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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17)] ‘불교의 나라’ 고려에 스며든 풍수도참설 

예언 겁낸 공양왕, 한양 천도 밀어붙였다 

신라 멸망과 새 왕조 탄생 예언한 도선에 감화된 왕건, 건국이념에 풍수설 녹여
도선 후계자 자처한 묘청은 서경천도 주장, 유교주의자 김부식과 격렬한 이념전쟁


▎영화 [명당]에서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지관(地官). 고려를 넘어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시대에도 풍수도참설은 힘을 발휘했다./사진:메가박스
정몽주를 중심으로 반(反)이성계전선이 만들어진 시점에 서운관에서 상소를 올려 갑자기 한양 천도를 주장했다. “[도선밀기](道詵密記)에 지리가 쇠미해지고 왕성해지는 설이 있으니, 서울을 한양으로 옮기어 송도의 지덕을 쉬게 하라”는 것이었다.

동지경연(同知經筵) 박의중이 반대했으나 공양왕은 “내가 그 폐해를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양의 설이 또한 어찌 거짓이겠느냐”라고 말하고 천도 계획을 강행했다. 그리고 불과 두 달여 만인 9월 16일, 한양 천도를 단행했다. 천도 같은 중대사에 대해 조정의 의견을 청취하지 않고 독단한 것이다. 좌헌납 이실, 형조총랑 윤회종, 대사헌 김사형이 반대했다. 이성계파인 윤회종과 김사형의 견해로 보건대, 이성계파는 천도에 반대했을 것이다. 공양왕의 어가가 한양에 도착했을 때 온갖 놀이판을 열어 왕을 영접한 양광도관찰사 유구가 탄핵돼 파직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파는 집단행동에 나서거나 집요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주목되는 것은 이 시점이 바로 즉위 후 이성계에 대항해 온 공양왕에게 비로소 희망이 생긴 때였다는 것이다. 정몽주가 공양왕에 동조함으로써 비로소 반이성계 전선이 모습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공양왕은 이성계가 찬탈할지 모른다는 깊은 불안감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좌헌납 이실이 천도에 반대하자, 그는 “[비록]에 ‘도읍을 옮기지 않으면 군신을 폐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네가 어찌 홀로 옳지 않다고 고집하느냐”라고 이실을 꾸짖었다. “음양의 설이 또한 어찌 거짓이겠느냐”는 공양왕의 반문처럼, 그는 풍수도참설을 깊이 믿었다. 풍수도참이란 풍수와 도참이 합해진 것으로, 풍수에 기초해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다.

왕건 “산천의 신비력에 의해 통일 대업을 이룩했다”

인간의 실존은 본질적으로 운명적이다. 정치가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로서, 운명에 도전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대부분의 정치가는 일반인보다 운명을 맹목적으로 믿는 경향이 있으며, 그만큼 더 미신적이다. 정치가의 환경이 일반인에 비해 더 취약하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공양왕은 더 미신적이었다. 그는 최악의 환경에서 등극했고, 왕이 된 후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즉위 후 매달 1일과 15일에는 반드시 궁궐로 승려를 불러다가 불경을 강론하게 했다. 또한 계절마다 13개소에다 복을 비는 제단을 차려놓고, 도량이니 법석이니, 별기은(別祈恩)이라는 명목으로 신령과 부처에게 빌었다.([고려사] 공양왕 2년)

도량은 불교의 일반법회를 말한다. 법석은 재해를 물리치고 복을 빌기 위한 소재법회에 해당한다. 별기은은 국왕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지방의 명산대천에 지내는 기복제사를 일컫는다.

그런데 풍수도참 신앙은 공양왕에게 특이한 것은 아니다. 고려의 공식 국가이념은 불교지만, 풍수도참 역시 필적하는 국가이념이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왕조는 풍수가 왕조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일호의 의심 없이 굳게 믿었다. 하지만 지리학이 국가이념의 지위를 차지한 것은 인류사에서 다소 예외적 사례다.

