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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전문기자의 ‘젊은 작가 列傳’(4)] 촛불·탄핵 배경 소설 쓴 작가 황정은 

“뜨거우니 조심하라 그 문장을 쓰고 싶었다”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 두 달 만에 2만 부…평단·독자 반응 좋아
문장 완벽주의자…“어떻게든 세월호 죽음 넘어서보고 싶었다”


▎소설가 황정은은 현재 한국문학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 중 하나다. / 사진:채널예스 이관형
2019년 한국문학의 젊은 작가들 지도를 그리며 1976년생 소설가 황정은을 건너뛰기 어렵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기자가 이 지면을 통해 지금까지 소개해온 작가들에 비하면 한 체급 위인 것처럼 느껴진다. 단순히 등단이 몇 년 빠르다거나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문학상을 더 받았다는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황정은은 범박하게는 한국 사회, 조금 더 이념적 하중을 부여해 표현하자면 우리가 공동체라고 부르는 사회적 단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는 작가로 받아들여지고 있어서다.

지난 1월 출간한 중편 두 편을 묶은 소설집 [디디의 우산]은 그런 행보에 정점을 찍은 작품이라고 해야겠다. 직전 소설집 [아무도 아닌] 이후 3년 만에 펴낸 이번 작품집에서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를 뿌리부터 흔들었던 메가톤급 사건들을 빠짐없이 호명해 현재화했다. 세월호, 이어진 촛불, 대통령 탄핵 같은 사건들 말이다. 역사 연구가 객관적이 되려면 사건의 뜨거움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시간적 거리가 확보되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문예 행위도 그런 조건을 갖추지 못할 경우 자칫 생명력 짧은 정치 팸플릿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크다는 점은 경험적으로도 인정된다. 가령 박노해의 노동시는 1970~80년대에는 첨예했지만 지금은 지나간 문학사의 한 페이지라는 느낌이 강하다.

황정은은 이 시대의 피 끓는 다른 작가들처럼 현재형 사건에 뛰어든다. 그리고, 이 부분이 중요한데, 독자들이 열광한다. 문학의 시대였다고 회고되는 역시 70~80년대에 비하면 크게 축소된 규모이긴 하지만 말이다. 얼마나 팔렸길래? 출판사 창비에 따르면 [디디의 우산]은 두 달 만에 2만 부가량 팔렸다. 2월 21일 창비가 마련한 독자와의 북 토크는 당초 100명 규모로 준비했으나 800명이나 참가 신청해 실제로 400명이 함께한, 독자 모임치고는 보기 드문 대형이 되고 말았다. 출판사는 판매가 3만 부까지 이어질 걸로 내다본다. 매년 최악을 기록하는 불모의 천수답 한국문학에서 손에 꼽히는 수치다.

이런 반응 열기는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새 소설책 전까지 6권을 꾸준히 내며 지지자를 차츰 늘려온 결과라고 우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거기서 그치고 만다면 우리가 황정은 소설이라는 하나의 문화적 상징자본에 대해, 그에 투영된 집단 열망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는 사라진다.

상징주의와 사실주의의 동거?


▎지금까지 출간된 황정은 소설. 왼쪽부터 [백의 그림자][파씨의 입문][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 [아무도 아닌], 그리고 지난 1월 출간한 [디디의 우산].
의문부호를 곁들여 이런 식의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황정은의 성공 전략을 따져 보기 위해 몇 가지 장면을 살펴보려 한다.

시계를 되돌리자. 2008년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이번 월간중앙 인터뷰를 위해 훑어보니 황정은은 이미 그 시절부터 잘 쓰는 작가였다. 우선 언어세공의 측면에서 그렇다. 그 배경은 곧 밝히겠다. 그렇다고 작품의 무게가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가능성과 잠재력이 꿈틀댄다.

