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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16)] 위화도회군 세력, 권력 앞에서 분열하다 

혁명동지 정몽주 저버린 이성계의 눈물 

윤이·이초 사건 이후 결집한 反이성계파를 심덕부 사건으로 무력화
이성계파는 사헌부 내세워 공양왕 등 반대파 견제 뚫고 군권 완전 장악


▎이성계는 정적을 제거하는데 우유부단한 면모를 보였지만 마지막 순간엔 권력을 택했다. 사진은 이성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 사진 : SBS
1390년 5월 윤이·이초사건이 터졌다. 공양왕이 저항하고 정몽주의 입장에 변화가 생기면서 이성계파의 공세가 둔화됐다.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성계파 내 강경파는 불안감을 느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하면, 윤이·이초사건은 이성계파 중 강경파가 교착 국면을 타개하려고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성계파가 군권을 장악하는 단계적 조치로 생각된다. 이 사건을 통해 주로 무장들이 제거됐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이성계파에 속한 무장들까지 포함됐다.

위화도회군 이후 발생한 대부분의 대형 정치사건에는 공작의 냄새가 짙게 느껴진다. 정도전이 그 배후라는 의혹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성균사예 유백순은 종친 왕담에게 “지금 정도전 등이 나라의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려 하니, 혹시 전일의 난 같은 것이 있다면 우리들이 그 화를 입을까 두렵다”고 말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7월) ‘전일의 난’이란 의종대의 무신 난을 뜻한다. 정도전이 무신 이성계를 등에 업고 문신세족들을 대거 살해할까 걱정한 것이다. 태종 이방원에 따르면, 정도전은 이 무렵 “부왕(이성계)의 은혜에 감격하여 힘을 다했다”고 한다.([태종실록] 3년 6월 5일)

이성계파 대간은 잇달아 상소를 올려 윤이·이초사건 관련자에 대한 국문을 주장했다. 그러나 공양왕은 이에 일체 반응하지 않고, 침묵으로 버텼다. 대부분은 사건의 진상에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5월 6일(무술) 밤 사건 관련자인 김종연이 도망치자 갑자기 사실이 됐다. 김종연과 친한 지용기(池湧奇)가 “공의 이름이 윤이와 이초의 글 속에 있으니 위태할 것”이라고 알렸다고 한다. 대규모의 옥사가 발생했다.

먼저 우현보·권중화·경보·장하·홍인계·윤유린이 순군옥에 갇혔다. 옥관이 윤유린을 혹독하게 국문했다. 윤유린의 자백으로 최공철·최칠석·조언·조경·공의·한성·김충·안주·곽선·정단봉·박의룡이 2차로 투옥됐다.([이색전]) 이들은 명단에는 없었던 자들로서 모두 무장이었다. 사건이 확대된 것이다. 이미 김저사건 등에 연루돼 유배 중인 이색·이림·우인열·이인민·정지·이숭인·권근·이종학·이귀생은 청주옥(淸州獄)에 모아 가뒀다.([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 5월)

민심동요 불러온 청주옥의 물난리


▎천인상응론을 담고 있는 태종실록.
윤이는 윤유린의 사촌동생이다. 그의 본명은 윤사강이고, 승려가 됐다가 뇌물을 받은 죄로 명나라에 도망쳐 들어가 윤이로 개명했다. 윤유린의 이름은 조반이 전한 사건 관련자 명단에 들어있다.

윤유린은 무장이다. 그는 공민왕대 사재시(司宰寺)의 종 3품관인 사재령(司宰令)이었다. 1359년(공민왕 8) 제1차 홍건적의 난 때 전공을 세워 기해격주홍적공신 2등에 책봉됐다. 우왕대에는 밀직부사, 동지밀직으로서 전라도도순문사에 임명돼 왜구 방어에 종사했다. 투옥된 윤유린은 화병에 걸려 밥을 먹지 못하고 투옥 3일 만에 죽었다.([이색전])

5월 25일에는 최공철에 이어 홍인계가 옥사했다. 모두 목을 베어 저자에 매달았다. 최공철과 홍인계도 무장이다. 두 사람은 알려진 무장 중 가장 중량급이다. 이들에게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문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더욱이 죄상이 명백히 규명되지 않았는데도 모반죄를 적용해 목을 베어 저자에 매달았다. 일종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무력시위로 보인다. 하지만 이력으로만 보면 두 장군은 오히려 이성계파에 가까웠다.

