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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2)] 산악계의 ‘작은 거인’ 엄홍길 

“먼저 간 동료들의 가족 돌보는 데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에베레스트 자락의 휴먼스쿨 15곳에 사고로 숨진 셰르파 자녀 등 수학
‘히말라야 16좌 등반’이라는 상징성에 맞춰 총 16곳에 학교 세울 계획


▎엄홍길 대장이 다딩 엄홍길휴먼스쿨 준공식에서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정영재
산악계의 ‘작은 거인’ 엄홍길(59, 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은 ‘약속을 지키는 사나이’다. 그는 히말라야 8000m급 16좌 완등(完登)을 앞두고 죽음이 너무나 두려웠다. “목표를 이루고 살아만 돌아가게 해주신다면 등반 중에 숨진 동료·셰르파의 가족을 돌보는 데 일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히말라야 신에게 기도했다.

2007년 5월 로체샤르(8382m)에 올라 히말라야 16좌 완등의 꿈을 이룬 엄홍길은 그해 파라다이스문화재단에서 받은 특별공로상 상금(5000만원)을 종잣돈 삼아 2008년 5월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후원자들의 정성을 모아 네팔 오지에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1차 엄홍길휴먼스쿨은 에베레스트로 가는 관문인 팡보체에 들어섰다. 엄 대장의 에베레스트 도전 때 숨진 셰르파(술딤 도르지)의 고향이다. 해발 4060m에 있는 팡보체휴먼스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학교다. 엄홍길휴먼스쿨은 2019년 3월 현재 15개가 건립돼 운영 중이고, 16번째는 네팔 수도 카트만두 인근 학교를 리모델링해 유치원-초-중-고-대학으로 이어지는 교육 타운으로 만들기로 했다. 17차 학교도 건축 중이다.

2월 18∼26일 엄 대장과 함께 네팔을 다녀왔다. 5차 휴먼스쿨(다딩) 증축 준공식, 16차 휴먼스쿨(딸께숼) 건립 협약식 등에 참석했고, 안나푸르나(8092m)가 바라다 보이는 푼힐 전망대(3200m)도 새벽에 함께 올랐다. 박겸수 서울 강북구청장과 이인영 강북구 보건소장 및 의사·약사·간호사로 구성된 의료봉사단이 함께 했고, 청소년 희망원정대로 참가한 중학생 2명도 끝까지 일정을 완주했다.

1주일 일정 당긴 덕에 횡액 면해


▎딸께숼 휴먼스쿨 건립 협약식 후 네팔 현지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엄홍길 대장(가운데). / 사진:정영재
카트만두에서 5차 휴먼스쿨이 있는 다딩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꼬불꼬불한 산길은 비포장도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돌길이었다. 우리를 태운 지프는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쉴 새 없이 우당탕퉁탕 요동쳤다. 동승한 박동만 비아이오(BIO)성형외과 원장의 만보계에는 2시간 만에 2만보를 걸은 것으로 찍혔다.

그런데도 앞자리의 엄 대장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잠깐 눈을 뜬 그는 “이 정도면 고속도로지요. 진짜 오지나 지진이 난 지역은 말도 못해요. 지난번 대구에서 온 분은 좌석에서 높이 떴다가 떨어지면서 갈비뼈에 금이 간 적도 있어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엄 대장이 2015년 네팔을 강타한 지진 상황을 들려줬다. 4월 25일 발생한 진도 7.8 지진의 진앙지 고르카 지역은 휴먼스쿨을 짓기로 한 곳이었다. 4월 25일을 착공식 날짜로 잡았는데 엄 대장이 갑자기 “일정을 1주일만 앞당기자”고 해서 횡액을 면했다.


