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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우리가 몰랐던 일본, 일본인(16)] 사랑과 야망의 격돌-이시다 미쓰나리의 세키가하라 전투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 모두가 한 사람을 위해 노력하면 행복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림자’로 발탁돼 통일전쟁 막후 지휘
도쿠가와와 대립 때 아군 배신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세키가하라 전투]의 한 장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운데) 앞에 다이묘들이 무릎을 꾼 채 엎드려 있다.
역사는 해석이다.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펼쳐진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승자와 패자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이유다.

1600년 9월 15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10만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1600)의 8만 서군 등 총 18만의 대군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그 전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일본 열도가 둘로 나뉜 ‘세기의 결전’이었다.

히데요시 사후에 발생한 도요토미 정권의 동요를 틈타 정권 탈취를 노리는 이에야스와 그를 저지하려는 미쓰나리 등의 치열한 투쟁이자 새로운 권력 등장을 알리는 통과의례였다. 생사를 건 무장들의 음모와 배신이 전투의 막후에서 펼쳐진다. 권력을 두고 벌이는 싸움은 철저하게 승자와 패자로 나뉜다.

서군의 실질적 대장이었던 패자(敗者) 미쓰나리는 역사에서 악역을 떠맡은 사람으로 기록되고 만다. 두뇌는 명석하나 인망(人望)이 부족하고, 도요토미의 천하를 망쳐버린 이미지다.

그러나 최근에는 ‘의(義)를 관철한 충신’이라는 해석이 등장했다. 동군과 서군의 대결은 서로의 이해가 충돌한 사건이다.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지분’을 갖고 있던 이에야스로서는 자신의 몫을 되찾는 일이었다. 히데요시에게 어려서부터 은혜를 입고 있던 미쓰나리에게는 정권 탈취를 시도하는 역적을 처단하는 정의 실현의 문제였다. 전쟁을 통해 힘의 우위로 시비를 결정하는 방식은 화끈하고 깔끔하다. 다툼이 사라지고 이로써 일본은 에도시대(1603~1868)라는 유례없는 평화시대에 진입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배경과 관련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중앙 집권파와 지방 분권파의 대립,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가신단 내부의 대립, 히데쓰구(秀次) 사건에 의한 도요토미 가(家)와 가신단의 불화, 히데요시의 유언을 둘러싼 가신단과 이에야스의 대립 등이다. 역사는 승자인 이에야스만을 주목하고 기록한다.

일본의 국사(國師) 대접을 받는 시바 료타료(司馬遼太郎)는 역사소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자인 이시다 미쓰나리를 조명한다.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끝까지 싸웠으나 패한 자의 이야기다. 폄훼되던 인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작가의 동정심까지 투사해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낸다.

미쓰나리는 아버지 이시다 마사쓰구, 어머니 이와타의 차남으로 오미국(近江国) 사카타군 이시다 촌(현재의 시가현 나가하마시 이시다쵸)에서 1560년 출생했다. 부모는 이 지역의 토호였다.

미쓰나리의 아명은 사키치(佐吉)였다. 어렸을 때 오미 지역은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하에 있었다. 노부나가는 1568년 상경하면서 오미 남부를, 1573년에는 아사이 가문을 멸망시키고 북부를 차지했다.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미의 영주가 된다. 나가하마 성을 쌓아 지배를 공고히 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의 눈에 띄어 측근이 된다.

40년 생애의 이시다 미쓰나리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 1573~1603)의 무장 다이묘(大名)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며, 1590년 시와야마(佐和山)의 성주가 됐다. 도요토미 정권의 부교(奉行)로 활동했고 5부교의 한 사람이었다. 도요토미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타도를 위해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등 여러 다이묘와 함께 서군을 조직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뒤 교토 로구죠가와라에서 처형된다.

히데요시에게 바친 석 잔의 차(茶)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직한 참모였던 이시다 미쓰나리.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면 관심을 유발하는 인물이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장수였기 때문이다. 또 전쟁이 끝난 뒤 사후 처리를 담당한 행정관료였다. 히데요시의 사망과 임진왜란의 후폭풍 속에서 일본의 권력을 두고 이에야스와 일전을 벌인다.

임진왜란 당시 벽제관에서는 명나라 이여송 장군을 패퇴시켰으나, 행주산성에서는 권율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에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패하고 만다. 미쓰노리는 전쟁터의 장군이라기보다는 막후의 참모 스타일로 문관의 이미지가 강하다. 시바 료타료가 미쓰나리의 최측근 가신이었던 시마 사콘의 입을 빌려 표현한 그의 인상을 보자.

