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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우리가 몰랐던 일본, 일본인(18)] ‘일본판 나폴레옹’ 꿈꿨던 에노모토 다케아키(제2부) 

죽음보다 차원 높은 용기와 사내의 헌신 

‘적장’ 구로다 권유 받아들여 새 정부에서 전력투구
내전으로 피폐한 조국 위해 지식과 경험 아낌없이 바쳐


▎일본 사무라이 정신을 다룬 액션영화 [쇼군 마에다]. 미국에 귀화한 일본인 배우 겸 제작자인 쇼 코스키가 주연 겸 제작을 담당했다.
월간중앙 5월호에서는 보신전쟁(戊辰戰爭)의 마지막 전투에서 메이지유신의 신정부군에 맞선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의 거병과 일본에 존재했던 2국가 체제인 에조공화국의 성립과 패전을 살펴봤다. 6월호에서는 에노모토가 뜨거운 우정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 이후를 살펴본다. 진영논리를 뛰어넘은 우정과 관용 그리고 애국심이 등장한다.

에노모토와 막부군 간부는 도쿄로 호송돼 타쓰노구치(현 도쿄도 마루노우치)의 감옥에 수감됐다. 옥중에서도 에노모토의 왕성한 지식욕과 호기심은 시들지 않았다. 독서에 몰두하면서 저술까지 했다.

에노모토가 옥중에서 쓴 [가이세이잣소](開成雑俎)에는 닭이나 오리의 인공부화기·소주·비누·양초 등의 제법(製法) 도해(圖解)까지 삽입했다. 그는 이 책을 형에게 보내 가계의 보탬이 되도록 하라고 조언한다. 에노모토는 산업기술의 발전과 생산을 늘리는 일이야말로 미래의 일본을 풍부하게 할 원동력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에노모토는 고료가쿠 시대부터 산업기술이나 화학 실험에 관심을 가졌다. 에노모토는 군인이자 정치가인 동시에 우수한 과학자로서의 자질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에노모토를 포함한 구막부군 간부들에 대한 처분과 관련해 정치권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엄벌을 요구하는 조슈번(기도 다카요시 등)과 에노모토의 재능을 아껴 구명을 주장하는 구로다 기요다카(黒田清隆) 등 사쓰마번과의 사이에 조정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 탓에 에노모토는 2년 반 동안 수감돼 있어야 했다. 홋카이도 개척사로 차관직에 있던 구로다 기요다카는 에노모토가 옥중에서 산업기술 개발을 구상하고 있을 뿐 아니라 홋카이도 개척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석방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또 훗날 [아세가만의 설](痩我慢の説)로 에노모토의 변절 모습을 비판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도 구명 활동에 나섰다. 여러 사람의 노력 덕분에 메이지 5년(1872) 1월 6일 에노모토는 특사로 출옥했고, 두 달 후 마침내 무죄 방면된다.

구로다는 에노모토를 매일같이 방문해 홋카이도 개척에 함께해 달라고 간청한다. 홋카이도 개척에는 미국도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그랜트 대통령은 현직 장관급 인사를 파견한 데 이어 미국 자본을 투입하는 등 홋카이도를 리틀아메리카로 만들려 했다. 구로다는 이런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외국인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의 협력 없이 홋카이도 개척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에노모토의 힘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구로다는 에노모토의 홋카이도 개척에 대한 열의와 네덜란드 유학 등을 통해 키운 과학자로서의 자질을 잘 활용하면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개척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에노모토는 고민했다. 막신(幕臣)으로서 삿초 정부를 섬길 수는 없다는 반감도 있었다. 하지만 사라져 가던 홋가이도 개척의 꿈이 다시 현실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에노모토는 구로다의 요청을 수락한다. 메이지 5년(1872) 3월 8일자로 에노모토는 개척사 4등 관직(현령 대우)에 출사 발령을 받는다. 막부의 신하로서 마지막까지 삿초 정부에 저항했던 에노모토가 메이지 신정부의 고위 관료에 오르게 된 것이다. 변신의 가장 큰 원인은 구로다 기요다카의 우정이었다.

