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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 김영희 대기자의 ‘한반도 워치’] 미·중 무역전쟁의 십자포화 맞는 한국 

다자 안보기구로 일본과 중국을 속박하라 

동북아 주요 국가 협력 발판으로 한반도 비핵·평화 꾀할 때 양자 관계 축적→느슨한 협의체→안보·경제 다자기구 프로세스

▎3·1절 100주년을 하루 앞둔 2월 28일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대사관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내걸렸다.
우수·경칩이 지나면 동면하던 생명들이 땅속에서 나와 부지런한 활동을 시작한다. 한반도 주변 국가 수뇌들이 6월 말 오사카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한반도 주변에서 먹이를 다투는 모습이 우수·경칩을 맞아 겨울잠에서 깬 개구리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의 활동으로 한반도라는 웅덩이가 왁자지껄하다.

현충일 아침 [중앙일보]는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 6월 28~29일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 앞서 한국을 방문한다고 보도했다. 보도가 맞는다면 그가 온다, 안 온다던 큰 논란에 종지부가 찍힌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시진핑이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이라는 역설적인 현실이다. 그의 방한기간 중 열릴 한·중 정상회담의 의제는 북핵문제로 포장될 것이다. 그리고 공동성명이나 언론 발표문에는 한반도 비핵화에 의견 일치를 재확인했다는 의례적인 말이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진핑의 요구의 실체적인 내용은 ‘중국의 일대일로에 가입하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가담하지 말라’,‘화웨이와 거래하지 말라’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라’는 무거운 압박일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이미 화웨이와 거래하는 한국 기업의 두 다리를 서로의 방향으로 잡아끌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궁지에 몰렸고, 정부는 기업들이 알아서 하라며 손을 놓고 있는 한심한 실정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진핑이 한국에 온다는 보도는 오보로 밝혀졌다. 한국 정부는 시진핑의 방한을 갈망했다. 그러나 시진핑은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시점에서 한국에 올 수가 없다. 하나는 김정은에 대한 배려다. 김정은은 2018년 이후 중국을 네 번이나 방문했다. 그리고 시진핑은 김정은이 초청한 북한 방문을 수락하고, 시기를 조정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시진핑이 북한보다 남한을 먼저 방문하는 것은 김정은에 대한 노골적인 배신이다. 두 번째 이유는 트럼프가 6월 말 오사카 G20 정상회의 뒤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돼 있는 민감한 시점이다. 시진핑이 트럼프에 앞서 한국을 방문하면 전선이 확대되고 있는 미·중 무역전쟁에서 한국과 미국 사이를 벌리려는 전략으로 오해를 받을 수가 있다. 시진핑의 계산으로는 한국 방문에서 얻을 실익이 없다.

한국의 모호성에 반대 입장을 표한 미국 대사


▎2018년 대(對)이란 제재 위반 혐의로 캐나다 사법 당국에 체포된 멍완저우 화웨이 부회장 겸 최고재무책임자(오른쪽). / 사진:AP/연합뉴스
시진핑 방한 불발은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다. 미·중 경제전쟁이 군사·안보 전쟁으로 확전 중이다. 미국 국방성이 6월 1일 발간한 ‘인도·태평양 전략보고서’에서 대만을 국가로 지칭했다. 이것은 중국의 핵심 이익(core interest)에 대한 정면 공격이다.

미국은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 때 상하이 코뮤니케에서 하나의 중국을 받아들였다. 1979년 지미 카터 정부는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대만과 외교관계를 끊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실천에 옮겼다. 트럼프는 이 원칙을 40년 만에 뒤집었다. 그것은 중국에게는 외교적 핵폭탄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중국의 강력한 대응으로 미·중전쟁의 전선의 확대가 불가피해 보인다. 그리고 그 불똥이 즉각 한국으로 튀었다.

