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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우리가 몰랐던 일본, 일본인(17)] ‘일본의 나폴레옹’ 꿈꿨던 에노모토 다케아키(제1부) 

구체제의 거점 홋카이도에서 메이지유신과 맞선 사람들 

아이누족과 함께 동아시아 최초 대통령중심제 공화국 체제 주도
신정부군에 밀리자 죽음 대신 항복 택함으로써 제2의 인생 시작


▎남북전쟁 영웅인 미국의 한 장교가 일본에서 사무라이의 포로가 되면서 그들의 신념에 동화된다는 내용을 그린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주연 톰 크루즈가 전투에서 앞장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다.
역사도 권력도 인생처럼 부침이 있다.

260여 년 전 세키가하라의 동·서군 격돌에서 패해 모욕적 처분을 받았던 서군의 주력 사쓰마번·조슈번·도사번은 삿초동맹(薩長, 사쓰마와 조슈의 연합)을 맺은 뒤 천황을 앞세운다. 메이지유신의 화룡점정이었던 이 전쟁은 보신전쟁(戊辰戰爭, 1868~1869)이었고, 전쟁의 마지막은 하코다테 전투였다. 삿초동맹은 3세기에 걸친 치욕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도쿠가와가(家)를 멸문의 지경까지 몰아붙인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이시다 미쓰나리가 정권의 마지막 버팀목으로 활약했던 것처럼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1836~1908)는 도쿠가와가의 마지막 무대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번 승리는 서군의 것이었다. 에도 막부를 탄생시킨 세키가하라 전투와 다른 점은 전쟁으로 분열된 국론을 통합해 원한의 불씨를 최소화했다는 점이다. 승자는 패자를 통일 일본의 한 구성원으로 안아줬고, ‘나라 만들기’라는 큰 틀에서 한 길을 걸었다.

할리우드 영화는 관객의 흥미를 돋우고자 역사도 마구잡이로 각색을 일삼는다.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톰 크루즈가 연기했던 네이든 알그렌 대위의 모델은 영화처럼 인디언 학살에 앞장섰던 제7기병대 출신이 아니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인솔하는 막부군의 일원으로 보신전쟁에 참가했던 에도 막부의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일원인 쥘 브뤼네였다. 영화에서처럼 그가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고결한 정신에 매료돼 전쟁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브뤼네는 하코다테에서 에도 막부의 해군 부총재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총재로 하는 이른바 에조공화국(蝦夷共和国)의 창설을 지원했다. 브뤼네는 육군 봉행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를 보좌하고 하코다테의 방위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며 4개의 연대를 지휘했다.

그들은 1869년 6월 고료카쿠(五稜郭)에서 농성(籠城)한다. 하코다테 정권군(軍)을 메이지 신정부군이 공격해 고료카쿠는 함락된다. 총재 에노모토 다케아키 일행은 신정부군에 투항한다. 브뤼네는 함락 전 하코다테 항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배로 피신한 뒤 귀국해 재판을 받는다. 이어 보불전쟁 발발로 복권돼 나중에 프랑스 육군 참모총장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 프랑스인이 참전했던 보신전쟁은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2년[1868년~1869년]) 왕정복고를 거쳐서 메이지 정부를 수립한 사쓰마번·조슈번·도사번 등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군과 구막부 인사 및 오우에쓰 열번 동맹(奥羽越列藩同盟)이 싸운 일본의 내전이다.

메이지 신정부는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을 통치하는 정부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하코다테에서 이뤄졌고, 그곳에는 에조공화국이라는 엄연한 권력체제가 존재했다. 정치체제는 공화정이었으며 대통령중심제였다. 수도는 하코다테이며 구성 인종은 일본인과 아이누인 그리고 공용어는 일본어와 아이누어였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본토에서 밀려난 세력은 섬으로 거점을 옮긴 사례가 많다. 몽골의 내습으로 강화도와 진도로 저항의 역사를 이어나간 고려의 삼별초도 그렇고, 명나라가 무너지자 해양세력을 규합해 타이완으로 넘어간 정성공(鄭成功, 1624~1662)도 그렇다. 가까운 역사에는 공산당에 패해 타이완 섬으로 이주한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정권도 있었다.

