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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분석 | 한국사회 대진단] 중증 울분으로 번지는 ‘무효사회’ 한국 

노력은 인정 못 받고 실수는 즉각 비판받아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차별과 따돌림에 ‘중증 이상의 울분’ 느끼는 한국인 14.7%
1년간 약물 치료해도 증상 완화 안 돼… 예방으로 접근해야


▎지난해 12월 경기 수원시의 한 대학교에서 수험생들이 2019학년도 수시모집 논술고사를 치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생각이 엔진이라면, 감정은 가솔린이다.’

가솔린은 평범한 액체처럼 보이지만, 점화되면 사납게 타오른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감정이라는 연료가 어떤 성분으로 이뤄져있는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는 사이 한국은 15년 연속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전국에 자살예방센터 스물네 곳을 운영되고 있지만 소기의 성과를 내는지는 장담키 어렵다.

한국인의 감정을 ‘울분’으로 진단한 연구 결과가 지난해 말 나왔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에서 진행한 ‘한국 사회와 울분’이라는 제목의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 성인남녀 14.7%가 일상생활에서 장애를 일으킬 정도의 중증도 이상의 울분을 느끼면서 사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보다 가볍지만 만성적으로 울분을 느끼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54.6%에 달했다. 한국인의 절반이 울분에 시달리는 셈이다.

연구팀은 여론조사기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성인남녀 2024명을 대상으로 ‘생각할 때마다 아주 화가 많이 나게 하는 일’ ‘내가 보기에 정의에 어긋나고 아주 불공정한 일’, ‘상대방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일’ 등 19가지 항목에 대해 질문했다. 이에 대해 ‘전혀 없었다’(0점)부터 ‘아주 많이 있었다’(4점) 사이로 평가하게 해 울분 정도를 측정했다.

또 19가지 항목에 응답한 평균 점수가 ‘약간 있었다’(2점)와 ‘많이 있었다’(3점)의 중간 수준인 2.5점을 넘어갈 경우 ‘중증도 이상의 울분’ 상태에 놓인 것으로 진단했다. 실제 정신과 진료 시 외상후울분장애(PTED)라는 정신질환 진단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상태다. 1.6점에서 2.5점 사이에 속하는 응답자도 울분 감정이 지속되는 만성적 울분 상태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측정 항목을 만든 독일의 정신과 의사 마이클 린덴(M. Linden) 등 유럽 정신의학자들이 측정 결과와 응답자의 실제 정신장애를 비교해 내린 결론이다.

‘무효’ 취급에도 무기력할 때 울분 맺혀


특히 한국인들은 학교와 직장에서 가장 울분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항목 가운데 하나인 사회적 사안 16가지 가운데 ‘직장·학교 내 따돌림·괴롭힘·차별·착취’에서 울분 평균 점수가 3.61점(4점 만점)으로 가장 높았다. ‘개인·기업의 지배적 지위를 이용한 갑질’이 3.59점, ‘정부(입법·사법·행정)의 비리나 잘못 은폐’가 3.58점으로 뒤를 이었다.

학교와 직장의 무엇이 울분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유명순 교수 연구팀은 스위스 베른대 연구진이 개발한 자기측정 도구(BEI)를 적용했다. BEI는 울분 유발 상황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유리하다. ‘성과 관련 울분’, ‘비관적 미래 전망 관련 울분’, ‘감정적 울분’, ‘경멸감·혐오감 관련 울분’까지 4개 척도로 울분 정도를 물었다.

그 결과 학교와 직장은 자신의 노력이 빈번히 ‘무효 취급’을 받는 현장이었다. 응답자들은 ‘때때로 나는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질문에 66.7%가 동의했다. 동시에 ‘노력은 인정받지 못하지만 한 번의 실수는 즉각 비판받는다’는 항목에도 64.1%가 동의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나 기여를 평가해주지 않는 ‘무효 취급’을 받으면서 억울한 감정이 생기고, 이에 따른 울분이 커진다는 얘기다. 연구팀은 이를 ‘무효사회’라고 개념화했다.