▎엄홍길 대장과 함께 푼힐 전망대에 오른 일행. / 사진:정영재
국내로 돌아와 지진 소식을 들은 엄 대장은 적십자 구호대장을 맡아 고르카로 달려갔다. “대형 트럭 12대에 구호물자를 싣고 갔죠. 큰 산 두 개 사이 협곡에 공터가 있어요. 거기 사람들을 모으고 구호물자를 내리고 있는데 갑자기 ‘우르르, 쾅 쾅’ 소리가 나면서 건너편 산 모서리가 쪼개지고 흙과 바위가 쏟아져 내리는 겁니다. 2차 지진(진도 7.2)이 발생한 거죠. 겁에 질린 사람들이 미친 듯이 강가 쪽으로 뛰어갔고, 우리도 ‘뭐야 뭐야’ 하면서 막 뒤따라갔죠. 그러다 ‘산사태로 길이 끊어지면 오도가도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물자를 내려주고 트럭을 돌렸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그 지역을 빠져 나왔는데 다행히 길이 끊어진 데는 한 곳도 없었어요. 우리가 그날 공터로 사람들을 모으지 않았다면 산 위에 있던 주민들이 얼마나 더 죽었을지 몰라요. 히말라야 신이 도운 거죠.”

다딩도 지진 피해 지역이었다. 동네 가옥들이 무너졌지만 2014년 완공된 휴먼스쿨만 온전히 보존돼 주민들의 대피 시설로 쓰였다고 한다. 건물 증축이 꼭 필요한 시점이어서 대한적십자사의 도움으로 2층을 올렸다. 준공식이 열리는 학교 운동장에는 학생과 주민 4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두 줄로 도열해 있던 이들은 우리 일행을 꽃목걸이와 박수로 맞았다.

행사는 길게 이어졌다. ‘지역 유지’들은 마이크를 잡으면 기본 20분은 연설을 했다. 중간중간 학생들이 환영과 감사의 뜻을 담은 전통춤을 췄다. 3시간 가까이 걸린 행사 도중 자리를 뜨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엄 대장은 행사 내내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듯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었다.

“이 학교가 지어질 수 있도록 도움 주시고 성원해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죠. 이 아이들에게 용기와 희망, 꿈을 줘야 한다며 학교 건축을 독려했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어요. 아이들 춤추는 것 보셨잖아요. 얼마나 활달하고 천진난만합니까. 우리나라 애들은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런 표정이 나올 수가 없어요. 주거환경서부터 입고 먹는 것까지 모든 게 열악함에도 전혀 구김살이나 부끄럼이 없잖아요. 애들 눈빛 보면 빨려 들어갈 것 같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모두 파랑과 하늘색이 깔끔하게 조화를 이룬 교복을 입고 나왔다. 교복을 후원한 박동만 원장은 2층에 만든 작은 도서관도 기증했다. 대학 산악부 출신인 박 원장은 “대장님을 평소 흠모해 오다 지난해 9월 처음 저녁을 함께 했어요. 범상치 않은 기운에 빨려 들어가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라며 웃었다.

히말라야 기운 받아라 “기, 기, 기”


▎2007년 히말라야 로체샤르 등반에 나서고 있는 엄홍길 대장.
다음날 네팔 제2 도시 포카라를 출발해 비레탄티에 있는 4차 휴먼스쿨에 들렀다. 거기서도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의약품과 기념품을 전달했다. 이곳에서는 9명의 중·고생들이 엄 대장과 반가운 해후를 했다. 2017년 9월 미술 특기생으로 뽑혀 서울을 방문했던 아이들이었다.

이들은 롯데월드타워·한강유람선 등을 구경하고 인사동에서 열린 ‘히말라야의 꿈’ 전시회 테이프 커팅도 했다. 홍옥선 엄홍길휴먼재단 사무처장은 “화가 한 분이 1년간 자원봉사로 이 곳에 와서 그림 지도를 했어요. 그중에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을 선발해 서울 나들이를 시켜줬죠. 확실히 애들이 때깔이 달라졌네요”라며 웃었다.

다시 지프를 타고 울레리(1950m)까지 3시간을 덜컹거리며 달렸다. 중간중간 염소떼와 당나귀들이 길을 막기도 했고, 아이들 서너 명이 손을 흔들기도 했다. 커다란 등짐을 지고 힘겹게 걸어가는 소녀, 먼지 자욱한 채석장에서 돌을 깨는 소년들도 보였다.


