대통령중심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로 불린다. 모든 권력이 서울과 청와대로 집중되는 ‘소용돌이 정치’ 구조의 사회문화적 관행은 권력 피라미드의 정점인 대통령의 위상을 더욱 강화한다. 한국인의 ‘마음의 습관’ 밑바탕에는 대통령을 왕으로 여겨 만능 해결사 역할을 기대하는 잠재의식이 남아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온갖 요구가 빗발치는 현실은 대통령을 현대판 나라님으로 여기는 국민적 무의식을 반영한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집행이 국회와의 입법 협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대치되는 경향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유산을 악화시킨다.

하지만 본래 ‘제왕적 대통령’은 선출된 대통령이 군주처럼 강대한 권력을 휘두르는 후진적 정치풍토를 꼬집는 촌평이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원래 형용모순에 가까운 말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프레지던트(President)는 결코 왕이 아니다. 영어 president는 라틴어 praesidere에서 나왔는데 ‘앞’을 뜻하는 prae와 ‘앉다’를 의미하는 sedere의 결합이다. 문자 그대로 ‘앞에 앉은 사람’으로서 회의의 사회자나 주재자를 지칭한다. 프레지던트는 권력자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아니라 토론과 협의(協議)에 기초한 민주적 협치 개념의 산물이다. 프레지던트를 ‘대통령’이라는 권위적 기표로 옮겨 당연시하는 언술행위 자체가 한국 사회의 비민주성을 함축한다.

2. 직접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경계선은 너무나 얇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왕정의 유혹을 끝까지 거절하고 민주주의를 지켰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제를 도입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왕정을 단호히 거부했다. 독립전쟁의 영웅 조지 워싱턴은 황제로 즉위하라는 권유를 일축하고 선출직 초대 대통령으로 국가에 봉사한 뒤 보통 시민으로 돌아갔다. 왕이 되기를 거부한 진짜 프레지던트였다. 워싱턴이 미국의 국부(國父)로 존경받는 이유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카리스마적 정치 리더십이 선출된 독재자로 변질돼 유사(類似) 왕정의 부활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여기서 대통령 권력을 견제하는 강력한 직선(直選) 의회와 여론에서 독립된 간선(間選) 법원이 상징하는 삼권분립의 원칙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자유언론이라는 권력 감시견(監視犬)과, 권력기구에서 자유로운 시민사회가 권력과 건강한 긴장관계를 맺었음은 물론이다. 입법·사법·행정 삼권(三權) 사이의 견제와 균형, 삼권과 시민사회의 견제와 균형이 법치주의와 시민종교가 낳은 마음의 습관과 결합해 미국 민주주의가 번성했다. 미국식 혼합정의 힘은 타운홀 미팅 같은 풀뿌리 민주주의 제도가 중우정치로 변질되는 것을 막았다.

‘선출된 왕’의 출현을 경계한 미국의 국부(國父)들


▎헬렌 토머스 기자(왼쪽)가 2009년 2월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삿대질하듯 질문을 퍼붓고 있다.
존 에프 케네디에서 버락 오바마까지 10명의 미국 대통령이 명멸한 50여 년 동안 백악관 출입기자단의 상징이었던 헬렌 토머스(H. Thomas·1920~2013)는 대통령 면전에서 직격탄을 날리기 일쑤였다. 어느 대통령도 그녀의 송곳 같은 공격을 피해갈 수 없었다. 언론이 국민을 대신해 대통령에게 직접 질문을 던지면서 책임을 따져 묻지 않으면 “대통령이 왕이 될 수도 있다”는 게 토머스의 변(辯)이었다. 자유언론 없이 민주주의도 없다는 교훈을 웅변한 전설적 언론인의 탁견이었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용어가 탄생한 미국에서도 ‘선출된 왕’의 출현을 방지하는 과업은 건국 이래 최대 숙제였다.

촛불은 한국 민주주의의 광휘(光輝)이자 살아있는 시민교육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촛불이 대변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여기는 문재인 정부의 논리는 민주주의의 본질과 역사적 교훈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고대 아테네 직접 민주정이 사라지고 근대 이후 정당과 의회 기반의 대의 민주주의가 출현한 데는 문명의 흥망성쇠를 넘어서는 필연적 이유가 있다. 근대 국민국가 단계에 이르러 시민과 영토가 너무 커져 직접 민주정을 시행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속설은 피상적 이해일 뿐이다.