“길거리에서 담배 냄새를 맡으면 분노한다. 마땅히 지켜야할 규칙을 어겨서다. 그러나 그 마음을 울분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직장에 낙하산으로 누가 내려왔을 때는 다르다. 응당 내가 가져야 할 걸 뺏겼기 때문에 일단 분노가 치민다. 여기까진 길거리 흡연과 같은 감정이다.” 유명숙 교수는 왜 분노를 넘어 울분에 주목해야 하는지 설명을 이었다.

“그러나 ‘내가 잘나갔으면 이랬겠냐’는 자책과 무력감도 든다. ‘더럽고 치사하다’며 이직을 하려해도 불경기에 갈 곳이 마땅찮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는 거다. 이렇게 세 가지 감정을 축으로 마음에 울분이 맺힌다.”

울분은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실제 버는 돈보다 ‘자신이 어떤 계층에 속해있는지’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실제 월평균 가구소득이 200만원 아래인 집단에서 울분 점수는 2.03점이었다. 반면 주관적 계층인식을 묻는 질문에 ‘하위층’이라고 답한 응답자 집단의 울분 점수는 2.14점으로 더 높았다. 이밖에 중위층은 1.60점, 상위층은 1.48점을 기록했다. 유 교수는 “울분이 사회적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라는 걸 방증하는 대목”이라고 해석했다.

연령 집단 가운데선 20대가 다른 세대에 비해 울분에 더 시달리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20대의 울분 점수는 1.81점으로, 1.70점 내외를 기록한 윗세대에 비해 높았다. 입시 경쟁의 터널에서 나오자마자 취업전선으로 떠밀리는 현실이 반영된 것으로 읽힌다.

이번 연구의 발표 세미나에 참석한 이관후 서강대 정치사상연구소 연구원은 20대의 울분과 관련해 흥미로운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특정 세대가 겪는 부정적 생애사건이 감정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4년째 교양수업을 하면서 매년 신입생을 만난다. 첫 번째 과제로 부모와의 인터뷰를 주문한다. 2016년에 가르쳤던 1996년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학생 3명 중 한 명의 부모가 IMF 외환위기 당시 실직했다. 학생들은 어린 시절의 일이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얘기를 들은 학생 절반이 인터뷰하면서 부모를 껴안고 울었다더라. 그리고 이 학생들이 세월호 참사로 또래를 잃었다. 정부에 대한 신뢰를 물었더니, 다른 세대에 비해 현저하게 낮았다.”

부정적 생애사건의 파괴력은 실제 사례로도 확인할 수 있다. 2011년 진상이 드러난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대표적이다.

자책감 해소하려 자살 생각하기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부인 이명희씨로 추정되는 인물이 하청업체 직원들에게 삿대질하며 직원들을 밀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2011년 5월 10일 원인 미상의 급성 폐렴으로 한 산모가 사망했다. 곧이어 같은 질환으로 이미 2003년부터 5년간 472명이 숨졌다는 연구 결과가 알려졌다. 손쓸 방법도 없이 폐가 굳어가는 탓에 사망률이 21.5%에 달했다. 세간엔 일본 후쿠시마(福島) 발전소에서 누출되는 방사능 탓이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3개월여 만인 8월 31일, 질병관리본부는 폐 손상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그 원인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지목했다. 1994년 유공(현 SK케미칼)이 처음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판 지 17년이 지나서야 유해성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지난해까지 네 차례에 걸친 피해조사 결과 6040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 사망한 사람은 1335명에 달했다.

지난 3월 14일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결과가 공개됐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장완익)이 지난해 10월부터 3개월여 간 피해자 가구 가운데 무작위로 100가구를 선정해 신체·정신 건강 상태와 경제적 피해 정도를 물었다. 유명순 교수도 참여해 울분 정도를 물었다.

조사 결과 성인 피해자 셋 중 하나가 중증도 이상의 울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반 응답자보다 2.27배 높았다. 울분 평균 점수가 1.6~2.5점 사이인 만성적 울분 상태까지 포함하면 전체의 66.6%에 달했다. 유 교수는 “살균제 피해는 피해자가 사망하기 전까지 진행형이기 때문에 미래를 예단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며 말을 이었다.

