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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대기자의 ‘지성담론'] 데카메론 ‘정의란 무엇인가?’(4) 

‘참여의 동등성’이 사회 정의의 핵심 

‘파트너’라는 의식 없으면 누구나 구조적 폭력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 될 수도
착취·주변화·무력함·문화제국주의, 소수자에 대한 폭력이 부정의의 대표적 양상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존 롤즈의 [정의론] 이후 ‘정의(正義)’라고 하면 윤리적·형이상학적 정의관보다도 ‘분배의 정의’와 같은 사회 정의의 덕목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정의를 이야기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는 “지위와 재화, 권리와 의무, 혜택과 부담을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어떻게 나누는 것이 공평한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정한 분배, 평등한 할당 등에서 정의의 규칙을 발견합니다. 불평등과 불공정은 정의의 적으로 규정합니다.

우리는 월간중앙 5월호에서 한국인 10명 중 8명이 ‘한국은 불공정사회’라고 인식하는 상황을 살펴봤습니다. 이런 인식의 배경에는 부동산 불로소득이 야기하는 불평등 분배와 부의 쏠림, 그리고 이 여파로 교육적·문화적 불평등과 소외가 이어지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짚어 봤습니다.


▎법철학자 김도균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특히 우리가 가장 주목했던 문제는 이 같은 부정의(不正義)에서 법제의 불비(不備)와 부정의를 지지하는 법원의 판결과 같은 ‘합법적 부정의’ 행태가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불평등 분배와 이에 대한 합법적 지지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성을 공고하게 하고, 더 나아가 정의에 대한 회의론을 낳는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즉 “정의란 강자나 지배계급의 이익을 포장하는 수단”이라거나 “정의란 각자의 처지에서 주관적으로 느끼는 관념일 뿐”이라는 비판들이 그것이지요.

이런 불평등과 불공정은 사회적 괴리현상도 일으킵니다. 즉 ‘그들만의 리그’라는 특권적 신분을 형성하는 한편,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적 지위가 세습된 부와 권위에서 비롯된다는 ‘신분사회적’ 의식을 형성하게 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즉 ‘신(新)신분사회’의 도래를 보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김도균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계속해서 분배적 부정의에서 야기된 신(新)신분사회에 나타나는 제도화된 부정의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그 전에 우리는 제도적 부정의를 얘기하면서 부정의보다는 불공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불공정은 부정의인가’에 대한 것부터 정리해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공정하지 않으면 정의롭지 않다는 관념은 단지 우리의 의식적인 학습으로 생긴 게 아닙니다. 여러 사회와 집단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들에선 인간에겐 이미 공정성이라는 감각이 내장돼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실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피실험자들을 A, B 두 집단으로 나누어 A집단 구성원에게는 1만원씩을 주고, B집단에 있는 구성원들 중 짝이 된 사람들에게 일정 금액을 나눠주겠다고 제안하도록 합니다.

A구성원이 제안한 금액을 B구성원이 받아들이면 그 금액으로 나누면 됩니다. 그러나 B구성원이 거절하면 1만원은 실험자가 몰수합니다. 이 경우 경제적 합리성으로만 따지면 A가 0원보다 큰 금액을 제시할 경우 B가 받으면 모두에게 이익입니다.

공정성과 정의 감각은 인간에게 내장돼 있다


▎서울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으로 불리는 ‘구룡마을’. 이곳의 주민들은 사회적 부정의에 일상적으로 노출된다. /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이 실험에선 1000원이나 2000원을 제안 받은 B집단 구성원은 제안을 거절했고, A집단 제안자들은 대체로 4000원을 제안했습니다. 돈을 거부한 이유는 ‘공정성에 어긋난다’는 것이었고, 4000원 정도를 제안한 측도 ‘상대방이 받아들일 정도의 공정한 금액이 얼마인가 고민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실험들은 여럿 존재합니다.

실험 결과는 대체로 인간은 ‘경제적 합리성을 선택할 것’이라는 가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런 실험들을 통해 인간에게는 공정성이라는 감각이 내장돼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지요. 사실 사람들은 수용소, 전쟁, 생존을 위한 투쟁과 같은 극단적 상황에 내몰리지 않는 한, 보통의 상황에서는 대체로 공정성의 규범에 따라 행동합니다.

