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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25)] 사막의 독거수행(獨居修行) 여정 

공포와 고통, 성찰과 낭만의 땅을 향해 

인도 문명 탐험 뒤 요르단 사막에서 홀로 살아보기 실험
모래 광야 바위산 중턱 그늘에서 고독한 단독자의 자유 만끽


▎장기 체류 프로젝트를 하게 된 요르단 사막의 전경. 다섯 개의 텐트가 필자의 숙소다.
델리에 도착했을 때, 나는 샹그릴라라고 불리는 5성급 호텔로 곧장 갔다. 호텔에서 제일 높은 층에 방을 하나 얻었다. 그곳에 방을 얻게 되면 디너에 앞서 드링크와 간단하지만 맛있는 스낵을 제공하는 클럽라운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나는 그날 온종일 호텔에서 지냈다. 풀장과 스파를 마음껏 활용하면서, 쥐와 먼지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내었다. 사실 최상의 사치라는 것은 고급의 정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설을 최대한으로 향유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에 달린 것이다.

나는 나의 삶의 장면의 극적인 전환에 부응하여, 샹그릴라 호텔에 머무는 하루와 반나절을 최대한으로 향유하고 또 향유했다.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욕조에 몸을 담그는 모든 순간이 순결한 환희였고, 내 입안에서 홀짝거리거나 한입 씹거나 하는 모든 순간이 절대적인 지락(至樂)이었다. 다음날 한국에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을 때, 나는 지나간 나의 삶의 장면들에 대하여 더 없는 만족감과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인도문명과의 첫 랑데부를 결론짓고 있었다.

인도 여행 후에 나는 나의 주된 홈베이스를 요르단의 암만으로 옮겼다. 때는 2013년 4월이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신음하는 나의 낙타 보싸(Bossa)를 보러 이집트로 갔다. 내가 요르단에 5월에 돌아왔을 때, 나의 주된 관심은 사막에서 홀로 사는 것을 실험해보는 데 있었다.

나의 베두인 가이드 아우데(Aude)의 배다른 형인 타야(Tayah)는 와디 럼(Wadi Rum)에 투어리스트 캠프를 하나 소유하고 있었는데, 내가 장기간 머물 수 있는 시설을 제공해주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 캠프는 빌리지로부터 사막 한가운데로 12㎞ 정도 더 들어간 곳에 한적하게 위치하고 있었는데, 4륜구동 자동차로 모래 위를 달려가면 25분 정도면 도달하는 곳이었다. 이 캠프는 서쪽으로는 100m 정도 되는 바위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20m 정도 되는 바위 조성물이 있는데, 그 사이에 안온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 관광객들을 위한 시설로서 지어졌으나 거의 관광객 손님을 받지 않았다. 주인인 타야의 주 수입원이 경주용 낙타를 기르고 경주에 참가시키고 또 파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이 안온한 바위계곡 전체를 실제로 나 혼자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나를 쉽게 발견할 수 없도록 캠프가 잘 가려져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나에게는 매우 이상적인 작업 환경을 제공했다.

도시와 인간으로부터 절대적 은둔


▎필자의 숙소 뒤편에 우뚝 솟은 바위산 중턱. 마치 신전과 같은 장엄한 풍경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단독자로서의 은신처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번의 나의 체류 목적은 베두인의 삶과 문화를 배우는 데 있지 않았다. 나는 도시의 소음과 인간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는 절대적 은둔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곳이어야만 했다. 나는 방해 받는 일 없이 계속 집필하고 싶었고, 나 자신의 존재의 성찰에 집중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의 문제였다. 지나치는 베두인 남자들이 이방의 처녀가 홀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았다.

