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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분석 | 한국사회 대진단] 혐오와 분노로 점철된 엄숙의 시대 

‘선(善)의 고지’ 둘러싼 속물들의 진흙탕 싸움! 

김도훈 아르스 프락시아 대표이사, 사회학 박사
미래에 대한 냉소와 젠더·세대 혐오 2030에 뚜렷... 기성사회 욕망과 무한경쟁 벗어나려는 생존의 몸부림

미투와 남혐·여혐으로 촉발된 성에 대한 금기 정서가 갈수록 확산된다. 지극히 사소한 말 한마디조차 폭력과 혐오로 매도당한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펜스로 진영을 가르는 ‘자발적 격리’와 구별짓기가 횡행한다. 강요당한 엄숙의 이면에는 분노와 혐오가 뿌리내린다. 차별과 차이의 구분 없이 무조건 혐오로 몰아가는 세태는 갈등을 증폭시킨다. 증폭된 혐오는 성별과 세대의 경계선에서 충돌한다. 소통(疏通)이 금기시되고 용인(容認)이 실종됐다. 통용 불가능한 시대의 주역, 특히 청년들의 분노는 어디에서 비롯됐나.


▎지난해 7월 ‘홍익대 누드 크로키 수업 몰카 사건’ 시위대가 서울 혜화역 인근에서 규탄시위를 벌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필자는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사회현상을 탐구하고 정부나 기업의 전략을 컨설팅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업을 수행하며 사람들을 만나보니, 더러 데이터 분석 업무가 세상의 전부를 조망할 수 있는 거대한 팬옵티콘(Panopticon) 같은 것인 양 오해하기도 한다. 실상은, 데이터의 스냅샷을 퍼즐처럼 모아 인과관계를 추론하고,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전을 기획하는 사진작가의 구성적 작업에 가깝다. 그만큼, 좋은 결론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애초에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주관의 깊이가 중요하다.

작년 초에 겪었던 일화다. 막 출범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로부터 의뢰를 받았다. 온라인상에서 국민들의 여론을 분석해서 저출산 문제 해소를 위한 단초를 찾고 싶다고 했다. 위원회는 주로 출산수당, 방과후 학교 운영 등 정책 아이템에 대한 국민들의 수용도에 관심이 있었다. 일단 의문이 들었다. 출산수당,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을 보고 사람들은 기꺼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더 낳으려 할까?

‘출산’ 관련 검색 키워드로 네이버의 기사 댓글 수년치를 분석해 보니, 의외의 모습이 압도했다. 출산과 양육의 어려움을 논하기 이전에, 사회 갈등이 너무나 심하게 표출되고 있었다. 한 언론 기사의 제목(‘출산 기사 뜨면… “사교육비·노후준비 해주나” 냉소가 주르륵’) 그대로였다. 세대 갈등, 계층 갈등도 심했지만, 남녀 갈등 표현이 더 두드러졌다. 아니, 보다 엄밀히 말해야겠다. 남성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여성에 대해 혐오 내지 분노를 표현한 댓글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물론 그런 모습이 낯선 것은 아니다. 수년간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 사이트를 분석하면서, 이른바 여성 혐오의 사회심리적인 동인이 무엇인지를 탐구한 적이 있었다([시사 IN] 418호,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탄생’, 2015년 9월). 당시엔 익명의 사이버 공간에서 남자들이 여성과의 연애 과정에서 겪은 좌절감의 체험이 공유되고 담론화하는 현상에서 여성 혐오의 주된 동기를 읽어냈지만, 내심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저렇게 체험했거나 혹은 상상된 이성관계에서의 좌절과 분노가, 비단 일베 회원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것일까? 적어도, 필자의 판단으로는 ‘연애를 못하니까 일베나 하지’라고 조소하고 끝낼 만큼 국지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혐오와 분노가 온라인을 점령했다


▎1월 12일 서울 마로니에 공원 인근에서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당당위)’ 회원들이 남성에 대한 유죄 추정을 규탄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비단 마초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일베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성에 대한 분노로 말할 것 같으면 현 시점에서 워마드를 따라올 온라인 플랫폼은 없는 듯하다. 단순히 비속어로만 끝나지 않는, 일반인 입장에서 거의 해석과 소통이 불가능한 외계어로 가득 찬 자폐적인 욕설은 일베 이상으로 거칠고 위악적이다. 그 사이트에서 ‘남성’은 일반명사로 쓰이는 반면, ‘남자’는 사람이 아니다. 남자는 그 자체로 가정폭력의 담지자였던 추한 아버지의 그림자이며, 온갖 성폭력을 일삼는 그들의 저주받을 새끼들이다. 그들은 폭력에는 폭력으로, 억압에는 억압으로 응수한다. 피해자가 될 바엔 차라리 가해자가 되겠다며 자신들의 폭력성을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백래시(backlash)로 포장한다.