풍수도참의 국가적 지위는 태조 왕건이 결정한 것이다. 그는 [훈요십조]에서 고려의 건국이념을 제시했다. 제1조에서 “국가의 대업은 여러 부처의 호위를 받아야 하므로 선종·교종 사원을 개창한 것”이라고 하며 불교가 제1의 국가이념임을 밝혔다. 제2조가 바로 풍수도참이다. “신설한 사원은 도선(道詵)이 산수의 순역을 점쳐놓은 데 따라 세운 것이다. 정해놓은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세우면 지덕(地德)을 손상하고 왕업이 깊지 못하리라. … 신라 말에 사탑을 다투어 세워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하랴.”([고려사] 태조 26년 4월)

왕건은 신라가 망한 원인을 풍수도참에서 찾았다. 왕건이 도선을 고려 건국의 선지자로 지정한 이래 그는 국가적 존숭의 대상이 됐다. 그는 숙종대 왕사에 추숭되고, 인종대에 선각국사로 추봉됐다. “고려에서는 이 도선을 신처럼 존숭하고, 도선이 지었다는 비기(祕記) 밀기(密記)를 금과옥조처럼 믿고 일을 결정할 정도였다.”(村山智順, [조선의 풍수])

훈요십조의 제5조도 풍수도참이다. “나는 우리나라 산천의 신비력에 의해 통일의 대업을 이룩했다. 서경(평양)의 수덕(水德)은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을 이루고 있어 길이 대업을 누릴 만한 곳이니, 사중(四仲: 子·午·卯·酉가 있는 해)마다 순수(巡狩)하여 100일을 머물러 안녕을 이루게 하라.” 왕건은 풍수도참에 힘입어 후삼국을 통일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고려가 수덕(水德)을 가진 나라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을 먼저 한 것은 궁예다. 그는 신라를 금덕의 나라로 보고, 신라를 잇는 나라는 수덕이라고 보아 ‘수덕만세’라는 연호를 제정했다. 왕건이 이를 답습한 것이다. 그리고 수덕의 도시 평양을 제2수도로 삼아 왕이 정기적으로 머물 것을 지시했다. 이런 해석은 모두 산천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믿고, 이를 국가의 변천에 관한 예언과 결합시킨 것이다. 조선왕조도 이를 조선 건국의 정당화에 이용했다. 고려의 수덕을 잇는 새로운 왕조는 목덕(木德)이라는 것이다. 이성계의 이(李)자를 파자하면 목자(木子), 즉 목덕의 아들이다. 그래서 목덕의 아들이 나라를 얻는다는 ‘목자득국’(木子得國) 설을 널리 유포했다.

한국 풍수도참의 비조는 도선이다. 그는 풍수도참에 근거해 왕건의 탄생과 창업을 예언했다. 이로써 고려건국은 하늘의 뜻이자 역사의 필연임이 보증된 것이다. 그 이야기가 [고려사]의 첫 부분([高麗世系])을 장식하고 있다. 왕건의 아버지는 세조 용건(龍建)이다. 그는 “체격이 헌칠하고 수염이 멋지며 도량이 넓고 커서, 삼한을 모조리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미 삼한의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송악(개성)의 옛집에살다가 그 남쪽에 새 집을 짓고 했다. 그곳은 바로 뒤에 고려왕들의 집무실 정궁이 된 연경궁 봉원전 터였다.

풍수도참은 고려 왕조의 정치적·정신적 심연


▎왕건은 풍수지리에 입각해 지형을 살핀 뒤, 천안도독부를 설치했다. 그 터가 됐던 천안 태조산 일대.
876년 도선이 백두산에 올랐다가 개성 송악산에 이르러 용건의 새 집을 봤다. 그는 혀를 차며 “메기장(穄)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 삼(麻)을 심었는가”라고 말한 다음 가버렸다. 이제현에 따르면, 고려의 말에 “기장은 왕이라는 말과 서로 비슷하다”고 한다. 요컨대, 왕이 될 집터인데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 들은 용건이 도선을 급히 좇아갔다. 서로 친해진 두 사람은 함께 송악산에 올라 산수의 맥을 짚고, 천문과 운수를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도선은 이렇게 말했다. “이지맥은 임방(壬方, 북쪽)의 백두산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부터 뻗어와 마두명당(馬頭明堂)까지 이어져 있소.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 떨어질 것이오. 그러면 내년에는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聖子)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하시오.”