“이렇게 보니 서른아홉 살짜리 이 주인은 아름답다고도 할 수 있는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입술 모양이 좋았다.”

여러 가지 기록을 보면 미쓰나리는 최고 권력자의 참모답게 매우 모질고 냉혈적이었으며 정적(政敵)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그를 “미쓰나리가 친애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냉혈한 같은 모습은 사그라지고 나름대로 귀여운 짓을 하거나 태도가 상냥해지는 것이다. 사콘에게는 어리광을 부리고, 하쓰메(미쓰나리의 여시종)에게는 싸늘한 모습을 보이다 하쓰메가 슬퍼하는 기색이 보이면 이내 따뜻한 남자로 변한다”고 표현했다. 패자에 대한 따뜻한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소설은 삼헌차(三獻茶)의 일화로 히데요시와의 만남을 소개한다. 후세의 창작설이 유력하지만 미쓰나리의 총명함을 나타낸 장면이다.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부장이었을 무렵, 매 사냥 후 돌아가는 길에 미쓰나리가 시동(侍童)으로 있던 나가하마의 어느 사찰에 갔다.

미쓰나리는 갈증을 느낀 히데요시에게 최초로 큰 찻잔에 미지근한 차를, 그 다음 잔은 약간 작은 찻잔에 약간 뜨거운 차를, 마지막으로 작은 찻잔에 뜨거운 차를 냈다. 먼저 미지근한 차로 갈증을 달래고, 뜨거운 차를 충분히 맛보게 하려는 미쓰나리의 세심한 배려에 감복한 히데요시는 그를 가신으로 삼았다.

1572년 13세의 나이로 히데요시에게 중용돼 40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철저하게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살아갔다.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의 권력 형성에 기여하고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시다 미쓰나리라는 이름이 문서에 등장하게 된 것은 텐쇼 10년(1582년) 무렵부터다.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와 다케다가가 멸망하고,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쓰러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움켜쥐려 달려들던 시기다.

천하통일을 목표로 삼은 히데요시의 그림자 미쓰나리도 무공(武功)을 올리지만, 역시 그는 전장(戰場)보다 외교나 내정으로 존재감을 나타내는 타입이었다. 덴쇼 13년(1585년)에 히데요시는 종일위 관백(關白)으로 취임한다. 미쓰나리 역시 조정으로부터 종5위하 지부쇼유(治部少輔, 혼인·상속·장례·의료 관장부서의 차관)의 직을 하사받는다.

그 당시 미쓰나리가 맡은 중요한 역할은 우에스기가(上衫家)와의 교섭이었다. 당시의 우에스기가는 위기를 넘기던 참이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대치하면서 다케다가(竹田家) 다음으로 자신들이 멸망당하는 것 아닌가 우려하고 있었다.

우에스기가는 갑작스럽게 혼노지에서 노부나가가 죽자 그 다음 천하인이 되는 히데요시에게 접근했다. 그렇지만 우에스기가가 처음부터 히데요시에게 굴복하려 했던 게 아니었기에 양측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미쓰나리는 우에스기가뿐만이 아니라 다른 다이묘들에 대해서도 외교적 창구 역할을 했다.

미쓰나리는 1586년에는 사카이(堺) 지역 감찰을 담당하는 사카이 부교(奉行)를 맡아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연말에는 오미국 미나쿠치 4만 석에 배령(拜領)됐다. 무용(武勇)으로 명성이 높은 옛 쓰쓰이 가문의 가신 시마 기요오키에게 2만 석을 주고 가신으로 맞아들인다.

무장보다 관료로서 더 큰 역량 발휘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
이에 놀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미쓰나리의 행동을 상찬(賞讚)했다. 또 시마 사콘에게는 미쓰나리에게 충성할 것을 명하면서 국동 문양이 있는 하오리(羽織, 일본 옷의 위에 입는 짧은 겉옷)를 줬다. 미쓰나리는 에치고의 우에스기가가 신종(臣從) 맹세를 하기 위해 오사카 성으로 상경할 때 이를 알선했고, 사카이의 행정 실무도 담당했다.

미쓰나리는 1587년 규슈 정벌 때는 후방 보급을 맡았다. 기코쿠 정벌처럼 규슈 평정도 비교적 단기간에 끝난 이유와 관련해 미쓰나리의 유능한 행정 실무가 뒷받침했다는 해석도 있다. 미쓰나리는 규슈 평정 후 하가타에서 행정 실무를 맡아 하가타의 부흥에 매진한다.