그런 극단적인 갈등 속에서도 흥미로운 발견이 있었다. 젠더 경계의 대척점에 서있는 사람들이 이성인 상대방을 비난할 때 공유하는 공통적인 정서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상대방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고 분노한다는 점이다. 남자는 자신들이 더 이상 가부장적인 권력과 부를 독점한 존재가 아닌데도, 여자들이 연애시장에서 끊임없이 일방적인 요구만 하고 계산적이라는 점에 대해, 여자는 남자들이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며 굳이 물리적 성폭력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저강도의 심리적 학대에 익숙하다는 점에 대해 분노한다. 서로의 결론은 결국 한 문장에서 만난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냐.”

그런 모습을 목도하면, 청년기의 긴 터널을 지나온 나 역시 성장과정 한국 사회에서 겪었던 여러 음울한 기억들이 중첩되면서 착잡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기성세대 중 일부가 지금의 20~30대 청년보다 상대적으로 더 온전하게 성인으로 성장할 기회가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경제적 성장에 대한 객관적인 기대와 사회통제에 빈 구멍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즈음 글로벌 뉴노멀(new normal)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은 미래의 파이에 대한 비전을 찾기 어렵다. 이는 경제적 성장에 대한 기대조차 사치로 여기게끔 하는 현실이다. 그런데 사회통제에 빈 구멍이 있었기에 사람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여기에 필자가 작금의 세대적 퇴행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이 있다.

우리 세대, 그리고 부모 세대가 살았던 대한민국 사회의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군사 쿠데타의 그림자가 사회 전반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가부장주의와 국가주의, 전체주의와 권위주의 문화가 팽배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지금보다 거칠었고, 때때로 폭력적이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화염병과 돌멩이, 곤봉과 죽창이 교차하는 폭력의 충돌이 일상이던 때였다. 돌이켜 보면 그런 가운데서 온정주의는 일종의 사회적 완충제로 작동했다. 그런 온정의 배경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허락하는 마음의 여유도 한몫했다.

성장을 위한 여유조차 박탈당한 20대


▎마지막 사법시험의 합격자가 발표된 2017년 10월 1일 서울 신림동 고시촌의 모습. /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개발시대에 대중이 공유했던 그 기대와 희망의 내용은 다분히 획일적이었다. 사람들이 지향하는 가치는 대개 ‘권력’이거나 ‘돈’으로 귀결됐다. 그 가치를 실현할 최고의 방법은 학벌뿐이었다. 다만,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집과 학교, 학원을 오가는 시공간에 적지 않은 ‘빈틈’도 있었다는 것이다. 학창시절 필자의 경험을 회상해 보면, 어머니가 학원 가라고 준 돈 일부를 ‘삥땅’치기도 했고, 중간고사 기간엔 종종 친구들과 오락실엘 갔다. 고3 때는 거의 매일같이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 모여 공을 찼고, 어쩌다 선생님이 “고 3이 공부는 안 하고!” 고함을 치며 다가오면 “야, 튀어!” 하고 다같이 내빼기도 했다(우리들이 어느 정도 공부를 하기도 했으니까 교사도 눈감아줬을 것이다). 가장 엄혹하기로 유명한 ‘강남 8학군’의 입시 위주 학교였는데도 풍경이 그랬다. 이런 빈틈이 있었기에 친구들과 학교와 교육 체제의 답답함을 토로하고, 사회와 인생에 대해 논하며 설익게나마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지금은? 어림없다. 더 이상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와 같은 물리적인 폭력이 학교에서 쉽사리 행해지진 않는다지만, IMF 체제 이후 ‘공포’가 체화된 요즘 학생들은 집-학교-학원 사이에 빡빡하게 정해진 시간과 동선에서 한치도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잠시나마 딴짓을 하고 숨돌릴 틈이 사라진 저들의 빽빽한 삶 자체는 예전보다도 더 큰 폭력과 억압에 억눌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년 시절의 한창 때는 잠을 충분히 자야 키가 잘 자란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의식적인 생산 활동을 하지 않아야 무의식적인 생산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작금의 20대, 그리고 30대 초반의 청년들은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일상화된 공포와 빡빡한 스케줄에 짓눌린 채, 무의식적인 생산과 성장을 할 여지를 박탈당한 채 살고 있다. 지난해 여론조사의 일환으로 20대 청년들을 인터뷰하면서, 공통적으로 ‘공포’라는 키워드를 청취했다. 저들의 공포는 생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절망적이기만 한 미래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는 주위의 경쟁자들이 내뿜는 살기와 질시 어린 공기가 바로 요즘 청년들을 억누르는 공포의 실체였다.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딱히 도움이 되지도 않는 수많은 노동을 다람쥐 쳇바퀴를 겉돌듯이 하는 것이다.