인간들에게 공정성이 내장돼 있기에 불공정한 상황에 직면하면 저절로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무엇이 불공정한지 감각적으로 알게 돼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특권층들이 아무리 명분을 둘러대며 공정함을 포장하려 들어도 설명이 먹히지 않는 것입니다.

또 인간에게 내장된 공정성의 감각이 잘 발현되려면 ‘대다수 사람들이 하면 나도 한다’는 상호성 조건, 무임승차자 응징의 조건, 배경의 공정성 조건 등이 어느 정도 충족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의의 원칙과 법의 역할입니다. 따라서 법이 공정성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사람들은 곧바로 법이 부정의하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알아챕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수저계급론’이 확고하게 지지받는 우리 사회의 경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합니다. 이처럼 우리 헌법은 차별 없는 평등사회를 적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현실에선 ‘사회적 신분(Social Status)’이라는 새로운 신분구조를 공공연하게 지지해왔습니다. 국내 헌법학에서는 사회적 신분을 선천적 신분(출생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적 지위)과 후천적 신분으로 구별합니다. 후자를 “인간이 후천적으로 사회에서 장기간 점하는 지위로서 일정한 사회적 평가를 수반하는 사회적 신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를 받아들여 우리 헌법재판소가 전과자를 후천적 사회적 신분으로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후천적 사회적 신분’은 이런 얘기도 됩니다. “제도화된 문화적 가치 평가 과정을 통해 특정 집단 사람들에게 이등 계급의 사회적 지위를 부과할 수 있다.” 이렇게 후천적 사회적 신분이 부여된 사회집단은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시민적 지위에서 사회 생활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신분 없는 평등사회의 이념은 이미 헌법을 해석하는 단계에서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법에 드리운 평등 이상과 불평등한 현실


▎인형탈을 쓴 알바생이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과거 서울시 서초구 양재2동 212번지 서울시 시유지에 형성된 판자촌 ‘잔디마을’ 거주민들의 사례는 제도적으로 정당한 이유로 이등 시민으로 전락한 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등 시민으로의 전락은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인 ‘전입신고’라는 단순한 행정조치의 거부만으로 이루어집니다.

한국 사회에서 판자촌 거주민은 법적으로는 유령 같은 존재입니다. 도시 개발의 결과,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 불법으로 판자촌을 형성한 도시 빈민들은 전입신고를 거부당해 왔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인근 지역에 위장전입을 해야만 그나마 취학통지서, 투표통지서, 기타 행정문서 등을 위장전입한 주소로 받을 수 있었고, 기초수급대상 혜택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들을 누릴 수 없는 이등국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 2007년 한 거주자가 양재2동 동사무소에 주민등록 전입신고를 했습니다. 당연히 거부당했고, 이것은 합법적이었습니다. 종전의 대법원 판결도 전입신고 거부가 합법적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거부를 합법화한 법은 주민등록법 상 주민등록 대상자가 되기 위한 요건으로서 “30일 이상 거주할 목적으로 관할구역 안에 주소 또는 거소를 가져야 한다.”는 법조항입니다. 이 규정의 해석에 대한 과거 대법원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주민등록법 상 주민등록 대상자의 요건인 ‘30일 이상 거주할 목적으로 그 관할구역 안에 주소 또는 거소를 가질 것’이라 함은 단순한 외형 상의 조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민등록법의 입법 목적과 주민등록의 법률상의 효과 및 지방자치의 이념에 부합하는 실질적 의미에서의 거주지를 갖춘 경우를 의미한다. 따라서 주민등록을 담당하는 행정청으로서는 주민등록 대상자가 이런 실질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볼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그 등록을 거부할 수 있다.”(대법원 2002.7.9. 선고 2002두1748 판결)

그리고 행정안전부는 빈곤층 집단거주지역 주민등록 전입과 관련해서 아래와 같은 지침을 수립하고 적용했습니다.

“주민등록 전입은 거주지 여건 등을 판단하여 사례 별로 조치하되 전입을 원할 경우, 주거 목적과 민원 발생 소지 등 종합적인 판단 하에 적극적으로 조치한다. 철거 지역 또는 투기 등 주민등록상 효과가 없는 경우는 주민등록 전입을 제외한다.”

하지만 전입신고를 거부당한 그 시민은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당시 법원은 양재2동장의 신고수리 거부 처분이 위법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 근거는 이랬습니다.

