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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유 전문기자의 대학총장 열전] 평양 숭실 재건 나선 황준성 숭실대 총장 

“한강의 기적이 대동강 기적으로 이어져 122년 역사 평양 숭실 복원돼야” 

글 양영유 교육전문기자 yangyy@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 녹취 정리 신재현 월간중앙 인턴기자 wogus0902@naver.com
- 유학 시절 베를린 장벽 무너지는 현장 목격… 통일은 시대적 소명
- 평양 숭실학당 김정은 증조부 김형직 졸업해 북한도 관심
- 창업 강한 한국판 ‘뱁슨 칼리지’로 만들어 4차 혁명시대 이끌 것


▎황준성 숭실대 총장은 선물로 받은 베를린 장벽의 돌을 보며 통일 한반도의 미래를 그린다.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2월 28일)로 북핵 문제가 안갯속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은 불편한 심기를 보여도 자극적인 수사는 자제하고 있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기 때문이다. 하노이 담판 결렬로 문재인 정부도 멈칫하고 있다. 김정은의 서울 답방과 종전선언, 금강산 관광 재개 등 정부가 기대하던 급행열차가 급정거하는 형국이다. 북한 동창리의 동향도 심상찮다. 미묘한 시점이다.

격변의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황준성(65) 숭실대 총장의 심정은 어떨까? 베를린 유학 시절 독일의 통일과정을 생생히 목격한 황 총장은 “철저히 준비하며 천천히 서두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남북통일과 평양 숭실대 재건의 꿈을 그려온 그였기에 통일에 대한 열정은 남다르다.

숭실대는 국내 유일의 이산(離散) 대학이다. 고향이 평양이다. 1897년 선교사 배위량(W.M. Baird) 박사가 대동강 변에 숭실학당을 설립한 것이 모태다. 1908년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숭실대학을 인가받아 최초의 근대 대학으로 졸업생 2명을 배출했다. 1938년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를 단행했다. 그런 굴곡을 극복하고 1954년 서울에서 숭실대가 재건됐으니 이산대학인 것이다. 숭실대 경제학과 74학번인 황 총장은 모교 교수로 재직하다 2017년 총장이 됐다. 평양 숭실 재건과 4차 산업 혁명시대 창업이 강한 ‘한국판 뱁슨 칼리지(Babson College)’ 숭실대를 만들겠다며 개혁의 페달을 밟고 있다. 3월 12일 그를 숭실대에서 만났다.

“통일 독일 타산지석, 북핵과 민간 교류 투 트랙으로 가야”


▎1992년 독일 베를린 자유대 유학 시절의 황준성 총장(오른쪽)과 지도교수. / 사진:숭실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 북핵 문제가 복잡해졌습니다.

“북한의 핵 문제는 중요한 정치·외교적 이슈입니다. 하지만 교육 문제는 별개로 생각해야죠. 정치적 이슈에 의해서 흔들리는 변수로 보지 말고 상수로 봐야 합니다. 교육 교류에 관한 한 남북 학생들이 자유롭게 교류·왕래했으면 좋겠어요. 경제 교류도 핵 문제와는 별개로 진행했으면 하고요. 대학 총장 입장에선 최소한 학술·체육 교류부터 활성화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그래야 10만 숭실인의 숙원인 평양 숭실 재건의 물꼬가 트일 것 같아요.”

국제제재 중이어서 교류가 쉽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렇죠. 그러니 단계별로 차별화해야 합니다. 통일 독일에서 보듯 경제통합은 빨리 될 수 있어요. 문제는 문화통합이죠.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요. 독일은 우리보다 더 많이 준비한 덕에 하나의 ‘문법(문화)’을 만들어가는 데 필요한 시간을 많이 줄였죠. 우리도 통일 비용을 줄이려면 민간차원의 문화교류부터 해야 합니다. 교육이 그 중 하나입니다. 이번 기회에 다양한 대안을 만들어 비정치 분야부터 교류해야 합니다. 정치 분야와 비정치 분야, 투 트랙이 필요해요.”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통일됐습니다. 베를린 유학 시절이었죠?