풍수지리상 한반도의 뿌리는 최북단의 백두산이다. 오행에서 북쪽은 물인데, 백두산 천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백두산은 물의 어머니 수모(水母)이다. 그 뿌리로부터 줄기가 자라듯 산맥이 남쪽으로 뻗치는데, 그 산맥이 목간(木幹)이다. 그것이 송악에 이르러 말머리 모양의 명당, 즉 봉화전터에 이르고, 백두의 지기가 용건의 집터에 응축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운을 받은 위대한 인물이 탄생할 것이다. 도선은 봉투를 만들고 겉봉에다 “삼가 글월을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께 바치나이다”라고 써서 용건에게 줬다.

과연 1년 뒤인 877년 아들이 탄생했다. 왕건이 17세 때 도선이 다시 찾아와, “족하께서는 백육의 운에 응하여 천부(天府)의 명허(名墟)에서 탄생하셨으니 삼계(三季)의 창생이 임금의 구원(弘濟)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천부의 명허란 하늘이 내린 명당이다. 요약하면, 왕건은 말세의 고통에 신음하는 창생을 구원하고자 명당에 태어난 난세의 메시아라는 뜻이다. 그리고 도선은 왕건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진 치며 지리와 천시를 보는 법(出師置陣地利天時之法), 산천에 제사 지내고 신과 감통하고 도움을 받는 이치(望秩山川感通保佑之理)를 알려줬다.” 군사학과 신비지(神秘知)를 전수한 것이다. 이처럼 풍수도참은 고려 왕조의 운명적 탄생을 장식하는 아우라로서, 고려 왕조의 정치적·정신적 심연을 이루고 있었다.

풍수설, 고려 건국과 삼한 통합을 예언하다


▎고려 태조 왕건의 어진. 왕건은 ‘풍수도참설을 존중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풍수설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산천에 살아있는 기운(生氣)가 있고, 그 기운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感應)는 믿음이다. 그래서 풍수설은 생기론과 감응론으로 나뉜다. 도참이란 상징을 보고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다. 도(圖)가 미래를 알려주는 예후와 상징이고, 참(讖)이 길흉화복과 성패를 알리는 예언이다. 요컨대 풍수도참은 땅을 보고(相地) 미래를 예언하는 일(讖言)이다. 적극적으로는 좋은 땅을 찾아 복을 찾고, 소극적으로는 나쁜 땅을 가려 화를 피하려는 것이다.

“풍수의 근본 목적은 천지간에 기대어 인간이 영화를 꾀하려 함에 있다. 인간이란 천지간에서 생겨나 천간에서 살아가는 것이므로 그 시종과 성쇠는 완전히 천지에 의해 규정되며 천지 이외의 것으로 살아간다고 하기 어렵다.”(村山智順, [조선의 풍수])

그 이론이 아무리 복잡하고 정교해도, 결국은 기복신앙인 것이다.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유사과학이다. 약한 존재인 인간은 이런 유혹을 피할 수 없다.

한국에서 이런 이론을 시작한 것은 도선(827~898)이다. 도선의 일생은 신화로 둘러싸여 있다. 고려 건국의 일등 공로자이므로 상세한 기록이 있어야 당연하지만, 역설적으로 근거 있는 문헌이 전무하다시피하다. 역사에서 실제로 필요했던 것은 도선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 신화였다는 뜻이다.

그중 가장 사실에 가까운 기록은 도선 사후 150여 년 지나 1150년(의종 4) 최유청이 왕명으로 찬술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이다. 백계산 옥룡사는 전남 광양 백운사의 사찰인데 오늘날 절터만 남았다. 그는 37세에 이곳에 안착해 72세에 입적할 때까지 35년간 머물렀다.