우화적이고 몽환적이면서도 처절할 만큼 실감 나게 어떤 지독한 삶들을 그려내는 작품들 곁에 그런 사실주의 규율과 동떨어진 환상적인 작품들이 이웃하고 있다. [마더] [소년] 같은 단편들이 조세희의 [난쏘공]을 연상시키는 사실주의 계열이라면, 사람의 등 쪽에서 문이 열려 죽은 자들이 거기에서 나오는 [문], 고양이 비슷하지만 인간의 말을 하는 괴생명체 ‘곡도’를 등장시킨 [곡도와 살고 있다] 등은 환상 계열이다. 그리고 이런 대목들.

“동물원은 가장 인간적인 영역이잖아.

그런가.

우리를 만들어서 동물들을 넣어두고 관람료를 받는 일 같은 것을 인간 외에 어떤 동물이 생각해내겠어. 동물을 관리하는 인간이 있고 동물을 관람하는 인간이 있고 동물을 관람하는 인간들을 관리하는 인간이 있고 그런 인간들에게 통제되고 영향받는 소수의 동물들이 있는 곳. 압도적인 인간의 영역, 그게 동물원이야. 동물원의 동물들이 어딘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야.”

소설집 표제작 [일곱시 삼십이분…]에 등장하는 장광설인데, 지금의 황정은 소설로 이어지는 문명·현실 비판적인 측면이 반짝거린다. 어쩌면 눈 밝은 독자들이 황정은의 이런 점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언어를 믿기 어렵다


▎소설가 황정은. 2005년에 등단해 지금까지 일곱 권의 소설책을 냈다. / 사진:창비 ⓒ 정민영
2010년 첫 장편이자 짧은 장편 [百(백)의 그림자]는 작품 자체도 그렇지만 스타 평론가 신형철의 ‘애정고백’에 가까운 해설이 인상적이다. 문예지 발표 당시부터 혹시나 있을 수 있는 오독(誤讀)으로부터 이 작품을 지켜내기 위해 뭔가 써야겠다는 다급함을 느끼던 차에 계속해서 발표하는 후속 단편([야행] [대니 드비토])들로 인해 작가에 대한 무한 신뢰를 갖게 됐고 그래서 [百의 그림자] 해설을 자청했다. 신형철은 이런 해명으로 해설을 시작한다. 사실 황정은은 누구보다 평론 우군이 풍부한 편이다. 본인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독자가 소설책을 펼치면 먼저 눈에 띄는 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기계적인 혹은 어딘가 헐거운 다음과 같은 대화다. 곧 사랑에 빠지는 은교와 무재가 당사자.

“①우리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요.

②글쎄요.

③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④죽지 않을까요.

⑤죽나요.

⑥ 어디서든 언젠가는 죽겠지만 나가지 못한다면 나가지 못한 채로 죽겠죠.

⑦무서워요.

⑧무서워요?

⑨무섭지 않아요?”

동그라미 번호는 기자가 붙였다. 홀수 인용문장은 은교, 짝수는 무재의 발언이다. 서울 세운상가에서 일하는 두 사람은 상가 단합 소풍에 참가했다가 숲에서 길을 잃었다. 그 와중에 나누는 대화. 그런데 느껴지시나.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의 따라 하기 같은 동어반복의 여운 말이다. 문장부호(인용부호)가 생략돼 마치 중얼거리는 것 같다. 그런데도 고지식할 만큼 반듯한 대화가 오히려 쾌감과 따듯함을 불러일으킨다.

