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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1부)] 진흥왕, 한강 유역을 점령하다(4) 전략적 선택의 적중 

상대 약점 최대 이용해 통일 기반 다진 명군(明君) 

고구려와 백제 사이 절묘한 줄타기로 요충지 한강 유역 차지
한반도 주도권 장악… 광개토대왕 버금가는 정복군주로 우뚝


▎한강 유역 고구려 유적지인 경기도 구리 지역의 아차산 시루봉 보루. 삼국시대 세 나라의 쟁탈전이 매우 치열했던 곳이다.
7세에 즉위한 진흥왕에게 즉위 12년째인 551년은 기념비적인 한 해였다. 이 해에 진흥왕은 18세가 됐다. 신라 때 성년인 16세보다 두 살이나 많은 나이였다. 나이만 생각하면 벌써 친정(親政)을 했어야만 마땅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551년 새해를 맞이해 진흥왕은 연호(年號)를 개국(開國)으로 고쳤다. 연호란 ‘연대(年代) 칭호’란 의미 그대로 유교문화권에서 새로운 제왕이 등장할 때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신라는 법흥왕 23년(536)에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후 15년 만인 551년에 개국이라는 연호로 바꾼 것인데, 진흥왕이 친정을 결단하고 그 친정을 기념한 것이다.

진흥왕이 자신의 시대를 상징하는 연호로 ‘개국’을 쓴 것은 의미심장했다. ‘개국’은 나라를 새로 개창한다는 의미도 있고, 국토를 크게 개척한다는 의미도 있다. 진흥왕의 연호인 개국은 개창보다는 개척의 뜻이라고 봐야 한다. 진흥왕은 새로운 나라를 개창한 왕이 아니라 새로운 국토를 개척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처럼 진흥왕은 자신의 시대를 위대한 정복의 시대로 만들고자 개국이라는 연호를 썼던 것이다.

진흥왕은 친정하기 이전부터 위대한 정복 군주의 재능을 보여줬다. 친정 1년 전인 550년의 일이었다. 그해 1월 백제의 성왕은 장군 달사(達巳)에게 군사 1만을 줘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게 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백제 성왕 역시 불교의 전륜성왕을 자처한 위대한 정복 군주였다. 성왕은 538년 봄에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후 국력을 키웠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자 성왕은 대군을 일으켜 도살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475년 한성을 함락당하고 웅진으로 후퇴한 뒤로 백제의 최대 염원은 한성 수복이었다. 그 염원을 달성하기 위해 백제 왕들은 수십 년간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523년에 즉위한 성왕 역시 마찬가지였고, 마침내 550년 1월 한성 수복의 전 단계로 도살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고구려·백제의 난타전 와중에 얻은 어부지리


▎신라시대 재현 행사에 등장한 장수와 군사들.
도살성의 위치는 논란이 없지 않지만 청주 북쪽의 증평에 있던 성으로 비정(比定)된다. 당시 고구려는 충북 충주에 군사 거점을 두고 있었고, 도살성은 전진기지였다. 그 충주와 도살성 때문에 백제는 한성 수복은커녕 수도 부여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북쪽의 한강 방면 고구려군과 동쪽의 충주 방면 고구려군에게 협공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도 부여의 안전을 확보하고 장차 한강 방면으로 반격하자면 도살성과 충주를 먼저 장악해야 했다. 550년 1월에 성왕이 대군으로 도살성을 선제 공격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도살성을 함락당한 고구려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대로 있으면 충주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충주를 잃으면 한반도 중부 지역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한성 지역이 위험해졌다.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당한 만큼 돌려줘야 했다. 550년 3월,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보복 공격해 함락했다. 금현성의 위치 역시 논란이 많은데 증평 주변의 백제성으로 비정된다.

즉 도살성이 충북의 고구려군 전진기지라면, 금현성은 충청도의 백제군 전진기지였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어느 정도의 병력을 동원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도살성을 공격한 백제 병력이 1만이었다는 사실에서 고구려 공격군 역시 그에 못지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군이 금현성을 함락하기는 했지만 막대한 피해를 면할 수는 없었다.