최공철은 윤유린과 같이 기해격주홍적공신 2등이다. 1370년(공민왕 19) 지용수, 이성계가 지휘하는 요동의 동녕부 공벌 때 비장으로 복무했다. 우왕대에는 왜구 방어에 종사했고, 1376년(우왕 2) 최영 장군의 홍산대첩 때 활약했다. 1388년 요동정벌 때는 좌군도통사 조민수 휘하의 조전원수로 종군했으며 위화도회군에 참여해 회군공신이 됐다. 윤이·이초사건 때는 충주등처병마절제사로 재직 중이었다. 홍인계는 1365년(공민왕 14) 신돈이 최영 등 무장세력을 제거할 때 유배됐다. 동녕부 공벌 때는 지용수의 비장으로서 최공철과 함께 종군했다. 1380년 이성계가 거둔 역사적인 황산대첩 때 함께 참전했다. 1388년 요동정벌 때는 이성(泥城) 원수로서 요동경계에 먼저 진공하기도 했다.

한편, 청주옥에 집결시킨 반이성계파 문신들을 국문하기 위해 문하평리 윤호 등이 파견됐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 키를 넘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져 청주 성문이 무너지고 관사, 민가를 모두 휩쓸어갔다. “한창 여러 죄수를 국문하는데,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많이 내려 앞 냇물이 갑자기 범람하여 성의 남문을 부수고 바로 북문에 부딪쳤다. 성 안의 물 깊이가 한 길이 넘어서 관사와 민가를 거의 모두 떠내려 보냈으며 옥관(獄官)은 허둥지둥 나무를 휘어잡고 올라가서 죽음을 면하였다. 노인들이, ‘고을이 생긴 이후로 수재가 이같이 심한 적은 없었다’ 하였다.”

자연재해를 기화로 이색 등 반이성계파에 대한 민심의 동정이 표출됐다. 권근이 쓴 이색의 행장을 보자. “경오년 4월에는 함창으로 내쫓겼으며 5월에는 이초(彝初)를 명나라에 파견했다는 모함을 입어서, 공 등 수십 명이 청주로 잡혀갔는데 국문이 너무 준엄하여 일이 어찌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공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마땅히 의리와 운명에 순응할 뿐이다’라며 그 처신함이 태연하였다. 그 수일 후 새벽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대낮이 되기 전에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솟구쳐 성문을 부수고 넘쳐 들어왔다. 집들이 함몰되었고, 문사관(問事官)도 물에 빠져 떠내려가다 나무를 붙잡아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이 사실을 나라에 알리니 곧 석방시키고 불문에 붙였다. 이 고을이 생긴 후 이같이 극심한 수재가 없었으므로, 모두 공(公)의 충성에 감동되어서 그랬으리라고 하였다.”