황정은은 이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이런 대화의 상당 부분을 실제 자신의 경험에서 따왔다고 밝혔다. 3월 8일 인터뷰에서다. 심각한 언어장애를 3년이나 겪었고, 인용 부분과 같은 대화는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 회복기의 양상이었다고 소개했다. 첫 1년은 “말을 하고 싶은데 들어주는 사람도 없고 말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서 괴로웠고”, 그 다음 1년은 “폭발적으로 말이 많아져 다언증(多言症)처럼 쉴 새 없이 떠들었을 뿐 아니라 약간 미친 듯이 살았던 시기”, 마지막 1년은 “말하고자 하는 욕망마저 사라진 채 다시 말이 없어진 시기”였다고 밝혔다. 이런 증상은 왜 생겼던 걸까. 황정은은 “원인은 있는데 너무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중요한 건 황정은이 그런 체험을 자신의 남다른 언어 결벽과 연결 짓고 있다는 점.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단어 단위로 의심하며 작품을 쓴다. 언어에 무감각해지거나 무신경해지면 그때는 소설 쓰기가 좀 어렵지 않을까 한다.”

언어에 대한 태도가 그렇다 보니 황정은의 집필과정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독특했다.

원고 마감일이 닥치면 황정은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오전 9시까지 쓴다. 아침 먹고 청소하고 체육관에서 근력운동한 다음 짧게 낮잠. 오후 2시부터 다시 작업. 하루 8~9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200자 원고지로 10매를 넘겨 쓰지 않는다. 한없이 꼼꼼하게 쓰기 때문인데 한 문장을 쓰는 데 평균 8~9개의 문장을 버린다고 했다. 같은 문장을 수많은 다른 각도에서 달리 생각해보기 때문이다. 버린 문장들은 별도의 파일에 저장한다. ‘백의 그림자’라는 원본 파일이 있으면 ‘백의 그림자에서 자르기’라는 별도 파일을 만드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작업하다 보니 “한 시간에 한 문장이 남는다. 쓴다기 보다 남는다”고 했다.

등단 초기부터 이렇게 작업했나.

“그렇지는 않다. 갈수록 쓰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다.”

높아진 주변의 기대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가.

“그런 부분은 전혀 없다. 쓰려 하는 인물의 상태, 인물이 느끼는 심정이나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적확한 문장을 찾으려는 과정 중에 그런 작업방식이 생긴 거지, 이런 문장을 쓰면 내가 망신당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 때문은 전혀 아니다. 작업할 때는 정말 백지만 내 앞에 있다. 그거 말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이 극단적인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만족할 만한 상태가 될 때까지 계속 읽어나가며 쓴다.”

기자만 그런 걸까. 그래선지 황정은의 소설 문장에서는 더하거나 덜어낼 부분을 찾기 어렵다. 대체로 길이가 짧은 편이어서 고속도로처럼 읽히는 문장들이다. 상황이나 맥락이 생경할 경우 의미 파악에 시간이 걸려도 말이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을 때까지

돌아돌아 이제야 왔다. 드디어 뜨거운 작품 [디디의 우산]을 말할 차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은 중편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묶은 것이다. 한데 두 작품 가운데 [d]는 소설책 [작가의 말]에서 밝힌 것처럼 이력이 복잡하다. 이전 단편 [디디의 우산]을 부숴 만든 또 다른 단편 [웃는 남자], 이 두 작품을 섞어 놓은 것이다. 한데 [디디의 우산]은 2012년 소설집 [파씨의 입문], [웃는 남자]는 2016년 소설집 [아무도 아닌]에 실려 있다. 책으로 묶이기 전 문예지 발표 시점을 기산점으로 하면 근 10년에 가까운 문학적 모색의 결과가 [d]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번거로움, 집요함이 왜 필요했던 걸까. 역시 ‘작가의 말’에 해답이 있다.

“2014년 가을, 다시 소설을 써야겠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였을 때 내게는 누군가의 죽음 외에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걸 어떻게든 소설로 쓰지 않으면 소설 쓰는 일이 여태와는 다른 방식으로 아주 어려워질 거라는 직감이 있었다. 종래 내가 가진 것 중에 무언가가 심각하게 파괴된 것처럼 종래 내가 쓴 소설 중 무언가가 파괴될 필요가 내게는 있었고, 나는 [디디의 우산]을 선택했다.”