남자 마음을 돌린 삭발 우정


▎1810년 에도 막부가 제작한 세계지도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의 한반도 부분. 당시에는 일본도 동해를 ‘조선해(朝鮮海)’로 표기한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지유신은 영웅의 시대였다. 양이(攘夷)와 개국을 둘러싸고 일본 열도가 분열돼 보신전쟁으로 발전했다. 그 싸움은 매우 잔혹했지만 이면에는 미담도 있었다. 막신인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메이지 신정부의 구로다 기요다카의 우정을 알아보자.

구로다 기요다카는 이토 히로부미에 이어 2대 내각총리 대신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오쿠보 도시미치에 이어 사쓰마 번벌(閥)의 유력 지도자가 된다. 구로다는 보신전쟁과 세이난(西南)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다.

결국 정치에 나서 내각총리대신까지 올랐지만 추문도 많았다. 처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다혈질의 인물인데다가 주호(酒豪)였지만 지인지감(知人之鑑)이 각별했다. 적장이었던 에노모토의 가능성과 인물됨을 알아보고, 국가발전에 기여하도록 했다.

에노모토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구로다는 삭발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에노모토는 자유의 몸이 된다. 나중에 구로다의 딸과 에노모토의 장남이 결혼했고, 둘은 사돈이 됐다.

구로다 기요다카는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2대 내각 총리대신에 취임한 인물이다. 일본사 교과서 등에는 메이지 22년(1889) 2월 11일 일본 제국 헌법 반포 시 총리대신으로 기재돼 있다. 그런데도 구로다의 고향인 사쓰마, 지금의 가고시마 현에는 그를 현창(顯彰)할 만한 비석이나 동상이 하나도 없다. 총리대신을 지냈던 인물이라면, 현창비와 동상 하나쯤은 고향땅에 있을 법하지만 가고시마에는 아무것도 세워지지 않았다.

그 수수께끼의 열쇠는 구로다의 생애 안에 숨겨져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이끌었던 세이난전쟁에서 사이고와의 이견으로 고향인 사쓰마에 총부리를 겨눴기 때문일 것이다.

홋카이도의 개척자로 거듭나다

에도막부 말기 당시, 고향 선후배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구로다 기요다카는 서로 아끼고 존경하는 사이였다. 구로다는 스스로 자신이 사이고의 뒤를 이을 인물이라 여겼다. 사이고는 메이지 5년(1872)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구로다에 대해 쓰고 있다.

“에노모토를 극형으로 다스리려던 논의가 관대한 처분론으로 바뀌게 된 데는 구로다의 성심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믿음직스럽습니다.”

보신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된 하코다테의 ‘고료가쿠의 전투’에서 구로다는 신정부군의 육군 참모를 지냈다. 그는 에노모토가 이끄는 구막부군이 농성하고 있는 고료가쿠를 공격하는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구로다는 전후 일관되게 적장이었던 에노모토의 구명 탄원운동을 펼쳤다. 탄원을 위해 삭발까지 감행한 구로다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남아 있다.

그때 사이고는 구로다의 헌신적인 행동을 칭찬했다. 사이고의 구로다에 대한 평은 그야말로 절찬이다. 사이고는 구로다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했고, 다음 세대를 끌어갈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메이지 6년(1873)의 정한론(征韓論)이 일자 구로다는 사이고와 대립한다. 그 후 일어난 세이난전쟁에서는 사이고를 포함한 예전의 동료를 토벌하려고 고향인 사쓰마로 진군한다. 그리고 반란군을 진압한다. 또한 구로다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암살 당한 후에는 사쓰마번벌의 중진이 된다.

