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선비 정신의 미학(39)] 두 스승 순절 지켜본 탁와(琢窩) 정기연 

“우리 말(言), 우리 예(禮), 우리 것 쓰겠다”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세에 충청도 송병선 형제 문하로 들어가 유학의 길 입문
망국 뒤 우경재에 은둔하며 습례국 고안하고 국한혼용 앞장서


▎탁와의 증손인 정원지(오른쪽)·정원일 교수가 경산시 옥곡동 우경재를 찾았다.
'습례국(習禮局).’ 예를 익히는 판이라는 뜻이다. 국립한글박물관에는 낯선 이름의 이 물건이 보관돼 있다. 습례국은 제사상 차림을 익히는 놀이기구다. 여기에는 장기판처럼 그려진 습례국과 주사위 역할을 하는 전자(轉子), 판에 놓는 말 역할을 하는 나무패 등이 있다. 나무패의 앞면에는 대추·밤·감·배·물고기·떡·산적 등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 이름이, 뒷면에는 1부터 22까지 숫자가 적혀 있다. 또 놀이 방법을 한문 원문과 언해문으로 같이 설명한 [습례국도설(習禮局圖說)]이 있다.

한글박물관이 이 놀이기구에 주목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조선시대 유학자는 대부분 한글이 백성들 속으로 파고든 뒤에도 한자와 한문을 주된 문자로 사용했다. 일부 국어학자는 선비들이 일상에서 한글을 실제로 어떻게 사용했는지 연구해 왔다. 습례국은 일제강점기의 한 유학자가 국문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사례다. 그는 당대 어떤 선비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한학을 깊이 공부하고 많은 한문 글을 남겼다. 그러면서도 한글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바로 탁와(琢窩) 정기연(鄭璣淵, 1877~1952) 선생이 걸어간 길이다.

4월 19일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북 경산시 옥곡동 우경재(寓敬齋)를 찾았다. 경산의 진산인 성암산(聖巖山)의 한쪽 기슭이다. 한눈에 봐도 뒤쪽은 산이 깊다. 우경재는 그 아래 외딴 곳에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도심에서 멀지도 않다. 500m쯤 가면 도로 건너편으로 아파트가 숲을 이룬다.

선생의 손자인 정유열(87) 옹이 동행하면서 내력을 설명했다. 일대는 경산 지역 초계(草溪) 정씨 집성촌이었다. 관향 초계는 경남 합천군 초계면에서 따왔다. 1905년 옥곡동을 가로질러 경부선 철도가 들어선다. 그러면서 하나둘 옥곡을 떠났다. 지금은 초계 정씨가 주변에 10호쯤 남았다고 한다. 탁와 연보에 따르면 우경재가 지어진 것은 1913년. 우경재는 방 2개와 누각으로 이뤄진 조촐한 건물이다.

유도(儒道) 수호 다짐하며 학문에 매달려


우경재로 들어섰다. 우경재는 최근 신대구부산고속도로가 뒤쪽으로 높이 지나가면서 소음이 심해졌다. 자동차가 씽씽 지날 때마다 주고받는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다.

우경재는 나라 잃은 선비가 의지한 은둔처였다. 탁와는 임진왜란 중에도 향교의 성현 위패를 지켰다는 성암산 아래서 유도(儒道)를 수호하겠다며 학문에 매진했다. 그러면서 일제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어 그때그때 몇 줄의 글귀로 쓰라린 마음을 달래던 공간이다.

시대는 엄중했다.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사람들은 유학을 싸잡아 비판하고 나섰다. ‘사대(事大)의 온상’이란 공격이다. 대신 개화(開化) 사상이 밀려왔다. 탁와는 그런 중에 결심한다. “만국이 모두 신법(新法)을 쓰고 온 세상이 신학(新學)을 한다 해도 나는 우리 옷, 우리 관(冠), 우리 말, 우리 예(禮) 등 우리 것을 쓰겠다. 7척의 작은 한 몸으로 천하 만고 의리의 큰 것을 담당해 죽을 때까지 지켜나가겠다.”

그래서 그는 [사례제요(四禮提要)] [습례국도설] 등을 쓰며 전통 예학을 재정리하고 교육 방법을 새로 모색했다. 탁와는 유학자로서 우리 것, 특히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는 11책에 이르는 방대한 [탁와집(琢窩集)]을 남겼다. 이 문집에는 한글로 쓴 저술도 포함돼 있다. [탁와집] 7책 권14의 ‘습례국도설’이란 글이다. 선비 문집에 국문이 등장하는 건 파격이다.

