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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38)] '명심보감' 편찬자로 알려진 노당(露堂) 추적 

“왕의 칼을 받는 것은 직언한 신하의 영광”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57세에 고려 국학교수로 대성전 개축하고 3품 이상 자제 가르쳐
60세 [명심보감] 편찬 등 안향과 함께 유학 진흥하고 문하시중 지내


▎남녀 대학생이 토요일을 맞아 대구 인흥서원을 둘러보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착한 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늘이 복으로 보답하고, 착하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늘이 재앙으로 갚느니라.”(子曰 爲善者는 天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는 天報之以禍니라) [공자가어(孔子家語)] 재액편(在厄編)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어]는 공자의 언행과 제자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이 구절은 동시에 [명심보감(明心寶監)] 맨 처음에 등장하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명심보감]은 ‘마음을 밝히는 보배로운 거울’이란 뜻이다. 중국 고전이나 명언에서 삶의 교훈이 될 만한 구절을 골라 엮은 책이다. 인용되는 인물은 광범위하다. 공자·맹자는 물론 장자·열자 등 제자백가, 태공 등 정치가, 당 태종 등 제왕, 심지어 도교의 신선까지 망라하는 수신서(修身書)다.

[명심보감]은 편찬된 이래 우리 선조들이 늘 곁에 두었던 ‘스테디셀러’였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중국과 베트남 등 동남아에서도 사랑을 받았다. 놀라운 것은 그 책을 편찬한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중국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바로 고려 충렬왕 시기 관료이자 학자였던 노당(露堂) 추적(秋適, 1246∼1371) 선생이다.

3월 23일 선생의 위패와 [명심보감] 목판이 보관된 대구 인흥서원(仁興書院)을 찾았다. 대구 달서구 대곡동 정부 대구지방합동청사를 지나 언덕을 넘으면 나타나는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있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 하얀 꽃이 줄을 지어 피었다. 겨울을 이긴 매화다. 천내천 다리를 건넜다. 대구시는 서원 진입로를 ‘명심보감로’로 이름 붙였다.

인흥서원 안으로 들어갔다. 경내는 건물에 가려서인지 아직 봄기운을 안은 파란 싹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햇빛이 잘 드는 동재 요산료(樂山寮) 앞뜰에 보랏빛 작약이 땅 위로 불쑥 새 순을 내밀었다.

인흥서원 편액이 걸린 강당 가운데 벽면에 지난해 음력 3월 올린 향사의 집사 분정(分定)지가 붙어 있었다. 초헌관·아헌관 등 술잔을 드린 헌관의 이름과 집례자의 이름이 차례로 적혀 있다. 그 위로 인흥서원 상량문을 새긴 판이 걸려 있다. 서원의 내력과 배향된 노당의 행적이 짧게 나와 있다. “…노당은 바로 고려조 유림의 종장이며 공맹(孔孟)의 도덕과 정주(程朱)의 글과 경학을 가지고 맨 처음 일국에 교화시켰다….”

불교가 국교이던 고려시대 신학문인 유학을 진흥시킨 노당은 어떤 인물일까. 그가 살았던 시기가 조선을 뛰어넘어 전하는 기록은 많지 않다. 정인지 등이 쓴 정사(正史)인 [고려사]에 짧게 생애가 언급돼 있다. 정확히는 [고려사] 권106 ‘열전’ 19편이다.

환관의 전횡에 맞서다 고초 겪어


▎드론으로 촬영한 하늘에서 내려다본 인흥서원. 맨 뒤에 사당 문현사와 장판각(오른쪽)이 보인다.
출판사 신서원이 펴낸 [고려사] ‘추적’ 부분 전체 역문은 이렇다.

“추적은 충렬왕 때 사람인데 성격이 활달하고 거침이 없었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 서기로 임명됐다가 직사관으로 선발됐으며,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좌사간이 됐다.


환관 황석량(黃石良)이 연줄을 얻어 세력을 쓰게 되었는데 그의 고향인 합덕(合德) 부곡을 승격시켜 현(縣)으로 만들었다. 추적이 그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더니 황석량이 석천보(石天補)·김광연(金光衍)과 더불어 기회를 잡아 왕에게 추적을 참소했다. 왕이 성을 내 즉시 그를 칼 씌워 순마소에 가두라 명하였다.

그를 호송하는 자가 추적에게 말하기를 ‘지름길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추적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무릇 죄가 있는 자는 모두 해당 관청으로 가는 법이요, 왕소(王所)에서 칼과 철쇄를 씌우는 법은 없다. 나는 응당 네거리로 지나가 나라 사람들이 이 모양을 보도록 해야 한다. 간관(諫官)으로서 칼을 쓰고 가는 것도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하필 아이나 여자들 본을 따 얼굴을 가리고 선비로서 체면을 버리겠는가’라고 했다. 그는 관직이 민부상서 예문관제학에 이르렀다.

