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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대기자의 사랑학개론(18)]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편지' 

남편이 거세되는 불행에도 부부의 사랑은 불멸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단테와 베아트리체만큼 유명한 사랑 이야기
파리 페르라셰즈 묘지 두 사람 합장 무덤은 세계 연인들의 성지


▎영국 화가 에드먼드 레이턴(1852~1922)이 그린 ‘아벨라르와 그의 제자 엘로이즈’(1882). / 사진:포로호베네스
예수는 결혼에 대해 [신약성서]에서 이렇게 말했다([성서]는 결혼에 대해 다양하게 서술하고 있다. 편향되지 않게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공동번역 [마태오의 복음서] 19:12)

여기서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은 순화된 표현이다. 원래는 고자(鼓子, ‘생식 기관이 불완전한 남자’)다. 우리말 개역 한글 성경·개역 개정 성경·새 번역 성경, 영어 성경인 킹제임스성경(KJV)·새국제판성경(NIV)·새미국표준성경(NASB)도 고자(eunuch)로 나온다. [마태오의 복음서] 19장 12절은 ‘신(神)의 나라’를 위해 독신이 되는 사람도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교 교부인 오리게네스(185년경~254년경)는 이 성경 구절을 너무나 중시한 나머지 스스로 거세했다.

사도 바울은 ‘신의 나라’를 위해 살려면 독신이 좋지만, 아무나 독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 같다.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명령이 아니라 충고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다 나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은총의 선물이 각각 다르므로 이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삽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과 과부들에게는 나처럼 그대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습니다.”(공동번역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7:6~9)

질녀를 친딸처럼 사랑한 숙부, 응징을 선택하다


▎스위스 화가 앙겔리카 카우프만(1741~1807)이 그린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이별’(1780년 이전). / 사진:요크프로젝트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오리게네스만큼 유명한 피에르 아벨라르(1079년경~1142년 혹은 1144년)는 거세당한 경우다. 아벨라르는 중세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엘로이즈(1101~1164년, 혹은 1100~1163년)라는 여성 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엘로이즈의 숙부가 아벨라르를 거세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사랑의 역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겼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가 주고받은 [서신]의 영문판(펭귄 클래식, 1974) 서문에 따르면, 둘의 사랑은 단테와 베아트리체, 로미오와 줄리엣만큼 유명하다.

아벨라르는 당시에는 프랑스의 변방인 브르타뉴에서 하급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남으로 태어났기에 기사 작위를 물려받아 편하게 살 수 있었다. 동생에게 양보하고 철학자가 되기 위해 1100년 파리로 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 무장한 그는 스승들까지 이내 능가했다. 당대 최고의 학자가 됐다.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 중 한 명이다. 수천 명의 학생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아벨라르는 파리대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를 비롯한 명강사들이 파리대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여러 대학이 파리대를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아벨라르는 ‘유럽 고등교육의 아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벨라르는 [에티까(Ethics)]에서 선과 악을 결정하는 것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라는 의도주의(intentional ism) 학설을 제시했다. [내 고통 이야기(Historia Calamitaum)](1132년경)라는 짧은 자서전에서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적었다. 아벨라르가 겪은 고통 중에는 재능이 너무 뛰어나 시기의 대상이 되는 고통과 더불어 사랑의 고통이 포함됐다.

엘로이즈와 아벨라르는 1115~1117년쯤에 만났다. 그때 엘로이즈는 10대 후반이거나 20대 초반이었다. 현대 연구가들은 20대 초반이었다고 본다. 엘로이즈가 남긴 편지에 보면 둘이 헤어졌을 때 엘로이즈는 22세였다.

엘로이즈에게는 그를 애지중지하는 숙부 퓔베르가 있었다. 퓔베르는 파리대 성당의 참사회원(canon)이었다. 퓔베르의 보호와 후견 속에 엘로이즈는 당대 최고의 명망 있는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엘로이즈는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에 능통했다.

아벨라르는 퓔베르에게 엘로이즈의 가정교사가 되겠다고 제안했다. 앙큼한 속셈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학문적으로 가장 유명한 여성인 엘로이즈를 유혹해 보겠다는 욕심이었다. 입주 가정교사가 된 아벨라르가 엘로이즈에게 사랑만 가르친 것은 아니다. 아벨라르에게 의학을 배운 엘로이즈는 훗날 수녀원 원장으로 있을 때 의사로서 명성이 높았다.