사이고가 세이난전쟁에서 패배해 자결하고, 오쿠보가 암살 당한 후 구로다라는 인물은 보통사람으로 변모하고 말았다는 평가도 있다. 원래 구로다라는 인물은 군사 방면에 재능이 출중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이고가 죽고, 그 다음 해 오쿠보가 암살 당한 뒤로는 사쓰마번 출신 인재가 부족하다 보니 구로다가 번을 대표하는 인물로 정치 표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구로다의 우정 어린 설득으로 개척사가 돼 홋카이도로 건너간 에노모토는 하코다테 주변에서 이시카리·히다카·도카치·구시로를 돌면서 자원 조사를 했다. 소라치탄전(이시카리 탄전의 북부)을 발견한 것은 에노모토였다. 하코다테에 일본 최초의 기상관측소를 설치한 것도 에노모토다. 그는 홋카이도 개척을 위해서는 기상관측소가 필요하다고 통감하고 있었다. 훗날 에노모토는 기상학회회장에 오른다.

메이지 7년(1874) 1월 에노모토는 주러시아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돼 러시아와의 영토 교섭에 임했다. 아울러 일본 최초의 해군 중장이 됐다. 페테르부르크에 부임한 에노모토는 약 1년간의 교섭 끝에 ‘가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樺太·千島交換条約)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의해 가라후토 전도(全島)는 러시아가, 쿠릴열도는 일본이 영유하기로 결정됐다.

또한 오호츠크해 및 캄차카 주변의 일본 어업권도 인정받았다. 이후에도 에노모토의 활약은 눈부시다. 신생 일본의 기반 확립에 많은 공헌을 했다. 메이지 15년(1882) 8월에는 주청 특명 전권공사가 돼 북경에 부임했다.

메이지 17년(1884)에 일본과 같은 근대 입헌군주제 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세력의 쿠데타(갑신정변)가 조선에서 일어나면서 청·일 양국 관계가 악화된다. 이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자 일본 측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와 청의 이홍장이 회담했을 때는 에노모토가 이토를 보좌해 천진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메이지 18년(1885)에 내각제도가 시작되면서 에노모토는 제1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체신(遞信)대신에 취임한다. 메이지 21년(1888) 구로다 기요다카 내각에서는 체신대신과 농상무대신을 겸임했다. 그해 전기학회의 초대 회장이 됐다. 다음해 2월 11일 일본제국 헌법 발포식의 당일에 암살된 모리 아리노레(森有礼)의 후임으로 문부대신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이 희망한 도덕 교육의 기준 책정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듬해 해임된다. 메이지 24년(1891) 제1차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내각의 외무대신이 돼 조약 개정 교섭에 임한다.

만년까지 정력적으로 활동하다 73세에 눈감아


▎1. 메이지유신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오쿠보 도시미치. / 2. 구로다 다케아키가 존경했던 사이고 다카모리, 메이지유신의 주역이다.
메이지 27년(1894)에는 제2차 이토 내각의 농상무 대신으로 취임했다. 이때 제철소의 건설과 관련해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민영이 아닌 관영 공장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아시오 구리야마 광독(鑛毒) 사건의 책임을 지고 에노모토는 농상무대신직을 사임했다.

만년(晩年)에도 에노모토는 공업화학회 초대 회장이 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메이지 33년(1900)에는 심우(心友) 구로다 기요다카의 장의위원장을 맡았다. 메이지 38년(1905) 10월에 해군 중장으로 퇴역했고 메이지 41년(1908년) 7월 신장병을 앓다가 같은 해 10월 26일 눈을 감았다. 향년 73세로 묘소는 도쿄도 분쿄구 기치죠지에 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하코다테 고료가쿠를 굳게 지키며 끝까지 신정부군에 저항한 구막부군의 리더였다. 하지만 메이지 5년에 특사로 석방되고 나서는 풍부한 기술 지식과 국제법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신생 일본국 만들기에 공헌했다. 그러나 그 공적에 걸맞은 평가가 이뤄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에조공화국 총재로서 마지막까지 신정부군과 싸웠다는 이미지가 너무 컸던 탓도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도쿠가와 막부의 해군 부총재였던 남자가 손바닥을 뒤집듯 삿초의 메이지 신정부를 모시고 크게 출세한 것이 ‘두 명의 군주를 섬기지 않는다’는, ‘무사도’(武士道) 정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에노모토를 그렇게 평가한 것이 세간의 비판을 한층 더 증폭시켰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일본인은 사이고 다카모리나 히지카타 도시조(土方歲三)처럼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관철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람들을 영웅으로 기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에노모토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싫어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에노모토의 공적은 이대로 역사 속에 매몰돼야 할까? 정말 에노모토는 변절자였을까?

