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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37)] 애민·충절로 의병 일으킨 죽천(竹川) 박광전 

“스승(이황)이 가르친 뜻 저버리지 않으리라” 

41세때 보성서 안동까지 천리 길 마다않고 퇴계 찾아가 공부
56세 때 광해군의 사부 지내고 정유재란 때 72세 나이로 의병장 활약


▎진원박씨대종회 박형기 회장이 용산서원 편액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1567년(명종 22) 정월께 퇴계 이황은 제자 한 사람을 떠나보낸다. 멀리서 온 제자가 겨울 한 철을 함께 하고 길을 막 나서려는 참이다. 스승이 운을 뗀다. “만년에 좋은 벗을 만났는데 갑자기 헤어지게 됐으니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퇴계는 25세 연하의 제자를 ‘좋은 벗’으로 부르면서 아쉬움을 시로 읊는다. 그것도 5수나 된다. 마지막 시는 이렇다.


一月寒溪意更堅(일월한계의경견) 일월의 찬 냇물에 뜻이 더욱 굳어지니
歸歟此志莫留遷(귀여차지막류천) 고향에 돌아가서도 이 뜻을 바꾸지 말게나
但能不見甛桃颺(단능불견첨도양) 달콤한 복숭아를 날려 보낼 수 없지만
無價明珠只在淵(무가명주지재연) 귀중한 밝은 구슬은 연못에 잠겨 있다네


퇴계는 제자가 앞으로도 학문에 정진하기를 당부한다. 그러면서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을 닦는데 힘쓰면 연못 속 구슬처럼 언젠간 드러나게 된다고 덧붙인다.

스승의 이별시를 받은 제자는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 1526∼97) 선생이다. 전남 보성이 고향이다.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죽천 종가에서 퇴계 선생이 강학한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당까지는 오늘날 자동차 길로 354.9㎞. 자그마치 4시 간15분이 걸리는 거리다. 죽천 당대에는 걸어서 열흘은 족히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가 전하는 죽천의 체취를 찾아 2월 15일 보성의 종가 옆 화산재(華山齋)를 찾았다. 진원박씨대종회 박형기(79) 회장이 안내했다. 죽천의 13대손이다. 관향 진원(珍原)은 전남 장성군 진원면에서 유래한다. 회장을 돕는 16대손 박철수(63) 화순군 문화관광전문위원도 동행했다.

화산재는 조촐했다. 사당에는 문강공(文康公) 시호를 받은 죽천 선생의 불천위 감실이 있었다. 감실의 독(櫝)을 열자 비취색과 적색 덮개에 쌓인 죽천 내외의 신주가 드러났다. 화산재를 둘러보았다. 마루에 퇴계가 쓴 그 이별시 5수가 걸려 있다. 450년을 뛰어넘은 돈독했던 사제의 징표다.

편지로 퇴계에게 질문한 항목만 85개


▎드론으로 촬영한 용산서원 전경. 오른쪽에 따로 떨어진 건물이 ‘보성 의병기념관’이다.
퇴계는 이별시와 함께 공부 거리를 선물한다. 책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한 질이다. 퇴계가 심혈을 기울여 주자의 편지에서 뽑은 성리학의 핵심을 제자들이 보고 쓴 8권짜리 필사본이다. 그해 2월 고향 보성으로 돌아온 죽천은 스승이 건넨 [주자서절요]를 읽으며 “선생께서 가르친 뜻을 저버리지 않으리라”란 다짐을 책에 남긴다. 현재 후손이 보관 중인 책은 표지에 [주자절요(朱子節要)]라 적혀 있다. 이 책을 검토했던 고(故) 류탁일 부산대 명예교수는 “4∼5명이 성주본 [회암서절요]를 저본으로 필사한 것”이라고 분석한 적이 있다.

죽천은 [주자서절요]를 읽는 데 몰두한다. 궁금한 것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편지를 써서 스승에게 질문했다. 퇴계는 질문에 일일이 답한다. [퇴계집]에는 ‘상사 박광전과 수재 윤흠중에 답한 편지’가 실려 있다.