“살림을 더 잘하고 싶어 산 살균제가 가족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혹은 평생 질병의 공포에 시달리며 살게 했다. ‘내가 왜 막지 못 했나’ 자책이 든다. 피해보상 과정은 어땠나.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를 입증해야 했다. 피해 등급이란 것도 수많은 피해 가운데 일부인 폐 질환을 중심으로 나눴을 뿐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는 5단계로 나뉜다. 1단계는 피해가 ‘거의 확실’이고, 2단계는 ‘가능성 높음’이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에 따르면 정부의 피해 지원금은 1~2단계 피해자에게 주어진다. 지난해 7월 11일 기준 정부의 지원금 대상자는 468명(생존 263, 사망 205)이다.

적지 않은 피해자가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27.6%가 자살 생각을, 11%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반 인구에 비해 자살 생각은 1.5배, 자살 시도는 4.5배 많았다. 울분의 다른 면인 ‘모멸감’을 책으로 펴낸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는 “자살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라며 “그 방향이 타인에게로 향하면 살인이 되며 둘 다 바탕에는 복수심이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한국여성의전화가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2012년 언론에 보도된 여성 살인사건 200건 가운데 120건이 남편이나 애인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밝혔다. 상대방에게 무시당했다고 느낀 것이 원인이 됐다.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분출하는 울분은 ‘묻지 마 범죄’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난해 10월 서울 강서구의 한 PC방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 전형적이다. 피의자 김씨는 ‘내 자리를 치워달라고 했는데 화장실을 다녀와도 그대로였다’ ‘그래서 환불을 요구했는데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PC방 직원을 살해했다. 피의자의 부모는 “김씨가 10년간 우울증 약을 복용했다”고 진술했다. 피해자의 담당의는 “얼굴에만 칼자국이 30개 정도 보였다”며 참담한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중증 울분 겪는 한국인, 독일의 6배


▎2017년 8월 서울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추모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추모사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유 교수는 ‘묻지 마 범죄’에서 엿볼 수 있는 울분의 또 다른 특징을 소개했다.

“이번 연구 결과를 보면, 부정적인 생애사건 가운데 부모의 사망은 나에게 울분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보다 ‘의료·사법·교육시설 등 필요해서 이용한 기관에서 심각한 모욕이나 부당한 취급을 받은’ 경험이 생애사건 가운데서 자책감과 외부세계에 대한 분노를 가장 강하게 불러 일으켰다.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일이 나에게 울분을 불러오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한 감정은 치료가 어렵다. 고려대 의대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인 한창수 교수는 2017년 고대안산병원을 찾은 정신과 외래환자 317명을 대상으로 1년간 우울증 치료효과를 검증했다. 연구 논문에 따르면, 우울증 검사(PHQ-9·15) 점수는 점진적으로 감소한 반면, 울분 점수는 치료 첫 1달 동안 감소한 이후엔 크게 변동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분노 기억(anger memory)’, ‘복수 희망(revenge wish)’, ‘스스로에 대한 분노(anger with myself)’, ‘복수 환상(revenge fantasy)’ 등 4가지 증상은 치료기간 동안 유의미하게 개선되지 않았다.

울분을 정신질환으로 처음 정의한 독일 샤리테(Charité) 의대의 린덴 교수 역시 ‘울분장애는 사후 치료효과가 크지 않다’고 평가한다. 울분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선 복수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리상담을 해도 문제의 원흉이 무엇인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등을 되새기는 데 그친다.

유 교수는 “린덴 팀은 학교·직장·지역 상담을 통해서 울분장애 전조가 보이는 사람을 먼저 발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면서 예방적 접근을 강조했다. 또 린덴 교수의 울분 연구를 한국의 국민연금공단에 해당하는 독일연금보험이 지원한 사실도 덧붙여 언급했다.

독일통일 이후 동독 인구집단 다수가 대량 정리해고 당하면서 삶을 재구성해야 했다. 이들 사이에서 만성화된 울분은 병가 장기화, 조기퇴직 등으로 연금보험에 부담을 줄 것이었다. 그래서 연금보험은 ‘질병이나 장애로 사람들의 소득활동이 단축되는 상황을 예방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연구를 지원했다. 그렇게 린덴 교수가 조사한 중증도 이상의 울분을 겪는 독일인은 전체의 2.5%였다. 한국의 6분의 1 수준이다.

유명순 교수는 “울분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혐오와 자기파괴 행위를 예측하는 변수가 될 것”이라며 “특히 분배·공정성과 관련한 사회정책의 평가변수로도 시사점이 있다”고 밝혔다.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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