이러한 실험을 감행하도록 나를 내몬 충동성은 그리 희귀한 욕구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또 도시의 억압적인 삶에서 발생하는 막연한 염려로부터 근원적으로 해방되고 싶어서 격리된 광야에서 카타르시스적인 체험을 갈구하는 성향의 도시인이라면 이러한 시도를 한 번은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이 지구상에는 다양한 자연의 풍경이 존재하지만, 사막은 단연코 매력적인 곳으로 부상되게 마련이다. 사막은 ‘죽음’이라는 존재상황과 항상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사막의 가혹한 삶의 조건은 인류의 문화적 환경 속에 대부분의 유일신 종교제도를 탄생시켰고, 세계 인구의 절반 가량의 사람들을 예속시켰다. 다시 말해서 유일신 사상은 사막의 특수정황이 만들어낸 판타지이지, 그것이 곧 종교의 고등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사막의 이미지는 항상 고난, 수난의 이미지로 물들어 있었다. 사막을 실제로 체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사막에 가게 되면 길을 잃거나, 인정머리 없는 열기와 갈증에 기운을 못 차리거나, 모래광풍에 파묻히거나, 전갈이나 독사에게 물리거나 하게 마련이라는 공포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가 하면 또 수많은 유명 소설이나 영화 덕분에 우리는 사막에 대한 매우 긍정적이고 로맨틱한 이미지를 가깝게 느끼기도 한다. 광활한 허공, 모든 기억과 과거의 슬픔을 날려버리는 뜨거운 모래바람, 고통을 당하지만, 또 정화시킬 수 있는 곳, 아마도 싯다르타와도 같은 각자(覺者)가 될 수 있는 곳. 유명한 문학작품의 몇몇 전형적인 고전들이 사막을 배경으로 했다. 폴 보울스의 [피안의 하늘(The Sheltering Sky)](1949, 1990년 베르톨루치에 의하여 영화화), 미카엘 온닷지(Michael Ondaatje)의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1992, 1996년 안토니 밍겔라(Anthony Minghella)에 의해 영화화, 9개 부문 아카데미 수상), 앙투완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의 [어린 왕자(Le Petit Prince)](1943, 3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됨),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의 [연금술사(The Alchemist)](1998, 영화 제작은 계속 시도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함. 브라질 사람의 소설로써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등의 작품이 열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다음의 항목 중에서 반드시 몇 개의 주제들을 전개 시킨다: 서사시적인 사랑이야기, 비극적인 상실, 죽음, 자아발견, 구원, 그리고 영적인 계시.

생존과 문명의 필수품 사이의 타협


▎바위산 중턱에 책상을 놓으니 뙤약볕을 피해 개인 서재로 삼기에 제격이다.
나 역시 타야의 캠프에서 장기 거주를 기획했을 때에는 이들 테마 중 한두 개의 클리셰를 가슴에 품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오랫동안 단순한 전통적 주거 환경 속에서 토착 유목민들과 섞여 지내온 나로서는 사막의 고존(孤存)을 유지시키려면 어떠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에 관해 나 자신의 확고한 철학을 정립시킨 후였다. 그 조건에는 모종의 타협이 필요했다. 가장 단순한 무위(無爲)적인 생존의 필수품과 내가 도시에 살면서 향유한 최소한의 문명 필수품 사이의 조화라 할까, 하여튼 그러한 타협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선, 긴 시간 동안 사막에서 혼자 살면서도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의 허리를 다치지 않고 읽고 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것은 단순한 요청이다. 내 몸에 맞는 책상과 의자였다. 그러나 이 따위 아주 단순한 삶의 사치가 베두인의 삶의 공간 속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목제 책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사진을 찍어 보내면서 설명해야만 했다. 그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것이다. 내가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아우데는 나에게 말했다. “알아, 알아. 나도 알아! 그런 거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아마도 그런 것은 아카바의 시장에서 살 수 있을 거야!”

베두인들은 내가 목격한 한에 있어서는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이 무엇인가 읽을 때에는 마룻바닥이나 보료 위에 팔뚝을 괴고 축 늘어진 채로 읽는다. 학교 다니는 아동들도 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거나 그냥 바닥에 앉은 채로 한다. 그들이 전기나 인터넷, 그리고 부수되는 휴대전화나 텔레비전, 노트북, 도요타자동차 같은 것을 어찌나 빠르게 수용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마치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의 결합처럼 느껴지지만,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불가결의 물건들이라고 여겨지는 아주 기초적인 것들은 오히려 결여돼 있다. 유선전화라든가, 책상이라든가, 스프링이 들어간 침대 매트리스라든가, 나무의자 같은 것은 전혀 그들에게 생소한 아이템인 것이다.