“베를린 자유대학교로 유학 가보니 동방정책 때문이었는지 물리적 장벽은 존재하지만 동·서독 간 이질감이 거의 없었어요. 사실 거기서부터 충격을 받았습니다. 통일 준비가 많이 되어 있긴 해도 그렇게까지 빨리 통일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베를린 자유대 기숙사에서 베를린 장벽까지는 길어야 800~900m에 불과했어요. 사람들 소리가 요란해 나가보니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 위로 올라가 곡괭이로 깨고 있는 거예요. 야, 이럴 수가 있나? 그때의 충격과 감회는 말할 수 없었어요. 38선이 떠오르고 북한 동포가 눈에 아른거리며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알 수 없는 설움이 밀려와 울컥했고요. ‘우리는 왜 통일을 못 이루는가’하는 안타까움이 내면 깊은 곳에서 슬픔의 강물처럼 흘렀던 것 같아요.”

특별한 기류를 느꼈나요?

“누구도 예상 못 했죠. 잘 알려진 일화가 있어요. 동독 중앙위원회 정보담당 서기 샤보프스키가 실수로 기자들에게 ‘동독 주민들이 자유롭게 서독을 왕래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기자들이 언제부터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져퍼트, 즉시라고 대답했어요. 이것이 기사화되면서 동독 주민들이 국경 지역(border line)으로 달려 나왔어요. 국경 수비대도 통제 불능이었습니다. 분단이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죠.”

그런 역사적 장면을 보신 거군요.

“감동적이었어요. 만감이 교차했죠. 준비된 통일이 가장 바람직한데 갑작스럽게 올 수도 있구나. 우리도 이런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저기 베를린 장벽 돌을 보세요.”

황 총장은 집무실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켰다. 조그만 돌이 들어 있었다. 선물로 받은 것이란다. 그 돌을 보면서 통일 한반도의 미래를 그리고, 평양 숭실대 재건을 꿈꾼다는 것이다.

라인강의 기적이 엘베강의 기적으로


▎1. 1910년 숭실 중학 졸업, 1914년 숭실대학을 졸업한 민족대표 33인 중 1명인 김창준 열사. / 2. 1932년 개교 35주년을 맞아 증축된 평양 숭실대학 본관. / 3. 평양 숭실대 기계창에서 목공 작업을 하고 있는 학생. / 사진:숭실대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보셨는데 많은 시사점이 있지요?

“훌륭한 타산지석입니다. 가장 중요한 교훈은 교류와 협력을 통한 상호공존입니다. 동·서독은 냉전 시기에도 이데올로기 영향을 경계하며 인적·물적 교류에 힘썼습니다. ‘분단된 상태에서 통일 효과를 누리자’는 전략에 따라 편지와 전화 교환, 상호 왕래, TV 시청을 할 수 있게 한 거죠. 동·서독 간 상업적 교역에선 대부분 동독이 유리했는데도 서독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자 동독은 가족 방문과 주민의 서독 이주를 허용하기 시작했어요. 3통(通) 정책, 즉 통상(경제교류), 통행(인적교류), 통신(문화교류)이 중요합니다.”

황 총장은 “사실 독일 통일은 조약과 협정에 의한 통일이었다”고 말했다. 동독이 서독 기본법 제23조와 제146조에 의한 통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51년의 ‘베를린 협약’을 기초로 교류를 시작한 지 40년 만인 1990년 하나가 된 것이다. 1970년 제1차 정상회담 기준으론 20년, 동·서독 기본 조약 체결 관점에선 18년 만이다.

독일과 남북통일 문제는 다른 것 같습니다.

