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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대기자의 사랑학개론(16)] 샬럿 브론테의 ‘분신’ '제인 제어' 

“나를 걸려들게 할 그물은 없다” 

여류작가 폄훼 사회 분위기 탓에 남성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
공포·로맨스 결합한 고딕소설이자 사회소설·신앙소설로도 평가


▎2017년 국립극장 무대에 올랐던 연극 [제인 에어]에서 배우들이 열연을 펼치고 있다.
민족국가·연애결혼·과학기술은 띄어쓰기를 안 한, 한 단어로 국어사전에 나온다. 그러나 민족과 국가, 연애와 결혼, 과학과 기술은 원래는 별개였다. 수백 년에 걸친 근대화 과정에서 한 짝이 된 것뿐이다.


▎영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중 한 명인 샬럿 브론테.
영어사전을 보면 이들 쌍이 원래 따로 존재했다는 게 드러난다. 영어의 ‘nationstate(민족국가)’에는 nation(민족)과 국가(state) 사이에 붙임표(-)가 있다. ‘love marriage(연애결혼)’의 경우에는 띄어쓰기를 했고, ‘science and technology(과학기술)’에는 등위접속사 and(그리고)가 있다.

결합의 정도는 연애결혼이 가장 취약하다. 회자정리(會者定離)·거자필반(去者必返)의 이치는 사람뿐만 아니라 현상에도 적용된다. 특히 민족국가·연애결혼에 분리의 조짐이 있다. 세계화 속 다문화주의는 민족국가의 기틀을 뒤흔들고 있다. 연애만 하고 결혼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샬럿 브론테(1816~1855)의 [제인 에어](1847)는 연애(“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해서 사귐”)와 결혼(“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이 본격적으로 결합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한 명작이다.

[제인 에어]는 당대에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고, 그 까다로운 비평가들의 평가도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제인에어]는 5년마다 한 번씩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지금까지 20편 이상의 극장용·TV용 [제인 에어]가 나왔다.

‘여자가 무슨 글을 쓰느냐’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커러 벨이라는 남성 필명으로 발표한 [제인 에어]는 시점이 일인칭이다. 그만큼 작가의 생각을 친밀하게 느낄 수 있다.

브론테는 [제인 에어]라는 자서전에서 독자들과 직접 소통한다. ‘독자(reader)’가 41번 나온다.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인 “독자여, 나는 그와 결혼했습니다(Reader, I married him)”로 [제인 에어]의 마지막 장이 시작된다.

[제인 에어]는 공포와 로맨스를 결합한 ‘고딕소설’이자 사회의 불의를 고발한 ‘사회소설’이자 ‘성장소설’이다. ‘신앙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변형된 ‘신데렐라’ 혹은 변형된 ‘미운오리새끼’ 스토리라고도 할 수 있다. 19세기 신데렐라인 제인 에어는 ‘왕자님’의 청혼에 무조건 기뻐하지 않고 따질 것은 따진다. 부부간 평등 같은 것 말이다.

지적이고 정열적이며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제인


▎일본계 미국인 캐리 후쿠나가 감독이 만든 영화 [제인 에어](2011)의 한 장면.
또 제인은 스스로를 백조로 발전시킨다. 유전자가 백조라는 뜻이 아니다. 노력으로 백조가 된다(제인은 숙부 존 에어로부터 오늘날 170만 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상속받는다. 알고 보니 그는 물질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백조였다).

[제인 에어]의 시공(時空)은 19세기 초, 잉글랜드 북부다. 부제는 자서전(An Autobiography)이다. 주인공 제인 에어가 자서전 형식으로 자신의 러브스토리를 펼쳐낸다. 브론테는 제인 에어와 마찬가지로 가정교사였으며 학교 선생님 경력이 있었다.