“주민등록법은 주민의 거주 관계 등 인구의 동태를 항상 명확하게 파악하여, 주민생활의 편익을 증진하고 행정사무를 적정하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지 부동산 투기방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투기방지 등의 목적은 주민등록법이 예정하고 있지 아니한 이상 간접적인 효과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투기나 전입신고에 따른 이주 대책 요구 등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입신고수리를 거부한 것은 주민등록법의 입법목적과 취지 등에 비추어 허용될 수 없다.”(서울행정법원 2007.11.25. 선고 2007구합27332 판결)

이 판결은 2009년 대법원에서 받아들여졌고, 대법원은 선례를 변경했습니다. 이 판결을 계기로 ‘잔디마을’이나 ‘구룡 마을’과 같은 판자촌에 거주민들도 비로소 전입신고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전입신고라는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도 긴 법정다툼을 벌여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물론 이들이 법률적으로 전입신고가 가능해졌다고 불법점유라는 사법상의 권리관계가 바뀐 것은 아니며, 다른 신분적 제약이 다 사라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신분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다’는 헌법정신은, 그러나 후천적 신분제를 유지하려는 여러 사회적 동기들 때문에 구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등 국민’ 낙인찍은 대법원 판결


▎2017년 8월 미국 시카고 일리노이에서 시민들이 ‘트럼프 정권은 파시스트’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백인우월주의에 반대하는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 사진:AFP/연합뉴스
이 사례처럼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신분사회적 성격은 단지 ‘분배의 정의가 이뤄지지 않아서’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이뤄지는 부정의 현상은 경제적 불평등, 즉 재화의 분배 부정의 말고도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Iris M. Young)은 ‘분배의 측면으로 포착되지 않는 부정의의 양상’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지역에서 기업 폐쇄 결정을 향한 주민들의 항의 운동에는 물질적인 분배의 정의보다는 의사결정 권력과 의사결정의 절차를 겨냥한 항의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또 미국에서 흑인이나 아랍인에 대한 TV나 영화의 묘사에서는 물질적인 분배의 부정의가 아니라 문화적 이미지와 상징이 특정 인종집단에 대한 부당한 고정관념과 차별을 고착시키는 부정의를 관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은 “우리 사회에는 일차적으로 소득·자원·지위 등의 분배와 관련된 부정의가 아니더라도 다른 형태의 부정의가 많이 존재한다”면서 “분배가 곧 정의라는 패러다임은 사회구조와 제도적 맥락을 평가 대상으로 삼지 못하기 때문에 정의의 영역을 부당하게 제한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대로 제도적 조건까지 정의의 대상으로 보게 되면, 정의는 분배 정의 이상의 것이 됩니다. 각 개인이 모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환경 속에서 좋은 기술(기량·기예)들을 익히고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제도적 조건, 자신의 중대사와 관련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제도적 조건, 타인이 나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나의 느낌과 체험과 관점을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는 제도적 조건이 ‘정의의 관심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의의 조건에서 보면, 사회적 부정의는 사회구성원 중 일부 집단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환경 속에서 좋은 기술들을 익히고 사용하는 것을 막는 제도 상황을 말합니다. 또 이들이 중요한 사안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는 제도적 조건도 부정의입니다. 물질적 재화와 권리의 분배만이 아니라 개인의 역량을 발전시키고 행사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 조건이 어느 정도 충족돼 있지 않다면 부정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사회를 한번 보도록 하죠. 지난번 진태원 교수가 ‘을의 민주주의’에서 지적했던,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부정의의 현상들 즉, 착취·주변화, 그리고 소수 집단에 대한 배제는 단순히 분배의 정의 차원에서만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부정의’의 양상을 보여줍니다.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대표적 사회적 부정의 양상을 꼽으라면 나는 착취·주변화·무력함·문화제국주의, 소수자에 대한 구조적 폭력 등 다섯 가지를 들고 싶습니다.