일본도 예외 없이 메이지 시대가 시작되자 도쿠가와 정권의 마지막 저항 세력은 홋카이도까지 이동해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1911년 중국에서 청나라를 멸망시킨 신해혁명으로 탄생한 중화민국보다 40여 년 앞서 탄생한 동아시아에서 생긴 최초의 공화국이며 가장 최근에 일본 열도에 존재한 2국가 체제였다.

폭넓은 세계관을 가졌던 신지식인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열었던 에조공화국의 국기.
1868년 10월 20일 새벽 구막부군 3000명이 탄 군함 7척이 하코다테 북방 우치우라 만(灣)을 바라보는 어항 와시노키 해변에 도착했다. 이미 30㎝가량의 눈이 쌓여 있는데다 해상에서는 눈 폭풍이 후려갈기는 혹한의 아침이었다.

메이지 시대가 된 1868년 10월, 보신전쟁의 동군은 아이즈(会津) 전쟁에 패하면서 센다이에서 여러 번의 동맹 붕괴를 봤다. 패잔병들은 ‘도쿠가와 탈영병’으로 센다이 남부 마쓰시마 항에 집결한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해군력에 희망을 걸고 이시노마키에 집결했다. 이곳에서 사후 대책을 짠 이들은 해외 유학 경험을 가진 에노모토 등 도쿠가와 엘리트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홋카이도로 건너가기로 했다.

패잔병들은 홋카이도의 하코다테(函館)까지 유입되고, 이들은 현지의 아이누족과 연대해 에조공화국을 수립한다. 제한적이긴 했지만 투표를 통해 근소한 차이로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는데, 신정부군은 결국 이들을 격파함으로써 일본의 실질적 권력 통합을 이끌어낸다.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존왕파(尊王派)가 승리함으로써 전후에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의 번사들이 주체가 돼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주도했다. 또 일본 제국이 중앙집권국가, 나아가 제국주의의 패권국가가 돼 대한제국과 청나라를 비롯한 제국(諸國)이 존재하는 아시아 대륙을 침범해 나가는 전기를 마련했다.

운명을 바꾼 가쓰 가이슈와의 만남


▎에조공화국 총재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
일본이 진정한 통일국가를 이뤄 제국주의의 길로 나서기까지 지난(至難)했던 전쟁의 종착역 즈음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이 에노모토 다케아키다. 그는 어려서부터 양질의 교육을 받은 덕분에 폭넓은 세계관을 갖고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에 최선을 다했다. 늘 불완전했지만 완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에노모토는 구막부군과 신정부군이 싸운 보신전쟁에서 구막부 해군 부총재로서 끝까지 신정부에 저항해 싸운 무인이다. 구막부군의 군함 등 8척의 함대를 이끌고 시나가와 바다에서 탈주한 에노모토는 도호쿠를 경유해 하코다테에 도착했다. 신센구미 부장인 히조가타 도시죠(土方歳三, 1835~1869)와 고료카쿠을 점거하고 ‘에조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메이지 2년(1869) 5월에 신정부군의 총공격을 받아 에노모토 등은 항복(히조카타 도시죠는 전사)함으로써 싸움은 끝났다. 에노모토 등 구막부군의 간부는 도쿄에 보내져 다쓰노 구치(현 도쿄 마루노우치)의 감옥에 수감됐다.