2013년 5월 중순, 암만에 있는 내 아파트에서 일주일 가량을 보내면서, 내가 그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다시 어울린 후에 나는 드디어 사막을 향한 짐을 새롭게 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책상 하나를 사기 위해 먼저 아카바로 갔다. 아카바는 인구가 15만이나 되는 매우 북적대는 대도시이다. 요르단 국경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 요르단의 유일한 항구도시이기도 하다.

기원전 4000년 경부터 이미 많은 인구가 모여 살았으며 구리광산이 있었다. 지금도 요르단의 경제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관광산업이 발달하면서, 아카바의 홍해 해안은 환상적인 리조트와 휴가를 위한 콘도미니엄 건축물로 쫙 깔려 있다. 그렇지만 아카바의 구시가지 다운타운에는 지역 상인과 남부 요르단 전역에서 몰려드는 빌리지의 사람들로 붐비고 있는 것이다. 와디 럼의 빌리지에서 오는 베두인들도 이들 중 한 그룹이다.

‘사막살이’ 위한 본격적인 채비


▎침실과 주방 등으로 쓰인 5개의 텐트. 가운데 텐트를 침실로 꾸몄다.
와디 럼에서 여기까지 차를 몰고 오면 한 40분 걸린다. 그들은 사막에서 구할 수 없는 특별한 물건들을 구매하러 때때로 아카바를 와야만 한다. 이 도시는 진실로 사람들이 북적대는 살아있는 도시였으며 혼돈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영어를 말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토속적인 동네였다. 그래서 내가 책상을 산다 할지라도 그것을 와디 럼까지 운반하기 위해선 아우데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는 친절하게도 직접 아카바로 와서 같이 책상을 산 후에, 그것을 와디 럼까지 실어다주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아카바에서 만나 시장을 헤맸다. 시내에서 가구를 파는 집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으나, 놀랍게도 책상은 모두 싸구려 합판으로 만들어진 매우 저질스러운 물건뿐이었다. 그들이 파는 물건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모두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우선 그 따위 나뭇가루를 눌러 만든 합성목으로는 사막의 척박한 외부환경을 견디어 낼 수가 없다. 내가 이 데스크를 쓰고자 하는 곳은 실내가 아닌 실외였으니 말이다.

사막이라는 광활한 공간에 사암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환상적인 독서 사무실을 차려놓기 위해서는 자연소재의 단단한 나무책상이 필요했다. 플라스틱 베니어판이나 발암물질이 방출되는 합성목재의 책상으로는 나의 꿈이 이루어질 길이 없었다. 작열하는 사막의 끝없는 공간을 쳐다보면서 읽고 쓰고… 아, 얼마나 멋있는 생활인가! 다섯 집을 돌아다닌 후에, 드디어 우리는 단단한 나무로 된 책상을 발견했다. 마호가니 칼라로 색상을 입힌 것인데, 나무는 단단하고 튼튼했다. 그리고 사이즈가 꼭 내 마음에 들었다. 랩탑을 놓고 주변에 책이나 하드디스크나 커피컵을 여유있게 놓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될 수 있었다.

아우데의 트럭에 분해된 책상을 싣고 와디 럼 빌리지에 도착했을 때, 아우데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궁금증에 사로잡혀 사온 것이 뭐냐고 물어댔다. 그중의 한 사람은 아우데의 사촌이었다. 아주 핸섬하게 생긴 23세의 청년이었다. 이름은 모하메드 팔라라고 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오는 알라딘처럼 생긴 인물이었다. 아우데가 이것은 내가 캠프에서 사용하려는 책상이라고 설명해주자마자, 그는 운반을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트럭에 훌쩍 올라탔다. 우리가 캠프에 도착했을 때, 모하메드는 이 책상이 돌산 꼭대기로 운반돼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책상은 밥상 테이블과는 달리 내가 앉은 곳을 빼놓고 3면이 막힌 4개의 나무 패널로 이뤄져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4개의 패널을 한꺼번에 목과 어깨에 올려놓고, 머리를 기울여 두 손으로 4개 패널 전부를 치받은, 상태로 돌산의 중턱에 내가 나의 서재로 지정한 곳까지, 계속 걸어가는 것이다.