의회와 정당이라는 매개 장치와 독립적 사법부로 구성된 삼권분립과 법치주의를 민주주의의 뼈대로 삼은 것은 민주주의에 내재된 포퓰리즘을 막기 위해서였다. 민심은 주권의 원천이지만 변덕스럽고 감성적이기도 하므로 민중의 요구를 따르는 것만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는 없다. 만약 민심이 모든 국정을 결정해야 한다면 국가운영은 여론조사로 환원되고 만다. 디지털 민주주의 시대에 모든 국정 현안을 여론조사에 붙여 시행하는 건 기술적으론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국정이 여론조사로 환원된다면 민주질서의 핵심인 토론과 성찰, 조정과 협의의 제도적 공간은 파괴된다. 의회와 정당이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지만 포퓰리즘은 나쁜 것이다’는 단순 이분법이 유행한다. 이와 반대로 민주주의의 역사는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경계가 통념보다 훨씬 얇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고대 아테네의 흥륭과 사멸이야말로 그 생생한 증거다. 독재가 대중의 적극적 동의와 묵인 위에서 훨씬 효과적으로 진행된다는 현대 대중독재론도 의미심장하다. 디지털 민주주의의 축복은 디지털 독재의 재앙과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현대 민주주의의 주된 위기는 독재나 쿠데타에서 오지 않는다. 민주적 수단과 절차에 의거해 민주 정체(政體)가 변질되는 현상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의 죽음’을 부르는 최대 원인이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민주주의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비롯된다는 교훈은 민주주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역설이다. 비유컨대 암종(癌腫)의 본질이 인체의 생리 기제 자체의 발현인 것과 비슷하다. 민주주의에 내재한 포퓰리즘적 요소를 제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민주주의의 영원한 숙제였다. 형식적 민주주의라는 멸칭(蔑稱)으로 홀대받는 근·현대 의회 민주주의와 정당정치는 사실 고대 직접민주주의에 내장된 치명적 문제점인 포퓰리즘을 통제하려는 소중한 노력의 결정체(結晶體)이다.

아테네 해군을 전멸시킨 포퓰리즘의 교훈


▎아테네 시민들은 정치가들의 선동에 넘어가 전쟁 영웅들을 스스로 처형하는 우를 범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를 열등한 정체(政體)로 여겼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의 정치사상은 시대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민주주의에 잠재된 포퓰리즘을 경계한 통찰만은 유효하다. 포퓰리즘적 민주주의가 중우정치와 폭민정으로 이어져 나라를 망친 고전적 사례가 아르기누사이 해전(BC 406)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겨룬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 때 해상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실질적 승부처는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비롯된 ‘장군들의 재판’이었다. 이 해전에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승리했지만 침몰한 아테네 전함의 부유물(浮游物)에 아테네 해군 1000여 명이 아직 매달려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폭풍우가 다가오는 데다 스파르타군 추격에 바빴던 8명의 아테네 장군들은 구조작업에 나설 수 없었다.

최초의 승전보에 환호하면서 장군들을 영웅으로 기리는 법안을 민회에서 결의했던 아테네 시민들은 구조 지연 소식에 분노해 장군들을 재판에 회부한다. 순식간에 일어난 반전(反轉)이었다. 군중의 표변에 반대한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유일했다. 그리하여 아테네 장군 2명이 망명하고 6명은 처형된다.

정확한 사정을 장군들의 처형 직후 알게 된 아테네 시민들이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테네 시민의 변덕스러운 민심이 숙련된 자국(自國)의 해군 지휘부 전체를 제거한 것이다. 1년 후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아테네 해군은 전멸했다. 적군(敵軍)이 아니라 아테네 민주정의 포퓰리즘이 해양 제국 아테네의 멸망을 재촉했다. 포퓰리즘이 직접 민주정의 죽음을 불러온 것이다.

3. 공화정이 포퓰리즘의 폭주를 막는다


▎2017년 6월 12일 문재인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을 앞두고 자유한국당 의원들 자리에 ‘제왕적 대통령 NO’라고 쓴 종이가 붙어있다.
대한민국은 2019년 현재,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다. 1인당 GDP 3만 달러와 5000만 인구를 넘어선 세계 일곱 번째 국가다. 촛불이 증명한 바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도 찬탄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상황은 봄을 가린 미세먼지처럼 회색이다.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임에도 한국 사회는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다. 주범은 누구인가. 경제 침체에 더해 국가적 의제를 정쟁의 블랙홀로 집어삼키는 이분법적 적대정치다. 적대정치는 여야의 적대적 공존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다. 포퓰리즘적 파당 정치는 적대구조를 더 악화시킨다. 적대의 악순환이다.

흥미로운 것은 탈원전 정책과 소득주도 성장 강행에서 보듯 매우 당파적으로 구사되는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이 국익을 경시하는 차원을 넘어 국민 다수의 의사를 무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소득주도 성장같이 명백한 정책 실패에 대한 합리적 비판도 제왕적 대통령은 일축한다. 충성도 높은 열혈 지지층이 엄존하는 데다 사법부 길들이기와 언론·시민사회의 우군화(友軍化)로 정권을 보위할 강고한 이데올로기적 진지가 구축됐기 때문이다.

포퓰리즘과 대통령의 군주화(君主化)는 이처럼 긴밀한 상관관계를 맺는다. 한국 정치의 최대 적폐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교훈을 고려하면 적폐 청산을 사명으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에서 제왕적 대통령제가 강화되고 있는 현실은 이율배반적이다. 실패한 보수 정권들의 권위주의적 행태와 문재인 정부의 실상이 과연 다른가? 의문의 해답은 어렵지 않다. 한국 정치의 본원적 위기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동으로 수구적 극우 포퓰리즘이 출현할 가능성이야말로 미래의 한국 정치가 직면하게 될 최악의 시나리오일지도 모른다.