“헤어진 뒤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함께했던 날보다 더했는데 편지를 보내오니 어찌 기쁘고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황(이황을 낮춰 표현)은 며칠 성묘하는 일로 추위를 무릅쓰고 출입하느라 몹시 피곤해 누웠으나 약을 달이고 섭생해 겨우 다른 병은 면했다네. 부쳐 준 지황은 감사히 받겠네. 다만 몸이 피폐해져 약의 힘으로도 효험을 얻기 어려울까 두려울 뿐이네. 편지에 쓴 십한(十寒)이란 말은 참으로 그러하네. 대저 도는 넓고 넓으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겠는가? 오직 성현이 남긴 교훈이 바로 손을 대야 하는 곳인데 그중 절실하고 요긴한 것을 구하기는 [주서(朱書)]보다 앞서는 것이 없을 것이네.”

스승은 편지를 보낸 것에 먼저 기뻐한다. 또 제자가 약초 지황을 부친 것에 고마움을 표한 뒤 [주자서절요]를 공부하다 생긴 질문에 답한다. 죽천이 [주자서절요]를 읽으며 스승에게 던진 질문과 답변은 85개 항목이다. [죽천집]에 실려 있다. 죽천은 그만큼 치밀하게 공부했다. [주자서절요]가 죽천의 성리학 탐구에 바탕이 된 것이다.

1566년 41세 죽천은 어떤 연유로 1000리 길 안동으로 퇴계를 찾아갔을까. 2016년 [도학과 절의의 선비, 의병장 죽천 박광전]을 쓴 김세곤(66) 호남역사연구원장은 두 가지 가능성을 제기한다. 하나는 사화에 휘말렸던 ‘호남5현’ 류희춘이 자신이 쓴 [속몽구(續蒙求)]를 퇴계와 논하면서 후배 죽천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죽천의 처남 문위세가 먼저 퇴계의 제자가 된 뒤 자형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박형기 대종회장은 “처남의 소개로 죽천 선조가 퇴계 문하로 나아갔다”고 설명했다. 죽천은 이후 기대승·이함형·문위세·윤강중·윤흠중 등과 함께 호남으로 사실상 퇴계 학문을 전하게 된다.

재실 화산재 뒤에는 죽천의 묘소가 있었다. 비석에는 ‘문강공 죽천박선생지묘’라 새겨져 있다. 묘소 앞 석물 중 석등과 동자석은 이끼 낀 비석과 달리 오래돼 보이지 않았다. 박 회장은 “두 차례나 동자석 등을 도난당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죽천 묘소 뒤로 봉분 2기가 나란히 보였다. 죽천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묘소다. 죽천 묘소 아래는 아버지를 도와 의병으로 활약한 아들 등 4대가 모여 있다. 그 묘소 오른쪽에 대형 테이블 같은 상석이 보였다. 용도를 묻자 회장이 난처해했다. “두 가지 불효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 상석 하나에 4대 선조의 제물을 한꺼번에 올려 묘제를 지냅니다. 또 죽천 선조의 불천위 제사도 벌써 2년째 자정 대신 돌아가신 날 오전 11시에 올립니다.” 불천위 제사엔 요즘 제관 30여 명이 모인다고 했다. 숭조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묘역에서 재실로 내려오는 길옆으로 머릿돌 조각이 섬세한 죽천의 신도비가 있었다. 주변은 대나무 숲이다. 글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전우가 지었다. 재실을 관리하는 후손은 “청나라 석공들이 몇 달씩 머무르며 새기고 동춘(송준길) 글씨를 집자했다”고 설명했다.

1568년 죽천은 과거시험인 증광 회시를 본다. 벼슬을 생각한 것일까. 결과는 진사 2등. 1570년 전라 감사 류희춘은 죽천을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한다. 이듬해 전주부 경기전(慶基殿) 참봉에 임명된다. 46세 첫 출사(出仕)다. 2년 뒤엔 다시 헌릉 참봉에 제수되지만 곧 그만둔다.