예컨대 고구려 공격군이 1만이고, 백제 수비군이 1만이라고 가정하면 양측 모두 비슷한 사상자를 내고 고구려가 겨우 승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살성과 금현성 공방전에서 백제와 고구려는 겉으로 일승일패였지만 사실상 양패구상(兩敗俱傷)이나 같았다. 도살성의 백제군이나 금현성의 고구려군 모두 기진맥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을 신라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힌 어부지리였다. 마음만 먹으면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 성을 차지한다면 충주를 비롯한 충북 전체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반도의 중원을 장악한다면 신라는 남한강을 따라 강원도·경기도로 팽창해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한강 본류까지 장악하면 신라는 한반도 전체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백제와 고구려를 동시에 적으로 돌려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신라 혼자 두 나라를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자칫 멸망당할 위험이 컸다. 그래서 550년 초에 신라는 결단해야 했다. 당장 백제·고구려와의 대결을 각오하고 한강 유역으로 팽창할지 아니면 현재 상황을 유지하며 만족할지 결단해야 했다.

한강 유역으로의 팽창이나 현상 유지나 모두 일장일단이 있었다. 한강 유역으로 팽창은 성공했을 때 한반도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실패 시 백제와 고구려 협공을 받아 멸망할 가능성도 있었다. 현상 유지 역시 신라의 현재를 유지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현재가 백제나 고구려의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요컨대 팽창 정책은 미래의 성공을 위해 멸망 위험을 각오해야 했고, 현상 유지 정책은 현재의 유지를 위해 미래의 변화를 각오해야 했다.

신라 수뇌부의 미래지향적 선택


▎경남 창녕에 있는 진흥왕척경비(拓境碑). 가야를 신라 영토에 편입시킨 것을 기념해 561년 세웠다.
550년 당시 신라 진흥왕은 17세였지만 아직 왕태후가 섭정 중이었다. 진흥왕과 왕태후를 뒷받침하는 핵심 실세는 이사부와 거칠부였다. 따라서 당시 신라가 팽창 정책을 택할지 아니면 현상 유지 정책을 택할지는 궁극적으로 진흥왕·왕태후 그리고 이사부와 거칠부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미래지향적이라면 팽창 정책을 택할 것이고 반대라면 현상 유지 정책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 네 명은 공히 미래지향적이었다. 특히 17세의 진흥왕이 미래지향적이었다. 조만간 친정을 해야 하는 진흥왕이었기에 당연히 미래지향적이었다. 진흥왕의 미래지향성은 왕태후와 이사부 그리고 거칠부에 의해 더욱 강화됐다. 왕태후와 이사부 그리고 거칠부는 진흥왕의 성공적인 친정을 위해 미래지향적이었는데, 특히 이사부와 거칠부가 미래지향적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흥왕은 550년 백제와 고구려가 싸움에 지친 기회를 타서 이찬 이사부에게 명령해 도살성과 금현성을 점령하게 했다고 한다. 진흥왕을 비롯한 신라 지도부가 한강 유역으로 팽창 정책을 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팽창 정책은 진흥왕과 왕태후가 최종 결정했겠지만 이사부와 거칠부가 입안했다고 봐야 한다.

한강 유역으로 팽창 정책은 신라의 미래는 물론 진흥왕의 친정을 위한 위험한 정책이었다. 자칫 백제와 고구려의 동맹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강 유역으로 팽창정책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백제와 고구려의 동맹을 저지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제와 고구려의 동맹을 저지하려면 당연히 양국 간의 갈등을 최대한 조장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당시 신라가 택한 한강유역으로 팽창 정책은 어부지리 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상대의 약점을 극대화해 최대 이익을 확보하는 정책이었다.

그 같은 어부지리 정책을 실행한 이사부의 경우 지증왕 6년(505) 실직(實職) 군주(郡主)가 된 이후 법흥왕과 진흥왕 3대에 걸쳐 활약한 대표적인 장군이자 정치가였다. 550년이면 이사부는 70대 전후의 최고 원로로서 병권을 장악한 최고 실세이기도 했다. 당시까지 진흥왕이 친정을 하지 않은 이유는 왕태후와 이사부에 대한 배려 때문이기도 했다. 친정을 하려면 왕태후와 이사부를 퇴진시켜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이사부가 너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550년 당시 이사부는 이미 고령이었고 진흥왕 또한 17세였다. 이사부 입장에서는 진흥왕의 친정과 함께 자신의 퇴임 그리고 자신의 후임자를 준비해야만 할 때였다. 이사부가 자신의 후임으로 신임한 인물이 바로 거칠부였다. 550년 당시 신라의 팽창 정책은 형식상 이사부가 실행했지만 실제는 거칠부가 입안했다고 봐야 한다.