대학생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과거엔 대학생이 되고나면 긴장의 끈을 놓을 여유가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대학교는 고등학교 입시의 연장선상일 뿐이다. 또 다른 입시인 취직을 위해 내달려야 하는 그들이 느끼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패배에 대한 강박은 기성세대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청년세대들은 이런 상징적인 경쟁을 간편하게 ‘인정투쟁’이라고 칭한다. 타자에 대한 인정을 기반으로 자신의 위치와 인정의 근거를 발견하기 위해 존재론적으로 분투하는 헤겔 본래의 인정투쟁 개념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다. 본래의 의미와는 정반대로, 되도록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깎아내리는 게 자신을 드높이는 방법인 양 사회화 돼 있는 것이다.

인정받기 위한 깎아내리기와 구별짓기


▎2월 1일 종영한 JTBC 드라마 [SKY캐슬]은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려는 학부모들의 뒤틀린 욕망을 그려내 큰 인기를 끌었다.
파이는 쪼그라들고, 성공방정식은 불투명해졌다. 불안해진 그들은 또다른 사회학 개념을 변용해서 실행한다. ‘구별짓기’가 그것이다. 1990년대에 소위 ‘명문대’를 다니던 내 또래들이 ‘쪽팔려서’ 잘 안 입던 학교 잠바, 과 잠바를 입는 것도 모자라 학교 이름 밑에 자신의 자랑스런 ‘출신성분’을 수 놓는다. ‘OO 외고’ 이런 식으로. 기성세대가 강요한 성공방정식에 대한 순응이 성공과 거의 무관할 수 있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인지부조화는, 현 시점에서 ‘그래도 내가 누구보다는 우월하다’는 의식과 위안을 자극하는 작은 기표에 집착하게 만든다.

연대(solidarity)의 문화가 캠퍼스에 넘쳐 흐르고, 화장실과 벽보대를 가득 채웠던 철학적 유희의 낙서와 대자보가 캠퍼스에서 사라진 지도 오래다. 수년 전부터 대학 화장실 낙서들을 살펴보면, 온갖 학교들의 서열을 매기는 것도 모자라 자기 학교 내에서도 수능 성적에 따라 학과별로 계급을 나눈다. 그런 구별짓기에는 타자에 대한 경멸과 조롱을 통한 자기 위안의 표현이 농밀하게 따라붙는다.

‘사랑이란…’ 으로 시작하던 시적인 표현, 경구들이 있던 옛날 벽이 외설적인 그림과 저질스럽고 때론 가학적이기까지 한 성적 표현들로 범벅이 된 지도 한참 되었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인터넷 발달로 인해 대학생들이 포르노그래피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포르노를 볼 수단과 시간은 과거에도 언제나 있었다. 사라진 것은 성인이 된 이후에 타자와 보다 인간적으로 진지한 관계를 맺고 서로를 고양해 가는 기쁨에 대한 상상력과 정신적 여유이다. 어찌보면 그런 ‘관계의 포르노화’는, 이성관계에 대해 부모나 교사가 충분히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대신 ‘대학 가고 나서’로 모든 것을 퉁쳐 온 사회의 관성과 욕망의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근래에 목도되는 사회의 갈등과 퇴행상은 오랜 기간을 통해 누적돼 온 것이다. 갑자기 페미니스트들이 기세등등해져서 ‘미투’가 터져 나오고, 워마드 같은 전투적 페미니즘이 발흥하는 게 아니다. 일자리가 없는 남자들이 남초 커뮤니티에 모여 여성 혐오 담론을 쏟아내는 것이라는 논평은 피상적일 뿐이다. 일차적 원인은 남들를 제치고 경쟁에서 이겨야 차지할 수 있었던 확실한 과실이 줄어든 사회구조와 시장의 상황에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의존형 인간


▎인정투쟁으로 쌓인 피로감은 보다 선정적인 유흥문화로 연결된다.
청년들은 그동안 감내했던 관계 속의 폭력들에 대해 더 이상 참거나 침묵할 이유도, 여유도 없어졌다. 저들이 그간 켜켜이 쌓아온 원한의 감정을 한꺼번에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욕망과 분노를 다독일 어른이나 조정자 역할이 한국 사회에 부재하다는 것이다. 각자도생을 위해 서로에게 울타리를 치고, 옆이 아닌 위만 쳐다보며 갈수록 제 살을 깎아먹는 경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궁리를 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 일부 지식인들이 피력하는 희망처럼, 현재 한국에서 유통되는 페미니즘 담론이 이런 사회적 질곡을 벗어날 적절한 성찰을 제공할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얼마전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작중화자인 김지영은 어렸을 때부터 별 생각 없이 엄마가 시키는 대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별다른 생각없이 취직하고, 또 별 깊은 생각없이 결혼하고 가정을 영위한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크고 작은 폭력에 직면한다. 소설은 그렇게 잽을 맞듯이 지속된 미시적 폭력에 의해 결국 정신적으로 불안해진 여성을 조명한다.