주인공 제인은 지적이고 정열적이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음악 등 예술에 조예가 깊다. 그리 미인은 아닌, 평범한 얼굴이다. [제인 에어]에는 외모가 평범한 여성이나 평범 이하인 여성도 얼마든지 정열적인 사랑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남자 주인공 에드워드 로체스터 또한 전형적인 영웅은 아니다. 그는 인상이 강렬하다. 얼굴은 검다. 눈썹이 짙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풍기는 분위기가 좀 어둡고 으스스하다. 냉소적인 데가 있고 감정기복이 심하다. 도덕적으로도 좀 문제가 있다. 브론테는 그런 로체스터를(물론 작가 자신이 창조한 인물이지만) 19세기를 넘어 20세의 섹스 심볼로 만들었다. 브론테의 글재주는 탁월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제인 에어]는 흔히 교육소설·교양소설·성장소설로 번역되는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이다. 17세기 독일에서 태어난 빌둥스로만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빌둥스로만은 한 인간, 한 주인공, 한 영웅이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그린다. 사랑의 문제는 단계별 성장과 성숙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제인 에어]는 5단계로 구성됐다. 부모를 일찍 여인 제인은 제1단계에서 외숙모 집에서 10여 년 동안 외숙모와 외사촌들의 구박을 받으며 자란다. 2단계에서는 자선단체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인 로우드에서 6년 동안 공부하고 2년 동안 교사로 일한다. 로우드는 80여 명의 가난한 집 아이들, 고아들이 다니는 학교다.

제3단계에서 18세 제인은 더 넓은 세상과 체험을 위해 로체스터 가문의 저택인 손필드에 가정교사로 취업한다. 제인에게 청혼한 로체스터와 결혼할 뻔하다가 로체스터에게 본처가 있다는 게 드러나 그를 떠났다. 4단계에서는 우연히 친척들을 만나고 두 번째 청혼한 남자를 만난다. 5단계에서는 로체스터와 재회해 결혼에 골인한다.

3단계에서 만난 로체스터는 제인보다 나이가 20년 더 위다. 로체스터는 상당한 재력가다. 제인은 무일푼이다. 나이와 신분을 초월해 둘은 사랑에 빠진다. 서로 보기에 생김새는 별로. 둘은 서로의 생김새보다는 지성과 영혼에 매료된다.

뭐니뭐니해도 어쩌면 연애의 핵심은 ‘밀고 당김’이다. 로체스터가 제인에게 “내가 잘생겼나요?”라고 묻자 제인은 0.1초 만에 “아뇨”라고 답한다(“네 주인님, 주인님은 너무너무 잘 생기셨어요”라고 하지 않았다).

영국 사회의 계급 문제도 공격


▎19세기 중·후반 영국을 통치했던 빅토리아 여왕.
어떤 ‘의욕’으로 불타게 된 로체스터는 제인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집시 점술가로 변장한다. 또 유럽으로 가서 한 1년 정도 머물 생각이라는 거짓 정보를 제인에게 흘려 이미 로체스터를 좋아하게 된 제인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또 제인의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해 마치 다른 여성(미인이지만 좀 세속적이고 사악한 구석이 있는 블랜치 잉그럼)에게 청혼할 것 같은 속임동작, 페인트모션을 쓴다. 얼마나 유치한가. 어쩌면 지극히 유치한 게 사랑의 본질이다. 유치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로체스터는 안달하다가 제인에게 청혼한다(안달하다=“속을 태우며 조급하게 굴다”). 제인은 로체스터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 성당 결혼식에서 혼인서약을 할 참인데 결격사유가 폭로된다. 로체스터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버사 메이슨과 이미 결혼했다는 것. 로체스터는 제인에게 프랑스로 도망가 부부처럼 살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부부처럼’과 부부는 엄연히 다르다. 제인은 로체스터를 떠난다.

4단계에서 제인은 신진(St. John)이라는 성직자를 만난다. 신진은 인도로 선교사로 떠날 것이다. 그는 선교사 생활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아내가 필요하다. 제인에게 프러포즈한다. 제인은 둘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하지만 신진이 하도 집요하게 나오니까 결혼 신청을 수락할 뻔했다. 그런데 갑자가 제인을 부르는 로체스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이었을까.