적폐 밟고 올라선 ‘제왕적 대통령’

직접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공생관계가 권위주의적 민주정을 낳는 비상한 위기상황에서는 비상한 처방이 필요하다. 민주공화국을 구성하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정이라는 세 가지 정치이념의 한국적 상호관계에 대한 철학적 탐색이 요구된다. 진정한 공화주의 철학은 자유주의의 합리적 핵심과 민주적 평등사상을 두루 담아낸다. 그러나 앞서 논의한 것처럼 문재인 정부는 민주주의 담론만을 강조한다.

문재인 정부에 우호적인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란 개념 자체가 퇴행적이라고 강변한다. 대한민국 헌법의 모태인 제헌헌법에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부재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조항이 유신헌법 때 처음 도입되었다고 지적한다. 문재인 정부가 헌법 개정안에서 ‘자유’를 삭제하려고 시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시각에서는 자유민주주의는 왜소한 형식적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유의 이념은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 가치다. 인류의 피땀 어린 투쟁과 절규가 녹아들어 간 자유의 이념은 인권과 인격의 근원을 이룬다. 대한민국 헌법의 변천사가 웅변하는 그대로다. 헌법의 핵심은 국민의 보편적 인권을 선포한 제2장이다. 기본권 존중을 핵심으로 삼는 헌법정신의 알맹이는 자유를 연결고리로 삼아 국민의 권리를 규정한다. 헌법 제10조에서 제39조까지의 기본권 조항은 ‘국민은 (특정한) 자유를 갖는다’고 선포한다. 이렇게 선명한 자유의 이념이 보편사상인 자유민주주의의 초석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자유민주주의는 결코 삭제될 수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긴장을 공화주의 담론과 교차시키면 자유민주주의를 둘러싼 논란의 본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바탕에는 국민적 정언명령이 엄존한다. 헌법 제1조 1항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그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민중의 자기 지배’로 투명하게 이해되고 있는 데 비해 공화주의에 대한 인식은 빈곤하다. 민주주의가 곧 공화주의이므로 민주공화정은 현대 민주주의와 동일한 정치사상이라는 주장을 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도식적 구분법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본질적 차이를 희석시킨다. 민주주의가 민중의 지배(kratia)를 가리키는 데 비해 공화주의는 정당하지 않은 모든 지배를 거부한다. 공화정의 핵심 규정이 비(非) 지배 자유(nondominant freedom)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민주주의가 필연적으로 소수에 대한 다수의 지배를 내포하는 데 비해 지배로 퇴행한 다수결을 비판하는 공화정은 다수와 소수의 공존을 중시한다.

‘왕이 없는 나라’는 실현될 것인가


▎지난해 7월 16일 제헌절을 앞두고 대구 동성로에서 서예가 쌍산 김동욱씨가 헌법 1조 1항을 쓰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로마 공화정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에 결여된 공화제적 요소를 발전시켜 제도화했다. 지배층의 독주나 민중의 포퓰리즘적 폭주를 제어하기 위해 혼합정을 공고화했다. 집정관, 원로원, 민회가 각기 왕정의 지도력, 귀족정의 경륜, 민주정의 활력을 대표하는 권력기구로서 상호견제와 균형 속에 나라가 발전했다.

귀족계층을 대변한 원로원·집정관과 평민계급을 대표한민회·호민관 사이 견제와 경쟁을 통한 연대야말로 로마 공화정의 주요 동력이었다. 토지 균분제와 시민군이라는 물리적 기초에다가 경쟁 계층의 화합(concordia ordinum)을 지향한 시민적 덕성(virtu)이 합쳐졌을 때 로마 공화정은 전성기를 맞았다.

공화정과 법치주의는 시민들의 평등한 자유를 가능케 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은 삶의 터전인 공화국을 자랑스러워하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따라서 조국(祖國, patria)의 반대말은 타국이 아니라 폭정이다. 여기서 조국은 공화정을 지칭한다. 결국 공화정은 시민적 덕성을 갖춘 평등한 시민들이 법 안의 자유를 누리는 정치공동체이다. 궁극적으로 이 지점에서 공화정은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모두의 정의로운 나라’로 규정된다.

문재인 정부의 최대 과오는 제왕적 대통령제와 적대 정치를 온존시킨 데 있다. 정권이 교체되었건만 소용돌이의 정치가 압축하는 청와대로의 권력 초(超) 집중 현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대통령이라는 현대판 군주가 삼권분립과 법치주의의 위에 서서 사회적 적대와 갈등을 악화시키는 현실엔 변화가 없다. 한국 현대사의 군주였던 박정희 패러다임의 종언을 외친 ‘촛불 혁명’의 지향과도 충돌한다.

민주공화국의 본질은 ‘왕이 없는 나라’다. 민주공화정의 정신과 제왕적 대통령제는 정면에서 부딪친다. 결국 민주주의의 퇴화와 포퓰리즘의 폭주를 막는 유일한 힘은 성숙한 공화정의 통합정치에서 온다. 이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실패는 대한민국의 도약을 위한 씁쓸한 반면교사가 아닐 수 없다.

-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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