‘도설’과 함께 습례국이라는 기발한 실물도 뒤늦게 발견돼 탁와의 창의적인 과학정신에도 관심이 모아졌다. 습례국이 세상에 드러난 과정은 흥미롭다. 정 옹이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에는 우리 집안도 습례국이란 놀이기구가 있는 줄 몰랐다. 한글박물관 개관위원장을 맡은 홍윤표 교수가 습례국도설과 관련된 사연을 2013년 [한글 이야기]란 책에 실었다. 그래서 연락했더니 홍 교수는 대뜸 ‘바둑판처럼 생긴 습례국이 집안에 없느냐’ 좀 알아봐 달라고 했다.”

“한문도 이 땅에 있으면 우리나라 국문”


▎탁와가 고안한 습례국과 전자, 나무패 그리고 국한혼용 사용설명서. / 사진:국립한글박물관
탁와 후손은 그때부터 습례국 찾기에 나섰다. 정 옹의 회고다. 여성을 위해 만들었다니 집안의 종부 격인 형수에게 물었지만 그도 알지 못했다. 혹시 딸에게 전했나 싶어 고모에게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오래 전 집안을 정리할 때 종손 격인 형님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다시 확인하니 형수는 그제야 시고모가 보자기에 싸 준 물건을 풀어보지도 않고 장롱 위에 얹어 둔 걸 기억해냈다. 보자기를 내려 처음으로 풀었다. 이게 웬일인가. 그 안에는 습례국이란 유품이 들어 있었다. 옆에 붙은 서랍에는 한문에 한글을 곁들인 사용설명서도 들어 있었다.

“탁와 할아버지가 부녀자를 가르치기 위해 한글까지 남겼다는 자체가 놀랍다. 한문으로만 써 놓았다면 딸들 누구도 그걸 해석하고 사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평생 한학을 공부했지만 한글을 같이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실용적 가치를 아셨다고 생각한다.” 문중은 이후 습례국을 한글박물관에 영구 기증했다.

변용을 받아들이며 전통 지키려 애써


▎드론으로 촬영한 삼의정의 전경. 위쪽으로 우경재가 작게 보인다
탁와는 이렇게 일찍이 한글의 효용성에 눈을 떴다. 그렇다고 탁와가 한글만 옹호한 건 아니다. 1945년 광복 이후 한동안 한자폐지론과 한글전용론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1947년 71세 탁와는 ‘옥석문답(玉石問答)’이라는 글에서 이와 관련한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한자폐지론에 대한 일종의 반론이다. 금장태·고광직이 쓴 [유학근백년(儒學近百年)]에는 탁와의 주장이 이렇게 나온다.

“한문이 중국에선 중국 국문이지만 우리나라에 있으면 우리나라 국문이 된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곡식이 중국에 있으면 중국 곡식이지만 우리나라에 있으면 우리나라 곡식인 것과 같다. 보리밥만 먹다가 쌀밥이 먹고 싶어 쌀을 시장에서 사다가 집에 두면 자기네 쌀이지 시장 쌀은 아니다. 우리나라 한문은 우리 집에 있는 시장에서 사온 쌀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수천 년 동안 한문을 쓰다가 갑자기 한글만 쓰자는 것은 손발이 움직이는 것만 생각하고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원기를 끊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탁와는 이렇게 변용을 받아들이면서 전통을 지키려 애썼다. 특히 전통 예법을 철저히 고수했다.

“할아버지는 1951년 돌아가실 때까지 상투를 틀었다. 경산에서 상투를 한 마지막 유학자였을 것이다. 반일이 뼛속까지 사무쳐 일제가 내린 단발령을 거부한 것이다. 또 집에서 500m쯤 떨어진 사당을 아침마다 찾아가 조상 감실에 문안을 드렸다. 눈이라도 내리면 두 살 아래 동생이 업어드리느라 고생 참 많이 했다.”

탁와는 1877년 경산시 옥곡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한하게 살지는 않은 듯하다. 탁와는 8세에 향리에서 글공부를 시작해 20세인 1896년 부친의 명을 받아 충청도의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과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1839∼1912) 형제를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연재와 심석재는 조선 유학의 한 획을 그은 우암 송시열의 후손이다.

[탁와집]에는 스승 연재를 처음 뵌 날의 감상이 기록돼 있다. 선생은 용모가 장중하고 기상은 준엄하나 말씀은 온후했다고 한다. 또 자신에게 뜻을 굳건히 세우고 퇴폐한 세파에 물들지 말라는 당부를 하셨다고 적혀 있다. 연재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해 을사5적의 처단과 국권회복을 바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탁와도 스승을 따라갔다. 연재는 자신의 뜻이 임금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고향으로 강제 송환되자 음독 자결했다. 강직한 선비였다.