6월 7일 주한 미국 대사 해리 해리스는 한국군사학회 주최 세미나 연설에서 한국에 세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동참하라. 둘째, 미국 기업들의 공정 경쟁을 가로막는 규제를 완화·철폐하라. 셋째, 동북아 안보에 필수적인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라이다. 해리스는 이미 한국에 화웨이와의 거래를 중단하라고 요구한 바 있다. 중국에 대항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미국 편에 서라는 요구는 한국을 궁지로 모는 것이다. 미·중 전쟁이 실질적인 열전(熱戰)으로 발전하기 전에 한국이 명시적으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참가를 선언한다면 중국으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보복을 받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한국은 개념전쟁의 단계에서는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이 현명한 정책이다. 인도·태평양 사령관 출신인 해리스 대사는 동맹국인 한국의 이런 태도에 공개적으로 노골적인 반대 입장을 표출한 것이다.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라는 요구는 일방적이다. 한·일 갈등은 한·일 두 나라에 원인이 있다.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관계 회복을 서두르라고 촉구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일 미국 대사가 해리스 대사와 같은 어조로 일본 정부에 한·일 관계 회복을 요구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대사면 대사의 격에 맞는 수사(rhetoric)을 구사해야 한다. 그는 대사지 총독이 아니다.

트럼프는 중국의 세계 최대 통신장비 기업인 화웨이를 제1의 전략적 공격 목표로 정했다. 창업자의 딸이요 화웨이 최고재무책임자(CFO)를 말 잘 듣는 캐나다 당국으로 하여금 체포하게 한 것이 고지점령전의 큰 성과다. 왜 화웨이인가. 미래의 국력은 정보통신(IT) 기술이 좌우한다는 인식에서다. 중국은 화웨이 같은 거대 통신기업을 앞세워 궁극적으로는 미국을 능가하는 기술입국을 국정의 주요 목표로 설정했다. 그래서 열심히 기술을 개발하고 주로 미국의 기술을 훔쳤다.

IT를 통한 기술입국은 4차 산업혁명기의 경제에 머물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미국은 중국의 5G(세대) 통신기술을 동맹국의 군사통신 안보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한국을 포함한 모든 동맹국들에게 화웨이와의 거래 중단을 요구한다. 해리 해리스 미국 대사는 지난 6월 5일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외교적 수사(rhetoric)를 벗어 던지고 이렇게 말했다.

“5세대 네트워크 상 사이버 보안은 동맹국 통신을 보호하기 위한 핵심요소다. 지금 (한국이) 내리는 결정이 앞으로 수십 년간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중략) 마이크 폼페이오 장관이 말했듯이 세계는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을 원한다.”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 2월 언론 인터뷰에서 “화웨이 장비를 자국의 핵심 정보시스템에 도입하는 나라와는 정보를 공유할 수 없다. (중략) 위험성을 안다면 동맹국들이 좋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이것은 한국이 반(反) 화웨이 전선에 동참하지 않으면 정보 공유가 어려울 것이라는 경고다.([동아일보] 6월 6일자)

미국이 중국과의 정보통신기술 전쟁을 지상·해상·공중에 이은 사이버공간이라는 제4의 전장(戰域)으로 확대해 동맹국의 동참을 요구, 더 노골적으로는 압박하는 것은 불가피한 결정이다. 화웨이는 연간 한국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부품 12조원 상당을 수입한다. 그리고 5G 이동통신 등 유선·무선 합쳐 5000억원을 수출한다.

미·중 경제전쟁이 사이버전쟁으로 확전되고 한국이 한·미동맹 관계에 따라 불가피하게 미국 진영에 남을 경우 화웨이는 한국에 수출하는 통신장비에 악성 코드를 심어 미국과 동맹국들의 전략을 탐지할 수가 있다. 이런 수법은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 사용한 이래 사이버전의 상식으로 정착됐다. 그래서 미국·캐나다·영국·호주·뉴질랜드 5개 영어 사용 국가들은 상호첩보공동체 ‘5 Eyes’를 구축, 내부적으로는 군사정보를 공유하고 적에 대해서는 정보를 보호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최근 비영어권으로는 유일하게 일본이 5 Eyes에 가입했다. 미국과 기존 5 Eyes 참가국가들이 일본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트럼프의 일본 방문에서 드러난 트럼프-아베의 이신일체(二身一體) 같은 관계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진 한국