그는 늙어서도 오히려 밥을 잘 먹었는데 항상 말하기를 ‘손님 대접은 쌀밥이나 무르게 짓고 생선을 썰어 국이라도 끓이면 가하거늘 하필 많은 돈을 써가며 팔진미를 구해 올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고려사]에 [명심보감]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열전에 나오는 마지막 부분에 “선비로서 체면을 버리겠는가”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노당은 주자학이 들어온 고려 말 선비의 삶을 이미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선비 노당의 면모가 궁금해졌다.

달성군 김제근 학예연구사가 문중 대신 노당과 관련된 자료를 제공해줬다. 2005년 ‘명심보감목판각보존회’와 ‘추계 추씨대구경북종친회’가 공동으로 발간한 148쪽 분량 [인흥서원지(仁興書院誌)]다. 거기에 노당의 생애가 실려 있다. 관향 추계(秋溪)는 경기 용인의 마을 이름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주자학을 처음 들여온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 선생과의 관계다.

노당은 5세에 배움을 시작해 고려 원종 원년인 1260년 15세로 문과에 급제했다. 노당보다 나이가 세 살 많은 회헌 선생도 당시 과거시험에 같이 합격했다. 고시 동기라고나 할까. 관직에 있는 동안 회헌은 노당에게 도움을 준 것 같다. [고려사]에 나온 환관 황석량의 참소 사건 때다.

안향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나


▎[명심보감]의 인흥재사본 목판. / 사진 : 대구 달성군
좌사간 노당은 바른말을 하다 칼이 씌워졌다. 압송 관리가 노당에게 골목길로 피해 갈 것을 운운하자 그는 “왕이 간관에게 칼을 씌운 것은 고대로부터 직언 신하가 영광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감옥에 갇힌 다음날 밤 남방 하늘에 혜성이 출현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노당을 가두니 괴이한 별이 나타났다는 말을 퍼뜨렸다. 우사간 김태정이 왕에게 좌사간의 석방을 간청하자 왕은 소인배의 말만 듣고 우사간마저 하옥시켰다. 노당이 구속된 지 75일 만이다. 세자이보(世子貳保)로 있던 회헌은 좌우 사간이 모두 구속되자 들고 일어났다. 마침내 노당이 석방된다.

1301년 노당은 원주 익흥도호부사로 전임한다. 조정이 90년에 걸친 무신정권에 이어 탐라에서 일어난 삼별초의 난 등으로 혼란기를 보낸 뒤다. 그 무렵은 선비들도 갑옷 입고 책 대신 병기와 활을 끼고 살았다. 글 읽는 선비가 열에 한두 명이 채 못 된다는 시절이다. 경전에 전하는 성현의 말씀은 실낱같이 겨우 이어질 뿐이었다. 노당은 당시를 회헌에 보내는 화답시로 한탄한다.

흐르는 물결에 휘말리듯 온 세상은 금불(金佛) 앞에 아첨하고
모두 말하기를 절간으로 가야만 가장 영험이 있다고 하네
옛 성현의 유풍(遺風)은 지금 다 없어지고
제(齊)나라와 노(魯)나라 예법을 몸에 갖춘 자를 볼 수가 없네



▎2006년 권오창 화백이 그린 추적 초상화. / 사진 : 대구 달성군
이때 회헌이 재상에 오른다. 회헌은 국립대학 격인 국학(國學)을 수리하고 1302년 노당을 이성·최원충 등과 함께 교수로 천거한다. 노당은 경리(經理) 교수가 돼 국학의 대성전을 개축 지도하고 3품 이상 자제를 가르쳤다.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고려사] 28권 ‘선거지’에는 “학문을 지원하는 선비와 국학에 설치된 7제 및 사학 12도 학생이 경서를 끼고 수업하는 자가 수백 명을 헤아리게 돼 국학 뜰이 연경의 장터처럼 복잡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노당은 유학을 진흥시키는 전면에 나섰다. 1304년(충렬왕 30) 6품 이상은 은 한 근, 7품 이하는 베 약간씩을 내 양현고(養賢庫)에 모아두고 섬학전(贍學錢)이라 부르며 그 이자로 학교를 경영하는 제도가 만들어진다.