에노모토 일행이 8척의 함대로 시나가와 앞바다를 탈주, 도호쿠를 경유해 지금의 홋카이도 에조치 하코다테로 향하던 때다. 이때 도쿠가와 15대 쇼군 요시노부는 새 정부에 공순(恭順)을 표하며 미토에서 근신하고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싸울 의사가 없었으며 도쿠가와 정권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에노모토 일행이 또 다른 저항을 계속한 것은 왜일까. 무인으로서 고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노모토에게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에노모토는 시나가와 바다를 벗어나며 가쓰 가이슈에게 ‘덕천가신대거고문’(徳川家臣大擧告文)을 건네며 신정부에 전해 달라고 했다. 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는 이전부터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진 도쿠가와 가신을 위해서 에조도 개척에 대한 허가를 바라고 있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싸울 수밖에 없다.” 또 에조치를 향해 센다이를 떠날 때 에노모토는 “구막신의 구제(救濟)와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고자 에조치를 개척하는 것이 목적이지 결코 조정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는 취지의 문구를 새 정부에 보냈다.

강요에 의한 변절? 꿈을 위한 변신!


▎1. 에노모토 다케아키, 메이지 정부에서 중용돼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 2. 일 본 제2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구로다 기요다카. 그는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석방을 위해 삭발까지 했다
에노모토 등이 수립한 에조 공화국에는 지금까지 일본에는 없었던 특징이 있었다. 첫 번째는 투표로 수뇌 인사를 결정한 것이다. 두 번째는 포로를 취급하는 데 인도적 방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마쓰마에를 공략했을 때 투항해 온 500명의 적병 가운데 희망자는 배에 태워 아오모리에 보냈다. 농상공인이 되고 싶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를 허락했다. 당시만 해도 포로는 무조건 죽어야 하는 시대였으니 그 조치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세 번째는 의사 다카마쓰 료운(高松凌雲)을 원장으로 하는 일본 최초의 적십자 병원(하코다테 병원) 창설이다. 피아 구분 없이 병사를 치료했고, 그 뜻을 적에게도 전달해 포화로부터 지켜냈다. 이러한 정책들은 네덜란드 유학을 경험한 에노모토만의 진보적인 행보였다. 에노모토는 일본이란 국가를 위해 에조치를 개척해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고, 이웃 나라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했다.

에노모토는 수감돼 있을 때 누나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 자신의 연구 성과를 홋카이도 개발에 유용하게 쓰고 싶다. 하지만 더 이상 이룰 수 없게 됐다.” 에노모토는 사형에 처하게 될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북쪽 땅을 개척해 부강한 땅을 만들겠다는 꿈만은 계속 갖고 있었다. 그런 에노모토를 필사적으로 구명한 구로다 기요다카로부터 홋카이도 개척사로 함께 일해 줬으면 좋겠다는 간청을 받았을 때, 에노모토로서는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하코다테 전쟁에서 죽어간 수많은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에노모토는 이 ‘십자가’를 평생 짊어질 각오를 했을 터이다. 그는 홋카이도 개척, 러시아와의 영토 교섭, 청국과의 평화 교섭 등을 실시했다. 3명의 내각총리대신 아래에서 체신대신·농상무대신·문부대신·외무대신을 역임했다.

식민협회를 창립해 멕시코에 이민단을 보냈고 막신의 자제에 대한 장학금 제도(토쿠가와 육영회)를 시행해 현재의 도쿄 농업대학 전신인 육영학교를 창립했다. 에노모토는 기상학회장, 전기학회 및 공업화학회의 초대 회장도 맡아 학술연구의 진흥에도 진력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변절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에노모토는 누군가에게 강요 당해 자신의 삶을 바꾼 것은 아니다. 홋카이도를 신천지로 개척해 풍부한 대지로 거듭나게 하고 정권 교체를 통해 생겨난 많은 실업자들(무사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려는 꿈을 꿨다.