▎화웨이 제재를 둘러싸고 팽팽하게 맞서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주석.
화웨이와의 거래를 끊으라는 미국의 압박은 노골화 돼간다. 연간 12조원의 IT 관련 부품의 수출길이 위협을 받는다. 한국 정부는 No라고도 못 하고, Yes라고도 할 수가 없다. 한국이 미국의 요구대로, 그리고 동맹국의 의무대로 화웨이와의 거래를 중단하면 12조원의 수출이 막히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사드 사태 때 우리가 뼈아프게 경험했다. 사드는 군사적인 하드웨어이고 화웨이 제품은 경제의 베일을 쓴 군사적인 소프트웨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거야말로 한국이 깊이 빠진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다. 현존하는 패권국(고대 스파르타)에 도전하는 부상하는 신흥강국(고대 아테네) 사이의 단층선에 위치한 한국의 선택은 솔로몬의 지혜로도, 비스마르크의 외교적 신기(神技)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법을 찾지 않고 비켜갈 수 없는 것이 이 도전이다.

당연히 중국 정부도 한국이 미국이 주도하는 반화웨이 전선에 참가하면 한·중 관계가 악화될 것이라는 경고를 거듭한다. 시진핑이 한국에 와도 걱정이라고 한 것은 그가 화웨이로 상징되는 미·중 간 사이버전쟁에 한국이 미국 편에 서지 말 것을 요구하는 정상급 요구와 압박을 휴대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국의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 조기 가입을 촉구하고 미국의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작전에 동조하지 말라는 요구도 했을 것이다. 시진핑의 요구에는 미 국방부가 발표한 “인도·태평양 전략”의 대상을 일대일로에 대한 경제적 견제에서 군사적 차원으로 확대한 데 대한 직·간접적인 반응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지역 패권 유지를 위해서는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의 강화·유지가 핵심이다. 미국에게 일본은 이 지역 평화와 번영 유지의 초석(cornerstone)이고 한·미동맹은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위한 린치핀(lynchpin, 핵심축)으로 간주된다. 미국의 주문에 따라 일본은 태평양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광범위한 해역에서 미국과 함께 중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늘려갈 것이다. 한국의 역할은 정보·감시·정찰(IRS: information, surveillance, reconnaissance) 활동을 강화하고 중층적인 탄도미사일방어망(BMD)을 확대하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 이 중에서 중국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탄도미사일방어망이다.

지금은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지만…

한국과 미국은 BMD가 북한을 겨냥한 것이라는 입장을 강조하지만 중국은 BMD의 궁극적인 표적이 중국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과 일본이 구축한 미사일방어망(MD) 체계 가입을 가(可)타 부(不)타 말없이 미루기 작전으로 일관한다. 지금 한국의 처지로서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그러나 일왕 나루히토의 즉위식에 참석한 트럼프의 행보는 다분히 일본을 군사대국으로 만드는 길을 질주하는 아베의 구미에 맞는 것이었다. 5월 28일 트럼프는 항공모함으로 개조될 일본의 호위함 가가 갑판(248m) 위에 아베 총리와 나란히 섰다. 아베 최고의 날이었고 중국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습이었다. 그 장면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항복한 뒤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경제 재건에 올인 한다는 요시다 독트린의 종말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아베는 트럼프 앞에서 “지역의 공공재로서 일·미동맹을 강화하여 일본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겠다. 가가를 5G 전투기 F-35를 탑재할 수 있는 항공모함으로 활용하겠다”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이렇게 미·일동맹은 글로벌 동맹으로 확대·격상의 역사적인 첫 걸음을 내디뎠다.