“북한의 핵 포기 선언이 필수입니다. 독일 통일은 동·서독 간 신뢰와 서독의 경제력과 외교력이 강대국을 설득해 나온 결과물입니다. 한반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핵 폐기를 통한 신뢰가 제일 중요합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치밀하게 종합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독일처럼 통일 비용, 화폐 통합, 재산 사유화, 사회·문화적 통합에 대한 마스터플랜이 필요해요. 교훈을 잘 새겨야 합니다. 당시 서독 정부와 경제학자들은 1990년 5월 조성한 통일기금이 충분하다는 판단 착오를 했어요. 2005년까지 약 1조 5600억 유로를 옛 동독지역에 쏟아 부었는데도 약발이 들지 않았죠. 동·서독 간 경제 불균형도 심했고요. 독일 경제가 하향 평준화했다는 비판도 거셌죠. 그런 시련을 극복하고 독일은 통일 대박을 일궈냈어요. 독일이 ‘라인강의 기적’에 이어 ‘엘베강의 기적’을 이뤄낸 것처럼 남북통일이 ‘한강의 기적’에 이어 ‘대동강의 기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엘베(Elbe)강은 독일 중동부에 위치한 드레스덴 시(市)를 끼고 있다. 드레스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도시의 90% 이상이 폐허가 됐다가 통일을 기점으로 첨단 산업도시로 거듭났다. 엘베강의 기적이란 말이 나온 까닭이다.

한강의 기적이 대동강의 기적으로 이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독일도 통일 20년째까지는 재앙이라고 여겨졌어요. 당장은 긍정적인 효과보다 부정적인 효과가 더 컸고, 통일 비용도 어마어마했죠. 25년 정도가 지나면서 성과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때부터 통일 성과를 보려면 인내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죠. 통일은 재앙이 아닌 축복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독일의 학자가 라인강의 기적에서 엘베강의 기적이라는 말을 썼어요. 독일에 배워야 할 학습효과는 큽니다. 빨리 무언가를 기대하면 안 돼요. 독일도 통일 성과를 위해 25년을 기다렸잖아요. 우리는 최소 곱하기 2는 해야 합니다. 최소 50년쯤 돼야 통일 잘했다는 말이 나올 겁니다. 그러니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북한을 끌어안고 통일비용을 감당하자는 국민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통일 대박이 아닌 통일 쪽박이라는 말이 계속 나올 겁니다. 기다리고 인내하는 공감대가 절실해요.”

3.1절 만세 운동 평양 숭실이 주도


▎2018년 6월, 재학생 창업 아이템 상담 공간인 ‘스타트업 펌프 벤처 스튜디오’ 개관식에 참석한 황준성 총장(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 / 사진:숭실대
황 총장은 30년 전 장면이 떠오르는 듯 숙연했다. 그러면서 “통일은 숭실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122년의 숭실 역사가 보여주듯 숭실은 언제나 진리의 편에 서서 겨레와 함께, 민족과 같이 울고 웃으며 달려왔어요. 숭실의 숙명이자 사명인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10만 숭실인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숭실대가 왜 한국 통일 교육을 이끌 대학이라고 하십니까?

“숭실의 뿌리가 평양에 있기 때문입니다. 평양에 아직 숭실학교 기념식 수석이 남아 있어요. 서울캠퍼스 부지가 3만5000평인데 배위량 박사가 처음 확보한 평양 숭실의 부지 면적도 똑같아요. 신기하죠? 우연이 아닙니다. 옛날 평양 숭실학교의 일부분은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관이 쓰고 있어요. 러시아 대사관이 2007년 리모델링 공사를 하다 기념 석비를 발견했어요. 10년 동안 러시아 대사관 관저에 보관했었는데 2017년 기념식 수석 제막행사가 열렸죠. 수석에는 ‘숭전농학과 제2회 졸업생 기념수 1935년 3월(崇專農學科 第二回 卒業生 紀念樹 一九三五, 三月)’이라고 새겨져 있어요. 일제가 자기들이 세운 경성제국대학 외에는 모두 전문학교로 격하시켰기 때문이죠. 제막식에는 신홍철 북한 외무성 부상(외교부 차관급)을 비롯한 북한 고위 외교관들이 참석했습니다.”

북한이 왜 숭실전문학교에 관심을 보이나요?