1305년 60세 노당은 마침내 [명심보감]을 편찬한다. 후손인 대구유림회 추태호(64) 사무국장은 “이 연도는 우리 문중이 [동국문헌록]과 가전(家傳)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고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중이 정리한 연보에는 노당이 1315년 전후로 문하시중에서 물러나 밀성(밀양)에 거소할 때 [명심보감]을 편찬했다는 주장도 함께 적혀 있다. 국학 재학생들이 심성을 수양하는 교재로 사용됐을 것이다. 노당은 이렇게 회헌과 함께 이 나라 유학의 기초를 놓는 종사(宗師) 역할을 한 것이다.

국학 교수로 3품 이상 자제 가르쳐


▎후손들이 실전했다가 1853년 되찾은 추적의 묘소.
서원의 강당 뒤로 노당의 위패를 모신 문현사(文顯祠)가 있었다. 그 오른쪽에 [명심보감]의 목판각을 보관한 장판각이 있었다. 문현사와 장판각 뒤는 대나무 숲이다. 장판각 앞에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7호 추적 원저 추세문간 인흥재사본 31매 소장 명심보감 판본 장판각’을 나무판에 세 줄로 써 놓았다. 추적이 편찬했고 추세문이 1869년(고종 6) 만든 인흥재사본이란 뜻이다. 이 목판은 [명심보감] 판본으로 유일하다고 한다. 서원 강당 오른쪽 존학당(尊學堂)에는 복제한 목판과 먹으로 찍은 인출본이 전시돼 있었다.

노당은 경리 교수를 거쳐 1306년 민부상서와 예문관 대제학에 오르고 1310년에는 문하시중이 돼 식읍이 내려지는 밀성백에 봉해진다. 1317년 그는 밀성에서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일연 스님이 주석한 인흥사가 있던 대구부화원현 인흥방 오좌로 가전에 기록돼 있다.

인흥서원에서 나왔다. 서원 앞 오른쪽에 노당의 신도비(神道碑)가 150여 년 세월의 흔적을 안은 채 비각 속에 서 있다. 신도비에는 노당의 학문 연원을 회헌으로 밝혀 놓았다. 노당의 시호는 문헌공(文憲公). 신도비는 통상 묘소 입구에 세워진다. 무덤에 들르기로 했다. 묘소가 아무래도 서원 뒤쪽에 위치할 것 같아 자료에 나오는 사진과 비슷한 곳으로 올라갔지만 아니었다. 여기저기 세 곳을 헛걸음한 뒤 동네 주민에게 물었다. 그는 저 산 아래라고 손을 가리켰다. 천내천을 건넜다. 마비정 벽화마을 쪽으로 올라갔다. 미나리 농장이 이어진다. 조금 올라가니 마침내 도로 옆에 묘소를 가리키는 표석이 보였다. 거기서 다시 100m. 가파른 산길이다. 솔잎 등 낙엽이 쌓인 경사 45도 산길을 구두를 신고 오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산 중턱 소나무 숲속에 노당의 묘소가 빛바랜 비석과 함께 있었다. 후손들이 묘소를 실전한지 536년 만인 1853년 되찾았다는 바로 그 위치다. 신도비에서 무려 1.5㎞ 떨어져 있었다. 이 묘소를 되찾고 문중은 1861년 사당을 시작으로 신도비와 인흥서원을 차례로 세운 것이다.

목판까지 남은 [명심보감]은 [천자문] [동몽선습]과 함께 조선시대 청소년 인성 교재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교화(敎化)의 바탕이 된 것이다. [명심보감]은 한자문화권으로 널리 보급된 모양이다. 중국에는 범립본(范立本) [명심보감] 등이 나왔다. 그래서 [명심보감]을 누가 처음으로 엮었는지를 놓고 그동안 논란이 있어 왔다. 홍익출판사가 2016년 발간한 [명심보감]은 해설에 “중국 명나라 때 학자 범립본이 1393년 처음으로 [명심보감]을 엮었고, 그걸 원본으로 추적이 내용을 가리고 추려 새로 [명심보감]을 만들었다”고 소개한다. 범립본이 그 책을 썼다는 서문이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추경화(68) 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은 “중국 범립본 등은 노당보다 후대 인물”이라며 “[명심보감]이 중국에서 시작됐다는 주장은 일종의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단언한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노당이 밀성에 머무르던 시절 [명심보감]을 엮었다고 봐도 범립본보다는 78년이나 앞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당이 [명심보감]을 편찬했다는 딱 떨어지는 근거도 나오지 않았다.