“책 읽을 때는 정밀하고 명확해야”


▎퇴계가 죽천에게 선물한 필사본 [주자절요] 1질. / 사진:진원박씨대종회
1581년 56세 죽천은 자신의 지식 수준을 공인받는다. 배움을 시작한 왕자(광해군)의 사부(師傅)가 된 것이다. 죽천은 왕자가 글을 정밀하고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가르쳤다. 선조 임금은 어느 날 왕자의 독서를 점검하다가 “글 읽기만 탐하면 뜻을 명확히 알지 못하니 마땅히 박 사부의 강의를 따라야 한다”며 죽천의 정독법을 칭찬한다.

죽천은 사부로 있는 2년 동안 왕실의 잘못 하나를 바로잡는다. 왕자 외가가 사찰에다 출입금지 표지를 세우고 이익을 부당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관아는 속수무책이었다. 죽천은 왕자에게 “사찰은 왕자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작은 일이지만 의리를 해치는 건 실로 크다”고 지적했다. 왕자가 사실을 확인한 뒤 문제의 표지를 빼낸 것이다.

1583년 죽천은 사부의 직을 마치고 함열 현감으로 임명된다. 함열은 전북 익산 지역이다. 그는 고을 수령으로 농사와 잠업을 권장하고 세금 부담을 줄였다. 관아의 씀씀이는 줄이고 절약했다. 죽천은 동헌(東軒)에다 ‘視民如傷(시민여상)’ 네 글자를 붙이고 백성을 자애로이 다스렸다. 다친 사람을 보살피듯 백성을 대하겠다는 것이다. 또 공무를 마치면 경전을 가르쳤다. 겨울이 되자 스승을 잊지 않은 왕자는 편지와 함께 청심원 등 약제와 붓·먹 등을 보내온다.

그러나 관직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죽천은 상관의 뜻을 거슬러 파직됐다가 다시 회덕 현감을 맡는다. 한 번은 전라 감사가 무고로 과부의 종을 죽이려 했다. 현감이 원통함을 낱낱이 밝히자 감사는 승복했다. 죽천은 온화한 성품이지만 시비를 가릴 때는 이렇게 엄정했다. 1589년 그는 두 번째로 파직된다. [죽천집] 연보에는 “재상어사(재해로 손상된 농작물 상황을 감정하는 어사) 우준민의 미움을 받아 파직됐다”고만 기록돼 있다. 죽천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선조 임금은 전쟁이 일어난 지 20일도 안 돼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떠났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5월 한양에 입성하고 함경도까지 북진한다. 조선에서 무사한 곳은 전라도 뿐이었다.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왜군을 대적하는 건 이제 전라 수군과 각지 의병이 전부였다. 담양에서 6000명을 결집한 호남 의병장 고경명은 그해 7월 금산전투에서 순절한다. 비보가 이웃 보성으로 날아들었다. 임계영 등은 선배 죽천을 찾아 “출병 계획을 세우자”고 요청한다. 거의(擧義)의 결단이다. 죽천이 마침내 격문을 써 내린다.

“임진년 7월 모일 전 현감 박광전·임계영 등은 능성 현령 김익복과 함께 여러 고을의 사우(士友)들에게 글을 드립니다. 아! 국가가 믿어 걱정하지 않았던 하삼도(下三道) 중 경상도와 충청도는 궤멸돼 왜적의 소굴이 됐고 호남만이 겨우 한 모퉁이를 보전해 군량의 수송과 정예병의 징발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일으켜 세울 기틀이 실로 이곳에 달려 있습니다. (중략) 격문이 도착한 날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온 고을에 즉시 알리고 깨우쳐 군인을 기록한 뒤, 이 달 20일 보성 관아의 대문 앞으로 모입시다. (중략) 모두 의병 일으킬 것을 도모하십시오.”

