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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4)] ‘승자의 전리품’ 나폴리에서 만난 생존법칙 

도심에 새긴 점령군주 8인의 조각상 

항전보다 타협 선택한 역사… ‘나폴리다움’ 잃지 않은 비결
청산이라는 미명 이면에 국수주의·전체주의 없는지 살펴야


▎8개 입상이 시대 순으로 늘어선 나폴리 구(舊) 왕궁 정면. 한 가운데 2층 베란다가 1931년 당시 무솔리니의 연설장소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칼로 찌르고 비명을 지르는 보톡스 여성 탤런트의 막장드라마, 귀걸이와 눈썹화장으로 잔뜩 멋을 부린 20대 청년들, 버스 약자좌석에 꽉꽉 채워진 대학생들…. 그런 모습에서 고립감을 느낄 때 생각나는 곳이 이탈리아 나폴리다.

세상이 시시하고 피곤하다고 생각될 때, 아니 주변 모두가 자신의 생각과 반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 떠오르는 도시가 나폴리다. 적과 친구를 구별하기 어려운, 미세먼지 속 세상이 두렵게 느껴질 때 가고 싶은 안식처, 바로 나폴리다.

성(聖)과 속(俗)이 공존하는, 카오스(Chaos)속의 코스모스(Cosmos)가 나폴리다. 카오스로 가득 채워진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코스모스도 넘친다. 흑백으로 분명이 나눠지는, 그러면서도 흑백이 교차하는 세상이 바로 나폴리다.

악명 높은 나폴리 마피아 카모라(Camorra)가 판치면서도, 시푸드·피자·에스프레소 같은 낭만이 넘실댄다. 배기가스, 불법 이민, 쓰레기로 어수선하지만, 에메랄드 청정 바다와 요트가 배경으로 들어서 있다. 북아프리카산 밀수 담배와 심야의 매춘부로 점철된 공간이지만, 베수비오(Vesuvius) 화산을 무대로 한 산타루치아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질서한 도로에서 골목 안으로 꺾으면 곧바로 바로크 스타일의 교회로 이어진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신의 세계가 펼쳐진다.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공존하는 도시


▎나폴리를 대표하는 인물화로, 예수를 대신한 인물은 여성배우 소피아 로렌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여성이라도 최고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혼돈 속에도 나름 장점이 있다. 생존 안테나로서의 오감(五感)이 급상승한다. 흑백이 뒤섞인 세상에 살다 잊어버린, 생존본능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다. 얼버무리거나 도망가는 자세가 아닌, 나폴리라는 공간에서의 정면대결이다. 그러나 목숨을 건 큰 사건은 아니다. 작고 사소하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게 만들 정도의 카오스다. 오래되지 않은 필자의 경험을 예로 들어보자.

자동차로 나폴리에 들어선 뒤, 한 주유소의 카페에 들렀다. 20유로짜리 지폐를 지불했는데 4유로의 잔돈만이 돌아온다. ‘1유로짜리 에스프레소가 왜 16유로로 둔갑하느냐’고 물어보니까 적반하장 답변이 돌아온다. “네가 지불한 것은 5유로 지폐다. 착각한 모양인데, 봐라. 여기 20유로짜리가 어디 있냐?” 주변 이탈리아인까지 불러 모아 20유로 지폐가 없다는 점을 증명하려 한다. 잃었던 생존으로서의 오감이 한순간 나타났다. 15유로 이전에, 상식과 정의를 증명하려는 싸움이다. 반말이나 어깨를 친 뒤 잘잘못을 따지는 식의 ‘주자학적 싸움’과 다르다.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다.

자칫 실수하기 쉬운 것이 외국 지폐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아니면 말고’ 사기꾼이 노리는 1차원적 속임수 중 하나다. 필자의 나폴리 경험은 20년 전부터 시작됐다. 나름대로 카오스 도시의 성격을 이해한 지 오래다. “무릎 밑 박스를 열어라. 거기에 20유로 지폐를 숨겨둔 것 안다. 좋게 말할 때 거스름돈 전부 내놔라. 아름다운 나폴리를 나쁘게 만들지 마라.”