정몽주, 이성계의 정적으로 돌아서다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석비가 세워진 개성의 표충각.
자연현상에 대한 인간주의적 해석은 ‘하늘이 자연현상을 통해 자신의 뜻을 표현한다’고 보는 이른바 재이론(災異論)이다. 재이론은 천인상응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원시부족의 샤머니즘에 널리 존재한다. 하늘과 인간이 서로 통하므로, 인간세계의 일에 하늘이 반응한다는 것이다. 춘추시대에 뿌리 내린 이런 해석은 한나라 초기의 동중서에 의해 정교하게 가다듬어졌다. 유교는 이를 군주권을 제한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하지만 태종은 “이것은 대개 윤이와 이초의 일로서, 고황제(高皇帝, 주원장)께서도 말씀한 바이고, 본국에서도 떠들썩하였던 일이니, 어찌 거짓이 있겠는가? 또 풍수의 재변은 어느 시대나 없는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반드시 이색의 일에 감동된 것이겠는가?”([태종실록] 11년 6월 29일)라고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윤이·이초사건은 조작된 것이 아니며, 자연재해는 단지 자연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권근은 청주옥 사건이 조작된 것이고, 자신은 무죄라고 확신했다. 물이 넘치자 권근은 “홀로 꼿꼿이 앉아서 신색(神色)이 자약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약 죄가 있으면 마땅히 천벌을 받을 것이고, 만약 죄가 없으면 하늘이 어찌 나를 물에 빠져 죽게 하겠느냐?’라고 하였다”([태종실록] 9년 2월 14일)

한편 홍수를 통해 나타난 민심을 읽은 공양왕은 이조판서 조온을 청주에 보내 죄수를 석방하고, 이색 등을 안치시켰다. 서울의 죄수 150명도 석방했다. 이성계파도 침묵을 지켰다. 자신들의 처사가 너무 가혹해 인심을 잃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6월에는 황제의 생일을 경하하기 위한 명목으로 정당문학 정도전이 중국에 파견됐다. 실질적인 목적은 “윤이의 글 속에 있는 사람들을 힐문하고 와서 보고하라”는 중국 정부의 요청에 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중국 황제가 직접 고려에 관원을 파견해 심문하고, 공양왕이 직접 남경에 가서 황제에게 사태를 설명할 것을 요청했다.

좌사의 김진양은 “윤이와 이초의 일은 세 살 난 어린아이라도 조반의 기만인 줄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조치가 위장이라는 것이다. 정몽주도 사건 관련자에 대한 처벌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양왕에게 조상 4대를 추봉(追封)하면서 “이색, 권근 등을 사면하는 큰 은혜를 내리소서”라고 건의했다.

이에 따라 7월에 대사면령이 내려졌다. 정몽주가 이성계파 내 강경파의 입장에 공식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8월 들어 사헌부와 형조는 윤이·이초사건 관련자의 처벌을 재차 요구했다. 정몽주는 이에 대해 “윤이·이초의 무리는 죄가 명백하지 않으며, 또 사면을 받았으니 다시 논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죄가 명백하지 않다”는 것은 반이성계파의 핵심적인 견해였다. 즉, 조작된 사건으로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후 정몽주는 시종일관 이 정치적 견해를 견지했다. 이제 이성계파와 정몽주의 싸움이 시작됐다. 위화도회군 이후 제5차 권력투쟁이었다.

윤귀택의 고변과 심덕부의 축출


▎쓰시마정벌 승리 보고 재연. 고려 말 무장 박위도 쓰시마의 왜구를 소탕했다.
1390년 9월, 이성계파는 공전과 사전의 문서를 저잣거리에서 불살랐다. 개성의 중심도로에 토지문서를 쌓아놓고 거대한 불을 피운 것은 일종의 시위였다. 위화도회군 이후 진행돼 온 사태를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분명히 알리는 불꽃이었다. 이성계파에게는 돌아갈 퇴로를 끊는 결의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전제개혁은 위화도회군 이후 최대의 개혁이자 이성계파와 반이성계파가 가장 치열하게 대립한 화두였기 때문이다. 공양왕도 쇼크를 받았다. “불길이 며칠 동안이나 꺼지지 않으니, 왕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조종의 사전법이 과인의 대에 이르러 갑자기 개혁되니 애석한 일이다’하였다.”([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 9월)