여기까지는 일본사 교과서에 수록돼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후 에노모토의 반생(半生)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그는 2년 반의 수감 생활 끝에 메이지 5년(1822) 1월 특사로 출옥했다. 이후 에노모토는 주러 특명전권대사로서 일본과 러시아의 국경선을 확정 짓는, 상트페테르부르크조약이라고도 불리는 ‘가라후토 치시마 교환조약’(1875년)의 체결을 주도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했다. 게다가 주청(駐淸) 특명 전권대사를 거쳤고, 제1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체신 대신, 구로다 키요타카 내각의 문부대신 등을 맡아 신생 일본의 ‘나라 만들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럼에도 메이지 이후 에노모토의 공적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일본의 무사도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미덕을 저버린 전향자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도쿠가와 막부의 해군 부총재이자 보신전쟁에서 최후까지 구막부군의 리더로서 신정부에 저항한 인물이 삿쵸를 중심으로 한 신정부에 꼬리를 흔들며 요직에 올랐다는 이미지가 에노모토에 대한 평가를 절하했다.

일반인들 사이에 이 같은 평가를 부채질한 장본인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였다. 그는 저서인 [야세가만의 설(痩我慢の説)]에서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가쓰 가이슈의 ‘변절’을 강하게 비판했다. “두 사람 모두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녹을 얻어 요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 후에는 원수였던 신정부를 섬기고 에노모토 등은 입신출세의 길을 걷고 있다. 무사의 윗자리에 둘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가쓰 가이슈는 양보와 타협으로 일본을 대전란의 위기에서 구했다. 패장으로 치욕적 죽음의 위기에 몰렸음에도 새로운 나라 만들기에 힘을 보탠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유연성과 신정부의 일원으로 포용한 신정부의 정치력은 어쩐지 부럽다.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덴포 7년(1836) 에도 시타야(현 다이토구) 오카마치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가마지로(釜次郎)다. 아버지는 빈고노구니 하코다무라 태생의 향사(鄕士)로 젊었을 때는 하코다 료스케라 자칭했다. 17세 때 에도로 나온 료스케는 천문학(정확히는 달력 작성)에 뜻을 둔다.

그리고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의 제자가 된다. 다다타카 자신도 당시에는 “일본의 달력을 바르게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강하게 가졌다고 한다. 분카 6년부터 분카 11년(1809~14)에 걸쳐 상세한 일본 지도를 작성하고자 실시한 제7, 8차 측량에서 하코다 료스케는 다다타카의 수제자로서 규슈 전역을 함께 돌며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図)] 작성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그 후 큰돈을 털어 오카치마치의 에노모토가의 주식을 사고 에노모토 엔베타케노리(榎本円兵衛武規)라고 자칭했다. 엔베는 니시노마루에서 감찰역을 담당하는 무사로 11대 쇼군 이에나리(家斉)의 측근이 돼 쇼군가의 업무를 맡았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가마지로도 ‘강렬한 막신(幕臣) 의식’과 ‘과학자로서의 자질’을 겸비한 인물로 성장했다.

가마지로는 15세 때 쇼헤이자카학문소(昌平坂学問所, 간다 유시마 소재 막부 직할 학문소)에 입학한다. 성적은 최저인 ‘병(丙)’이었다. 수료 후 하코다테 봉행(奉行)인 호리 도시히로의 종자로 에조치의 하코다테(현 하코다테시)에 부임했다. 이것이 가마지로와 에조치의 첫 번째 관계였다.

도쿠가와 막부를 둘러싼 환경 급변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목숨을 살리는 데 일조한 [만국해율전서]. / 사진 : 최치현
그 후 21세 때 쇼헤이자카학문소에 재입학한 가마지로는 동료의 부친으로 대감찰역인 이자와 마사요시(伊澤政義)와의 연줄로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에 입학하게 된다. 나가사키 해군전습소는 안세이 2년(1855), 도쿠가와 막부가 해군 사관 양성을 위해 설립한 학교다. 가마지로는 2기생이었다.

여기서 가마지로는 가쓰 가이슈를 만난다. 네덜란드인 교사(카텐디케와 폼페)로부터 기관학이나 화학 등을 배운 가마지로는 점차 두각을 나타낸다. 안세이 5년(1858)에는 에도에 개설된 쓰키지 군함조련소의 교수가 됐다. 가마지로가 다케아키로 개명한 것은 이때다.