1588년에는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사와 히데요시의 접견을 알선했다. 이듬해에는 미노국에서 검지(檢地, 히데요시 정권이 경제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실시한 토지 조사, 이를 통해 연공 수입의 확보와 증대를 꾀함) 실무를 맡았고,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때는 호조 가문의 주변 지성(枝城) 공략에 매진했다.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의 통일 전쟁을 위한 병참 확보에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이런 면을 볼 때 미쓰나리는 무장보다는 오히려 관료로 역량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에 나서면서 미쓰나리는 바빠진다. 규슈 정벌과 도요토미가 천하에 위세를 떨치기 위해 고요제이(後陽成) 천황 행차에 대한 대응, 관동의 호쿠조씨(氏) 공격(오다와라 정벌), 그리고 검지를 행한다. 행정 실무 책임자로서, 외교 담당으로서 바쁜 날들이 계속된다.

히데요시가 아시나씨(蘆名氏)를 멸망시킨 오쿠슈의 다테 마사무네 대응 문제, 그리고 데와 쇼나이(出羽庄内)에서 대립하던 우에스기씨와 모가미씨에 대한 처리 와중에 폭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미쓰나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가 진정한 의인이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이처럼 뛰어난 실무 능력만은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히데요시의 혁신적인 정책들을 실행에 옮긴 것은 미쓰나리를 비롯한 관료들이었다.

미쓰나리는 국내 분쟁의 조정자로서 히데요시의 내치를 보좌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미쓰나리의 이러한 역할이 정적들이 원한을 품는 요인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히데요시의 의지대로 처리한다 해도 실무 집행자인 미쓰나리에게 분노나 초조함이 향했던 것이다.

미쓰나리는 요즘으로 치면 행정안전부의 장관에 해당하는 5부교(五奉行)의 일원으로 행정 업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행정 능력 덕분에 미쓰나리는 도요토미 정권 관료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하사받은 후,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할 관료의 필요성을 느껴 신설한 자리가 5부교였다.

임진왜란 때는 조선 침략에 앞장서기도


▎2017년 개봉한 영화 [세키가하라 전투]의 포스터.
미쓰나리는 5부교 내에서도 점차 두각을 드러내면서 이들을 대표하는 존재로 부각됐다. 미쓰나리의 활약 중 대표적인 것은 전국에 걸친 토지 조사, 즉 검지 작업이었다. 히데요시의 근거지였던 오미부터 규슈·호쿠리쿠 등 전국에 걸쳐 검지를 수행했다.

사쓰마 검지를 시행하면서 도량형의 기준으로 활용했던 검지척과 검지의 조령 등은 현재 시마즈 가문의 문서에 남아 있다. 당시 도요토미 정권이 수행했던 태합 검지의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다. 태합 검지는 통일정권으로 발돋움한 도요토미 정권이 전국에 걸쳐 실시한 토지 조사다.

이는 지방의 다이묘 세력보다 우위에 있는 중앙권력이 일본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미쓰나리가 사쓰마에서 실시한 검지가 그 증거로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를 통해 당시 통일권력으로 부상한 도요토미 정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미쓰나리는 도요토미 정권에 항복해 오는 다이묘들의 중재를 담당했다. 시바타 가쓰이에와의 일전 후 호쿠리쿠의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굴복할 때도 미쓰나리가 중재했다. 규슈 정벌 때 시마즈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전장에서 공훈은 다른 이들에 비해 뒤처지지만, 외교와 내정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중재를 담당했던 다이묘들과의 인연은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을 규합할 때 사용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함께 나고야에 전쟁을 위한 전진기지 축성을 담당했고 히데요시의 한반도 도해(渡海)를 준비했다. 그는 또 후나부교(船奉行)에 임명돼 군사들의 수송을 기획했다. 조선 침략이 시작되자 히젠 나고야(肥前 名護屋) 성에 머물면서 침략군 도항을 지휘했다. 이후 조선으로 건너가 부교로서 전쟁의 총수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보좌하면서 여러 장수들을 독려했다.