그리고 에노모토는 홋카이도에 강한 정부가 탄생한다는 것은 일본 국가에도 도움이 된다고 봤다. 북방으로부터 ‘틈새’를 노리는 러시아에 대한 방위력 강화에도 연결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구로다의 권유를 받아들여 홋카이도 개척사로 새 정부를 섬기게 됐다.

국가와 내전(內戰)으로 불행해진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최대한 발휘해 공헌하려고 하는 생각이 에노모토를 움직였다. 이건 결코 전향도 변절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에노모토 다케아키라는 인물을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들의 꾸밈없는 ‘붉은 마음’의 사귐

일본 태생의 미국의 대표적인 일본 학자이자 주일대사를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1910~1990) 하버드대 교수는 [일본 제국주의 흥망사]에서 근대 일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젊은이들의 꿈을 꼽았다. 라이샤워는 그들의 꿈에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이해관계가 없어 보인다고 분석했다. 바로 이런 점이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 근대국가를 이룬 원동력이 됐다고 라이샤워는 진단했다.

이 대목에서 눈에 띄는 단어가 세키신(赤心)이다. 우리의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단어인데 잘 쓰지는 않는다. 우리가 잊고 지냈던 ‘붉은 마음’이라는 고루한 단어가 사실은 얼마나 값어치 있는지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은 진영논리에 얽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총칼을 들이대던 구원도 씻고 같은 목표인 ‘나라 만들기’라는 대의를 향해 진력했다. 그들의 우정은 대륙의 문경지교(刎頸之交)라는 과잉 감정의 사귐이 아니었다. 서로의 마음을 꾸밈없이 바라보고 더 큰 뜻을 향해가는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우정이었다.

돌아보면 에도 무혈개성으로 전화(戰禍)의 위기로부터 일본을 구한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쓰 가이슈의 우정도 있었다. 일본인의 미적 감각에는 진심, 즉 마고코로(眞心)라는 것이 있다. 진솔한 마음이다. 꾸밈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마음의 아름다움이다.

일본인들은 애국도 정치도 이런 마음으로 하나만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높게 쳐줬다. 그들은 일생 동안 하나의 일에 매진한다. 그것도 진심을 담아서 한다. 서로의 진심을 알아보고 우정을 키우고 더 큰 목표인 애국을 향해 매진한다.

히타무키(直向き)는 한 가지 일에 전념하는 모양이다. 오로지 목표를 향해 ‘곧장, 열심히, 외곬으로, 일편단심, 한결같다’라는 의미가 있다. “믿어라. 너에겐 오로지 나만, 나에게도 오로지 너만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도 적심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적심이라는 단어로 돌아와서 그 말의 어원을 살펴보자. 거짓과 꾸밈없는 마음, 순진무구한 마음이다. 붉을 적의 ‘赤’ 자에는 ‘알몸의, 아무것도 아닌 노골적인’라는 의미가 있다. 맹자에는 ‘적자지심’(赤子之心, 세상의 더러움을 받지 않은 아기 같은, 부정 없는 마음)라는 말이 나온다. 아기는 피부가 얇고 붉게 보여서 그런가?

아무튼 요즘 같은 시대에 적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어도 진심의 힘을 언제나 믿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우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인생이야말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상생의 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적심이 아닌 흑심으로 권력을 탐하는 정치인들은 되새겨 봐야 할 대목이다. 잘 꾸며진, 편집된 세계관으로 흑심을 감춘 무리들이 널려 있는 시대다. 우리는 적심과 흑심을 구별할 줄 하는 구로다 기요다카 같은 지인지감을 키워야 하겠다.

그리고 한 시대가 막을 내린 시점에서 절망적인 패배에 좌절하지 않고 제2의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경험하고 익힌 세계를 ‘나라 만들기’에 진력한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용기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무사처럼 쉽게 죽을 용기 대신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는 차원이 다른 용기를 낸 아름다운 전향도 눈여겨봐야겠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1906호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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