[삼국사기] 열전에 의하면 거칠부는 아주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거칠부는 내물왕의 5세손으로 이사부의 조카뻘이었다. 거칠부는 소년이었을 때 원대한 뜻이 있어 머리를 깎고 스님이 돼 사방을 편력(遍歷)했다고 한다. 소년이라면 20세 이전으로 봐야 하는데, 거칠부의 20세 이전은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전이었다.

거칠부는 진지왕 4년(579) 즈음에 78세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태어난 해는 502년 즈음이 된다. 따라서 소년의 거칠부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다는 시점을 20세 이전으로 본다면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던 528년보다 최소한 6년 이전일 것이다. 당연히 신라에서 불교는 금기시됐다. 그럼에도 어린 거칠부는 주위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스님이 됐던 것이다. 주관이 뚜렷하고 담력도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듯하다.

그렇게 신라를 편력하던 거칠부는 30대에 고구려를 정탐하기 위해 밀입국했다. 거칠부는 혜량(惠亮) 법사가 불경을 강설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공부했다. 법사가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한강 유역에 있었을 듯하다. 그 이유는 551년 9월 거칠부가 남한강 하류를 점령했을 때 법사가 귀순했기 때문이다.

법사 문하에서 공부하던 어느 날, 법사가 거칠부를 불러 “사미(沙彌)는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물었다. 거칠부는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혜량 법사가 이미 알고 묻는다고 판단해 그렇게 대답했을 듯한데, 이런 사실에서도 거칠부의 대담무쌍한 담력을 엿볼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거칠부는 당황했어야 마땅하다. 정탐을 위해 밀입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칠부는 거침없이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오히려 놀란 사람은 법사였다. 거칠부는 자신이 신라에서 온 간첩이라고 고백한 셈인데, 그 거칠부를 어찌할지는 법사에게 달렸다. 관청에 신고할 수도 있고 모른 척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거칠부의 그릇 크기를 알아본 혜량 법사


▎관악산 정상부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성벽.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6세기 중엽부터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날 밤 법사는 비밀리에 거칠부를 불러 “그대의 용모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대는 딴 마음이 있지 않는가” 하고 추궁했다. 고구려에 잠입한 목적을 실토하라는 추궁이었다. 하지만 거칠부는 다른 목적은 없고 그냥 불교 공부를 위해 왔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법사는 “그대를 신라 사람으로 알아보고 잡을까 염려돼 비밀히 알리는 것이니,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아울러 법사는 “그대의 인상을 보니 제비의 턱과 매의 눈을 가져 장차 반드시 장수가 될 듯하다. 만약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로 쳐들어오는 날에는 나를 해치지 말기 바란다”는 청탁까지 했다.

고구려를 탈출해 신라로 돌아온 거칠부는 이사부의 추천을 받아 고관대작에 올랐다. 거칠부가 역사 기록에 등장한 때는 진흥왕 6년(545)부터다. 그해에 이사부는 진흥왕에게 ‘국사(國史)는 군신의 선악을 기록해 잘하고 못한 것을 만대에 보이는 것’이라며 편찬을 요청했다. 진흥왕이 수용함으로써 국사 편찬이 시작됐는데 그때 거칠부가 책임자로 추천됐다. 거칠부를 추천한 사람은 물론 이사부였다. 그 후 몇 년 동안 거칠부는 당대의 지식인들과 함께 국사 편찬에 전념했다.

550년 초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놓고 충돌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거칠부는 한반도의 현실 상황 및 신라의 대응 방안을 이렇게 제시했을 것이다.