다케아키의 인생에 있어서 큰 전환기가 된 것은 네덜란드 유학이었다. 막부는 한때 미국에 군함 3척을 발주함과 동시에 에노모토 등 유학생을 파견하기로 했으나 남북전쟁이 격화되자 미국 측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이에 막부는 네덜란드에 군함 1척을 발주함과 동시에 에노모토 등 9명의 유학생과 수부(水夫), 조선 기술자를 네덜란드에 파견하기로 했다.

분큐 2년(1862) 6월 일행은 시나가와 앞바다에서 간닌마루(咸臨丸)로 출발했다.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선박으로 갈아탄 일행은 도중에 남대서양에 떠 있는 세인트헬레나에 기항(寄航)한다. 세인트헬레나 섬은 영웅 나폴레옹 1세가 실각 후 유폐된 섬이다. 에노모토 다케요시는 나폴레옹을 존경하고 있던 터라 이때 영웅의 무덤을 앞에 두고, ‘나도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해군 진흥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익히겠다고 다짐했다. 에노모토는 그때까지 쓰던 일기(渡蘭日記)도 이날을 계기로 중단했다.

네덜란드에서 에노모토는 나가사키 전습소 시대의 은사였던 카텐디케·퐁페와 재회한다. 여기서 에노모토 일행은 선박 운용술, 포술, 증기기관학, 화학, 국제법 등을 배웠다. 특히 프랑스 국제학자 올트랑이 쓴 [만국해율전서(萬国海律全書](바다의 국제 법규와 외교)와 외교에 대해서 열심히 배웠다. 그 열성에 감동 받은 네덜란드인 강사로부터 일본에 돌아올 때 선물로 네덜란드어 역(譯)의 이 책을 받는다. 훗날 이 책은 에노모토가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에노모토 일행 유학생이 네덜란드에 도착한 지 3년 4개월 후인 게이오 2년(1866) 7월에 전함 가이요마루(開陽丸)가 완성됐다. 같은 해 10월 에노모토 일행은 이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요코하마 항에 도착한 때가 케이오 3년(1867) 3월 26일의 일이었다.

에노모토가 네덜란드에 유학하고 있던 5년간, 도쿠가와 막부를 둘러싼 환경은 급변하고 있었다. 조슈번을 중심으로 존왕양이 운동은 과격화돼 막부와 조슈번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도사번 탈번(脫藩) 낭사인 사카모토 료마의 중개로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동맹을 맺었다. 사쓰마번과의 동맹으로 최신 군비를 갖추게 된 조슈번은 막부군의 제2차 조슈 정벌에서 승리했고, 그로 인해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제1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가 사망하고 15대 쇼군에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뒤를 잇는다. 에노모토가 귀국했을 때는 도쿠가와 막부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였다.

그리고 에노모토가 귀국한 지 반년 남짓 된 케이오 3년(1867) 10월 14일,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로부터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주상(奏上)됐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도쿠가와 막부의 폐절과 천황에 의한 신정부의 성립을 목표로 하는 삿쵸나 일부 귀족인 구케(公家, 이와쿠라 도모미 등)는 같은 해 12월 9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펴서 도쿠가와가(家)의 모든 영지를 조정에 반납하는 것과 관위(官位)의 반환을 명했다. 양측의 대립은 극에 달하게 됐다.

쇼군 요시노부의 이해할 수 없는 도주


▎보신전쟁의 말미를 좌우한 최강 장갑함 ‘코테쓰’.
게이오 4년(1868) 1월 2일, 막부의 군함 2척이 효고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던 사쓰마번의 군함을 포격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도 가이요마루를 기함으로 하는 함대를 이끌었고 오사카만 내에서 삿쵸 측의 군함과 교전 끝에 자침(自沈)시켰다. 이때 에노모토는 ‘적어도 해전에서는 삿쵸와 좋은 승부를 할 수 있다’고 느꼈다 한다.