15년에서 20여 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뜨겁게 사랑했다(둘의 생몰 연대에 대해 이견이 많아 둘이 실제로 몇 살 차이었는지 알 수 없다). 이때를 아벨라르는 이렇게 회상했다. “엘로이즈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기쁨은 세상의 모든 향수의 방향(芳香)을 능가했다.” “교육이란 구실하에 우리는 완전히 사랑에 몰두했다. 교육을 구실로 사랑에 필요한 별실이 제공됐다. 펼쳐진 책을 앞에 두고 철학 공부보다는 사랑 이야기가 더 많았고, 학문 설명보다는 입맞춤이 더 빈번했으며, 내 손은 내 책으로 가는 일보다 더 자주 그녀의 가슴으로 갔다. 사랑은 두 사람의 눈이 교과서의 문자 위를 더듬게 하지 않고 서로의 눈망울 속에 머물게 했다.”

만난 지 1년 안에 숨 가쁜 일들이 있었다. 엘로이즈는 아들을 출산했다(아들 아스트롤라베가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 둘은 비밀리에 결혼한다. 아벨라르가 엘로이즈를 버리려 한다고 오해한 퓔베르는 아벨라르를 거세한다. 퓔베르는 아벨라르의 하인을 매수하고, 악당 4명을 고용해 거세를 감행한다. 당시 여성들은 마치 남편을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고 전한다. 질녀에 대한 이러한 퓔베르의 집착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퓔베르가 엘로이즈의 친부였거나 엘로이즈를 여성으로서 사랑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10대 여학생과 30대 스승의 사랑은 달콤했으나···


▎프랑스 파리에 있는 페르라셰즈 묘지에 있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무덤. / 사진:피에르이브 보두앵
성직자의 독신은 가톨릭의 ‘교리’가 아니라 전통이나 규율이다. 당시 교회는 성직자의 독신을 강화하고 있었다. 특히 고위 성직자가 되려면 독신이어야 하는 방향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둘이 결혼하면 아벨라르의 ‘출세’는 물 건너갈 가능성이 컸다. 아벨라르는 비밀 결혼을 구상했고 엘로이즈는 당차게도 아예 결혼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거세 사건으로 결혼은 무의미해졌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각자 수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둘이 헤어지고 12년 후 아벨라르는 [내 고통 이야기]를 썼다. 1132년경 책을 접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후 둘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둘의 편지는 1616년에 출간됐다. [편지]는 [내 고통 이야기], 아벨라르가 엘로이즈에게 보낸 편지 4통,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보낸 편지 3통으로 구성됐다.

[편지]는 밸런타인데이 선물로도 인기 있다. 사랑과 종교에 대해 중세 최고의 남녀 지식인 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편지]의 전반부는 사랑, 후반부는 성경, 수도자 생활, 윤리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편지]는 뜨거운 논란을 불렀다. 일부 학자들은 책 전체가 위작이라고 주장한다. [편지] 전체를 아벨라르가 모두 썼다는 주장도 있다.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강간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뜨거운 논란 끝에 전통적인 해석으로 돌아갔다. 아벨라르가 거세 이전에 둘이 주고받은 113통의 편지의 일부도 1980년대에 발견됐다. 역시 저자에 대한 논란이 있다.

“나는 황후보다는 그의 창부가 되겠다”


▎스페인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1682)가 그린 ‘가나의 혼인 잔치’(1672년경). / 사진:데팍토
엘로이즈와 아벨라르가 쓴 편지들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면 둘이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드러난다. 또 예수가 둘의 사랑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알 수 있다.

엘로이즈가 보낸 첫 번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주인 혹은 차라리 아버지, 내 남편 혹은 차라리 오빠인 아벨라르에게. 그의 여종 혹은 차라리 딸, 그의 아내 혹은 차라리 여동생인 엘로이즈가.” 답신으로 아벨라르가 엘로이즈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엘로이즈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엘로이즈의 오빠인 아벨라르로부터”로 시작한다.