5단계에서 로체스터를 찾아가 보니 저택은 불에 타 폐허가 돼 있다. 로체스터의 본처가 불을 지른 것이다. 로체스터는 본처를 살리기 위해 애쓰다 실명했고 한 쪽 손이 불구가 됐다. 본처는 떨어져 죽었다. 제인과 로체스터는 완전히 평등한 관계로 결혼한다. 로체스터는 한 쪽 눈 시력을 회복하고, 둘은 아들을 낳는다.

[제인 에어]는 시원적(始原的) 페미니즘 소설이다. 사실 [제인 에어]가 서양문학의 정전(正典, canon)으로 자리 잡은 것은 여성해방 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1970년대 이후다. 새로운 여성상, 부부간 평등을 제시한 [제인 에어]는 페미니즘이 중시하는 텍스트가 됐다.

대부분의 명작은 여러 문제의 핵심을 건드린다. 문제가 낳은 고름을 짠다. [제인 에어]는 당시 영국 사회의 계급 문제를 공격했다. 어쩌면 [제인 에어]의 초기 독자 중에는 여성 가정교사가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교육이나 인품의 면에서는 귀족들과 동급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월급쟁이 피고용인에 불과했다. 제인 에어라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당시의 가정교사의 공통적으로 겪는 모순이었다.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는 지적으로는 동등하다. 하지만 둘은 신분차, 재력상의 차이가 있다.

인과응보라는 세상 이치는 벗어날 수 없어


▎1980년대 이후 [제인 에어]는 탈식민지 문학이론의 필독서가 됐다. 영국 식민지였던 국가는 왼쪽, 그 밖의 국가는 오른쪽 통행을 한다.
빅토리아 여왕(1819~1901, 재위 1837~1901) 시대의 영국은, 여성의 30%가 싱글이었다(빅토리아 여왕은 [제인 에어]의 애독자였다).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주고 싶었던 신흥부자들은 가정교사를 채용했다. 19세기 중반 영국에는 약 2만5000명의 여성 가정교사가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어, 간단한 산수·음악·그림·역사 등을 가르쳤다. 당시 가정교사의 정년은 대략 40세였다. 그들은 너무 늦기 전에 제 짝을 찾아 결혼해야 했다.

[제인 에어]는 종교소설이다. 당시의 전형적인 신앙인 유형을 그리고 있다. 제인이 다니던 기숙학교의 교장인 브로클허스트는 당시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의 일부 부정적인 인물들을 대표한다. 브로클허스트는 광신자이며 위선자다. 잔인한 인간이다. 학생들에게 가난과 금욕을 강요하지만, 정작 자신은 학교에서 빼돌린 돈으로 호의호식한다. 한마디로 인간 말종.

제인이 인생 4단계에서 만난 신진은 신앙심이 두터운 것은 좋은데 지나친 야심가라는 것, 지나친 자존감이 문제다. 신진은 사랑보다는 신(神)의 사업이 우선이다. 그는 가정보다 신앙이 우선이다.

[제인 에어]에 나타난 또 다른 신앙인 유형은 헬렌이다. 제인은 그를 기숙학교에서 만났다. 헬렌은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헬렌은 궁핍도 받아들인다. 제인은 헬렌의 신앙 모델에 동의하지 않는다. 헬렌의 신앙은 불의를 용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인공 제인은 작품 속에서 사랑과 신앙 사이에서 어떤 고민을 했을까. 그리고 고민의 결과로 어떤 선택과 행동을 했을까.

제인은 신앙인으로서의 도덕적인 책무와 지상의 쾌락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해 애썼다. 제인에게 신앙은 사람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욕망에 브레이크 역할을 했다. 동시에 신앙은 세속적인 성공에도 도움을 주는 조력자였다.