난형난제. 아우 심석재도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국권을 상실하자 이를 개탄하며 1912년 음독 순국했다. 심석재는 “죽는 것은 사는 것보다 어려우면서 살기보다 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탁와의 학맥은 궁금한 대목이다. 탁와의 부친이 어떤 연유로 영남학파 남인(南人)의 본거지 경상도를 두고 멀리 충청도의 노론(老論)쪽 연재·심석재 문하로 아들을 보냈는지 의문이다. 안내한 정 옹도 “그건 들은 게 없다”고 했다.

공부하다가 들고 내려온 서책만 수천 권


▎1. 11책 규모의 [탁와집]. / 2. 탁와 정기연의 초상.
여하튼 두 스승은 다른 어느 제자보다 탁와를 아낀 듯하다, 연재는 1903년 “내 평생 정기연의 집에는 한번 가봐야겠다”며 경산 옥곡동을 방문했다. 41세 차이가 나는 어린 제자에 대한 스승의 기대와 사랑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탁와는 불행히도 나라를 잃고 설상가상으로 두 스승까지 한꺼번에 잃는 신세가 돼 버렸다. 탁와는 비통함과 울분을 안고 향리로 돌아온다. 그때 천석꾼인 백형(伯兄)이 나섰다. “재실을 지을 테니 공부하고 온 만큼 그곳에서 고을 후진을 가르치며 학문을 계속하라.” 그래서 지은 게 우경재였다.

당시 배움에 치열했던 탁와가 들고 내려온 서책은 수천 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논 몇 마지기를 팔아야 살 수 있다는 [송자대전] 등이 들어 있었다. 우경재는 이후 서당이 되고 [탁와집]의 저술 공간으로 기능했다. 탁와가 평생 읽고 저술한 책 1451권은 현재 영남대에 보관돼 있다.

1912년 7월 일왕 메이지(明治)가 죽는다. 일제는 우리 국민에게도 상을 당한 복식을 하도록 강요했다. 옷 위에다 나비 모양의 검은 휘장을 붙이라는 것이다. 우경재에 은거하던 탁와는 나라 잃은 원한과 슬픔을 사립문을 닫아건다는 뜻의 ‘엄비음(掩扉吟)’이란 한시로 표현했다. 절망의 신음소리다.

紛紛海外蝶(분분해외접) 바다 건너 검은 나비 어지럽게 날아들어
來坐東人衣(내좌동인의) 우리 백성 옷깃 위에 함부로 내려앉네
攘臂那知恥(양비나지치) 팔뚝을 걷는다고 부끄러움 가실 거냐 (중략)


탁와는 한편으로 집안사람들이 일본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대신 남자는 한자와 한글을, 여자는 한글을 쓰게 했다. 습례국을 만든 것도 그 일환이다.

우경재를 나오자 50m쯤 떨어진 곳에 삼의정(三義亭)이란 누각이 보였다. 이곳 역시 탁와의 흔적이 남은 공간이다. 1948년 탁와가 만년에 문장(門長, 문중의 어른)이 된 뒤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한 선대 조상을 추모하고자 건립을 주도한 정자다. 삼의사(三義士)는 경산 입향조의 5대 손인 정변함·정변호 형제와 4촌 동생 정변문을 가리킨다.

삼의정은 사방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문중은 측면 진입로를 정원처럼 널찍하게 꾸며 놓았다. 그 끝에 시비 하나가 보였다.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탁와가 지은 ‘특별한’ 한시다. 제목이 ‘聞安義士重根殺伊藤博文(문안의사중근살이등박문,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이다. 예사롭지 않다. 전문(全文)은 이렇다.

封狐渡海禍俱臻(봉호도해화구진) 벼슬한 여우가 바다를 건너오니 그 재앙도 함께 이르렀구나
抱劒躊躇幾箇人(포검주저기개인) 응징할 칼을 품고 망설인 자 얼마던고
有一少年伸大手(유일소년신대수) 한 젊은이가 있어 큰 손을 내뻗쳐 쏘아 죽이니
東天快嘯動西隣(동천쾌소동서린) 동녘 하늘에는 쾌재소리 울리고 서쪽 이웃을 감동케 하였도다


1909년 10월 26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안중근(1879~1910) 의사의 하얼빈 총성이 금방이라도 들릴 듯 생생하다. 거사의 배경과 의미도 짧은 4행에 오롯이 담겨 있다. 다만 탁와가 자신보다 단지 두 살 아래인 안 의사를 ‘소년’으로 표현한 게 이채롭다. 이 한시는 [탁와집] 1책 권1 22쪽에 실려 있다.