작가가 작품을 쓰기 위해 스스로를 어떤 식으로 몰아붙여야만 했던 2014년 가을의 상황은 역시 그 해 봄 세월호의 충격 때문이겠다. 한데 압도적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거대한 죽음들 앞에서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현실의 죽음을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런 실존적 좌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토로다.

실제로 [d]는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 dd를 잃고 극단적인 자폐 상태에 빠진 청년의 이야기다. d는 남겨진 자다. [d]는 요즘 흔한 애도 소설인가. 황정은은 한발 더 나아간다. 이어지는 작가의 말이다.

“[디디의 우산]을 선택한 이유는 디디가 혁명, 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애도도 애도지만 혁명이 소설의 키워드라는 얘기다. 혁명이라는 주제 혹은 소재는 당연히 소설책의 나머지 작품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도 변주돼 이어진다. 그런데 소설에서 말하는 혁명이 반드시 대통령 탄핵 같은 정치적 혁명 상황을 지시하는 것만은 아니다. 정치적 혁명을 포함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보다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일상의 혁명 같은 것들을 얘기한다. 캠퍼스와 직장 사무공간에서 지금도 벌어지는 은밀한 혹은 교묘한 형태의 온갖 성추행, 촛불 시위 현장에도 등장했던 무의식적인 여성 차별, 시각 장애인의 처지에 무신경한 지하철 안내 체계 같은 것들 말이다. 감추고 싶은 우리 안의 부조리, 부끄러움 같은 것들일 텐데, 대통령 탄핵을 부른 혁명적 정치 상황만큼이나 예외적이고 강렬한 결단과 실천이 필요하리라는 게 작가의 심중인 듯하다. 그리고 그 부조리들이 사라진 이상적인 상황을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상태로 상정하는 듯하다. 그러니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다. 저강도 생활의 혁명을,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을 때까지.

황정은은 “이번 소설책이 가급적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독자를 만나는 행사 요청이 들어오면 대부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인다”고 했다.

특별히 이번 책이 많이 읽히기를 바라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았는데 결국 소수자성에 대한 이야기라서 그렇다.”

소수자 아닌 소수자성이라니.

“[아무것도…]에 나오는 비혼여성, 아이 키우는 여성, 미취학 아동, 성소수자, 장애를 지닌 여성,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소수로 존재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람들이 쉽게 상식이라고 말하는 태도로 인해 계속해서 사회적으로 배제돼온 입장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내가 말하는 소수자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소수자들에 가해지는 불합리한 처우를 확 바꾸자는 얘기인데, 중편 [d]는 메시지가 또 다르다. 황정은은 이 작품 마지막에 나오는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말을 하고 싶어 작품을 썼다고 밝혔다. 쉽게 풀면, 민중(여기서는 어쩐지 ‘민중’이라는 표현이 적합한 것 같다)은 뜨거우니 함부로 대하지 말고 조심해라. 이런 경고로 읽힌다.

황정은은 “[d]를 쓰던 2016년 여름·가을 한국사회는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끔찍했다”고 토로했다. “환멸이나 낙담에 대해 쓰더라도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간에 대한 모종의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데, 사람에 대한 나의 사랑이 완전히 증발돼버린 것 같았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전혀 신뢰할 수 없었고 세상이 다 망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세월호 유가족이나 애도자에게 극도의 혐오를 표출하는 부류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그런 나쁜 생각에 맞서기 위해 쓴 게 [d]라는 얘기였다.

작가의 이런 생각을 독자들이 속속들이 알 리 없다. 독자들이 작가의 의도 대로 작품을 읽어주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순진한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위기의 소설에 독자들은 지지를 보낸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이 시대의 어떤 정신이 그런지도 모르겠다. 황정은의 글과 말은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 신준봉 문화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 1993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신문사에서 10년 가까이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상식의 눈에는 괴짜인 문인들, 그들이 생산한 영롱한 것들을 초롱초롱한 독자들에게 중개하는 일, 제도로서 문학의 생로병사에 관심이 많다.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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