베트남 이야기는 약간 다른 가닥이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은 사이공(현 호치민)을 방문했다. 베트남 고 딘 디엠(吳廷琰) 대통령의 방한에 대한 답방 차원이었다. 고 딘 디엠은 그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내 놓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래 전 귀국에서 이 책이 우리나라에 전해져 그동안 국민 필독서로 내려왔습니다. 이제 감사의 뜻을 담아 책을 돌려 드립니다.” 바로 [명심보감]이었다. 이 대통령은 귀국한 뒤 그 책을 성균관대학에 전하면서 번역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선근 성균관대 전 총장은 1959년 [명심보감] 완역본 서문에 그 이야기를 남겼다.

스테디셀러 '명심보감'의 원저 논란


▎노당의 후손 추세문이 1869년 새긴 [명심보감] 목판이 소장된 장판각.
우리나라 첫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조선 중기 주세붕은 [무릉잡고]에 노당의 공적을 “해동에서 유교를 숭상하고 학교를 건립한 도(道)가 복초당 안선생 문성공 유와 노당 추선생 문헌공 적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이제까지 누구라고 흠모하지 않겠는가”라고 적었다. 우리나라 유교가 안향과 추적 두 선생에서 본격 시작됐다는 평가다. 율곡 이이는 [명심보감] 평을 남겼다. “지난 겨울 가친께서 영남에서 돌아오실 적에 손수 [명심보감] 한 권을 가지고 오셨는데 거기에 실린 수백 가지 말이 모두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는 글이었다. 나는 자주 펴 읽으면서 일찍이 팔을 치며 감탄치 않을 수 없었다….”

천내천을 사이에 두고 인흥서원 건너편은 문익점 후손들이 사는 남평 문씨 세거지다. 휴일을 맞아 이날 일대는 나들이객으로 붐볐다.

인흥서원의 주인공 추적은 고려 후기 안향과 함께 이 땅에 유학을 정착시키고 동방예의지국의 기틀을 다진 선비였다. 무례(無禮)가 흔해진 세상이다. 노당을 취재하면서 예의란 걸 다시 생각했다. 인흥서원 앞 주차장에는 [명심보감]의 세 가지 말씀을 발췌한 독서대가 있다. 그중 하나에 “군자가 용맹만 있고 예의가 없으면 세상을 어지럽히고, 소인이 용맹만 있고 예의가 없으면 도둑이 된다”고 적혀 있다. 예의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서늘한 말이다.

[박스기사] 삶 속에서 가르침 실천한 노당 - 평안도 용만부 부사 부임 때 진수성찬 물리쳐

1299년 노당 추적은 54세에 평안도 용만부(龍灣府) 부사가 된다. 내시 황석량의 참소 사건을 겪은 뒤다. 용만은 원나라와 고려의 국경지대로 교통과 어업, 식량 운반의 요충지였다.

노당이 부임하는 날 관아는 진수성찬 도임상(到任床)을 마련했다. 용만부의 특산물인 상어·조기·넙치·대하·숭어·홍어·굴·바지락·낙지·민어·준치·오징어 등 각종 해산물이 올랐다. 거기다 밥 열 사발 은쟁반에 과일과 떡, 술이 넘쳤다. 부사는 400리 길을 행차한 뒤라 잔뜩 시장했다.

그러나 부사 노당은 도임상을 보자 말없이 물리쳤다. 아전과 방백들은 도임상이 초라해서인 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관속들은 “다시 상을 차리겠다”며 모두 꿇어 엎드렸다. 마침내 부사가 입을 열었다. “나에게 산해진미는 필요 없고 오직 밥 한 그릇과 나물국이면 족하다”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손님이 오면 흰밥을 부드럽게 짓고 생선을 잘라 국을 끓여 대접하라”며 “팔진미를 차려도 입으로 한번 지나가면 마찬가지”라고 했다. 노당의 가르침을 받은 이제현은 [역옹패설(櫟翁稗說)]에 이 이야기를 남겼다.

노당이 편찬한 [명심보감]에도 소박함을 강조하는 가르침이 나온다. [명심보감] 제12편 성심편(省心篇) 하의 구절이다.

“천 칸이나 되는 큰집이라도 밤에 누울 때는 여덟 척일뿐이요, 기름진 밭이 수만 이랑이라도 하루 먹는 것은 두 되 밥일 뿐이다.”(大廈千間이라도 夜臥八尺이요 良田萬頃이라도 日食二升이니라)

저택이 있은들 밤에 눕고 자는 공간은 방 한 칸이다. 그 방도 다 쓰지 못한다. 세상 논밭을 다 소유해도 하루 먹는 양식은 두 되를 넘을 수 없다. 욕심이란 이처럼 허망하다.

노당은 세상 이치를 꿰뚫은 가르침을 모아 수신서로 엮은 것은 물론 삶 속에서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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