미쓰나리의 전승(戰勝) 기록은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와 일전을 벌인 벽제관 전투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小早川隆景)와 함께 거둔 승리가 유일하다. 1593년에는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에게 패퇴했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명나라와 강화(講和)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미쓰나리는 명군의 개입과 그에 따른 잇따른 패전을 감안해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조선 측과 강화 교섭을 시작했다. 조선 땅에 건너와 목숨 걸고 전투를 벌여온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 등은 미쓰나리의 처사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미쓰나리가 조선에서 행한 기요마사의 부당한 행위를 히데요시에게 보고한 적도 있었기에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와 함께 하카타에서 철군을 주도했다.

2년 후인 1600년 문치파와 무단파의 대결전인 세키가하라 일전을 벌인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발단이 된 미쓰나리의 문치파와 기요마사의 무장파의 반목은 이즈음 시작됐다. 이러한 반목을 너구리라는 음흉한 별명을 가진 이에야쓰는 놓치지 않고 전투로 이끌어내 권력을 움켜쥐게 된다.

그 무렵 도요토미 정권 내에는 새로운 문제가 부상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결국 한반도로 도해하지 않고 명나라에 들어가려던 구상을 중단했다. 이것이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됐다. 히데요시는 도해를 전제로 국내를 지키게 되는 조카 히데쓰구(관백)에게 권한을 이양했다. 태합(太閤)과 관백으로 일본을 분할해 지배하는 체제였다. 그런데 히데요시가 히데쓰구의 통치 자세를 꾸짖으면서 둘 사이에 긴장감이 생기게 된다.

저물어가는 그들의 절대권력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삼았던 영화 [명량]의 한 장면.
명나라와의 강화 협상도 계속 진행됐으나 견해차가 커서 분로쿠 5년(1596년)에 결렬되고 만다. 그 와중에 황당한 사건이 일어난다. 분로쿠 4년(1595년) 7월 15일, 고야산(高野山)에서 관백인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할복한다. 더구나 사건 관련자들이 대량으로 처단됐다. 히데쓰구의 처자도 함께 처형된다.

히데쓰구 사건 후 미쓰나리에게 봉록이 더해진다. 히데쓰구의 봉토 가운데 오미 7만 석이 국유화되고 오미 사와야마에 19만4000석의 영지가 할당됐다. 또한 미쓰나리는 히데쓰구 가신단을 자신의 가신단 대열로 합류시켜 마스다 나가모리와 함께 교토쇼지대에 임명됐다.

다이묘로서 미쓰나리는 영지의 백성들에게 꼼꼼한 지시를 내리고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다망(多忙)한 미쓰나리를 대신해 가신 시마자콘 등이 영지를 관리했다. 그렇게 해서 미쓰나리는 도요토미 정권의 근간으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자리매김해 간다.

명나라와의 강화 협상은 결렬된다. 실패가 확실해 보이는 조선 재파병이 결정된다. 조선(造船) 그리고 후시미성 축성 등 미쓰나리에겐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조선 재파병의 총대장은 도요토미가의 젊은 귀공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였다.

이번 파병은 명나라 정복이 아니라 한반도의 영토 절취(折取)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미쓰나리 등 정권 중추에 있는 부교는 일본에 머무르며 현지로부터 바다 건너 전황을 보고하는 체제였다. 현지 상황을 잘 모르는 히데요시나 부교들이 무책임하게 전장에 명령하는 체제는 문제를 일으키게 마련이었다. 도요토미 정권 그 자체에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 증오의 칼끝은 미쓰나리를 향했다.

사실 미쓰나리는 전황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정권 차원의 계획으로는 한반도의 영토를 획득해 그곳에 규슈의 이름을 전봉(轉封, 봉토 전환)하고 빈 규슈에 모리(毛利)나 우키타(宇喜多)를 전봉한다는 구상을 했다.

이러한 계획을 불안해하는 모리 데루모토에 대해 미쓰나리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실력자인 미쓰나리조차 무모한 계획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게이쵸 3년(1598) 8월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다. 히데요시라는 절대 카리스마를 잃고 도요토미 정권은 심각한 위기에 처한다. 미쓰나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히데요시도 사후를 생각해서 유언을 남겼다. 뒷일을 맡게 된 것은 저명한 다섯 명의 다이로(五大老)와 5부교다. 부교의 한 사람으로서 정권 운영을 담당하게 된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의 죽음은 비밀로 부치고, 5부교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정무를 수행하며 산적한 과제를 소화한다.