먼저 착취란 특정 집단의 노동과 에너지가 공정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타 집단에 부당하게 이전돼 후자의 능력과 권력을 강화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현실에 주목했지요. 현대 사회에선 젠더(성별) 관계라는 고유한 착취에 주목합니다. 여성의 노동 과실과 에너지가 남성에게 이전되어 그들의 이익에 종사하는 현상입니다. 착취의 부정의는 불평등 분배를 야기하는 집단 간 에너지가 이전되는 ‘사회과정’과 이를 통해 이전받은 소수는 부를 축적하는 반면, 다수는 그렇지 못한 처지에 머무는 ‘사회과정의 방식’에 있습니다. 이런 착취의 부정의는 재화를 재분배하는 것만으로는 제거될 수 없습니다. 제도화된 관행, 세뇌당한 역할 분담 같은 구조적 관계가 바뀌지 않는 한 에너지 이전 과정은 이익의 불평등 분배를 계속 재 생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변화(Marginalization)는 사람들이 노동시장에서 추방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기술의 발전과 사회 변화로 노동시장에서 쓸모없는 기술을 가지게 된 사람 혹은 사회집단들뿐 아니라 부유하나 사회적 역할을 찾지 못한 부자 노인들도 주변화라는 부정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들은 노동의 터전을 잃고 생존의 위기에 몰리는 현상부터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배제됨으로써 자존심이 결핍되는 등 ‘인간적 삶’ 자체를 영위하기 어렵습니다.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억압 형태입니다.

제도적 부정의가 분배 부정의보다 뿌리 깊어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중·장년층 실업자들이 서울의 한 지역고용노동청이 개최한 실업 급여 설명회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어떤 권한도 갖지 못하는 무력함(Powerlessness)도 사회적 부정의의 주요 양상입니다. 알바생, 인턴, 단기간 미숙련 노동자, 콜센터 전화상담원, 슈퍼마켓 직원처럼 타인의 명령에 따르는 것 외에 명령을 하거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는 ‘무력한 지위’의 사람들이 무력함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의 희생자입니다.

문화제국주의(Cultural Imperialism)로 일컬어지는 사회적 부정의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의 세 가지 부정의가 주로 노동시장과 관련돼 있고, 대부분 알고 있는 문제라면 문화제국주의라는 부정의는 문화적 의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서구사회의 백인이 비서구사회의 사람들을 식민지화하고, 자신들은 ‘정상’이나 ‘우수한 존재’로, 후자는 ‘비정상’이나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던 제국주의 현상에서 따온 용어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구와 비서구 문화의 비교가 주 대상이 아니라 더 확대된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말하자면 문화제국주의는 지배 집단의 경험·문화·의미·규범을 보편적인 것 혹은 표준이며 정상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다른 집단들은 그 표준에서 벗어난 열등한 존재로, 즉 ‘타자’로 표지 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들 열등한 집단의 주장과 체험과 관점은 ‘비가시적인 것’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리고 억압 받는 집단들의 사회생활 체험과 해석은 지배 집단 문화에서 거의 표현되지도, 반영되지도 않는 반면, 지배 집단의 그것은 지배문화를 통해 억압 받는 집단에 고스란히 부과되는 부정의를 낳습니다.

특정 집단, 예를 들어 여성·성소수자·인종·이주노동자 등을 향한 증오 폭력과 살인, 혐오 발언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폭력 현상도 있습니다. 가령 어떤 집단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가해자를 전혀 도발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신체나 재산에 무작위로 언제라도 느닷없이 공격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이는 다른 동기 없이 오직 그 사람에게 신체적 손상을 가하고, 모욕하고, 파괴하는 것만이 오로지 동기인 공격 형태라는 점에서 무섭습니다. 범죄자나 특이한 성향의 사람들이 특수한 상황에서 자행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행사해도 무방하다거나 용인될 것이라는 모종의 사회적 규칙에 입각해 일상적으로 또는 사회 전반적으로 행해진다는 의미에서 구조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사회적 부정의는 우리 사회에 구조적으로 상존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정의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재화와 권리의 분배에만 관심을 두다보면 구조적 폭력이라는 부정의를 예외적인 현상으로 파악하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폭력이 나쁘다는 점은 다 인정하지만, 그런 행위들이 대부분 극단주의자, 범죄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개인이 저지르는 범죄행위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법·제도적 실천만이 구조적 폭력 막을 수 있어


▎올 3월 총격 테러로 5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뉴질랜드 이슬람 사원 희생자 추모소를 방문한 한 어린이. / 사진:AP/연합뉴스
하지만 어떤 폭력에 대해서는 사회가 관행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오히려 암암리에 권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사회제도와 사회적 관행과 사회적 의식이 여성이나 성소수자를 향해 폭력 행위를 부추기고 이런 폭력 행사를 관용하고 가능하게 한다면, 그런 사회제도와 사회적 관행은 부정의한 것으로 교정돼야만 합니다.