그러나 정몽주가 입장을 바꾸면서 정치투쟁은 소강국면을 벗어나지 못했다. 윤이·이초사건을 통해 반대파와 무장들을 대거 제거하려던 이성계파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11월에 이성계는 글을 올려 사직했다. 공양왕의 결단을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공양왕은 눈물을 흘리며 사직을 불허했다. 당시는 즉위 이후 공양왕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낙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공양왕은 한편으로 희망을 느끼면서도 불안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성계도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시했다. 이성계는 왜 운 것일까? 이후 사태의 전개를 보면, 마지막 기로에 서서 이성계도 최종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더욱이 마지막 상대는 젊은 시절 이래 깊은 교분을 나누며 혁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같은 길을 걸어 온 정몽주였다. 그 역시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11월이 가기 전 공양왕은 우현보·이색·권중화·경보의 죄를 사면하고 편의에 따라 거처하게 했다. 우현보와 이색은 김저사건 이래 이성계파의 핵심 타깃이었다. 즉, 반이성계파의 공세를 최종적으로 무효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7월 대사면에 의해 시작된 국면전환을 확고하게 굳히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심덕부 사건이 발생했다. 11월 4일(임진) 서경천호(西京千戶) 윤귀택은 이성계에게 직접 심덕부의 음모를 고변했다. 그 자신이 음모의 참가자였던 윤귀택은 도망친 김종연이 심덕부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밀고했다. 원래 5월 6일 도망친 김종연은 5월 13일 이후 봉주의 산속에서 체포돼 순군옥에 갇혔다. 그런데 그는 변소 구멍을 통해 탈출했다. 그는 추격을 피해 평양에 이르러 전 판사 권충의 집에 숨었다. 권충의 아들 진사 권격(權格)과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김종연전])

윤귀택이 고변한 음모자 명단에는 심덕부를 비롯해 삼사지용기, 전판자혜부사 정희계, 문하평리 박위, 나주도절제사 이무, 전주도절제사 진을서, 강릉도절제사 이옥 및 진원서 등이 포함돼 있었다. 진을서는 조반이 보고한 명단에 이미 들어있었다. 조언, 곽선은 심덕부의 휘하 진무로서 윤유린이 이미 지목한 자들이다. 그러나 지용기·정희계·박위·윤사덕·이빈·이무·이옥·진원서·이중화 그리고 심덕부의 진무인 조유·김조부·위충·장익은 새롭게 추가된 인물이다. 윤이·이초사건은 윤유린의 자백을 통해 한 번 확대되고, 윤귀택의 고변을 통해 다시 확대됐다.

이성계와 정몽주 사이에서 줄타기한 무장들


▎국립진주박물관이 소장한 태조 이성계가 내린 개국공신교서. /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심덕부·지용기·박위는 공양왕을 즉위시킨 이른바 9공신의 일원이었다. 1389년 11월 김저사건 이후 9공신 중 이미 정몽주가 떨어져 나가고, 심덕부 사건을 계기로 다시 3인이 제거될 상황에 놓인 것이다. 명시적이지 않지만 설장수도 경계선에 놓여 있었다. 이들을 제외하면 성석린·조준·정도전만 남는다. 사실 역성혁명에 찬성한 것은 이들 뿐이었다.