오감 안테나를 바짝 세운 탓이겠지만, 나폴리에 가면 곧바로 흑백이 뚜렷해진다. 보톡스도 없고, 좌석 쟁취에 바쁜 약자용 좌석도 아예 없다. 서로 갈등이 생길 경우 본능에 기초한 각개전투로 싸워야한다. 법원·경찰·정치가가 끼어들 틈도 없다.

흥미로운 것은 300만 인구의 카오스 나폴리가 갖고 있는 인내심이다. 아무리 심해도 칼을 휘두르는 막장은 극히 드물다. 끝까지 간다는 것은 기관총을 통한 마피아식 처형이다. 15유로를 위해 암살범을 동원하지는 않는다. 목소리도 낮춘 채, 나폴리 특유의 현란한 손놀림과 몸짓을 통한 해결이 주류다.

주유소 카페에서 만난 적반하장 나폴리타노의 경우 고급 브랜드 옷에다, 영화배우 뺨칠 정도의 미남이다. 날개를 크게 펴고 점프를 높이 하는 새가 강자로 군림하는 식의, 게임이라 볼 수 있는 흑백증명이다. 동시에 정의를 증명해낼 경우 그 즉시 상대방도 수락하는, 팔로우십(Followship)에도 충실하다. 모든 것이 뒤엉킨 카오스 도시로 느껴지지만, 실타래의 끝을 찾아낼 경우 곧바로 코스모스로 이어진다.

“베디 나폴리 에 포이 무오리(Vedi Napoli e poi muori).”

영어로 표현하자면 ‘See Naples and Die’로 번역될 수 있다. ‘나폴리를 본 뒤 죽어라’로 직역된다. 독일의 문호 괴테를 통해 유명해진 말이다. 1786년부터 3년간 이탈리아를 여행한 뒤 발표한 책 속에 나온다. 원래 이탈리아 속담이지만, 나폴리에 반한 괴테가 문학적으로 재구성해 유럽 전체에 알렸다. 필자는 괴테의 말을 다른 각도로 풀이한다. ‘나폴리를 이해할 수 없다면 결코 인생을 논할 수 없다’는 의미다. ‘카오스 도시의 가치와 진짜 얼굴을 모른다면 삶의 의미도 모른다’는 말로도 통한다.

파시즘과 민주주의가 교차하는 광장


▎나폴리타노가 칼을 입에 문다는 것은 평생 복수를 다짐한다는 의미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프레비시토 광장(Piazza del Plebiscito)은 카오스 도시, 나폴리의 얼굴에 해당한다. 산 카를로(San Carlo) 오페라 하우스를 내려다보는, 도시 한복판에 들어선 아름답고도 신성한 공간이다. 19세기 초 조성된 곳으로, 나폴리에 가는 외국인이라면 가장 먼저 찾는 명소다. 바다를 낀 언덕에 들어서 있기 때문에, 멀리 베수비오 화산도 볼 수 있다. 축구장 4개가 들어설 만한,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초대형 광장이다. 가운데 산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di Paola) 교회를 중심으로 하면서 양쪽에 나폴리 정부청사가 들어서 있다. 교회의 맞은편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구(舊) 왕궁이다. 나폴리가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로 군림하던 시절, 왕가의 거처로 쓰이던 곳이다.

필자 역시 나폴리에 도착하는 순간 찾아가는 곳이 프레비시토다. 광장 오른쪽 입구 쪽에 들어선, 1890년 세워진 카페 감베리누스(Gambrinus)에서의 에스프레소는 필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현재의 프란체스코 교황은 물론,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 가리발디(Garibaldi)가 찾은, 벨 에포크(Belle Epoque)시대를 상징하는 유서 깊은 카페다. 1유로짜리 모레노(Moreno) 에스프레소는 세계에 자랑하는 나폴리타노의 자존심이다. 한 잔 마시면 시력을 3.0까지 끌어올릴만한, 진한 향과가 강한 맛의 커피다.