도무지 마호가니 색상의 책상 무게를 생각할 때 아무리 힘 있는 성인이라 할지라도 4개의 패널을 혼자 한꺼번에 치켜들고 나른다는 것은 상상키 어려운 과업이었다. 책상이 놓여질 돌산의 고지에 올라가는 것만 해도 10분은 걸렸다. 모하메드는 매우 홀쭉한 몸매여서 나는 그의 건강이 심히 걱정됐다. 그래서 패널을 나누어 여러 번에 나르자고 계속 제안해도 그는 단번에 운반할 것을 계속 고집했다.

도대체 그런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나에게는 불가사의였는데, 그는 쉼이 없이 단번에 전 패널을 목적지까지 나르는 데 성공했다. 아우데는 천성이 매우 게으른 사람이었다. 그는 이 과정을 캠프의 자동차에 기대어 쳐다보기만 했다.

우리는 모하메드가 가져온 작은 포켓 나이프를 이용해 책상을 조립했다. 사실 그것은 조립을 위한 마땅한 공구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모하메드는 그 공구를 매우 솜씨 있게 활용했다. 가구상에서 실수로 같은 면의 패널을 두 개 주는 바람에 구멍이 맞지 않았지만, 모하메드는 구멍을 하나 더 파서 나사못이 제대로 박히도록 조립해주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단단한 나무책상이 탄생되었고, 그것은 끝없는 사막의 장쾌한 파노라마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사암의 고지 위에 단단히 자리잡았다.

헐렁한 옷차림, 생애 처음 있는 해방감


▎완벽한 고독과 자유의 공간에서 가부좌를 틀고 수행을 시작하는 필자
베두인들이 정오에 떠난 후 나는 캠프에 홀로 남게 되었다. 이제부터 실험의 첫날을 시작해야만 했다. 제일 먼저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캠프에는 텐트가 5개 한 열로 지어져 있는데 그중에서 내가 거주할 텐트를 고르는 일이었다. 이 텐트들은 현대식으로 지어져서 전통적인 베두인 텐트와는 좀 다른 성격의 것이었지만, 사도 바울이 만들었다고 하는 염소털로 짠 텐트 기지로 건물 외벽 전체를 덮은 것은 전통적 감각을 계승하고 있었다. 그것은 관광객들을 위해 지어진 반영구적 구조물이었는데, 바닥을 지면에서 약 20㎝ 가량 띄어서 지은 것이 특이하고 현명한 설계였다. 쇠프레임으로 바닥을 띄어 만들고, 그 위에 합판을 깔고 그 위에 비닐돗자리를 덮었다. 바닥이 공중에 떠있기 때문에 뱀이나 전갈이 방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 방마다 두 개의 트윈 사이즈의 쇠프레임 베드가 있는데 그 위에 스프링 침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싸구려 스펀지매트리스가 놓여있는 것이다. 그리고 입구 반대편에는 여닫이 창문이 하나 있다. 입구의 문도 경첩이 달려 여닫는 것인데 안쪽에서 잠금장치인 빗장이 달려있다. 나는 5개 텐트의 사정들을 면밀히 살핀 후에 한가운데 있는 텐트를 방으로 골랐다. 짐을 안에 넣고, 긴 소매의 셔츠를 벗고 나니 안도의 한숨이 푹 나왔다.

나는 베두인들이 옆에 있을 때는 피부를 노출시키지 않고자 신경을 썼다. 보수적인 베두인 윤리를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그들이 나를 쉽게 다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막에 관광 온 서양의 여성들은 탱크톱이나 쇼트팬츠를 입고 자유롭게 다니지만, 나는 베두인들 앞에서 그렇게 품위 없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이미 그들의 문화에 꽤 동화돼 있었다. 실상 사막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소매 없는 셔츠를 입고 다닌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발상이다.