우선 한반도 철병 및 강화 협상, 히데요시가 죽기 전부터 조선군은 반전 공세를 취해서 철병은 어려웠다. 미쓰나리는 10월에 규슈로 향하면서 철병 지휘를 실시한다. 2개월 후인 12월에는 다시 오사카에 돌아와 정권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철군 후에도 문제는 계속된다. 불만을 품은 다이묘들을 상대로 한 논공행상과 영토를 재편성해야 했다. 무모한 전쟁으로 인한 다이묘들의 불평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쓰나리가 무사히 정무를 수행할 리 없었다. 다섯 명의 다이로와 5부교 제도는 위태로운 권력 위에 구축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게이쵸 4년(1599년) 초에는 다이로의 한 명인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가 사망했다. 그 이후 미쓰나리가 말려든 유명한 사건이 일어난다.

과거 히데요시의 근위 시동 출신 칠본창(七本槍,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7명의 장수)에게 습격당한 것이다. 미쓰나리는 후시미성의 치베 쇼마루로 도망쳐 난을 피했다. 미쓰나리는 이 사건의 수습 때 은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분골쇄신해 도요토미 정권에 힘써 왔건만 정권에서 추방된 것이다.

게이쵸 5년(1600년), 히데요시가 죽은 지 채 2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이에야스는 천하인으로서 힘을 키웠다. 이 해 부상한 것이 우에스기가의 상락(교토에 상경하는 일) 문제였다. 우에스기가는 게이쵸 3년(1598년)에 에치고에서 아이즈로 영지 교체 명령을 받았다. 우에스기는 곧바로 아이즈로 향하지 않고, 위쪽에 머물러 다이로의 한 사람으로서 정권 운영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화톳불과 함께 사라져가는 나의 몸이로구나”

이에야스는 우에스기를 토벌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실은 미쓰나리의 거병(擧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야스의 도박이었다.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은 다이묘들에게 궐기를 촉구한다.

이에야스의 유인에 미쓰나리가 각본을 짠 세키가하라 전투는 개시 6시간 만에 싱겁게 끝난다. 일본 전국에서 18만여 명을 끌어들인 장관(壯觀)이었다. 본(本)전투 전날까지 늦가을비가 내렸고 당일은 짙은 안갯속이었다.

진용이나 명분 등에서 분명 서군의 우세 속에서 전투는 개시됐다. 그러나 총대장을 맡은 모리 테루모토의 서군 주력부대마저 이에야스의 동군과 미리 내통한데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승부의 추는 기울고 만다. 미쓰나리 홀로 전장을 지휘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이에야스는 자신에게 반발해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으킨 미쓰나리, 모리를 꼬드겨 자신과 싸우게 만든 안코쿠지 에케이, 천주교를 포기하지 않은데다 미쓰나리의 편에 서서 자신을 공격한 고니시 유키나가를 참수 직전까지 마구 때렸다. 결국 미쓰나리는 참수돼 산조대교의 근처에서 효수된 뒤 다이토쿠지(大徳寺) 산겐인에 매장됐다.

그의 유골이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307년 후인 메이지 40년(1907년) 10월이었다. 묘역을 개장하면서 미쓰나리의 묘가 발굴됐고, 두개골, 허벅지뼈, 상완골 등의 뼈가 나왔다. 동시에 한 개의 고즈카도 발견됐다. 고즈카란 참수된 사람을 매장할 때 목과 몸통을 잇는 구리로 된 도구다. 메이지(明治) 45년(1912) 교토대 해부학과의 아다치 분타로 박사의 손으로 미쓰나리의 유골 조사가 이뤄졌다.

시바 료타료의 소설을 2017년 영화화한 [세키가하라]는 “누구나 아는 세키가하라의 누구도 모르는 진실, 사랑과 야망의 격돌”이라는 광고 문구를 달아 흥행에 성공한다. 영화는 소설보다 배신과 가공인물 하쓰메(初芽)와의 로맨스에 비중을 둔다.

포박당해 형장으로 끌려가는 미쓰나리 행렬에 나타난 하쓰메는 미쓰나리와 최후의 눈길을 스치면서 “대일대만대 길”이라고 말한다. 대일대만대길 (大一大萬大吉)은 미쓰나리 집안의 문장(紋章)이다.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 모두가 한 사람을 위해 노력한다면 천하는 행복해진다.” 죽기 전에 미쓰나리는 “이것이 나의 정의”라고 말하며 영화는 마친다.

미쓰나리는 사세구(辭世句, 절명구)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치쿠마 강(江)과 아시마에 켜진 화톳불과 함께 사라져가는 나의 몸이로구나.”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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