그러나 구막부군에 믿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해 1월 6일 밤 오사카 성에 있던 쇼군 요시노부가 아군을 버리고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전함 가이요마루를 타고 에도로 도망쳐 돌아왔다. 이로 인해 구막부군은 전의를 잃고 철수한다.

1월 7일 오사카 성에 입성한 에노모토는 쇼군 부재를 확인한 뒤 성에 남겨진 무기와 비품 및 금 18만 냥을 실어 나르며 부상병들과 함께 후지산마루로 에도로 올라온다. 이때 찾아낸 자금이 후에 에노모토 함대의 군자금으로 쓰였다는 설이 있다.

어찌됐건 간에 쇼군 요시노부는 왜 부하를 내팽개치고 도망갔을까? 형세가 불리하다고 보고 일단 퇴각해 체제를 다시 세우려고 했다고 하는 시각이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모친이 아리스가와 노미야오리 히토노우의 딸로 천황가에 기댈 수 있었기에 관군과 싸우는 것을 주저했다는 등의 설도 있다. 어떻든 요시노부의 이런 행위를 보고 ‘이젠 도쿠가와의 세상은 끝났다’고 에노모토가 생각한들 이상하지 않았다.

에도로 돌아온 에노모토는 해군 부총재를 맡는다. 에노모토는 관군과의 철저한 항전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쇼군 요시노부는 공순(恭順)의 자세를 굽히지 않고 미토에서 근신하게 되고 에도성은 관군에 무혈개성(게이오 4년, 메이지 원년 4월 11일)됐다.

에노모토는 가이요마루를 비롯한 군함 4척과 운송선 4척의 함대를 편성해 시나가와 바다에서 북쪽으로 탈출했다. 구막부군의 막강 해군력을 동원한 것이다. 이때 에노모토는 ‘격문(檄文)’을 공표한 뒤 가쓰 가이슈에게 전달하며 신정부에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는 이전부터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진 도쿠가와 가신을 위해서 에조치(蝦夷地, 홋카이도) 개척에 대한 허가를 바라고 있었지만 허가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이제 싸울 수밖에 없다.” 이를 보면 에노모토는 이 시점에서 에조치 개척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함대는 보소 앞바다에서 폭풍우에 휩쓸렸고 간린마루와 미카호마루는 크게 손상됐다. 간린마루는 이즈의 시모다(下田)로 피난했고, 그 후 선체 수리를 위해 시미즈(淸水)항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때 신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30여 명이 살해됐고 그 시신은 바다에 던져졌다. 그 상황을 보다 못해 시신을 수습하고 극진하게 모신 것이 바로 시미즈의 협객 야마모토 지로쵸(山本次郎長)였다.

에노모토 부대는 일단 센다이(仙台)에 기항했다. 그러나 센다이번이 신정부에 공순의 뜻을 표명함에 따라 ‘오우에쓰 열번 동맹’은 이미 붕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구와나번의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타카, 구막부 육군 총재 오토리 게이스케, 신센구미의 부장 히지가타 도시조, 구막신이나 센다이번 탈번병 등을 더한 구막부군은 약 3000명의 대부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 막부가 센다이에 빌려줬던 3척이 가세하면서 모두 9척의 함대로 에조치로 향하게 됐다. 센다이를 떠날 때 에노모토는 시오가마(현 미야기현 시오가마시)에 있던 오쿠바(奥羽) 진수총독 앞으로 “구막신의 구제와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에조치를 개척하는 것이 목적이지 결코 조정에 화살을 들이대는 것은 아니다”는 취지의 서면을 보냈다.

10월 20일 에조치에 도착한 에노모토 함대는 하코다테의 북방 와시노키(鷲の木, 현 홋카이도 모리마치)에 상륙하자 2대로 나뉘어 하코다테를 향했다. 그리고 6일 후 신정부군을 몰아내고 하코다테 고료카쿠를 점거했다. 고료카쿠는 하코다테 개항 후 도쿠가와 막부가 개설한 하코다테 봉행소를 지키기 위한 성곽이었다.