72세에 정유재란 의병장 맡아


▎주자의 편지에서 뽑은 [주자서절요] 1권 첫 장. / 사진:진원박씨대종회
7월 20일 보성 관아에 모여든 향병(鄕兵)은 700여 명. 이른바 전라좌의병이다. 죽천은 그러나 병으로 싸움에 나설 수 없었다. 대신 진보 현감을 지내고 향리에 물러나 있던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한다. 또 문위세는 군량, 정사제는 종사관, 죽천의 큰아들 박근효는 참모가 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왜적은 이번엔 전라도로 침범했다. 여러 사람이 죽천을 찾아 “선생은 신망을 얻은 지 오래니 원컨대 의병장을 맡아야 한다”고 간청한다. 당시 죽천은 72세. 그는 고령임에도 “한줄기 목숨이 아직 붙어 있으니 맹세코 왜적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며 창의(倡義)의 뜻을 밝힌다. 이후 그는 의병과 군량을 모은 뒤 병이 깊었지만 전장인 화순지역 동복으로 떠났다. 부장(副將) 송홍렬은 병사를 이끌고 용감하게 왜적의 소굴로 쳐들어갔다.

의병이 전공(戰功)을 연거푸 올렸다. 숨어 있던 수령들이 헐뜯기 시작한다. 연보에는 “이 무렵 (전라)감사가 수령들의 무소(誣訴, 일을 거짓으로 꾸며 관청에 고소)에 선생을 불러 힐문했다”고 적혀 있다. 그해 11월 의병장 죽천은 감사의 조사를 받는다. 그리고는 돌아오는 길에 진원 선영에 들른 뒤 세상을 떠났다. 윤사순(83) 고려대 명예교수는 “죽천은 외침을 당한 위기에서 남보다 더 두터운 애민·위민의 충정으로 의군의 선봉에 섰다”며 “그를 선비답게 하는 정신”이라고 평가했다.

안방준·정길 등 제자들은 사후 10년 뒤 죽천이 강학하던 보성군 미력면 용산(龍山) 아래 서원을 세운다. 숙종 임금은 용산서원 편액을 내렸으나 고종 때 훼철됐다. 사라진 용산서원은 145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전라남도, 보성군과 지역 유림 등은 2016년 보성군 노동면 수다원으로 자리를 옮겨 용산서원을 복설(復設)했다. 문중은 땅을 내놓았다. 사액 당시 전서(篆書) 글씨는 서원 입구 바윗돌에 새겨져 눈길을 끈다. 복설사적비는 선대의 인연으로 퇴계의 후손이 글을 썼다.

문중은 용산서원 준공과 함께 건물과 부지 전체를 최근 보성군에 기부했다. 박 회장은 서원을 나와 개관을 준비 중인 오른쪽 건물로 안내했다. 의병기념관이다. 보성군은 이름이 전하는 290여 명 전라좌의병의 위패와 유품 등을 모아 이곳에 전시할 예정이다.

죽천정과 광탄 사이엔 철길이 놓여


▎묘소 입구 화산재 옆에 세워져 있는 죽천의 신도비.
일행은 이날 마지막으로 보성강 상류 노동면 광곡리 광탄(廣灘)이 내려다보이는 화전봉 자락 죽천정(竹川亭)에 들렀다. 30대 죽천이 정사(精舍)를 짓고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던 터에 세워진 정자다. 광탄술회시 등 시판 여럿이 걸린 정자는 대나무 숲에 쌓여 고즈넉했다. 아쉬운 건 죽천정과 광탄 사이로 난 철길이다. 철길이 놓이면서 통행이 뜸해져 진입로는 잡초로 덮여있었다.