이에 대한 답신인 엘로이즈의 두 번째 편지는 “그리스도 다음으로 내게 유일한 당신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에게 유일한 내가”로 시작한다. 아벨라르의 답신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신부에게, 그리스도의 종복으로부터.” [편지]에는 아벨라르의 ‘신앙고백’이 포함된다. 자신을 이단으로 단죄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은 정통 신앙이라고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두 번이나 이단으로 정죄됐고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책은 불살라졌다. ‘신앙고백’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때 세상 안에서 내게 소중했으며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게 가장 소중한 내 여동생 엘로이즈여.”

[편지]가 드러내는 엘로이즈는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철학자다. 그는 그리스도교 페미니즘의 기원으로 인정된다. 엘로이즈는 [편지]에서 자신이 바란 것은 오로지 아벨라르이지, 결혼이 아니었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엘로이즈는 황후가 되기보다는 아벨라르의 정부(情婦), 심지어는 창부가 되겠다고 고백했다. 엘로이즈에게 아내라는 타이틀이나 결혼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결혼이 일종의 ‘성매매 계약’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여성에게 열린 길은 주부, 수녀, 성매매 여성밖에 없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엘로이즈는 ‘오직 사랑’을 외친 것이다.

엘로이즈의 결혼관은 그의 첫 번째 편지에 이렇게 나온다. “사람의 가치는 재물이나 권력에 달린 게 아니다. 사람의 재물과 권력은 행운이 결정하지만, 사람의 가치는 공적이 결정한다. 가난한 남자보다는 부자인 남자와 더 기꺼이 결혼하는 여자는, 그리고 남편을 남편 그 자체보다는 그의 재물을 보고 원하는 여자는 그 자신을 팔겠다고 내놓은 것이다.”

[편지]에 나타난 엘로이즈의 고백은 놀랍도록 솔직하다.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내가 순결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내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른다. 미사 중에도 아벨라르와 나눈 쾌락의 음탕한 영상이 불행한 내 영혼을 사로잡는다. 나는 기도가 아니라 음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신앙 안에서 둘은 영원한 안식과 사랑을 얻었다


▎아일랜드 화가 피비 애나 트러퀘어(1852~1936)가 그린 ‘열 처녀의 비유’. / 사진:스티븐 딕슨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그동안 왜 연락이 없었는지를 물으며 “당신이 내게 집착하게 만든 것은 애정이 아니라 욕정, 사랑이 아니라 성욕의 불꽃이었다”라고 몰아세운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추궁에 변명하지 않는다. 자신이 엘로이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 엘로이즈는 욕정의 대상이었을 뿐이었기에 둘의 관계는 죄라고 정리해 버린다. 왜 그랬을까. 아벨라르는 엘로이즈가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수도생활에 전념하기를 바란 것 같다.


▎한글판 『편지』의 표지
둘은 헤어진 후 단 한 번 파리에서 잠시 마주친 적이 있다. 둘이 부부로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엘로이즈가 아벨라르를 순화시켰을 것이다. 아벨라르는 도처에 적을 만드는 특별한 재주를 타고난 인물이었다. 반면 엘로이즈는 모든 사람과 잘 지냈다고 한다. 성직자들과 민중이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엘로이즈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12세기 유럽은 문명과 야만이 혼재하는 지역이었고, 그야말로 법은 멀고 주먹과 칼이 가까운 시대였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보다 20여 년을 더 살았다. 합장하려고 관을 열었을 때 아벨라르의 유해가 엘로이즈를 안기 위해 팔을 벌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둘의 사랑에 감동한 황후 조제핀 보나파르트(1763~1814)의 명으로 1817년 둘은 파리 20구에 있는 페르라셰즈 묘지에 이장됐다. 둘의 무덤은 연인들의 성지다.

비문(碑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됐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 그들의 영혼을 하나로 결합했으며 그들이 헤어져 있을 때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영적인 편지로 보존됐던 사랑이 그들의 육신을 이 무덤 안에 재결합했다.”

※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서울대 외교학과와 스탠퍼드대(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에서 공부했다. 중앙일보에 지식전문기자로 입사, 심의실장과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서강대·한경대·단국대 등에서 강단에 섰다. 지은 책으로 [따뜻한 종교 이야기] [CEO를 위한 인문학] [대한민국을 말하다: 세계적 석학들과의 인터뷰 33선] [마음고전] [아포리즘 행복 수업] [하루 10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말하다] 등이 있다.

201906호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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