미국은 동시에 최신형 강습상륙함 아메리카(LHA-6)와 뉴올리언스(LPD 18)를 일본 사세보 기지에 전진 배치할 예정이다. 아메리카에는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해병대의 스텔스 전투기 F-35를 최대 20대까지 실을 수 있다. 아메리카의 사세보기지 전진 배치로 미국은 요코스카 해군기지에 배치한 핵추진 항모 도널드레이건(CVN 76)과 함께 동북아시아에서 사실상 2척의 항모 체제를 갖추게 됐다. 미 해군의 이런 2척 항모 체제는 일도양단(一刀兩斷)이다. 작고 단기적인 규모로는 북한의 도발에 신속대응하고, 크고 장기적인 차원에서는 서태평양과 인도양에서의 중국의 패권 도전에 대한 대응전략이다. 이 전략에 동참하라는 것이 해리스 대사의 요구다.

시진핑이 한국에 온다면 그 목적의 하나는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일으키는 파장을 한반도에서 저지하기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미국제일주의와 반(反)무역주의와 일본 참여로 강화된 인도·태평양전략과, 미국을 서태평양에서 밀어내고 남중국해를 중국의 내해(內海)로 만들고 아프리카까지 끌어안는 일대일로로 미국을 역포위하겠다는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이 격돌하는 불길한 그림이다. 트럼프의 대(對)중국 경제전쟁은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의 재선 전략과도 얽혀있다.

스킬라와 카립디스 사이에서


▎지난 5월 경기도 동두천시 캠프 케이시에서 열린 주한미군 2사단 부사단장 이취임식에서 기수단이 입장하고 있다. / 사진:AP/연합뉴스
핵무기의 역설은 그것을 보유하면 국위는 격상되지만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미국을 위협할 경제적 핵무기를 가졌다. 2019년 현재 1조1700억 달러나 되는 미국 국채다. 중국이 미국의 국채를 팔면 미국은 타격을 받지만 국채가격 하락은 중국의 외환 가치의 급락을 가져오고 외화 유출로 중국 경제가 큰 손실을 입는다. 결국 미·중 경제전쟁은 두 나라 경제에 상처만 낼 뿐 군사적인 충돌까지 포함한 미·중 전쟁 자체의 승패를 결정짓지는 못 한다. 그 사이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 경제적으로 중국에 의존도가 과도한 한국 같은 나라다.

한·미동맹은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보루일 뿐 아니라 번영을 보장하는 가장 안전한 장치다. 한국은 어떤 경우에도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행동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적 보복과 압력을 견뎌낼 힘도 없다.

이 상황은 고대 그리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왕국 이태카로 돌아가는 오디세이가 맞닥뜨린 고난에 비유된다. 트로이 해안에서 그리스의 이태카로 가려면 바다의 두 괴물 스킬라(Scylla)와 카립디스(Charybdis)가 양쪽 바위섬에 사는 좁은 바닷길을 지나야 한다. 배에 탄 병사들을 잡아먹는 스킬라를 피하면 카립디스에게 먹힌다. 미국과 중국 어느 쪽이 스킬라고 어느 쪽이 카립디스인가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한반도가 처한 지리적 조건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조선 강제 병탄까지 우리의 의식 속에는 지리적으로 저주받았다는 일종의 ‘지리적 결정론(geographic determinism)’이 잠재해 있는 게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이걸 털어내고 오디세이가 그랬듯이 우리도 스킬라와 카립디스 사이를 뚫고 나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어떤 선택이 있는가. 먼저 개념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위치한 동북아의 지정학(geopolitics)을 지정전략(geostrategy)로 관리해야 한다. 지정학은 세력균형의 다른 이름이다. 세력 균형은 강대국들의 안보 이익의 균형을 말한다. 지정전략은 지정학을 지리적 조건에 맞게 관리하는 것이다. 동북아의 지정학에서 남북한은 강대국 간 세력균형 게임의 졸(卒)이다. 남북한이 한반도에 영구평화를 정착시키고 대외적으로 목소리를 하나로 합치면 졸은 플레이어(player)가 될 수 있다. 주변 4강은 플레이어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를 기약 없이 끌고 통일에 반대한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헬무트 콜 총리가 편 통일외교는 독일 통일에 반대하는 이웃들을 초인적인 노력으로 설득하는 데서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와 폴란드를 통일 지지로 돌려세우고 마지막으로 소련의 고르바초프의 동의를 받아낸 것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우화(列子 湯問扁) 같은 업적이다.