“김일성의 생부이자 김정은의 증조부인 김형직이 1911년부터 1913년까지 숭실에서 수학한 졸업생이기 때문이죠. 역사적인 고리가 증명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학교는 평양의 김형직 사범대학과 교류협정(MOU)을 맺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시대적 사명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평양 숭실 재건추진위원회’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지난해 10월 10일 발족했습니다. 5개년 로드맵을 짜고 실행 추진위원회도 구성했죠. 북한에 바로 가서 캠퍼스를 짓는 건 무리입니다. 그래서 학교 안에 평양숭실 재건을 위한 재건기금을 마련했습니다. 적지 않아요. 민관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민의 숭실, 관의 국가가 같이 해서 필요하다면 남북협력기금도 이용할 수 있고요. 북한에서 원하면 숭실대에 칼리지 레벨(college level)의 분교를 세우고 싶어요. 통일이 될 때까지는 평양 숭실이 서브, 서울 숭실이 메인, 그리고 통일이 되면 평양 숭실이 본교, 서울 숭실이 분교가 될 것입니다. 평양숭실은 먼저 북한에 시급한 학문적·사회적 수요에 맞춰 정보기술(IT) 분야로 특화하는 방향을 생각하고 있어요. 여건이 되면 평양으로 달려가 물꼬를 트고 싶어요.”

122년 역사의 숭실대는 민족의 역사 같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누가 있나요?

“100년 전 3.1절 평양 만세 항쟁은 사실상 숭실인이 주도했어요. 당시 숭실 교정에 게양되었던 태극기가 현재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있죠. 민족 대표 33인인 박희도·김창준 열사를 비롯해 독립유공자도 83명을 배출했습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한국 음악의 거장 김동진·현재명, 종교계의 노벨상인 ‘템플턴 상’을 수상한 한경직 목사도 숭실인입니다.”

황 총장은 대한민국 최초의 기독교 대학이 평양에 세워졌을 때는 최초이고 최고였는데 현재 위상은 그렇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숭실의 명예와 명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최초이고 최고였던 숭실의 자부심 말입니다.”

숭실대는 통일 교육도 앞장서고 있지요.

“우리 대학에 통일은 소명(召命)입니다. 남북 하모니를 이끌 인재를 키우려 적극적으로 통일 교육을 하고 있어요. 교양 필수 과목인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이수하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죠. 숭실통일리더십연수원과 기독교통일지도자훈련센터, 기독교통일지도자학과 석·박사과정, 숭실평화통일 연구원 도 운영하고 있어요. 통일부의 ‘통일선도대학’에도 선정됐고요.”

1969년 최초로 IBM 컴퓨터 도입한 IT에 강한 대학

황 총장은 숭실대의 강점인 정보기술(IT)을 창업으로 연결하고자 한다. 평양과 서울 숭실의 미래 역시 IT 특화를 통한 창업특화 대학에 걸고 있다. 창의적 융·복합 인재를 길러 창업과 창직에 나설 수 있도록 개성 있는 인재들을 양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숭실대가 창업 과 IT에 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양 숭실은 학생들이 기술을 익히며 학비를 조달할 수 있도록 미국형 산학협력 모델인 학생자조기관을 최초로 도입했습니다. 1902년에는 T자형 공장인 기계창(機械廠)을 지어 학생들이 목공·철공·주물과 같은 전문기술 교육을 받게 했죠. 기술선도 정신이 이어져 1969년에는 국내 대학 최초로 IBM 컴퓨터를 도입하고 전자계산학과를 신설했어요. 국내 첫 중소기업대학원(1983년), 정보과학대학원(1987년), IT대학(2005년), 금융학부(2010년) 등 시대를 앞서가는 ‘최초’의 기록을 쓰고 있습니다.”

숭실은 다양한 ‘1호’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최고가 못 됐나요?

“여러 원인과 이유가 있겠지만, 저부터 반성의 고백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최초를 최고로 발전시킬 마스터플랜이 없었던 것도 원인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엔 최고가 되려고 혁신 중입니다.”

총장 임기의 반이 지났는데 혁신에 가장 역점을 두는 분야는.