▎2000년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에 도전하고 있는 엄홍길 대장 일행.
엄 대장은 “아이들은 보통 2∼3시간을 걸어서 학교를 옵니다. 그나마 학교에 갈 수 있으면 다행이죠. ‘공부는 해서 뭐 하나’ 하는 생각을 가진 부모 밑에서는 아이들이 학교 한번 가 보지 못하고 평생 일만 하다 일생을 마치는 경우도 많아요”라고 말했다. 그는 “아까 학교 있는 데서 우리가 가는 울레리까지 옛날에는 사흘길을 걸어왔어요. 지금은 네팔 정부에서 포크레인을 동원해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있죠”라고 설명했다.

울레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롯지(산장)가 있는 반단티(2300m)까지는 1시간 정도 트레킹을 해야 한다. 개당 15kg이 넘는 카고백(가로로 길다란 가방)은 포터들에게 맡겼다. 포터들은 35∼40㎏ 되는 짐을 등에 지고 묵묵히 산길을 올라간다. 커다란 망태기에 끈을 달아 어깨에 메는 게 아니라 머리에 두른다. 목힘으로 무게를 지탱하는 것이다.

해가 떨어져 헤드랜턴을 켜야 했다. 엄 대장은 일행의 장비를 꼼꼼히 챙겼다. 중학생 이이삭 군, 이다현 양에게는 산행 때 주의할 점과 등산화 끈 묶는 법, 등산 스틱 사용법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20분쯤 올라갔을 때 여성 한 명이 “휴대폰을 울레리에 두고 왔네”라고 소리쳤다.

엄 대장이 침착하게 “배낭 속 잘 찾아봐”라고 했지만 이 여성은 “배낭에 안 넣었어요. 내려가서 찾아와야 해요” 라며 울상을 지었다. 엄 대장이 재차 얘기해 배낭을 뒤지니 휴대폰이 나왔다. 엄 대장은 “아까 출발할 때 저 사람이 유난히 부산스러워서 체크를 했거든. 난 산에서는 한 번만 쓱 훑어봐도 누가 뭘 빠뜨렸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아요”라고 말했다.

다음날 새벽 조식을 한 뒤 반단티에서 고라파니(2850m)까지 4시간 이상 걸어가는 본격 산행이 시작됐다. 중간에 서울대 봉사동아리 기브(GIV) 회원들을 만났다. “엄홍길 대장님이 저 앞에 가신다”고 했더니 “농담하지 마세요” 라던 이들이 롯지에서 엄 대장을 만나자 “와∼ 대박” 이라며 환호했다.

기념촬영을 한 뒤 엄 대장이 “좋은 일 하는 젊은이들을 만나니 기분이 좋아서 맥주 한 잔씩만 사 드리겠다”고 했다. 엄 대장의 건배사는 늘 “기, 기, 기”로 끝난다. 히말라야의 신성한 기를 받아 모든 일이 잘 풀리라는 뜻이다.

엄 대장은 일행과 기분 좋게 어울리다가도 가끔씩 혼자 뭔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왠지 외롭고 지쳐 보이기도 한다.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하니 그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하∼, 여기 나와 있을 때는 아이들 학교 가는 모습 보고, 사람들 좋아하는 모습 보면서 너무 좋아요. 근데 한구석에선 ‘들어가서 다음 학교 또 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들거든요. 이게 계획대로 번호표 들고 대기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16차 프로젝트 진행하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학교 지어달라는 데가 있어요. 우리도 이젠 딱 들어보면 얘기가 되는지 아닌지 알죠. 여기 사람들도 우리가 도사라는 걸 아니까 어느 정도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 부탁하거든요. 그래서 ‘언제 지을지는 모르지만 답사라도 해라’고 말한 뒤에 고민이 시작되는 거죠. 이렇게 점점 지쳐가는 건가 싶네요.”

네팔 사람들은 협조를 잘해 주나요?