게다가 신정부군에 귀순하고 있던 마쓰마에번을 공격해 마쓰마에·에사시를 점령했다. 이로써 에조치는 에노모토 등 구막부군에 의해 평정됐다. 하지만 그 대가도 컸다. 에사시 포대를 바다에서 포격하기 위해 파견한 전함 가이요마루가 악천후로 좌초해 침몰해 버렸다.

그 결과 에노모토 함대의 전력은 현저하게 약화됐다. 12월 15일 에조치를 평정한 구막부군은 사관 이상의 간부에 의한 투표로 수뇌부 인사를 결정했다. 여기에서 ‘에조공화국’이 세워졌다. 초대 총재로는 에노모토 다케요시가 선출됐다. 히지카타 도시조도 육군 봉행으로 선출됐다.

“이 책만은 정부군에 기증하고 싶다”

에조공화국에 대해서 영국이나 프랑스는 ‘불간섭’의 입장이었다. 또 미국도 국외 중립의 입장이었지만 12월 18일 돌연 신정부 지지를 표명했다. 미국은 구막부에서 계약금을 지불하고 납품이 연기된 장갑함 ‘코테쓰(甲鉄)’를 신정부에 인도한다. 주력인 가이요를 잃은 구막부군에 비해 최신예 장비를 갖춘 신정부군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졌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 2년(1869) 2월 신정부는 육군부대 약 8000명을 아오모리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3월 9일, 장갑함 코데쓰를 기함(旗艦)으로 한 8척의 신정부 함대가 시나가와 바다에서 아오모리를 향해서 출범했다. 이에 구막부군은 군함 가이텐(回天) 등 3척을 출동시켜 미야코만에 정박 중인 코데쓰를 기습했다. 이 작전에는 히지카타 도시조도 참여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기세가 오른 신정부군은 4월 9일 하코다테의 북서, 에사시쿠의 북쪽에 있는 오토베(현 홋카이도 호토베쵸)에 상륙했다. 4개 부대로 나뉘어 4개 루트에서 하코다테를 향해 진격한 신정부군의 기세에 눌린 구막부군은 한 발짝 물러서야 했다. 그리고 5월 11일 마침내 하코다테 시가도 신정부군에 제압되면서 에노모토 등 구막부군은 고료카쿠에 머물게 된다.

이때 히조카다 도시조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벤텐포대에 원군으로 참전하던 도중 잇폰기에서 적의 포탄을 받아 최후를 맞았다. 같은 달 12일, 신정부군 참모인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淸隆, 1840~1900)로부터의 항복 권고서가 에노모토에게 전달됐다. 하지만 에노모토는 이를 거부한다.

에노모토는 늘 애독하고 있던 [만국해율전서]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을 꺼내 “이 책은 향후 일본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귀중한 것이므로 한 줌의 재로 만들기는 아깝다. 정부군 참모에게 기증하고 싶다”는 내용의 서신을 첨부해 사자에게 전달했다. 에노모토의 서찰을 받고 감격한 구로다 참모는 답례로 술 5통을 고료카쿠에 보냈다. 이때부터 구로다 기요타카와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기묘한 우정이 시작됐다.

구막부군 입장에서 전황은 더욱 악화된다. 5월 15일에는 벤텐포대가 함락되고 다음 날에는 치요가다이(千代岱) 병영이 떨어져 나간 것을 알게 되자 에노모토는 그날 밤 자결을 결심한다. 하지만 근습(近習)이 이를 온몸으로 제지했다. 결국 에노모토 등 구막부군 간부는 다음 날 구로다 기요타카를 만나 항복했다.

죽음 대신 항복을 택한 에조공화국의 총재는 죽음으로 책임을 완결 짓는 사무라이와는 다르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가 극적으로 살아난 배경에는 사나이의 우정과 그의 실력이 있었다. 다음 편(6월호)에서는 거듭나게 되는 에노모토 제2의 인생에서의 활약상을 살펴보자.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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