그러나 고독의 첫 순간만은 나는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좀 느슨한 까만색의 탱크톱을 걸치고, 헐렁한 요가바지에 밀짚모자를 쓰고 베일 속의 머리카락이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내버려두는 첫 순간의 감동은 내가 이 사막에서 자유롭고 고독한 단독자가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일종의 축하연이었다. 그냥 내가 입고 싶은 것을 입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해방감을 맛본다는 것은 내 생애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동쪽의 바위언덕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책상이 놓인 나의 서재는 서쪽 바위산의 중턱에 있다. 그 맞은편의 나지막한 바위산이 나의 주거가 있는 곳이다. 동쪽 바위언덕의 최하단 암벽을 활용해 부엌을 만들었다. 그 바위언덕 꼭대기에는 직사각형의 금속 물탱크가 두 개 놓여 있는데 이것이 부엌과 욕실에 물을 공급한다. 나는 호기심에 물탱크 위로 올라가서 뚜껑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놀랍게도 물은 맑고 깨끗했다. 물론 수면 위로 떠다니는 까만 개미가 적지 않게 보였지만.

나만을 위한 바위언덕의 서재와 카페


▎사막 체류 준비를 마친 첫날 직접 마련한 점심 식사
나는 바위언덕을 더 올라가서 내가 오전에 머물 수 있는 그늘진 곳이 있을까 하고 살펴보았다. 내가 서재로 삼은 곳은 서쪽 바위산 중턱에 있기 때문에 완벽한 동향이다. 그러니까 오전에는 그늘이 들지 않는다. 오후 2시 이후에나 나의 책상에는 그늘이 드리운다. 사막에서 ‘그늘’은 매우 중요한 삶의 조건이다. 작열하는 태양을 직접 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열기를 느끼기도 하지만 금방 피부에 화상을 입는다. 바위에 가려지는 그늘 속에 앉아있기만 해도 최소한 섭씨 10도 정도는 더 서늘하게 느낀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아우데의 엄마 캠프 밖에서 잤을 때 이미 아침 7시가 되면 태양은 너무나 강렬했다. 8시만 돼도 태양 아래서 몇 분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아우데 엄마의 집에 있을 때 아침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물론 지금 새로 생긴 이 텐트 속에서는 늦게까지 잘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태양이 내려 쬐기만 하면 이 텐트 속은 찜통이 되고 만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바위언덕의 북쪽으로 기어올라갔을 때,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아침운동을 할 수 있는 아주 완벽한 장소 하나를 발견했다. 바위언덕의 중턱에 나의 서재와 비슷한 매우 평평한 공간이 있는 것이다. 지상으로부터 5m 정도의 높이에 있는데 동쪽 바위에 가려 오후 시작 때까지는 완벽하게 그늘에 덮였다. 서편 서재에서 일하기 전까지 오전의 시간을 여기서 보내면 되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곳에서 빌리지까지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어서 그런지, 폰 시그널이나 인터넷 시그널을 통해 아이폰으로 세계의 뉴스를 접할 수도 있었다. 뉴스를 볼 필요는 없어도 접할 가능성은 남겨두어야 한다. 물론 내가 쓰는 전기는 모두 태양광을 활용한 자가발전이다. 나는 이 장소를 나의 모닝 까페(my Morning Café)라고 이름 지었다. 이 곳의 평평한 표면은 구들장 같은 회색돌이 깔려있어서 마치 로마궁전의 바닥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 돌바닥 위에서 매일 아침 북향의 광활한 파노라마를 쳐다보면서 요가를 하고 좌선의 수행을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물론 사막에서의 나의 일정은 내가 첫날 꿈꾸었던 그러한 규칙적 일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단독자의 디시플린은 자유를 지향한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아름답고도 신선한 생활에 대한 흥분과 희망을 안고 캠프로 돌아왔지만, 부엌이 엉망진창인 것을 발견했다. 쓰레기와 곰팡이투성이였다. 깨끗한 부엌이 없이는 안락한 삶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나는 즉시 청소작업에 착수했다. 절해고도의 사막 한가운데라는 것을 생각하면 진실로 여기 부엌은 모든 현대적 시설이 갖추어진 매우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스테인리스 싱크대, 수도꼭지, 가스탱크에 연결된 3개의 버너가 있는 쇠프레임의 스토브, 돌로 된 카운터, 쇠다리 두 개 위에 걸쳐놓은 합판 식탁, 주전자, 단지와 프라이팬, 접시걸이, 접시와 사발, 실버웨어, 유리컵, 금속제 소반 등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바닥에 깔려있는 타일이나 벽면을 포함해 그 모든 것이 때와 먼지로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싱크대는 쓰다 남은 찻잎과 음식물 찌꺼기로 막혀 곰팡이 천지였고 온갖 수챗구멍 악취가 서려있었다.