“물론 잘 도와줍니다. 그런데 네팔 사람들은 어떤 나라의 지배를 받은 적도 없고 가난하지만 자존심이 세요. ‘이런 거 좀 필요한데 도와 달라’는 게 아니라 ‘너희 많이 있는 것 중에서 이거 하나 주면 안 되냐’는 식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있어요. 또 학교를 지으면서 당연히 해 줘야 할 절차에 대해 생색을 내면서 ‘내가 잘 처리해 줄 테니 우리 지역에도 하나 지어 달라’며 숟가락을 얹으려는 사람들도 가끔 있죠.”

대충대충 하는 사람은 그대로 넘기지 않아


▎딸께숼 휴먼스쿨 학생들이 줄을 지어 엄홍길 대장을 환영하고 있다. / 사진:정영재
휴먼스쿨은 왜 전부 찾아가기 힘든 곳에 있는 건가요?

“누구나 학교를 지을 수 있는 곳이라면 우리는 짓지 않아요. 다른 NGO 단체에서 ‘왜 저기다 지어?’ 하는 곳에 짓는 거죠. 사람들은 ‘누가 보려고 해도 볼 수도 없고, 찾아가기도 힘든 곳에다 짓는 걸 이해하지 못하겠다. 누구나 쉽게 갈 수 있고, 잘 보이는 곳에 지어야 홍보도 될 텐데’ 라고 말합니다. 이번에 방문하는 휴먼스쿨은 다 차로 갈 수 있지만 걸어서 8시간, 10시간 올라가야 되는 곳도 있어요. 그런 산속 골짜기에 3층짜리 건물과 기숙사, 식당까지 있어요. 자재를 다 헬기로 실어 나른 거죠. 그 돈이면 도시 근처 접근성 좋은 데 2개를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절실하게 학교가 필요한 곳에, 2개 지을 돈으로 하나를 짓는다’가 원칙입니다.”

엄 대장 주변에 ‘우군’만 있는 건 아니다. 끊임없이 문제점을 지적하고 흠을 찾아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엄 대장에게 심한 말을 들어서 상처를 받았고 그래서 떠났다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엄 대장에게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들린다. 엄 대장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30년간 고산 등반을 했고, 8000m급을 36번 도전해 20번 올랐어요. 이게 그냥 어영부영, 대충대충, 얼렁뚱땅해서 되는 일이겠어요? 산 하나를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계산과 철저한 준비를 하는지 몰라요.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거니까. 저는 휴먼재단 일을 할 때도 똑같다고 봐요. 내가 지시하는 걸 완벽하게 해내지 않고, 하는 척만 하고 대충대충 하는 사람은 그대로 넘기지 않아요. 나는 뭐든지 쓱 한번 보면 스캔이 된다고 했잖아요. 내 눈에 보이는 문제점은 바로바로 말해서 시정을 해야 합니다. ‘좋은 일 하는 건데 너무 매정하게 그럴 것 있나’ 식이면 반드시 사고가 나게 돼 있어요. 우리 재단에서 10년 만에 15개 학교를 세우면서 돈 관련해 한 건의 사고도 생기지 않았잖아요.”

엄 대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한 번 더 보게 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건축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휴먼스쿨을 지으면서 반(半) 건축가가 됐어요. 창을 크게 만들어 채광과 전망이 좋게 하고,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은 바닥을 지면에서 약간 띄우고, 해가 좋은 곳은 테라스를 만들고 등등 애정을 갖고 생각하면 아이디어가 나오게 돼 있습니다.” 내친김에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지금까지는 엄홍길이라는 브랜드의 영향력과 개인기로 해왔습니다. 한계에 이른 것 아닌가요?

“히말라야 16좌 등반이라는 상징성에 맞춰 휴먼스쿨 16차까지를 완벽하게 마무리 지어야겠죠. 물론 학교를 계속 지어나갈 거지만 재단의 볼륨을 더 키울 생각은 없어요. 향후 10년은 학교를 중심으로 해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력할 계획입니다. 교사의 자질 향상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다음달 휴먼스쿨 교장과 교사들을 초청해 2박3일 워크숍을 할 겁니다. 또 엄정한 평가를 통해 잘한 학교에 상도 주려고 합니다.”

학교를 지을 때마다 큰돈을 기부한 스폰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엄 대장이 뚫은 건가요? 자발적으로 찾아온 건가요?