과거 100년에 걸쳐 한반도의 주도권을 행사하던 고구려는 심각한 내분으로 약화된 반면, 백제는 역대 왕들의 절치부심으로 부흥하고 있다. 신라 역시 법흥왕 이래 약진하고 있다. 향후 당분간은 이 같은 추세가 지속될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대결을 최대한 조장하되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하게 대응함으로써 국익을 극대화한다. 아울러 고구려가 약화되는 상황이라 신라의 국익은 고구려 영토에서 구현돼야 하며 최적의 장소는 한강 유역이다.

한강 유역은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장악돼야 한다. 이런 거칠부의 제안에 이사부·진흥왕 그리고 왕태후 등이 동의함으로써 한강 유역으로의 팽창 정책이 확정됐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 거칠부는 이사부의 후계자로 공인됐을 뿐만 아니라 명실상부 최고의 고구려 전문가로 인정됐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사부는 두 성을 점령하고는 1000 병력을 둬 수비했다고 한다. 이사부가 두 성을 점령한 시점은 550년 3월 직후, 그러니까 4월이나 5월쯤일 것이다. 그런데 ‘이사부 열전’에 의하면 금현성을 빼앗긴 고구려에서는 보복 공격을 했지만, 도살성을 빼앗긴 백제군의 공격은 전혀 없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이사부가 금현성의 고구려군은 공격했지만 도살성의 백제군은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백제와 고구려의 동맹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진흥왕은 금현성을 함락한 후 백제 성왕에게 한강 유역 수복을 위한 합동 작전을 제안했던 듯하다. 그때 진흥왕은 백제가 한강 유역을 공격하면, 신라는 충주부터 양평까지 즉 남한강 하류까지 공격하겠다고 제안했을 듯하다. 그것은 고구려의 영토 중에서 옛 백제 영토인 한성 지역은 백제가 갖지만, 남한강 유역은 신라가 나눠 갖겠다는 제안이나 같았다.

또한 그것은 도살성을 그냥 내놓으라는 제안이기도 했다. 도살성이나 충주 역시 남한강 유역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백제 성왕은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한다면 고구려와 신라를 공히 적국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성 수복이라는 염원도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결국 성왕은 한성 유역 수복을 위해 도살성과 충주 등 남한강 상류 전체를 신라에 양보했다.

이렇게 신라는 어부지리 정책으로 금현성과 도살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충주를 중심으로 하는 남한강 상류까지도 수월하게 획득했다. 그 후에도 신라의 어부지리 정책은 계속됐고, 최소 노력으로 확보되는 최대 효과도 계속됐다.

551년 1월, 18세의 진흥왕은 새해를 맞아 친정과 함께 개국 연호를 선포했다. 이렇게 보면 550년의 남한강 상류 확보는 진흥왕의 친정을 위한 사전포석이자 한강 유역 확보를 위한 정지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550년에 신라가 충주를 포함한 남한강 상류를 장악한 사실은 551년 3월 진흥왕의 청주 순행(巡幸)으로 확인된다. 그 순행은 진흥왕 최초의 순행이자 친정 기념 순행으로 아주 중요했다. 진흥왕이 청주까지 순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주변의 도살성과 금현성은 물로 충주 지역과 단양 지역까지도 장악했기에 가능했다. 청주에 순행한 진흥왕은 그곳으로 우륵을 불러 가야금을 연주하게 했다. 이는 개국이라는 연호를 내걸고 위대한 정복 군주를 지향하는 진흥왕에게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청주 순행 이후 정복사업 본격화