안중근 의사 칭송하는 글 찾기 어려워


▎삼의정 입구에 세워진 ‘문안의사중근살이등박문’ 시비.
이 시를 문집에서 찾아낸 이는 지금은 고인이 된 탁와의 손자 정구열이라고 한다. 정구열은 서울대 사학과를 나와 독학으로 한문을 익힌 뒤 [탁와집]을 읽어 내렸다고 한다. 이 한시는 그가 국역했다. 정구열은 이어 2007년 후손들과 함께 삼의정 정원에 이 시비를 세웠다. 시비 뒷면에는 안 의사의 결행과 삼의사의 충의 정신이 맥을 같이 한다고 새겼다.

동행한 정유열 옹은 “형님이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도 안 의사 의거에 만사(輓詞)를 남겼는데 우리 이천만 동포는 당시 누구도 안 의사를 칭송하는 글을 지은 걸 보지 못했다’며 찬양시비 건립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또 그 까닭을 “광복이 될 때까지 왜적의 이목이 두려워 모두 숨 죽이고 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정구열은 1997년에는 [탁와집]을 읽은 뒤 후손들이 꼭 알아야 할 글을 뽑아 [탁와집 초역본(抄譯本)]을 만들기도 했다.

감용문(感龍門)을 지나 삼의정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따라 정자의 2층 마루로 올라갔다. 널찍한 정자에 시판이 여럿 걸려 있었다. 시선을 끈 것은 대들보 가운데 큼지막하게 쓴 ‘求道’(구도)라는 글자였다. 퇴계 이황이 인근 대구 고산서당(孤山書堂)에 남긴 친필을 탁본해 새긴 것이다. 삼의사가 바로 고산서당을 세운 주역이기 때문이다. 삼의정은 탁와 사후인 1956년 준공된다.

탁와는 이렇게 망국과 두 스승의 순절, 일제강점기, 광복과 서구 문명의 유입이라는 변혁기를 숨 가쁘게 살았던 유학자였다. 그는 ‘이경전(二耕傳)’이라는 글 등을 통해 시대가 변해도 유교의 도통(道統)을 이어 발전시키면 그것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틀림없이 건설할 수 있다고 믿은 선비였다. 그런 중에도 우리 것의 소중함을 실천하고 또 깨우쳤다. 특히 유학자로서 한글을 한문과 함께 일찍이 받아들여 혼용을 강조한 선각자이기도 했다.


[박스기사] 아들 잃은 비통함 장문으로 남긴 탁와 - ‘제망아문’에 아로새긴 유학자의 인간적 슬픔


자식이 부모보다 앞서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탁와는 14세 아들을 앞세우고 그 비통함을 ‘제망아문(祭亡兒文)’이라는 장문(長文, 14∼22항)으로 남겼다. 표현이 절절하다. [탁와집] 10책 권19에 실려 있다. 탁와의 손자 정구열이 국역한 일부를 소개한다.

내 아들 상주(相周)는 열네 살이 되도록 성장해서 경술년 11월 25일 신시(申時)를 기해 부모의 손길 속에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집에서 남쪽으로 양지 바른 곳에 묻혔다. 아비는 비통함을 참고 한을 머금은 채 이듬해 신해년 8월 13일 정사(丁巳)에 이르러 햇과일 몇 점과 감주 한 그릇으로 묘 앞에 새벽 전(奠)을 베풀면서 통곡하노라.

아! 상주야! 나는 어떻게 참고서 너를 여기에 묻을 수 있었으며, 너는 어찌 감히 나를 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너는 모질게도 너의 부모를 버렸으며, 또한 할머니·증조모마저 버렸구나!

오늘은 곧 너의 생일이다. 너를 낳은 자는 너의 아비 어미지만 너의 삶을 바라보고 기뻐하던 사람은 너의 할머니·증조모였다. 지금 너의 아비 어미는 모두 이 세상에 있고, 너의 할머니·증조모도 계시는데 너는 어찌 가서는 돌아올 줄 모르는가. 나는 너의 생일인 이날을 잊지 않고 있는데 너는 어찌 이날을 잊었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이 무덤까지 한번 올라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너는 내가 온 줄을 알고는 있는가. 길게 불러 봐도 대답이 없으니 이 일을 안다고는 할 수 없겠구나.(중략)

(상주야!) 복 많은 집안에 다시 태어나 오래오래 장수해 평생의 한을 씻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 너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다. 내 보기로도 너처럼 아름다운 자질을 지닌 사람이 어찌 한번 죽음으로써 그뿐이겠나 싶다. 반드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내가 다시 이것을 너에게 바라나니 너는 저버리지 말지어다.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201906호 (2019.05.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