최유청에 따르면, 도선의 속성은 김씨이고 전남 영암인이다. 가계는 불확실한 것으로 봐서 명족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 강씨(姜氏)가 꿈에서 이인이 준 구슬을 삼키고 도선을 낳았다고 한다. 태생이 불확실했던 것이다. 도선은 15세에 월유산 화엄사에 출가했다. 그는 곧 불경의 대의를 깨달아 문수보살의 묘지(妙智)와 보현보살의 현문(玄門)을 깨달았다. 화엄학은 교종으로서 의상대사 이래 신라 불교의 주류였다. 그러나 도선은 20세 때 “대장부가 마땅히 법을 떠나서 고요히 살아야 할 것인데(離法自靜), 어찌 문자에만 부지런히 종사할까보냐”고 생각했다. 문자에 종사하는 것은 교종이며, 법을 떠나 자정하는 것은 선종이다. 선종은 당시 불교의 새로운 사조였다. 선종의 가르침은 교종과 반대로 불립문자(不立文字)이다. 불교의 진리가 문자에 있지 않고, 성품을 보면 바로 부처라는 것(直指人心)이다. 선종의 개조는 527년 인도에서 중국에 온 달마대사였다. 그의 불교사상이 300여 년 뒤 신라에 새로운 열풍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선종 사상은 특히 하층민과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현대와 달리 전근대사회에서 종교는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다. 그런데 중국 선종의 6대 조사 혜능은 나뭇꾼 출신으로 글자도 몰랐다. 그런 전설은 당연히 일반 민중에게 큰 희열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 결과 신라말 고려초에 이른바 구산선문이 개창되었다. 도선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교종에서 선종으로 길을 바꿨다. 그는 전남 곡성의 동리산 태안사에서 법석을 연 혜철대사(惠徹大師, 785~861)의 제자가 됐다. 경주인인 그 역시 화엄사찰인 부석사에 출가했다가 814년 당나라에 구법 유학을 떠나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선사의 법을 이었다. 그는 839년 귀국해 9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문을 열었다. 그 가르침의 종지는 무설의 설(無說之說)과 무법의 법(無法之法), 이른바 머뭄이 없는(無住相) 공(空)의 사상이다.

신화에 싸인 도선의 생애

혜철의 가르침을 받은 도선은 그 뒤 전국을 떠돌았다. 운봉산 밑에서 도굴을 파고 참선도 하고, 혹은 태백산 바위 앞에서 띠집을 짓고 여름을 지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37세 되던 해인 864년 희양현(曦陽縣, 현 광양군) 백계산 옥계사에 정착했다. 하루는 제자들을 불러 “나는 장차 갈 것이다. 대저 인연을 타고 이 세상에 왔다가 인연이 다 되면 가는 것은 이치의 떳떳한 것이니 어찌 싫어하겠는가”란 말을 마치자 가부좌하고 앉아서 입적했다. 898년, 세수 72세였다. “사중(四衆)들이 눈물을 흘리고 부모를 생각하듯 하면서 앉은 시체를 옮기어 절 북쪽에 탑을 세웠으니 유언을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1994년 이후 순천대학교가 옥룡사지를 발굴하다가 나말여초의 부도전터를 발견했다. 도선의 부도전으로 추정되는 이곳에서 돌덧널(石槨, 석곽)이 출토됐는데, 그 안의 석관에서 거의 온전한 상태의 인골이 물에 잠긴 채 발견됐다. 확증은 없지만 아마 도선일 것이다.

선승인 도선이 어떤 경위로 풍수의 길에 들어선지는 확실치 않다. 최유청의 기록에 따르면, 도선이 옥룡사에 정착하기 전 지리산 구령(甌嶺)에 암자를 짓고 있을 때 한 이인(異人)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수백 년 간 숨어살았고 작은 기술(小技)이 있는데, 천한 술법(賤術)이지만 이 역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도하는 법(救世度人之法)”이니 그에게 전하고 싶다고 간청했다. 두 사람은 남해의 물가에서 만났다. 이인은 모래를 쌓아 산천의 순역의 형세를 보여주고 사라졌다. 이에 도선은 음양오행의 술법(陰陽五行之術)을 환하게 깨닫고 더욱 연구했다.