▎북한산 소재 국보3호 진흥왕순수비는 균열·파손 방지 등을 위해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진흥왕은 대가야 출신의 우륵 그리고 새로 정복한 충북 지역을 위무(慰撫)함으로써 장차 개척할 국토와 백성들도 잘 위무하겠다는 뜻을 선전한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550년 신라의 남한강 상류 점령 그리고 551년 3월 진흥왕의 청주 순행은 모두 위대한 정복 군주 진흥왕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알리고자 이뤄진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주 순행 이후 진흥왕의 정복은 본격화됐다. 그것은 551년 9월 거칠부가 수행한 남한강 하류와 북한강 유역 점령으로 시작됐다.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에 의하면 551년 진흥왕은 거칠부를 비롯한 8장군에게 명령해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는데, 백제가 먼저 한성 지역의 6군(郡)을 점령하자 거칠부 등은 승세를 타서 경상도 죽령에서부터 강원도 철령에 이르는 10군(郡)을 점령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성왕이 신라와 가야 병력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해 한성 지역의 6군을 수복한 것으로 기록됐다. 두 기록을 종합하면 551년 9월 백제와 가야 연합군이 먼저 한성 지역을 공격했고, 거칠부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신라군은 죽령부터 철령 지역 즉 남한강 하류와 북한강 유역을 공격해 점령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 총사령관이 거칠부였다는 사실에서 진흥왕 친정 이후 신라의 병권이 이사부에서 거칠부로 넘어갔음도 알 수 있다. 550년 거칠부는 어부지리 정책을 입안했고 실행은 이사부가 주도했지만, 551년 진흥왕의 친정 이후 거칠부가 이사부를 대신했던 것이다. 거칠부가 총사령관으로 남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하자 혜량 법사는 거칠부에게 귀순했다. 옛날 약속대로 거칠부는 법사를 환대했다. 법사는 거칠부의 추천으로 진흥왕대 최초의 승통(僧統)이 돼 신라 불교를 정비했다.

그런데 당시 백제 성왕은 한성 지역 수복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승리한 기회를 타고 아예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라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해서 연합작전을 제의했다. 당시 성왕이 진흥왕에게 어떤 대가를 제시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강 이북의 동쪽 방면 즉 함경도 지역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성왕은 이미 남한강과 북한강 유역을 신라에 양보했기에 그 북쪽을 추가로 양보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즉 성왕은 신라와 더불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한반도를 동서로 분할하자고 제안했을 것인데, 진흥왕은 거절했다. 가장 큰 이유는 수용할 경우 어부지리 이점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고구려·신라의 밀약… 백제는 일본과 결탁


▎공주에 있는 공산성은 문주왕 원년(475) 한강 유역에서 천도해 성왕 16년 부여로 옮길 때까지 64년간 왕도를 지켰던 왕성이다.
고구려가 멸망하면 신라와 백제의 대결이 본격화할 것은 불문가지인데 한반도 동쪽은 겉으로만 넓을 뿐 인구가 적었다. 당연히 백제와의 대결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고구려를 존속시켜 백제와 대결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이익이었다.

그래서 진흥왕은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렸는데,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라겠는가”는 명분으로 거절했다. 진흥왕은 성왕의 제안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고구려와 밀약을 맺기까지 했다. 어부지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관련해 [일본서기]에는 ‘신라가 고구려와 밀약해 말하기를 백제와 가야가 자주 일본에 가는데 이는 병력을 요청해 신라를 공격하려는 뜻인 듯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라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병력이 출동하기 전에 먼저 안라(安羅: 아라가야, 함안 지역)를 공격해 일본의 길을 끊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 본다면 신라가 고구려와 밀약하자 성왕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과 밀착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을 협상한 주역은 아무래도 거칠부였을 듯하다. 거칠부는 귀순한 지 얼마 되지 않는 혜량 법사를 매개로 고구려 지배층과 연결해 막후 협상을 벌였을 것이다.

거칠부는 신라와 고구려의 협력 조건으로 백제가 점령한 한강 하류를 요구했을 것이 분명하다. 고구려는 그 요구를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한강 하류는 이미 백제가 점령한 상황이고, 자칫 신라와 백제가 연합 공격한다면 고구려가 멸망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백제에게 빼앗긴 한강 하류만 포기하고 신라와 백제의 군사동맹을 와해시킬 수 있다면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그 결과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이 성사됐다. 553년 7월, 신라군은 한강 하류를 기습 공격했다. 최고 사령관은 물론 거칠부였을 것이다.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을 눈치챈 백제 성왕은 대항하지 않고 후퇴했다.

이에 거칠부는 한강 하류 역시 수월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도살성과 금현성 점령부터 시작된 신라의 어부지리 정책은 한강 하류 점령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이렇게 한강 유역 전체를 점령하게 된 진흥왕은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에 버금가는 정복군주가 됐다. 친정시 연호에서 표명한 그대로 명실상부한 개국 군주가 됐던 것이다. 이 같은 진흥왕의 성공은 궁극적으로 어부지리 정책 즉 상대의 약점을 최대화해 최대 이익을 확보하는 정책으로 가능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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