올해는 운 좋게 찾아간 날이 맑다. 바람이 조금 불지만,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지중해의 눈부신 햇볕에 눈을 뜰 수가 없다. 바닥의 대리석에서 반사된 빛이다.

광장 자체의 성격이기도 하지만, 프레비시토는 묘한 매력을 가진 곳이다. 고대 그리스에 탄생된 민주주의 함성과 더불어 파시즘의 전체주의와 중우정치가 교차하는, 지킬과 하이드의 양면이 도사린 공간이다. 찾아갈 때마다 항상 느끼지만, 평화와 조화가 깃든 조용한 공간으로 느껴진다. 개도 뛰어놀고 자전거를 탄 10대 연인들의 모습과 함께, 이탈리아 스타일의 방패연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순식간에 비명과 칼부림으로 변할 수 있는 화약고와 같은 곳이 프레비시토다. 민주주의 전체주의 어디든, 극단으로 갈 경우 ‘인민의 이름’ 하의 피바람이 기다리고 있다.

실제로 1931년 10월 25일, 프레비시토는 군복 차림의 두체(Duce) 무솔리니의 연설장으로도 활용된 곳이다. 1922년 정권을 잡은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전성기로, 당시 두체의 연설을 들으러 50만 명 이상의 나폴리타노가 모였다. 나폴리는 무솔리니를 99% 지지한 파시즘의 원조 격인 곳이다. 덕분에 무솔리니 당시 나폴리는 개발 중점 지역으로 발전된다. 대부분의 나폴리타노는 아직도 무솔리니를 존경하고 있다.

기자 출신의 무솔리니 연설은 크로아티아 재탈환에 집중한다. 영토 문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국가 주권의 핵심이다. 제1차 대전 이후 상실한 영토 크로아티아의 수복이 파시스트의 의무이자 책임이라 강조한다. 나폴리타노의 99%가 지지하고 나선 것은 당연하다. 유튜브에 당시 영상이 공개돼 있지만, 무솔리니의 광적인 리더십과 나폴리타노의 충성 서약이 인상 깊다. 이미 88년이 흐른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광장이 가져다주는 신비한 파워와 함께 당시의 열기가 새삼 느껴진다.

11번이나 주인 바뀐 ‘유럽 속의 식민지’


▎1935년 문을 연 거리의 상점. 나폴리의 가게나 음식점은 보통 100년이 넘은 노포들이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필자에게 있어서 프레비시토 광장은 카오스인 동시에 코스모스다.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교차점이기도 하지만, 나폴리만의 생존법을 읽을 수 있는 최적의 교과서가 광장 내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나폴리를 본 뒤, 죽으라’는 괴테의 말을 확인할 수 있는 본보기가 프레시비토다. 다시 말해 ‘카오스 도시의 가치와 진짜 얼굴을 모른다면 삶의 의미도 모른다’는 증거가 광장 속에 묻혀있다.

무솔리니가 올라가 연설을 한 구왕궁 박물관 정면이 현장이다. 정확히 말해, 광장을 향해 세워진 8명의 나폴리 주역들이 괴테의 말을 되새기게 만드는 본보기이자 증거다. 거의 3m 높이의 8명 입상(立像)은 나폴리를 대표하는, 구왕궁의 주인들에 해당된다. 한 시대를 호령한 최고 권력자들인 동시에, 나폴리를 지배 통치한 나폴리타노 역사의 주인공들이다.

지중해 연안도시가 그러하듯, 나폴리는 해상국가 고대 그리스의 영향권에서 탄생된 식민 도시다. 그리스어로 ‘Νεάπολις’, 영어로 풀자면 ‘New Polis’가 나폴리의 어원이다. 뉴 시티(New City)란 말이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나폴리 앞의 섬 카프리를 여름 별장지로 활용한다. 덕분에 나폴리도 번성하게 된다.