풍수의 이치를 터득한 도선은 신라의 멸망과 새로운 왕자의 출현을 예측하고 개성을 찾아가 왕건의 탄생을 도왔다. 왕건은 장성하자 도선이 남긴 책을 읽고 자신의 천명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몸을 일으켜 삼한을 통일한 것이다. 최유청은 왕건이 “그 성스러운 시대를 창업하여 조용한 가운데 정해진 운수로 받은 것은, 그 원인이 모두 우리 대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도선은 그렇게 자신의 방식대로 천지를 개벽했다.

도선과 왕건은 만났을까? 최유청의 비문만 보면, 도선은 왕건을 만난 게 아니라 헌강왕을 만났다. 도선이 왕건의 아버지 용건을 만났다면 49세나 50세 때고, 그 후 22~23년을 더 살았으므로 충분히 만났을 개연성은 있다. 그러나 [고려사]와 달리 최유청은 왕건이 도선의 책만 읽었다고 적었다. 나주, 영암 지역은 사실 왕건과 인연이 깊다. 왕건은 903년 후백제 영토인 나주를 공격해 점령함으로써 군사적 재능을 입증하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왕건의 후계자인 제2대 혜종은 나주 출신 장화왕후의 소생이다. 그러나 왕건이 나주를 점령한 것은 도선 사후였다.

도선에 대한 또 하나의 잘 알려진 기록은 영암 도갑사의 도선국사수미선사비(道詵國師守眉禪師碑)이다. 이 비문은 1653년(효종4)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썼다. 이경석은 1636년 청나라에 항복할 때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은 인물이다. 수미선사는 세조대의 왕사이다. 도갑사가 배출한 대표적 두 인물의 일대기를 적었지만 도선국사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최유청 비문과 비교하면 그 내용이 신화로 가득 차있다. 이에 따르면 도선은 13세에 당에 구법 유학했다. 그 스승이 일행선사(一行, 683~727)였다. 도선이 귀국하자 일행은 붉은 책 한 권을 주면서, “조심해서 다루고 절대로 일찍 열어보지 말라, 그대에게 왕씨 일가를 부탁하노니 앞으로 7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열어보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도선은 송도에 이르러 왕륭(왕건의 아버지, 세조)의 집에 유숙했다. 그리고 “내년에 반드시 훌륭한 아들을 낳아 도탄에 빠져 고통 받는 백성들을 건지리라”고 예언했다.

정도전도 말살할 수 없었던 풍수설


▎도선대사는 풍수도참에 근거해 왕건의 탄생과 고려의 창업을 예견했다.
이는 물론 사실과 다르다. 도선은 일행선사의 사후 100년 뒤에 탄생했으니 서로 만날 수 없다. 일행은 위대한 밀교승이자 천채적인 천문학자였다. 그는 밀교경전인 [대일경](大日經)을 한자로 번역했고, [대일경소](大日經疏) 20권을 완성했다. 당 현종이 그의 영향으로 밀교에 귀의했다. 그는 또한 현종의 요청에 의해 해와 달, 행성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고 천구의를 제작해 새로운 달력인 [대연력](大衍曆)을 제작했다. 그가 음양오행에 고도로 정통했음은 당연하다. 당나라는 중국에서 풍수설이 본격적으로 성행하던 때였다. 일행 역시 도선처럼 풍수신화의 주인공이었다.