“4차 혁명을 선도하는 교육혁신입니다. 숭실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더 단단히 해 창의·융합형 인재를 키워내려 합니다. 빅데이터 융합 분야로 치고 나갈 겁니다. 베스트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2년 안에 토대를 만들어 다음 리더십에 넘겨줄 겁니다. 최소 10년은 가야 하니 빅데이터만큼은 확실히 할 겁니다. 또 하나는 창업선도대학입니다. 지난해 정부 평가에서 우리가 ‘최우수’ 대학에 꼽혔어요. 정도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인재 육성 방식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맞아요. 강의실을 뜯어고쳐야지요. 스펙 관리하는 모범생 시대, 간판주의 시대는 끝났어요. 드라마 [SKY 캐슬]에 나왔던 인재상은 21세기 대한민국 교육의 마지막 부산물에 불과해요. 그런 교육으론 미래가 없어요. 창의력을 갖춘 협력하는 괴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에디슨같이 계란도 배에 품어보는 괴짜, 뭔가 하나를 터뜨리면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가 되는 시대 아닙니까? 교수들도 옛날처럼 가르치면 안 돼요. 지식은 온라인에 다 있어요, 모든 수업을 PBL로 바꾸려 합니다. PBL이란 프로젝트 중심 교육(Project Based Learning), 또는 문제 해결 중심 교육(Problem Based Learning)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주도적 학습이죠.”

4차 산업혁명 시대엔 융합적 사고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2017년부터 DIY(자기설계융합전공)를 도입했죠. 학생 스스로 교과목을 구성해 학교 승인을 받아 전공을 이수하는 제도입니다. 교내로 한정하지 않고 국내는 물론 해외 교류 대학 교과목까지 학생 선택권을 넓혔어요. 그랬더니 사물인터넷 네트워크, 과학철학, 유비쿼터스 의공학, 인간 및 사회 통섭 등 다양한 전공과목이 개발됐어요. 더 확대될 거라 봅니다.”

대학 수업 방식이 확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 시절 토론 중심 수업을 하고 학기 말에는 구술시험을 치렀죠. 독일식으로 3년 정도 했는데 역부족이더군요. 구술시험도 쉽지 않고 성적 내기도 어렵고. 앞으론 해내야 합니다. 팀 티칭, 팀 레벨의 토론 수업으로 말이죠. 그런 개혁을 통해 4C를 갖추도록 자극해야 해요. 창의력(Creativity), 비판적 사고력(Critical thinking), 소통능력(Communication), 협업능력(Collaboration)입니다. 그게 대학의 역할입니다. 지식 전달의 시대는 끝났어요.”

학생 스스로 전공과목 만드는 DIY로 4C형 인재 육성


▎황준성 총장은 재학생들에게 “제조업이나 상품 개발 분야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재능을 극대화하는 분야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 사진:숭실대
교수를 설득하는 일이 힘듭니다.

“좀 늦더라도 함께 가야 해요. 소통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요. 지난 2년 동안 구성원이 잘 따라줘 감사하죠. 대표적인 게 ‘융합 특성화 자유전공학부’입니다. 독립적 레벨의 단과대 학부로 신설해 거의 모든 학과가 최소한 한두 개씩 엮어서 융·복합할 수 있도록 만들었죠. 톱다운 베이스입니다. 학과 간 벽을 깨려 겸직교수(JA, Joint Appointment)제도 시도했죠. 다른 대학엔 거의 없죠. 특정 학과의 특정 전공 교수를 뽑는 게 일반적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 학교 IT 전자전기공학부는 그 학부만이 아니라 컴퓨터 공학부 소속도 됩니다. 양쪽을 넘나들며 교육과 연구를 같이 하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수 정원(T/O)을 주지 않았죠. JA가 활성화되면 교수 칸막이가 헐릴 겁니다.”