▎아직까지 나폴리를 점령하지 않은 나라가 미국이지만, 나폴리타노가 가장 원하는 점령국이 미국이기도 하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유럽사를 통해 볼 때, 나폴리는 유럽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압축판이라고 보면 된다. 유럽의 맹주(盟主)라면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들러 자신의 힘을 과시한, 유럽 내 식민지의 원조가 나폴리다. 주목할 부분은 ‘유럽 내 식민지의 원조’라는 부분이다. 보통 유럽은 식민지 종주국으로 받아들여진다. 가해자다. 그러나 나폴리는 식민지로 통치를 받은 피해자 도시로 유명하다. 유럽 안에 있으면서도, 다른 강자들의 노리개감이 된 슬픈 역사다. 큰 전쟁이 벌어질 경우, 종결 후 승자의 전리품으로 할당된 도시가 나폴리다.

유럽의 어떤 실력자들이 나폴리를 거쳐 갔는지 살펴보자. ①고대 그리스(기원전 6세기) ②로마(1세기) ③독일계 동고트(Ostro Goths, 6세기) ④비잔틴제국(7세기) ⑤바이킹 후손 노르만(12세기) ⑥독일계 호엔슈타우펜 왕가(Hohenstaufens, 13세기) ⑦스페인 아라곤(Aragonese, 15세기) ⑧스페인(16세기) ⑨오스트리아(18세기) ⑩나폴리 부르봉 왕가(19세기) ⑪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출신의 가리발디 장군에 의해 통일(1861년)

너무도 당연하지만, 주인이 바뀔 경우 새로운 조건과 환경이 조성된다. 어제의 정을 감안해주는 주인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 멋대로’다. 새로운 통치자가 등장해 그동안 쌓아왔던 기존 질서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된다면, 통치 대상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11번이나 주인이 바뀐 나폴리의 역사는 과연 어떤 식으로 이어져 내려왔을까? 프레비시토 광장을 지키는 8명의 입상은 바로 그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8명의 입상을 왼쪽부터 살펴보면서, 나폴리의 어제를 알아보자.

① 노르만 왕가 로제르 2세(Roger Ⅱ, the Norman, 통치기간 1130~1154)

② 호엔슈타우펜 왕가 프레드릭 2세(Frederick Ⅱ of Hohenstaufen, 통치기간 1211~1250)

③ 앙주 왕가 찰스(Charles of Anjou, 통치기간 1266~1285)

④ 아라곤 왕가 알폰소 대왕(Alfonso of Aragon, 통치기간 1442~1458)

⑤ 합스부르크 왕가 찰스 5세 (Charles V of Hapsburg, 통치기간 1520~1558)

⑥ 브루봉 왕가 찰스 3세(Charles Ⅲ of Bourbon, 통치기간 1734~1759)

⑦ 지오아키노 무라트(Gioacchino Murat, 통치기간 1808~1815)

⑧ 사보이 왕가 빅토르 에마뉘엘 2세(Victor Emanuel Ⅱ of Savoy, 통치기간 1861~1878)

유럽 권력자의 대부분은 왕가 사이의 정략결혼을 통한, 피로 맺어진 친척 관계다. 국민주권과 민족주의에 기초한 근대적 의미의 국가 개념은 나폴레옹 이후인 18세기부터 시작됐다. 광장에 세워진 8명의 나폴리 통치자 역시 유럽 왕가들의 피로 뒤엉켜져 있다. 노르만·프랑스·독일·스페인·오스트리아의 피가 주류로, 마침내 이탈리아인 피로 연결된 것은 제일 마지막인 에마뉘엘 2세 때다. 가리발디가 이탈리아 통일을 이룬 뒤 내세운 이탈리아 왕이다.

