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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 특별기획] 진보의 설계자들이 바라본 일본 

지극히 냉철한 시각으로 현재와 미래를 숙고하다 

근·현대 진보 적통 이어온 7인(신익희·조봉암·조병옥·윤보선·장면·김대중·노무현)의 선택
과거 얽매이지 않고 현실주의 기초한 포용으로 일본의 자발적 관계 개선 유도


▎1965년 12월 18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 기본조약 비준 때 사용됐던 한글 병풍. 국교 정상화의 상징으로 주일 한국대사관과 주한 일본대사관이 각각 6폭씩 보관하고 있다.
지난 3월 경기도의회에서 ‘일본 전범기업 스티커 부착 의무화 조례’가 발의됐다. 전범기업으로 규정된 299개 일본 기업이 생산한 학교 기자재에 전범기업의 생산품임을 알리는 스티커를 부착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논쟁이 벌어졌다. 정부 관계자들도 난색을 표했다. 조례안을 대표 발의한 더불어민주당 소속 황대호 도의원은 “일본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기는커녕 자국 기업의 자산 압류에 대한 보복조처를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 진짜 외교적 문제 아니냐”고 항변했지만 여론은 차가웠다.

일본 현지에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반한(反韓) 감정이 증폭됐다. 일본의 인터넷 포털에는 ‘한국과 자매 도시 교류를 재검토해야 한다’거나 ‘일본도 모든 수출을 중단하자’는 반발과 ‘한국 여행을 간 일본인에게도 전범의 후예라는 스티커를 목에 걸게 하지 그러느냐’, ‘스티커를 붙이면서까지 사용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제품 안 쓰면 스티커 안 붙여도 되지 않나’ 하는 반감들이 넘쳐났다.

앞서 1월에는 민주당 소속 홍성룡 서울시의원이 ‘일본 전범기업과의 수의계약 체결 제한에 관한 조례안’을 발의했다. 서울시와 서울시의회가 발주하는 사업에 일본 전범기업들은 수의계약을 참여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이다. 경기도의회 처럼 낙인찍기를 하자는 것이다. 민주당과 정부,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우려를 전한 끝에 서울시의회 소관 상임위에서 심사안건으로 상정되지 못했다. 조례안을 발의한 홍 의원은 “싸움을 시킨 일본은 빠져버리고 우리끼리 상처만 남았다. 우리가 또 일본에 당했다”고 분개했다.

다른 쪽에선 ‘흔적 지우기’가 한창이다. 지난 2월 광주에서 시작된 친일(親日) 작곡가가 만든 교가 바꾸기 캠페인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시작은 광주일고였다. 광주일고 교가를 작곡한 김동진(1913~2009)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았다. 광주일고 총동창회는 교가를 바꾸기로 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씨에게 새 교가 작곡을 의뢰했다. 김상곤 전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총동창회장에 취임한 직후였다.

‘교육현장의 친일 지우기’는 설립 111주년을 맞은 광주 숭일중·고교를 비롯해 울산·경남·충청 등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국가와 지역을 대표하는 공신력 있는 기관이나 단체에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는데 이는 한·일 관계를 개선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고 우려했다.

‘낙인찍기’와 ‘흔적 지우기’로 확산되는 반일 감정


▎해공 신익희.
한·일 관계를 대하는 정치권의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축사에서 ‘친일파’와 ‘친일 잔재 청산’을 강조했다. 김대중 정부 때 주일대사를 지낸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는 4월 11일 원혜영·강창일 의원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한·일 관계, 이대로 괜찮은가)에서 “국내 정치로부터의 유혹에 못 이겨 일본과 관련한 국가이익과 국민 감정이 갈등하도록 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잔뜩 꼬여버린 한·일 관계의 실타래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월간중앙은 일제강점기로부터 최근까지 한국적 진보의 명맥을 이어온 주요 정치 지도자들의 일본관에서 힌트를 얻고자 했다. 해공(海公) 신익희(1894~1956), 죽산(竹山) 조봉암(1899~1959), 유석(維石) 조병옥(1894~1960), 해위(海葦) 윤보선(1897~1990), 운석(雲石) 장면(1899~1966), 김대중(1924~2009), 그리고 노무현(1946~2009). 민주당의 정통성을 지켜온 거목들, 이른바 ‘진보의 설계자들’이다.

국회 의사록과 자서전, 언론보도 등 여러 기록을 통해 일본에 대한 견해를 조명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이들의 공통점은 지극히 냉철한 시각으로 한·일 관계를 바라봤다는 점이다. 국익을 위해 일본을 이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때로는 일본 스스로 과거를 반성하도록 퇴로를 열어주는 승자의 배려로 상대를 압도하기도 했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국민의 반일 감정을 이용하는 요즘 세태와 확연히 달랐다.