구조적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원과 지위와 권력의 재분배가 선행돼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하려면, 문화적 이미지와 고정관념에서의 변화, 그리고 일상적 제스처에서 지배와 혐오 관계가 매일매일 재생산되는 것을 막는 법·제도적 실천이 더 먼저 이뤄져야 합니다. 불공정을 시정하고 평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법·제도적 실천이 선행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정의의 문제를 제도적 차원으로 확대하면 내용이 너무 커져서 어떤 해결책을 찾아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해결책을 찾아가는 첫 단계는 일단 문제를 드러내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지금 이 정도의 문제 제기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한국의 법질서와 정의를 세 영역 또는 세 차원으로 나눠 문제를 제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사회·경제적 정의 영역. 사회·경제적 재화의 (비합리적인) 불평등 분배는 가장 도전적인 정의의 과제입니다. 이 과제에 해답을 제시할 정의 원리로 저는 “모든 사회 구성원은 인간으로서의 ‘번영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물질적 수단에 대해 평등한 접근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제안합니다. 핵심은 ‘인간으로서의 번영된 삶’(Human Flourishing)입니다. 번영된 삶이란 ‘개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충분히 계발하고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둘째, 사회·문화적 정의 영역. 무시나 경멸, 신분상의 불평등이나 신분 위계 질서가 대표적인 부정의의 모습입니다. 동등한 구성원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 각종 문화적 가치들, 남성중심주의적 시선들, 이방인에 대한 모멸적 태도 등이 그 예라고 하겠습니다. 사회적 지위 속성에 기초한 경멸과 모욕, 무시, 차별, 사회적 배제는 비합리적인 경제적 불평등만큼이나 인간으로서의 번영에 필요한 사회·문화적 가치들을 박탈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와 미국의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제시했던, 이 영역에서의 정의의 지도 원리로 ‘인정’(Recognition)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이는 앞의 진태원 선생이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즉 “각 개인이 집단적 계층화 없이 자신의 고유한 활동과 능력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을 기회의 대등함”이 인정 개념에 담겨 있습니다.

정의란 모두를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하는 것


▎올 3월,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 이주노동자 증언대회’에 참석한 참가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셋째, 정치적 정의의 영역. 이 영역에서 나타나는 대표적 부정의는 특정 집단의 개인들이 전혀 대표되지 않거나, 과소대표되거나, 과잉대표되는 것(Misrepresentation) 또는 정치적 발언권이 박탈되거나 제한되는 것입니다. “각 개인들이 자신들이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의미있게 참여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수단들에 대해 대체로 평등한 접근권을 가져야 한다”는 원리가 이 영역에서의 지도 원리라 하겠습니다. 각 개인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선택을 스스로 할 자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적 결정에 참여하고 그 결정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정치적 정의의 자유주의적 차원을, 후자는 민주주의적의 차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회 정의의 이들 세 영역을 관통하고 연결하는 공통의 원리는 결국 ‘참여의 동등성’(Parity of Participation)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정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파트너로서 사회 생활에 참여하도록 하는 사회질서를 요구한다”는 요청으로 집약됩니다.

이렇게 보면 부정의란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완전한 파트너로서 사회적 상호작용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는 제도적 장애물이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장애물로 낸시 프레이저는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합니다. ▷동등한 파트너로서 참여하는 데 필수적인 사회·경제적 수단들을 거부하는 경제 질서 ▷동등한 파트너로서의 지위를 거부하는 문화적 가치와 위계 질서 ▷공적인 토론과 공동의 의사 결정에서 동등한 발언권을 박탈하는 의사 결정 규칙과 제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등한 파트너라는 의식,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자면 우리 사회 전반에 이 같은 평등을 향한 인식 자체의 발전이 무엇보다 긴요합니다. 앞의 사례들에서 보았듯이 부정의를 지지하는 판례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태도의 변화를 보입니다. 그것은 법적 판결 역시 사회적 인식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정의에 대한 시민들의 감수성’이 정의를 구현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일보 온라인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사회적·경제적 소외와 불평등 문제를 직설화법으로 다루는 칼럼으로 유명하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이며, 해박한 중국 역사와 고전 지식을 바탕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미디어)][적우(敵友):한비자와 진시황(나남)]등 중국 역사소설을 썼다. 서울대에서 경제교육학 전공으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906호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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