통일에 관한 한 우리의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이다. 폴란드와 소련은 중국이다. 이런 구도를 설정해 놓고 보면 우리가 무엇부터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 나온다. 미국의 압박이 아니라도 최악의 사태에 빠진 한·일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그 첫째요, 미국의 힘을 빌려 중국을 설득하고 중국을 활용하여 미국의 과도한 요구를 견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구적인 헤징(hedging) 수단은 한반도문제를 그 틀 안에서 해결할 동북아다자기구다. 원론적으로는 지역 국가들 모두 동북아다자기구 구상에 찬성이다. 그러나 디테일로 들어가면 상충되는 이해가 속출한다. 그래서 동북아다자기구는 장기적인 구상이어야 한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도 거기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 한국이 서두르면 일본과 중국뿐 아니라 미국과 러시아까지도 한국의 초조한 심리를 악용 내지 활용해 한반도의 평화·통일 협상에서 최대한의 지분을 확보하려고 할 것이다. 지금 요구되는 것은 단순화하면 발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한반도 비핵·평화에서 동북아 평화를 위한 다자기구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 다자협력을 발판으로 한반도 평화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독일 통일에서 우리가 배울 교훈이기도 하다.

강대국 기득권의 저항을 무디게 하는 법

그러나 일반론으로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잠식하는 다자기구를 환영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미·일강화조약을 초석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냉전체제에 계속 안주하고 싶어 한다.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를 보장해 왔다. 평화굴기를 졸업하고 군사굴기로 올라간 중국이 이 질서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 오늘의 동북아 지역 안보환경이다. 미국의 질서에 길들여진 한국은 한반도에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 도전과제를 안고 있다. 현존 체제에서 한국 안보는 한·미동맹에, 경제는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영구적인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한·미동맹에 대한 우리의 기존 인식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전환해야 한다는 것, 둘은 외부 환경의 프레임 밖에서는 한반도 평화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독일은 나토(NATO)에 자진해서 속박당하는 방법으로 독일 통일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저항을 무마했다.

동북아에서는 다자안보기구로 일본과 중국을 속박하지 않으면 영원한 평화의 조건은 만들어지지 않고,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에도 높은 장벽으로 작용한다. 지역 강대국들이 관심이 없는 다자기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결국 다자기구를 구성하는 단위는 개별 국가들이다. 한국은 먼저 신남방정책을 활용해 이 지역 개별 국가들과의 양자 관계를 적어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끌어 올려야 한다. 그중에서도 한·일, 한·중 관계가 핵심이다. 양자 관계가 충분히 축적되면 그것들을 교집합(交集合)으로 묶어 우선은 느슨한 회의체로 출발한다. 그러는 동안에 한국과 동남아국가들의 국력과 위상이 강대국에 대해 상대적으로 강화되면 회의체는 안보와 경제를 포괄하는 다자기구의 형태를 갖출 조건이 만들어질 것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기 마련이다. 목마른 한국이 앞장설 수밖에 없다. 한국 말고 급한 나라는 없다. 필수적인 조건은 남북한이 한목소리를 낼 수준으로 남북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한반도 평화의 분위기를 실현하는 것이다. 비핵화고 평화고 간에 한반도 문제를 동북아 문제에서 고립시켜서 해결할 수 없다는 발상의 전환이 대전제다. 표현을 달리하면 한반도에 작용하는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을 잡는 고차원의 외교가 필수적이다.

※ 김영희 중앙일보 명예 대기자... 1958년 22세 나이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필자는 82세가 된 지금까지 현장을 누비는 영원한 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 임원 등을 거치고 최근까지도 중앙일보 대기자 및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다. 외교·안보·국제 뉴스의 한 우물을 판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201907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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