민주당의 시조 격인 해공 신익희는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해공은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건국 등의 과정에 모두 참여했다. 초대 국회에서 민주당의 시초인 대한국민당(민주국민당, 민주당으로 개명)을 창당한 진보의 아버지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해공의 생가는 매년 민주당 창당 기념일 때 주요 당직자들이 모여 기념행사를 치른다.

누구보다 독립에 헌신했던 그는 해방 후 한때 친일분자로 매도당했다. 1956년 대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해공은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였다.(‘못살겠다, 갈아보자’란 선거 구호는 지금도 최고의 슬로건으로 회자되곤 한다.) 당시 해공은 한 강연회에서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일본 지도자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먼저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 발언이 친일분자로 공격받는 빌미가 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인정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을 발표했다. 독도를 포함한 일명 ‘이승만 평화선’을 설정해 미국과 일본의 반발을 샀다. 일본과 13년간 전개된 해양분쟁의 불씨가 됐다.

일제강점기의 앙금이 아직 가라앉기도 전이었고, 반일 감정이 고조된 당시 상황에서 해공의 발언은 실익보다 손해가 컸다. 하지만 해공은 개의치 않았다. 단순히 정치 상황을 고려한 즉흥적인 발언이 아니라 현실주의에 기초한 그의 오랜 철학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만행 몸소 체험했던 신익희 조병옥의 ‘극일관’


▎유석 조병옥.
실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일본관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발언이 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직후 해공은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우리가 구적(원수)을 몰아내고 나라를 도로 찾는 데는 부질없이 감상에만 흐르지 말고 현대로 개화 진보한 일본에 가서 배워 그놈을 이기고 일어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큰 일꾼이 되어 잃었던 조국을 도로 찾고 가문도 빛내리라”([해공 신익희 자서전])는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남광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2016년 10월에 열린 국민대 개교 70주년 기념 세미나-해공은 국민대 창립자이기도 하다-에서 “해공의 현실주의는 근대문명을 수용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일본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해공에 이어 1960년 제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유석 조병옥 박사도 일본을 적절히 이용하는 게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48년 건국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해외 특사였던 유석은 유엔(UN)총회에서 “미국과 일본의 강화조약 이전이라도 한·일 무역을 재개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마침 이승만 정부가 일본과 경제관계 복원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것도 해외특사로서 이승만에게 대외정책 방향을 조언했던 유석의 생각과 일치했다.

1948년 9월 일본을 방문한 유석은 재일동포 환영회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세계 대세는 패전국인 일본이라고 하더라도 반공진영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할 것이라고 인정하고…(중략) 일본이 과거 우리의 역사적 숙적이었다 할지라도 현재는 우호국이 될 수 있으며 외교관계를 맺을 수도 있으므로 우리 국민은 일본 국민에 대하여 대국민의 긍지로서 임해야 할 것입니다.” ([조병옥], 2003)

진보의 설계자들은 국내의 시급한 정치·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하기도 했다. 6·25 전후 본격적으로 국가 부흥작업이 추진됐던 1960년대의 일이다. 주인공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고 들어선 민주당 정권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였다.


▎장면 전 총리.
내각의 실질적인 수반이었던 장면 총리에게 경제 부흥은 가장 큰 숙제였다. 더불어 북한과 중공(중국의 옛 이름), 소련의 공산권에 맞서 동아시아의 자유주의 우방국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도 중요한 외교 과제였다. 경제 부흥을 위해선 원조차관이 필요했다. 한국전쟁으로 경제 부흥을 이룬 일본이 협력 파트너로 제격이었다.

그러나 당시 양국 관계는 경색 국면에 놓여 있었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일본과 경제협력에 긍정적이었던 이승만 정권은 1951년 9월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한국이 배제되면서 대일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다. 이승만은 “일본의 패권이나 공산분자의 패권은 그다지 큰 차이가 없으며, 일본의 새로운 명령 지시에 보복하느니보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타개책을 강구할 것”이라고 밝힌 뒤 대일교역을 두 차례 중단시켰다.

이승만 정권의 이 같은 변덕은 장면 총리로선 맥이 풀리는 일이었다. 장면 총리는 1949년에 이승만 정권 아래서 초대 주미대사를 지내며 일본과 4차례에 걸쳐 통상협상을 진행했다. 달러가 부족한 상황에서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려면 일본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던 시대였다. 거의 10년 만에 집권한 장면 총리로선 무너진 한·일 관계 개선을 복원하는 게 경제복구의 첩경이나 다름없었다.

장면 총리는 ‘한국의 경제개혁 비망록’을 작성해 미국 국무부에 전달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구상을 밝힌 이 문서에는 물자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대일무역 확대를 추진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시도할 테니 미국이 도와달라는 메시지였다. 비록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 계획서를 바탕으로 핵심 경제정책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또 1965년 한·일 협정의 마중물이 되기도 했다.