제인은 작품 속에서 “시편이 흥미롭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인은 인생의 위기와 고비가 있을 때마다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남편 로체스터를 감화시켜 신앙의 길로 이끈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Amen; even so come, Lord Jesus!’)로 끝난다. 요한계시록 22: 20에 나오는 구절이다.

[제인 에어]는 21세기 관점으로는 지나치게 종교적이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사람들 중 일부의 생각은 달랐다. 일각에서는 신이 부여한 직분을 거역하는 부도덕하고 위험한 책이라고 비판했다.

이 소설에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나온다. 그들 중, 그 어떤 인물도 인과응보·상선벌악(賞善罰惡)이라는 세상의 이치를 벗어날 수 없다(현대인은 과연 인과응보·상선벌악이 인간사의 지배 원리인지에 대해 정당한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

[제인 에어]의 또 다른 한계는 제국주의다. 얼핏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대목도 나온다. 1980년대 이후에는 [제인 에어]가 탈식민지 문학이론의 필독서가 됐다. ‘유럽의 여성 해방은 제3세계의 이름 없는 사람들의 희생 위에 전개됐다’는 논리를 예시하는 텍스트로 [제인 에어]가 중시된 것이다.

임신 중이던 39세에 생을 마감한 천재


▎바나나가 미국에 전파된 것은 19세기 말 빅토리아 여왕 시대였다. 당시에도 관능적 외설성이 문제가 됐다.
브론테는 어렸을 때부터 키가 작고 허약한 체질이었다. 6남매 중 셋째.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는 아일랜드 출신의 성공회 신부였다. 5세일 때 어머니가 사망했다. 친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브론테 자신이 스스로를 ‘늙고 못생겼다(old and ugly)’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제인은 브론테의 분신이다.

브론테는 4번 청혼을 받았다. 1854년 보좌신부인 아서 니콜스(1819~1906)와 결혼했다. 아버지가 반대했다. 지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딸과 가난하고 평범한 성직자가 배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듯. 브론테는 니콜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것을 보면 브론테는 어떤 운명의 힘에 이끌렸던 것 같다.

‘워라벨(work-life balance)’은 그때도 힘들었다. 브론테는 “나는 전보다 바쁘다.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결혼 후 불과 9개월 뒤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임신 중이었다. 향년 39세. [제인 에어]가 발간된 지 8년 만이었다.

1855년 사망한 샬럿 브론테 부고 기사는 [뉴욕타임스](1851년 창간)에 실리지 않았지만, 51년 후에 사망한 남편의 부고는 실렸다. 5줄짜리 부고 기사의 제목은 ‘샬럿 브론테의 남편 사망’이었다.

[제인 에어]에서 브론테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새가 아니다. 나를 걸려들게 할 그물은 없다. 나는 독립적인 의지를 지닌 자유로운 인간이다(I am no bird; and no net ensnares me: I am a free human being with an independent will).”

제인 에어의 이러한 선언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풍습상으로 남성은 여성이 앉았던 자리에 곧바로 앉을 수 없었다. 여성의 체온이 느껴지면 남성이 ‘망측한’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브론테는 상당히 ‘에로틱한’ 장면을 작품 곳곳에 심는 데 성공했다. 한마디로 브론테는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천재 작가였다.

알렉산더 포프(1688~1744)는 “잘못을 저지르는 건 사람다운 것이다. 용서하는 건 신성(神性)한 것이다(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고 말했다. [제인 에어]가 ‘그들은 그 후 쭉 행복하게 살았다(They lived happily ever after)’라는 식으로 끝난 것은 그들이 서로 용서했기 때문이 아닐까.

※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서울대 외교학과와 스탠퍼드대(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에서 공부했다. 중앙일보에 지식전문기자로 입사, 심의실장과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서강대·한경대·단국대 등에서 강단에 섰다. 지은 책으로 [따뜻한 종교 이야기] [CEO를 위한 인문학] [대한민국을 말하다: 세계적 석학들과의 인터뷰 33선] [마음고전] [아포리즘 행복 수업] [하루 10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말하다] 등이 있다.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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