곽박의 [장서]에는 풍수도참과 관련된 일행의 얘기가 전해진다. 현종이 아직 태자였을 때 백운선생 장씨와 사냥에 나갔다가 새 묘지를 보았다. 풍수의 대가인 백운선생은 그 묘의 배치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고, 상주를 찾아가 그 점을 지적했다. 그러자 상주는 자신의 선친이 그렇게 묘를 배치하면 “3년 이내에 만승의 천자가 바로 이곳에 오실 것이 틀림없다”고 예언했다는 것이다.(村山智順, [조선의 풍수]) 도선을 일행에 연결시키려는 것은 일행의 이런 풍수적 아우라를 빌려오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경석 같은 당대 최고의 유교 지식인이 도선에 대한 신화적 비문을 작성했다는 것은 넌센스다. 당시는 병자호란의 병화에 신음하던 때였다. 도선국사의 신통력이 절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풍수도참은 괴력난신을 배척하는 성리학의 근본이념에 배치된다. 조선 건국 초 천도 문제로 의견이 분분했을 때, 정도전은 국가의 운명은 풍수와 무관하며 오직 사람에게 달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은 음양술수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 30대 800년이라 하는 주나라의 운수는 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 국가의 치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 지금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마음속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다 옛사람들의 말을 전해 듣고서 하는 말이며, 신이 말한 바도 또한 옛사람이 이미 징험한 말입니다. 어찌 술수한 자만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겠습니까?”([태조실록] 태조 3년 8월 12일)

신채호가 재평가한 묘청의 서경 천도


▎한국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삼국사기]. 저자인 김부식의 유교적 의식이 담겨 있다.
그러나 조선도 왕실과 민간에서 풍수도참이 널리 유행했다. 조선 후기 송사의 대부분은 묏자리를 다투는 산송(山訟)이었다. 풍수는 1000년 이상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내린 종교에 가까웠다.

유교와 풍수의 대립은 사실 고려 초기부터 존재했다. [훈요십조]에서 보듯이, 왕건의 사상적 자원은 기본적으로 불교와 풍수도참이었다. 그러나 왕건의 옆에는 최응(崔凝, 898~932) 같은 유학자도 있었다. 그는 궁예가 왕건을 의심해 죽이려고 했을 때 기지로 구해낸 인물이다.

왕건이 왕위에 올라 불교와 풍수에 의존하자, 최응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는 문(文)을 닦아서 인심을 얻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왕자는 비록 전시를 당해서도 반드시 문덕(文德)을 닦는 것이지 음양이나 부도에 의지해서 천하를 얻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라고 충고했다. 문덕과 불력, 지기를 대비시킨 것이다. 문덕이란 인심을 얻는 것이다. 천하를 얻으려면 부처나 땅의 힘이 아니라 선정을 베풀어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주장과 요점이 같다. 강력한 반론이었다. 이에 대해 왕건은 “그 말을 짐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는 산수가 신령스럽고 기이하다. 중국으로부터 먼 곳에 끼여 있어서, 사람들의 성품이 부처나 신을 좋아하고, 거기에 복리를 취하려 한다. 지금은 전쟁이 그치지 않아 안위가 결정되지 못하여 주야로 두려워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오직 부처와 신의 음조, 산수의 영험이 혹 임시방편으로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할 따름인데, 어찌 이것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얻는 큰 법도로 삼겠는가”라고 답했다.

왕건은 이념보다 현실을 먼저 본 것이다. 부처나 신을 좋아하는 백성의 정신적 취향, 그리고 병화의 두려움에 떠는 백성의 정신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절대적 위기에 부딪히면 인간의 이성은 초라한 것이다. 왕건의 현실주의적 사고와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훈요십조]에는 유교적 가르침도 있다. 제7조가 그렇다. “임금이 신민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나, 그 요체는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참소를 멀리하는 데 있으니, 간언을 좇으면 어진 임금이 되고, 참소가 비록 꿀과 같이 달지라도 이를 믿지 아니하면 참소는 그칠 것이다. 또, 백성을 부리되 때를 가려서 하고 용역과 부세를 가벼이 하며 농사의 어려움을 안다면, 자연히 민심을 얻고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할 것이다.” 제10조도 그렇다. “국가를 가진 자는 항상 무사한 때를 경계할 것이며,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해 과거의 예를 거울로 삼아 현실을 경계하라. 주공(周公)과 같은 대성도 ‘무일(無逸)’ 1편을 지어 성왕(成王)에게 바쳤으니, 이를 써서 붙이고 출입할 때마다 보고 살피라.”