장면 내각의 수반이었다가 군사쿠데타로 물러난 윤보선 대통령은 이후 야당을 이끌며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웠다. 윤보선의 투쟁 전략은 과거 제2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경험에서 쌓은 외교적 역량을 이용해 박정희 정권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국가 부흥, 독재 타도에 일본 이용한 장면, 윤보선


▎윤보선 전 대통령.
1977년 7월 18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그해 7월 4일 후쿠다 일본 수상에게 “일본 자민당 정권이 한국 내정에 대해 무비판적 무조건적인 지지 태도를 표명하고 있다”면서 유신정권과의 유착 문제를 비난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 현재의 한·일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대한(對韓) 정책을 수립하라고 촉구했다.

또 1965년 5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이 존슨 미국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한다는 발표가 나온 뒤 윤보선은 브라운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나 박 대통령의 방미 초청을 취소하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브라운 대사 외에도 마샬 그린 미 국무성 극동담당 부차관보를 비롯한 워싱턴 정가의 인맥을 동원해 박정희 정권에 맞섰다.

윤보선의 이런 활동은 정권의 통제를 받고 있던 언론의 역공을 받게 됐다. 언론들은 윤 전 대통령이 후쿠다 수상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생략한 채 ‘일본에 내정간섭을 요청했다’는 식으로 왜곡해서 보도했다. 윤 전 대통령이 큰 곤욕을 치렀음은 물론이다.

냉전이 끝난 뒤 한·일 관계가 가장 꽃피었던 시대는 언제였을까. 얼핏 생각하면 미국과 일본에 비교적 우호적인 보수정권기가 아닐까 싶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주의 색채가 강했던 김대중(DJ) 정부 때였다. DJ는 가장 밝은 한·일 관계의 총연출자였다.

정치 신인 시절의 DJ는 일본에 비판적이었다. 1953년 10월 2일 언론 기고문에서 그는 “방만무도한 태도에 눈감은 채 악수의 손을 내민다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이 이를 불허함은 물론…(후략)”이라며 일본의 태도에 불만을 나타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한·일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한·일 회담 협상이 진행 중이던 1965년 3월 국회 본회의에서 DJ는 “한·일 국교의 주목적이 되는 양국민이 과거를 청산하고 서로 굳건한 악수를 하고 호혜평등 하에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 나가는 동시에…(중략) 우리 자체의 안전보장이라든가, 우리 경제 번영을 위해서도 이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1970년대에는 더 적극적으로 일본과 협력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1970년 서울 외신기자클럽 회견에서 “나는 한·일간의 협력을 진심으로 원해온 삶이며, 일본의 존재가 아시아의 세력 균형과 한국의 안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야당 의원으로서 수많은 반대와 오해를 무릅쓰고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는 한·일 회담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도 DJ의 뚝심과 신념을 보여준다. 그는 중국과 북한 등 대륙 공산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한·일간의 협력이 불가피하다고 인식한 현실주의자였다. 설사 한국이 관계 개선에 소극적이더라도 동북아 방위의 책임을 일본에 분담시키려 하는 미국의 압력 때문에라도 국교 정상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DJ가 한·일 관계 개선에 긍정적이었던 건 남북 관계 개선과 동북아 평화질서 정착에 일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같은 생각은 1970년 10월 대선공약으로 발표한 ‘4대국 안전보장론’에서 드러난다. “70년대의 우방 관계는 지금까지의 의존일변도에서 상호협조와 공동이익 증진의 방향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중략) 미·소·일·중공 등 4대 국가에 대해서 한반도에서의 전쟁 억제를 공동으로 보장할 것입니다.” 이 구상은 향후 한반도 평화 체제의 보루인 ‘6자 회담’의 기원으로도 평가받는다.

승자의 너그러움으로 반성 유도한 김대중과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
DJ가 가진 일본관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일본에 사과와 반성을 강요하기보다 자발적으로 반성에 나서도록 유도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북한을 스스로 무장해제시키는 ‘햇볕정책’의 일본판이나 다름없었다. DJ는 신군부 독재에 맞서 한·미·일 3국 국민의 연대를 촉구했다. 단순한 정치적 수사에 그친 것이 아니라 1982년부터 777일간의 미국 망명기간에 200회가 넘는 공개 강연을 하는 등 행동으로 미·일 국민들을 매료시켰다.

1972년 11월 DJ를 만난 뒤 일본에서 그의 가장 강력한 지원자가 됐던 우츠노미야 토쿠마 전 자민당 의원은 “절망적인 상황 하에서도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조금도 잃지 않고, 한국 국민의 능력과 가능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는 자유주의 정치가였다”고 회고했다. 우츠노 미야는 일본 내에서 정치·사회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DJ를 후원하는 네트워크를 꾸리는 데 앞장섰다.