대중은 그러한 ‘피해자 됨’에 대한 공감을 ‘페미니즘’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과잉보호를 받으며 생각하지 않고 살도록 길러져 온전한 성인으로 자라나지 못했고, 사회에 나온 후 경험하는 폭력의 맥락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채로 주변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 징징거리는 김지영은 ‘아짱(어리숙하고 부족한 사람을 일컫는 사투리)’한 사람이다. 구성원들과 함께 공유하는 사회적 성찰이 부재한 채로 이런 주체에게 주로 남는 감성은 속물적인 욕망, 타자에 대한 의존과 짜증뿐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하는 인간 주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곁’은 사라지고 ‘편’을 강요하면서, 성장과 배움이 사라지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의 저서 제목이기도 한) ‘단속사회’라고 명명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아무도 지속적으로 연결될 수 없고, 단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자기 욕망과 고통을 ‘단속’적이고 나르시시즘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저신뢰의 피상적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는 ‘돈’과, 돈을 암시하는 메타적 상징뿐이다. 그런 우매한 비교와 저열한 상징투쟁의 공간에서, 모멸감이라도 안 느끼고 살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난해 청년층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페이스북에 20대 남성에 대해 논평한 글을 올리고 나서 몇몇 기자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중 한 기자가 “현 청년세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하겠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인정투쟁과 원한감정으로 상처받은, 파편화되고 슬픈 부족들’이라고 다소 현학적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이제는 좀 더 명료하게 답할 수 있을 듯하다. ‘기성사회의 욕망이 여과되지 못한 채 모여든 찌꺼기 세대’라고 말이다. 청년세대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엄마’에게 사육당한다. 갈수록 쪼그라드는 수축사회에서 남들과 조금 다르게 행동하고, 도전하고, 체험할 기회와 의지는 박탈당했다. 그런 청년들이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 코드는 결국 죽은 욕망과 원한감정의 찌꺼기뿐이다.

글머리의 저출산 얘기로 돌아가보자. 요즘 각광받는 ‘인공지능’(엄밀히는 머신러닝 기법)을 활용해 출산율과 담론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적이 있다. 분석 결과, 주거비와 사교육비의 동조화 현상이 저출산과 가장 높은 상관관계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 결과는 집값, 혹은 사교육비 지출의 안정화가 곧바로 이 사회에서 삶을 함께 하기를 희망하는 주체의 재생산으로 직결될 것임을 암시하진 않는다.

관계 맺을 수 없는 사람들, 서로 통할 수 없는 사회의 파국은 오래전부터 예비되어 왔다. 떠들썩한 경제성장의 신화와 기대의 거품이 갈등의 찌꺼기가 한데 모여드는 시간을 조금 유예했거나, 가치를 담지한 인격의 매개체로서 사람간의 통용이 불가능한 사회의 비극을 꽤나 오랜 시간 은폐했을 뿐이다.

통용 불가능한 사회의 비극

그러니 앞으로는 보다 근본적인 성찰과 사회 변혁이 필요하다.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할까? 나는 사회가 좋은 청년들에게 희망과 기회를 우선적으로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누가 좋은 청년인가? 그 질문을 같은 20대 청년들에게 해봤다. 저들이 엇비슷하게 내놓은 대답은 이랬다. 좋은 청년은 우선 자기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부터 알고 있어야 한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며 살고 있는지는 차치하고, 스스로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나 많아서라고 한다.

자신에 대한 기본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공동체의식, 시민의식이 인성에 체화될 수 있는 사람이 소중하고, 또 부재하다. 경쟁의 문화가 자라나는 세대를 얼마나 망가뜨렸는지를 교육계와 산업 현장에서 종종 듣는다. 그런 한탄은 기성세대의 거울에 비친 상이기도 하다.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타자를 인정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성숙한 인간, 시민적 주체로 성장할 수 있으려면,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과 경제·노동 환경부터 송두리째 변해야 한다. 그 일은 한 세대, 한 정부의 시간 하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조급함은 반드시 탈이 나게 마련이다. 보다 긴 호흡과 사회의 비전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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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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