윤귀택의 고변을 들은 이성계는 심덕부에게 직접 이를 전했다. 경악한 심덕부는 조카인 조유를 옥에 가두었다. 윤유린에 따르면, 그는 윤귀택과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종연의 아내와 종, 족인 박천상·박가흥을 순군옥에 가두고 국문했다. 종의 자백에 따르면, 김종연이 상복으로 변장하고 박가흥의 집에 와서 “윤귀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른다면 일은 성취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심덕부(1328~1401)는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아버지이다. 이성계보다 7살 위로서, 영해부 청부현(靑鳧縣, 경북 청송) 사람이다. 이색의 외가인 영덕과 가깝다. 그는 충숙왕대에 음서로 관직에 진출해 우왕대 대왜구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다. 1380(우왕 6) 진포대첩 때 나세, 최무선과 함께 왜구의 전선 500척을 불살랐다. 1385년(우왕 11), 전선 150척을 타고 동북면에 침입한 왜구의 대군과 싸울 때 모든 장군이 달아났지만, 심덕부는 홀로 적진에 돌진하다 창에 맞아 낙마했다. 휘하의 유가랑합(劉訶郞哈)이 구하지 않았다면 전사했을 것이다.([심덕부전]) 심덕부가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맹장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388년 요동정벌 때 심덕부는 서경도원수로 종군했다가 이성계를 따라 회군했다. 1389년에는 9공신의 일원으로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심덕부는 이성계보다 연장자였고, 왜구전에서 상당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회군과 공양왕 옹립에서는 이성계의 충실한 협력자였다. 나이와 무공, 경륜 면에서 그는 친이성계 무장 가운데 가장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경계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1390년 3월부터 미세하지만 심덕부의 입장에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공양왕은 장단에 가서 전함을 살펴보려고 했다. 무비를 검열함으로써 왕의 위엄을 과시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대간이 농사에 대한 피해와 접대 비용을 들어 반대했다. 공양왕이 “사람을 심덕부에게 보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묻자 “임금의 행동거지를 대간이 중지시킬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이는 이성계파의 입장에 반했다. 심덕부의 명망을 이용해 대간의 반대를 돌파하려는 공양왕의 전략은 적중했다. 이에 공양왕은 “다시 심덕부에게 교서를 내려 회군한 공을 녹권에 올리고 토지를 하사하였다.”([심덕부전])

또한 얼마 후 심덕부는 정적 처벌에 대한 이성계의 우유부단함을 걱정하는 윤소종의 말을 공양왕에게 전했다. 이성계가 구출에 나섰지만, 공양왕은 이를 기화로 윤소종을 추방했다.([고려사] 공양왕 3년) 윤소종은 정부 내 명분 논쟁에서 이성계파의 강력한 대변자였다. 이성계파는 언론전의 핵심 전력을 잃었다. 공양왕이 저항에 나서고 정몽주의 입장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즈음에 심덕부도 조심스럽게 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성계의 동맹들은 정몽주의 입장을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심덕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정몽주가 이성계파에 대항할 수 있는 무력으로 가장 큰 기대를 건 것은 박위(朴威)였다. 박위는 원래 위화도회군과 공양왕 옹립에도 참여해 친이성계 정치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그 역시 배반을 꿈꾸고 있었다. 조선 건국 뒤인 1394년(태조 3) 이성계의 회고를 보자.

“박위가 나에게 모반하려는 마음이 있음은 오늘날 시작된 것은 아니다. 지난 경오년(1390) 공양왕이 한양으로 옮겨 갔을 적에 정몽주의 말을 곡청(曲聽)하고는 나에게 모반하려는 마음이 있었다.”([태조실록] 3년 3월 3일) 박위는 1389년(창왕 원년) 제1차 쓰시마정벌을 지휘, 고려말 왜구 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한 명장이다. 정몽주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362년(공민왕 11) 2월 무렵이었다. 그때 공민왕은 제2차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에 피신했다가 다시 상주로 올라와 머물렀다. 당시 왕을 시종하던 26세의 정몽주는 객사에서 박위를 처음 만났다. 그 뒤 1375년(우왕 2) 정몽주가 언양(彦陽, 울산)에 유배 중일 때, 박위는 김해부사가 되어 왜구를 격퇴하고 김해산성을 수리해 방비를 강화했다.([金海山城記]) 정몽주는 그의 애민과 실무 능력(吏才)을 높이 평가했다. 이런 인연으로 박위는 윤이·이초사건이 한창 진행되는 중 정몽주에게 포섭된 것이다.

배반의 싹 자른 이성계의 정보력


▎정도전은 중국으로 건너가 윤이·이초 사건을 수습했다.
지용기는 공민왕대 문관으로서 시작했으나, 우왕대에는 주로 무관으로서 왜구전에 종군해 다수의 전공을 세웠다. 그는 전라도도순문사로서 응령역(應嶺驛, 전북 남원)에서 왜구와 전쟁하다가 화살을 맞은 적도 있다. 또한 1380년(우왕6) 진포에 침입한 왜구가 배를 잃고 남도를 겁략할 때, 그 휘하인 배검이 사신을 가장해 적진에 들어가 적황을 정탐한 적이 있다. 1388년 요동정벌 때는 안주도상원수로서 우군도통사 이성계 휘하로 출전했다. 또한 1389년 공양왕을 옹립하는 9공신의 일원으로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고 중흥공신의 녹권을 받았으며 충의군에 봉해졌다. 그는 본래 김종연과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윤이·이초의 명단에 김종연이 포함된 것을 비밀리에 알려 도망치게 했다.