황 총장께서 유난히 창업정신을 강조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평양 숭실이 기계창을 만든 것은 여러 의미가 있어요. 학생들이 생활비를 버는 생활의 도구도 되지만 창립도 하는 최초의 산학협력 모델이었죠. 이 시대엔 취업보단 창업, 창직이 중요해요. 창업선도대학으로 인정받았으니 ‘숭실대를 뱁슨 칼리지(Babson College)로 만들겠다’고 선언했어요. 지난해 직접 미국 현장을 봤어요. 뱁슨 칼리지는 미국 보스턴에 위치한 MIT대와 하버드대에 인접해 있는데 틈새 전략을 잘 짰더군요. 우리도 서울대 옆에 있어요. 서울대는 학문 연구로 명성을 날리고, 숭실대는 창업이 최고인 한국의 뱁슨 칼리지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이유입니다. 전 세계 학생들이 하버드대 대신 그 옆에 있는 뱁슨을 찾아가는 것처럼 특성화·차별화를 통해 숭실대를 찾게 할 겁니다.”

뱁슨 칼리지는 1919년 창업과 경영, 기업가 정신에 초점을 맞춰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인근에 설립한 사립대다. 지난해 [US 뉴스 & 월드 리포트]지가 MBA 부문 최고 우수대학으로 선정했다. 21년 연속이다. 특히 졸업생의 창업 비율이 17%로 스탠퍼드대(13%), 하버드대(7%), 컬럼비아대(5%)보다도 높다. 앙트러프러너쉽(Entrepreneurship), 즉 기업가 정신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과연 숭실대가 한국의 뱁슨 칼리지처럼 될 수 있을까?

뱁슨 칼리지로 만들 수 있는 구체적 계획이 있나요?

“모든 재학생에게 기업가 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올해부터 모든 신입생은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과목을 필수로 들어야 합니다. 총동문회 최고경영자과정(CEO) 포럼도 발족시켰고요. 1대1 창업 클럽을 만들면 동문 CEO가 멘토 역할을 해줍니다.”

창업은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아요. 왜 창업인가요?

“여러 의미가 있어요. 우선 도전의식을 심어주죠. 학생들에게 넥타이 매는 데 가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합니다. 산업구조가 대기업 중심이어서 넥타이 부대를 양산했어요. 그러다 보니 청년들의 도전 정신이 부족해졌어요. 물론 창업에 성공하는 것은 어렵죠.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그 경험이 100세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사실 배운 지식은 아무리 길어봤자 1년 이내에 잊힙니다. 그래서 45개 전공 중 32개에 캡스톤 디자인(Capstone Design)을 만들었죠. 학생들이 팀을 만들어 창업 아이템을 개발해가는 과정입니다. 내년까지 모든 학과에 도입합니다. 꼭 제조업이나 상품 개발 분야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재능을 극대화하는 분야를 찾아야 합니다.”

‘창직 시대’엔 ‘넥타이 맨’ 고집 말아야

‘숭실’ 하면 떠오르는 벤처 성공스토리가 있나요?

“걸출한 스타가 없는 건 아쉽습니다. 일신방직 창업자인 김형남 이사장이 기계창 출신이고 ‘곰 TV’를 만든 이병기 대표도 있지만…. 벤처 스타는 많지 않아도 전산 쪽 특히 금융기관을 필두로 한 기업의 책임자들은 숭실맨이 많아요. 최근 캠퍼스에 미래의 벤처 스타가 될 학생 창업가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어요. ‘스마트폰으로 안구 검사하는 인공지능(AI) 종합 솔루션’ 업체 픽셀 디스플레이(대표 권태현, 글로벌 미디어 학부 13)는 ‘키즈옵터(KIZOPTER)’라는 앱을 개발했어요. 스마트폰으로 영·유아 시력과 안구 굴절 이상 여부를 검사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입니다. 빛의 안구 반사 원리를 이용한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개발해 미국·중국·유럽 등에 8건의 특허 출원 및 등록을 마쳤어요. 전자문서를 100% 검증하는 화이트블록(대표 전의찬, 컴퓨터학부 17)은 ‘2018 서울지역 우수 창업동아리’ 왕중왕전을 제패한 실력 있는 벤처죠. 이렇게 놀라운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가득 찬 청년들에게 내일은 절대 두려운 대상이 아닐 겁니다.”