유교는 사람의 사상이다. 사람 중심인가, 부처·땅 중심인가, 이 두 개의 대립축이 고려의 사상적 지형을 이룬 큰 골간이었다. 두 사상의 대립이 극적으로 충돌한 사건이 묘청의 난이다. 이 사건을 사대와 자주의 분열이자, 고려의 정치이념과 세계관을 둘러싼 격렬한 충돌로 이해한 것은 신채호가 처음이었다. 신채호는 “1000년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했다.

조선건국은 사상혁명이었다

묘청은 도선의 후계자로 자임하고, 서경 천도를 주장했다. “신등이 서경의 임원역 땅을 보니 이는 음양가가 말하는 대화세(大華勢)라, 만약 궁궐을 세워 이곳으로 이어하시면 천하를 합병할 수 있을 것이요,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다 신첩이 될 것입니다.([고려사] 김부식전)

풍수도참에 따라 서경 천도를 하면, 금을 항복시키고 사해를 제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허황된 것이다. 그러나 묘청의 주장은 단순한 주술이 아니라 국책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당시 대신들은 묘청을 성인(聖人)으로 칭하고, “국사는 일일이 자문한 뒤에 행하시고, 그 청하는 바는 들어주지 아니함이 없어야만 정사가 이루어지고 일이 성취되어 국가를 보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대한 것은 김부식을 비롯한 단 세 사람뿐이었다.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인 정지상 역시 “이는 성인의 법이요, 나라를 이롭게 하고 국기(國基)를 연장시키는 술”이라고 평가했다.

묘청의 난이 끝나고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해 71세 (인종 23년, 1145)에 완성했다. 그가 이 내전의 의미를 사상전으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는 역사의 형식을 빈 사상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도는 ‘무엇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가’ 라는 문제를 유교적 관점에서 해명하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멸망에 대한 김부식의 논평을 보자. “맹자가 말하기를 ‘천시와 지리는 인화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좌씨는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는 것은 복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망하는 것은 화로 말미암는 것이다. 나라가 흥할 때에는 백성 대하기를 자기가 상처를 입은 것같이 하니 이것이 그 복이요, 나라가 망할 때에는 백성을 초개 같이 보니 이것이 그 화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의미가 있는 말이다. 무릇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포학한 관리의 구박과 강한 종친의 약탈을 그대로 놓아두어 인민을 잃게 되면, 비록 다스리려 해도 어지럽지 않고, 보존하려 해도 망가지지 않겠는가?”(<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제10)

지금의 서울인 남경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논의는 이미 고려 숙종 때 제기됐다. 1096년 김위제는 “개국한 뒤 160여 년에는 목멱양에 도읍한다”는 <도선기>에 근거해 “삼각산 남쪽, 목멱산 북쪽 평지에 도성을 건설하고 때때로 순주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라고 상소했다.(<고려사절요>) 개경의 지덕이 고갈됐다는 주장이었다.

1107년(예종2)에도 서경과 남경 천도가 논의됐다. “이로부터 양경(兩京)의 쇠왕(衰旺)의 설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다달이 성해져서, 고려의 세대를 마칠 때까지 수도를 정하여 임금이 옮겨 거처해야 한다는 설이 분분하였다.”(<동사강목>)

1390년 공양왕의 천도론 역시 그 연속 위에 있었다.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고려의 국가이념과 정신적 기초를 둘러싼 논쟁이 야기됐다. 위회도회군 이후의 정쟁은 낭자한 피바람 속에서 진행됐지만, 동시에 고도의 형이상학적 논쟁이 병행됐다. 그런 점에서 이 정쟁은 고려 정치에서의 통상적 권력투쟁과 성격이 달랐다. 조선 건국이 사상혁명의 성격을 지닌 까닭이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906호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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