지용기의 행적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윤귀택의 고변에 지용기의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왕익부 사건을 보면 지용기는 상당한 야심가였던 듯하다. 위화도회군 시 그는 “친왕(親王)의 자손이 있다”고 말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5월) 그 자손이란 충렬왕의 서자로서 정읍에 숨어살던 왕익부(王益富)다. 왕익부는 지용기 아내의 재종형제였는데, 지용기에게 자신이 충선왕의 서증손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지용기는 위화도회군 때 왕익부를 옹립할 뜻도 가졌던 것이다. 간관 진의귀의 논핵을 보자.

진실 가린 윤유린과 김종연의 의문사

“지용기는 왕씨의 서얼을 몰래 집안에 숨겨두고 애지중지 부양하며 높이 받들었습니다. 중흥의 초기에 조금씩 도리에 벗어난 발언을 하더니, 전하께서 즉위한 뒤에도 자수하지 않았습니다. 때를 보아 가만히 그 자를 임금으로 추대해 반역의 음모를 실행에 옮길지 어찌 알겠습니까?”([지용기전]) 왕익부는 1391년 공양왕의 동생 정양군 왕우의 고발로 체포돼 자손 13명과 함께 교살됐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2월)

지용기는 천태종 승려로서 공민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신조(神照)와도 교분이 깊었다. 신조는 우왕의 측근이었고, 공양왕에게도 총애를 받았다. 또한 1377년(우왕 3) 이성계의 군사 참모로도 활동했고, 1388년 요동정벌 시 위화도회군의 모책에도 참여했다. 윤귀택의 고변으로 지용기가 위기에 처하자 신조는 공양왕에게 “전하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한 공은 오로지 용기에게 있다”고 옹호했다. 그 덕분에 지용기는 처형을 면하고 유배에 그쳤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2월) 지용기가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가 왕권에 매우 근접한 최고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위의 사례를 보면 정몽주는 비밀리 무장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이성계파는 동맹 내 무장들의 이런 미세한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위에 대한 이성계의 회고를 통해 짐작컨대, 이성계파는 상당히 정확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다. 11월 심덕부 사건은 이런 배반의 싹을 사전에 자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성계로부터 윤귀택의 고변을 직접 들은 심덕부는 진무 조유를 필두로 관련자를 체포, 투옥해 선제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공양왕에게 “신은 덕부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나라를 받들었으며 본래 시기와 의심이 없었습니다. 조유를 신문하지 말아서 우리 두 신하로 하여금 시종토록 정의를 보전하게 하소서”라고 간청했다. 심덕부와의 군사동맹을 유지하고 싶다는 의견이었다. 공양왕이 조유를 석방하려고 하자, 심덕부는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조유가 진술한 말이 신에게 관련되었으니, 지금 만약 신문하지 않는다면 신이 어찌 변명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스스로 순군옥에 나가 대죄했다. 그러나 공양왕은 끝내 조유를 석방시켰다.

그러나 사헌부는 조유와 윤귀택의 대질을 요청했다. 국문을 담당한 박위는 윤귀택부터 고문하고자 했다. 그러자 이성계파인 집의 유정현이 “고발자를 먼저 국문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고 항의했다. 조유는 윤귀택의 고변 명단에 포함된 인물 중 유일하게 처형됐다. 심덕부를 비롯한 나머지 관련자는 모두 귀양에 그쳤다. 지용기는 귀양지에서 죽었지만, 심덕부와 박위는 조선왕조에도 참여했다. 정희계는 개국 1등공신, 윤사덕과 이빈은 개국 원종공신이다.