타협해야 한다면, 최강자를 가려내야


▎프레비시토 광장 구(舊) 왕궁 전면에 세워져 있는 여덟 개의 조각상.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노르만 왕가 로제르 2세, 호엔슈타우펜 왕가 프레드릭 2세, 앙주 왕가 찰스, 아라곤 왕가 알폰소 대왕, 합스부르크 왕가 찰스 5세, 브루봉 왕가 찰스 3세, 지오아키노 무라트, 사보이 왕가 빅토르 에마뉘엘 2세.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굳이 찾는다면 이탈리아의 피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한국인의 눈에 8명의 입상은 어떻게 비쳐질까? 현지인과 전혀 무관한 점령군 수장의 입상에 지나지 않을 듯하다. 나폴레옹 부하로, 나폴리 통치에 나선 프랑스 장군 지오아키노 무라트는 외부 점령군 수장의 좋은 예다. 프레비시토 광장 건설을 처음으로 추진한 인물이기도 하다. 만약 한국이라면, 에마뉘엘 2세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의 입상은 흔적도 없이 매장됐거나 부셔졌을 법하다. 그러나 카오스의 도시 나폴리는 이방인 통치자 모두를 기억하고, 중심 광장에 모아 모두에게 보여주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나폴리를 ‘유럽의 매춘부’라 부른다. 돈이나 힘을 통해, 누구나 집안에까지 들어가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할지 모르겠다. 유럽의 강자가 등장하면, 나폴리타노는 새로운 실력자와의 타협에 매달렸다. 단순히 ‘강자’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최강자’를 찾아가 타협했다. 곧 무너질 강자에 붙었다가는 최후의 강자로부터 당할 수도 있다. 강자 속에서 최강자를 발견해낼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유럽의 맹주들은 나폴리타노의 세계관을 잘 알고 있다. 칼을 배제한, 무혈탈환이다. 지배 권력의 최정상은 바뀌겠지만, 기존의 나폴리 질서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통치 체제를 유지해간다. 피를 통한 대량 숙청은 없다. 아직도 남아있지만, 나폴리는 7개의 귀족 가문이 존재한다. 이탈리아 다른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수백 년 이어진 황금수저들이다. 지배층의 꼭대기만 바뀔 뿐, 귀족이나 중간 지배층 일반인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 수평적 권력이동이다.

과거에 매달려 내일을 망치지 않는다


▎프레비시토 광장의 배경을 장식하는 베수비오 화산. 나폴리의 상징으로, 나폴리를 표현하는 그림이라면 반드시 등장하는 주제이자 소재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권력의 부침을 지켜본 나폴리는 ‘독특한 처세술’을 통해 생존을 이어간다. 피·문화·역사·피부색·출신지·이념과 무관한 생존이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어떻게 재미있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부분이 나폴리타노 최고의 덕목으로 자리 잡는다. ‘무릎 끓고 사느니, 목숨을 바친다’는 생각과 멀다. 바이킹·독일·스페인·프랑스·오스트리아 누구든 상관없다. 21세기 들어 중국이 나폴리 경제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지배층이 누구든 관계 없이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다. 8명의 입상은 그 같은 역사와 현실, 그리고 미래를 향한 증거다. 22세기쯤 되면 중국인 입상도 광장 어딘가에 들어서지 않을까.

문을 두드린다고 해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에게 열어준다는 것도 이상하다. 그러나 문을 부수며 쳐들어오는 최강 파워에 맞서, 전원 결사항전을 부르짖는 것도 지나치다. 민족·국가·이념·명분으로 무장된, 변형된 국수주의나 전체주의일 뿐이다. 임전무퇴 배수진을 부르짖기 전에, 최악의 상황을 피할 준비가 한층 더 중요하다. 준비를 못했기 때문에, 현실과 무관한 자기만족 수준의 과거사에 집착한다. 저항하고 자존심을 찾자는 식의 얘기가 정의·진리로 포장된다. 19세기, 20세기 초에나 볼 수 있는 시대착오다.

나폴리가 최상의 모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민족 점령군의 수장을 광장 한가운데 보관하는 도시가 ‘결코’ 비굴하거나 약하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적어도 과거에 매달려 오늘과 내일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배우고 따라야 할 모델이 될 수 있다. 카오스 나폴리라고 하지만, 평화와 번영의 코스모스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언뜻 보면 전부 뒤섞인 듯하지만, 나폴리 역사를 통틀어 관통하는 대원칙이 하나 있다. 어제가 아닌 오늘과 내일을 무대로 한 도시라는 점이다. ‘나폴리를 본 뒤 죽으라’는 괴테의 말속에 배인 행간의 의미일 듯하다. 나폴리를 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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