“다른 NGO 단체처럼 방송 광고하고 신문에도 광고 내고 그럴 수 없었어요. 우린 그냥 10년 동안 묵묵히 할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홍보됐고, 그래서 알음알음으로 찾아오거나 연락이 온 거죠. 우리가 찾아간 적은 없어요. 우리 재단에 회비를 꾸준히 내는 회원이 1800명입니다. 그 숫자를 늘릴 수 있으면 서울 재단 사무실과 네팔 지부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겠죠. 우리도 공신력 생겼으니까 회원도 늘리고, 기금 마련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엄 대장과 함께 이번에 네팔을 찾아 휴먼스쿨 4곳을 방문하고 의료봉사를 함께한 일행들은 휴먼재단에 1구좌(월 1만원) 이상씩 가입하기로 했다.)

이번 여정의 마지막 일정은 16차 딸께숼 휴먼스쿨 건립 협약식이었다. 카트만두 중심가에서 7㎞ 떨어진 딸께숼 지역에서 4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프리티비 나라얀 고등학교를 리모델링해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아우르는 종합학교로 만드는 계획이다. 1억 루피(약 10억원)에 이르는 1차 공사비는 엄홍길휴먼재단이 많이 내고, 프리티비 나라얀 고교, 딸께숼시에서도 돕기로 했다.

시각장애 학생들 축가… ‘꽃의 눈에는 꽃이 보인다’


▎딸께숼 학교에 다니고 있는 시각장애 학생들. 이들이 행사 중 축가를 불렀다. / 사진:정영재
이의재 엄홍길재단 네팔지부장의 안내로 새 교사(校舍)와 체육관 등이 들어설 부지를 둘러봤다. 많은 학생과 주민들이 두 손을 합장해 “나마스테”라고 인사했다. ‘당신 안에 있는 신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다.

협약식에서는 이 학교 시각장애 학생들이 축가를 불렀다. ‘꽃의 눈에는 꽃이 보이고, 재의 눈에는 재가 보인다’는 내용이라고 했다. 안경을 쓰고 열심히 한글 교본을 들여다보는 여학생도 눈에 띄었다. 모두 꽃처럼 예쁜 아이들이었다.

네팔을 떠나기 전날, 엄홍길휴먼재단의 도움으로 공부하고 있는 두 학생을 인터뷰했다. 남학생 파상 타망은 엄 대장과 함께 2000년 칸첸중가를 오르다 숨진 셰르파의 아들이다. 한국어능력시험에 합격한 그는 한국에 유학 가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할 계획이다. 그는 “제가 여기 서 있는 건 대장님 덕분입니다. 열심히 살아서 대장님처럼 성공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저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겠습니다”고 말했다.

여학생 프레러나 쳐우더리는 학교가 없는 오지 마을 나무 밑에서 남들이 버리고 간 책으로 공부하던 아이였다. 마을에 휴먼스쿨이 생기면서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지금은 네팔 명문인 만모한기념대학 간호학과에 재학 중이다. 그는 “12학년을 마치고 다 돈 벌러 가는데 저만 공부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어요. 마을에 가면 공부하고 싶어도 못하는 어린 동생들이 많아요. 그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학생들을 격려하고자 엄홍길휴먼재단 자문위원이자 전 네팔 교육부장관인 겅가랄 뚜라덜이 함께했다. 엄홍길휴먼스쿨이 네팔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묻자 그는 “엄홍길 대장님”이라고 크게 말한 뒤 이렇게 답했다.

“대장님이 8000m 이상 16개 봉우리를 등반하면서 네팔에서 많은 친구를 잃었는데 그 자녀들에게 뭔가를 하겠다는 게 큰 의미가 있다. 단순히 학교를 만든 게 아니라 네팔 정부가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네팔의 품격과 수준을 높이자면 질 높은 교육이 필요하다. 그건 배운 뒤에 실제 생활과 생계에 써먹을 수 있는 교육”이라고 말한 뒤 두 학생에게 덕담을 건넸다. “아버지가 없는 너희에게 엄홍길 대장님이 아버지가 돼주셨다. 내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큰 꿈을 가져라.”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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