1390년 12월, 마침내 김종연이 체포됐다. 그 전에 심덕부가 구속시킨 김종연의 처, 종, 그리고 친족인 박찬상, 박가흥에 대한 심문이 이뤄졌다. 그들의 자백에 의해 김종연을 숨겨준 권충과 권격이 체포됐다. 권격은 김종연의 행적과 모의를 자세히 진술했다.

그에 따르면 공양왕의 동생 왕우를 비롯해 지용기, 박위 등 거물급 무장, 그리고 정희계·윤사덕·진을서·이빈·이옥 등 중견급 무장들, 서경의 광범위한 중·하급 무관들이 모의에 참여했다. 김종연의 거사 목적은 이성계·정몽주·정도전·설장수·조준·성석린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성계·정몽주·정도전이 핵심 타깃이었다. 그러나 김종연은 “내가 차마 죽지 못하고 처지가 박복해 이 지경에 이르렀을 뿐이지, 진실로 그런 일을 모의한 적이 없다”고 자백했다. 또한 그의 모의를 권격과 이천용이 이미 실토했다고 하자, 김종연은 “권격이나 이천용과 공모한들 무슨 일을 이룰 수 있었겠소? 내가 모의한 일이 없음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을 거요”라고 답했다.

이성계파의 군권 장악

김종연은 투옥된 이튿날 옥사했다. 임순례가 김종연을 압송하면서 먹을 것도 주지 않은 채 하루에 300리를 달린 결과 끝내 피곤과 추위에 지쳐 굶어 죽었다. 임순례는 죄를 추궁 받긴 했으나 처벌되지 않았다. 주요 증언자인 윤유린과 김종연이 우연히도 투옥 2~3일 내 사망했다. 이로써 진실은 영원히 알 수 없게 됐다. 한편 심덕부 사건을 고변한 윤귀택이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에 임명됐는데, 낭사(郞舍)는 여러 달 동안 임명장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김종연전])

윤이·이초사건은 김종연 사건, 심덕부 사건으로 연결되면서 수많은 사람이 연루됐다. 그 핵심 타깃은 이성계파에 협력한 고위급 무신까지 포함된 무장들이었다. 그러나 처형되거나 옥사한 인물 중 비중 있는 무장은 김종연·최공철·홍인계·윤유린 4인에 그쳤다. 하지만 윤이·이초사건을 계기로 이성계파는 무장들 중 잠재적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리고 심덕부 사건이 마무리되자 사후 조치로서, 사헌부는 “지금 서울과 지방의 군사(軍事)는 이미 영삼사(領三司) 이성계로 하여금 모두 통솔하게 하였으니, 여러 원수의 인장(印章)을 모두 회수하소서”라고 상소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 11월) 모든 무장들의 지휘권을 박탈해 이성계에게 집중시키려는 것이다. 1개월여 뒤, 공양왕 3년 1월에는 5군을 줄여 3군으로 하고, 도총제부(都總制府)에서 서울과 지방의 군무를 통솔하게 하고, 이성계를 도총제사로, 배극렴을 중군총제사로, 조준을 좌군총제사로, 정도전을 우군총제사로 삼았다. 이성계파가 군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11월 심덕부 사건의 와중에서 공양왕은 이성계를 영삼사 사로, 정몽주를 수문하시중으로, 지용기를 판삼사사로, 배극렴·설장수·조준을 문하찬성사로 삼았다. 정몽주를 정치의 중심에 놓는 인사였다. 배극렴과 조준은 확고한 이성계파였다. 하지만 지용기는 김종연을 비호하고 윤귀택의 음모자 명단에 포함됐다. 설장수는 정몽주에 우호적이었다. 심덕부 사건의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한 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헌부와 대간이 사건 관련자의 심문과 처벌을 집요하게 주장함으로써 공양왕의 시도는 무산됐다. 관련자들은 처벌됐고, 공양왕은 이성계를 문하시중에 임명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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