인터뷰는 총장실과 한국기독교 박물관, 숭실대 재건자인 한경직 목사 기념관, 그리고 재학생 창업 아이템 상담 공간인 ‘스타트업 펌프 벤처 스튜디오(Startup Pump Venture Studio)’를 돌며 네 시간 이상 이어졌다. 특히 지난해 6월 15일 문을 연 벤처 스튜디오에는 멘토링 룸과 프로젝트 룸, 코워킹 공간이 있어 신선했다. 새 학기를 맞은 학생들도 활기찼다. 황 총장은 “모든 역경은 의지로 돌파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청년 시절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기독교 집안의 외동아들로 자라 1978년 숭실대를 졸업하고 ROTC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고 한다. 미국 유학을 생각했으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2년 동안 기업체에 다녔다고 한다.

미국이 아닌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된 동기가 있나요?

“회사에 다니면서도 학자의 꿈을 접을 수 없었어요. 고민하고 있었는데 지인이 독일 유학을 추천했어요. 학비가 전혀 없더군요. 그래서 회사에 다니며 주경야독으로 처음으로 독일어를 공부했죠. 하버드대는 못 가도 독일에서 제일 좋은 대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교회에서 만난 담임목사님 딸과 결혼해 같이 떠났어요. (웃으며) 아내는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는데 당연히 장모님께서 반대하셨었지요.”

‘배워서 남주자’ 교육 소신

독일에는 얼마나 있었나요?

“10년 정도 있었죠. 학사부터 다시 공부했어요. 한국에서 이수하지 않은 과목을 독일에서 따로 들어야 했어요. 일종의 학사편입이죠.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다 베를린 자유대에서 마쳤어요. 파이프오르간을 전공한 아내도 교수로 일하다 지난해 퇴직했습니다.”

ROTC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치고 유학 가는 경우는 드문데요.

“어차피 군대에 가야 하니 장교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강원도 양구에서 복무하면서 10·26 사태도 겪었습니다. 제가 학군장교(ROTC) 16기인데 대학 총장 중 선후배도 있어요. 명지대 유병진 총장이 13기, 한국외국어대 김인철 총장이 18기, 그리고 단국대 장호성 총장은 16기 동기입니다.”

평소 신념과 교육철학이 궁금합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신념입니다. 평생 교육자로서 ‘교육은 사람이다. 배워서 남 주자. 타인을 섬기자’는 소신을 갖고 있어요.”

황 총장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올곧은 원칙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의 자녀 교육관은 어땠을까? 1녀1남을 뒀는데 자유방임 교육을 했다고 한다. “억지로 시켜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하고 싶은 일을 하더군요. 딸은 취업 후 출가했고, 아들은 얼마 전 졸업해 푸드 트럭을 한다더니 말아먹었어요. 공유 하우징 창업을 한다고 해 잘 도전해보라고 했어요. 뜻을 세우고 뚜벅뚜벅 걸어가면 반드시 각자 길이 있어요.” 황 총장이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박스기사] 황준성 총장 약력


▎1919년 3·1운동 당시 평양 숭실대가 사용했던 태극기 앞의 황준성 총장.
■ 1954년 대구 출생, 무녀독남
■ 1978년 숭실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ROTC 16기 임관
■ 1988년 베를린 자유대학교 경제학 석사
■ 1992년 베를린 자유대학교 경제학 박사(비교경제,정치경제학)
■ 1993년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 2009~2014년 숭실대 교무처장·경제통상대학장·학사부총장
■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수석부회장 한독경상학회 고문, 신촌교회 시무장로
■ 2017년 2월 숭실대 제14대 총장~현재

※ 양영유 교육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고려대 영어교육학과를 나와 한국외국어대에서 교육저널리즘으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30년 가까이 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교육데스크, 정책사회데스크, 사회1데스크, 행정국장, 사회에디터를 거쳐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마음은 따뜻하고 시선은 엄정해야 한다는 저널리즘 소신을 갖고 있다. 공저[한국의 파워엘리트]와 역서[멀티미디어 조직혁명]이 있다.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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