이런 노력은 1998년 10월 한·일 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김대중-오부치 선언(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이어졌다. DJ는 전후 일본이 평화헌법 아래 비핵의 원칙과 함께 안전보장과 세계경제 및 개발도상국에 대한 경제 지원 등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대해 수행한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이에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는 공동선언에 ‘통절한 반성’,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표현으로 성의를 보였다. 또 DJ정부의 대북 정책에 지지를 표명했다. DJ는 생전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일본의 진지한 반성을 유도하려고 했다”고 회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DJ의 일본관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상속됐다.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8월 11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과거 문제를 정부가 공식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고, 양국 국민의 활발한 민간교류를 통해 인식 차이를 좁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취임 초에는 역사 언급보다 실리를 우선했다. 2003년 1월 23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역사 문제는 한국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해결이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그러나 21세기 한·일 관계가 과거에 속박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야 할 길을 나아가야 합니다. 양국 국민이 감정적으로 대결할 문제가 되지 않도록 협력하는 과정을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이런 우호적 노력 덕분에 2004년 12월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발족됐다. 양국 국민이 가장 예민해하는 역사 문제에 대해 전문가들이 모여 갈등 해결을 처음으로 모색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에도 노 전 대통령은 “관계가 진전돼도 일시적 감정 고조로 손상된다”며 제2기 역사공동위를 출범시켰다. 다만 임기 말에 접어들면서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일본에 책임 있는 자세 촉구한 조봉암


▎죽산 조봉암.
진보 정치 지도자들이 일본에 무턱대고 너그러운 손길을 내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이 스스로 각성할 것을 엄중히 지적하기도 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이 대표적이다.

죽산이 활동했던 1950년대 초반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여서 일본과 관계 개선이 요원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일본과 관계 개선에 소극적이었다. 죽산은 정부 수립 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이승만 정부의 토지분배정책을 설계했다. 한때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기도 했던 그는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일본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6·25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과 협력 관계를 중단시키자 죽산은 관계 개선에 나서기를 촉구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거나 공격해 압박하기보다 너그러운 태도로 정책 변화를 유도했다. 죽산은 “대일 외교의 기본 목표는 과연 무엇인지 또 어떤 조건이면 타협이 성립될지 아는 사람은 이 대통령 자신뿐”이라면서 “알지도 못하면서 외교문제에 대하여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며, 또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믿는다”고 에둘러 이승만 정권을 감쌌다.

반면 일본에 대해선 엄정한 자세를 유지했다. 전후 복구 과정에서 일본이 원조에는 소극적이면서 중공(중국)과 무역을 꾀하려는 이중적 태도에 대해 죽산은 “우리는 일본이 자유진영의 굳은 일원이 되기를 심원(心願)한다. 다만 하고 싶은 일은 자아를 깊이 반성함으로써 자중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정부에는 “다만 우리 전 국민이, 그리고 미국을 위시한 모든 자유진영 제국이 한·일 국교가 조정되기를 바라고 있는 일이니만큼 하루라도 속히 합의와 타협이 성립되기를 기대할 뿐이다”라며 일본과 관계 개선에 나설 것을 채근하기도 했다.

한국의 각계 오피니언 리더들은 경제와 대북 정책의 성공 여부가 일본과 관계 개선에 달려 있다고 지적한다. 윤평중 교수는 “조선의 독립과 대한민국 건국에 헌신했던 진보 정치 지도자들은 일제강점기에 고초를 겪으며 누구보다 원한이 깊었을 테지만 일본을 대할 때 감정을 누르고 이성과 실리로 접근했다”면서 “극일의 첩경은 반일도 아니고, 친일도 아닌 용일이란 것을 알았던 것”이라고 했다.

지난 4월 15일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세토포럼 주관으로 열린 ‘한·일 관계 진단 전문가 긴급좌담회’에서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한·일 관계는 국교정상화 이후 많은 갈등 속에서도 늘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해 왔고, 한·일 관계가 좋았을 때 우리 경제도 좋았다”며 민간 차원의 협력 강화를 촉구했다. 이날 토론에 참석한 오코노기 마사오 일본 게이오대 명예교수는 “한·일 양국은 1965년 국교정상화 이전 상태로 복귀할 수 없고, 사법절차를 부정할 수도 없다”면서 “청구권 협정과 무관하지 않은 새로운 한·일 관계의 틀이 제시돼야 한다”고 말했다.

7인에 이어 이제 문재인 대통령의 차례가 왔다. 잔뜩 엉킨 실타래에도 실마리는 있는 법이다. 마침 일본은 새로운 시대(레이와·令和)가 시작됐다. 한국적 진보의 적통을 이어받은 문 대통령은 여덟 번째 페이지를 무엇으로 채울까.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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