죽천이 태어난 곳은 보성 조양리. 그는 41세에 퇴계를 만나기 전 고향에서 두 스승을 거쳤다. 9세 소년 죽천을 가르친 첫 스승은 홍섬이다. 후에 영의정이 된 홍섬은 당시 죽천의 집과 5리 떨어진 곳으로 귀양 와 있었다. 죽천은 10대부터 아버지의 바람인 과거 공부보다 자신을 닦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관심이 더 많았다. 아버지는 시문 짓기를 독촉했지만 죽천은 몰래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구해 의미를 탐구했다. 두 번째 스승은 22세에 수학한 양응정이다. 30대 들어 죽천은 경전의 옛 뜻을 새기는데 몰두했다. 34세부터는 천봉산 대원사와 우계(遇溪), 산앙정(山仰亭) 등지에서 강학한다. 그런 뒤 퇴계를 만났으니 스승은 학문을 아는 죽천이 ‘좋은 벗’처럼 반가웠던 게 아닐까.

죽천은 평생 출세보다 도덕적 인간의 확립에 더 힘을 쏟았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맨 앞자리에 서서 기꺼이 위민을 실천한 선비였다. 그가 450년을 뛰어넘어 지역에서 추앙 받는 까닭일 것이다.


▎강학 공간인 정사 자리에 세워진 죽천정. 정자 아래로 보성강 상류 광탄이 흐른다.


[박스기사] 안보관, 문화로 감화시켜야 - 1568년 성균관 증광 회시에 진사 2등으로 합격

1568년 죽천은 성균관에서 증광(增廣) 회시(會試)에 진사 2등으로 합격한다. 증광시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하는 과거시험이다. 회시는 2차 시험으로 문과는 초장·중장·종장으로 이루어진다. 종장 ‘책문(策問)’은 당시 임금 선조가 출제한 국가 정책을 묻는 일종의 논술이다.

문제는 ‘정벌이냐 화친이냐’였다. 당시 남쪽에는 왜구가 출몰하고 북쪽에는 오랑캐가 변경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제법 긴 책문의 끝은 이렇다. “어떻게 해야 올바른 도리로 외적에 대해 나라가 욕을 당하거나 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나라가 외적을 대처하는 방법을 물은 것이다. 이 문제가 출제된 24년 뒤 공교롭게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죽천은 3502자에 이르는 답안 ‘대책(對策)’을 써냈다. 천자문 3권이 넘는 분량이다. 요지는 이렇다. ‘정벌의 원칙은 힘을 헤아리는 데 있고 화친의 원칙은 형세를 살피는데 있다. 따라서 힘을 헤아려 대처하면 이길 수 있고 형세를 살펴 대처하면 상대방의 침략 의도를 사전에 분쇄할 수 있다. 또 힘에 의거해 정벌할 만하면 정벌하고 형세를 살펴 화친할 만하면 화친해야 하는 것이 대책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덕을 쌓아 외적이 스스로 포섭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 병사를 운용하는 통솔력이 뛰어난 장수를 얻어야 한다.’ 죽천의 실제 답안은 이렇게 시작된다. “저는 오래전 ‘오랑캐를 막는다’는 시를 보고 죄 있는 사람은 마땅히 토벌해야 한다는 걸 알았고 ‘오랑캐도 따르고 복종한다’는 글을 보고 외적을 막는 데도 도리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중략) 저 역시 오래 전부터 외적을 근심해 왔습니다.”

이어 죽천은 당시 자주 도발하던 북쪽 오랑캐를 막을 계책을 제시하고 문화의 힘을 강조한다. “마땅히 두만강을 경계로 성을 쌓아 요새를 방어하고, (중략) 또 안으로 문화를 널리 펼쳐 교화의 덕이 멀리까지 미치게 해야 합니다. (중략) 그러면 그들도 문명국의 문화에 감화돼 귀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좋은 장수의 중요성을 덧붙인다. “나라의 일 가운데 아주 큰일은 전쟁과 관련된 일이고 병사를 운용할 큰 임무는 장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병무는 장수를 얻는 일이 가장 우선입니다.” 죽천이 그날 적어낸 답안은 오늘날에도 곱씹을 만한 계책일 것이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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