광활한 파노라마를 향해 펼쳐낸 첫 밥상


▎서재가 있는 바위산에서 바라본 장쾌한 광야의 원경.
깨끗한 접시조차도 음식찌꺼기로 덮여있었다. 이것들을 모두 내 기준으로 청소하려면 몇 날 며칠을 걸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우선 싱크대라도 치우고, 접시를 깨끗이 하고, 마루를 닦자! 주전자는 필요하니까 우선 닦자! 뚜껑을 열어보니 곰팡이 핀 찻잎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을 씻어내고 나는 몇 번 물을 채워 박박 끓였다.

그리고는 점심을 준비하려고 방금 빌리지에서 사온 음식 재료를 점검했다. 20개 정도의 쿠부츠빵, 5개의 통마늘, 올리브기름 한 병, 자아타르(za’atar) 한 봉지(아주 전형적인 중동 지역의 향신료. 백리향, 소금, 참깨, 거먕옻나무 이파리 말린 가루를 섞어 만든다. 검붉은 가루인데 좀 시고 레몬향이 난다), 오이와 토마토 한 봉지, 요구르트 3곽, 참치통조림, 옥수수통조림, 야채캔, 올리브 기름, 한 통의 후무스(병아리 콩가루로 만든 찍어먹기용 반죽), 무타바알(가지와 참깨를 으깨서 만든 페이스트), 주스 한 통, 밀크 한 통, 몇 개의 음료수 등이었다.

이 중 몇 개의 아이템은 곧 상할 수도 있는 것이라서 우선 첫 식사거리로 선별했다. 냉장고가 없는 이 사막의 열기 속에서 음식물이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토마토와 오이를 썰고, 무타바알과 요구르트 패키지를 뜯었다. 그리고 빵 한 개를 가스스토브 위에 김 굽듯이 구웠다.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점심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나는 바위 사이에 그늘진 곳을 찾았다. 부엌 실내에서 우그리고 앉아 먹는 것보다는 시원한 밖에서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단독자로서 처음 향유하는 식사에 대한 대접이 아닐 것 같았다. 사막의 그늘에서 사막을 향해 첫 점심을 먹어라! 나는 언제나 미식가이고 애식가이다. 주어진 조건에서 나는 항상 가능한 최상의 식사를 창조하려고 세심한 주의를 쏟는다.

오후 4시경 나는 점심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서쪽 바위산을 올라갔다. 나는 캠프에서 빈약한 플라스틱 의자를 하나 찾았다. 나의 서재로 가서 책상 앞에 의자까지 구비해 놓았을 때, 그 지역은 완전히 그늘에 덮여 있었고, 매우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플라스틱 의자는 내 등허리를 제대로 받쳐줄 수 있는 단단한 나무의자를 발견할 때까지 임시로 사용하기로 했다. 나는 책상 앞에 걸상을 놓은 후 서재 부근 환경과 파노라믹 뷰를 친근하게 느끼기 위해 여기저기 걸어 다녔다. 그리고 고원의 벼랑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시작했다. 광활한 사막의 에너지를 한 몸에 빨아들일 기세로 앉았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906호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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