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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 산업이슈] 화웨이發 경제 시한폭탄 안전핀 뽑히나 

정부 몸 사리는 동안 기업 애간장 다 탄다 

허인회 월간중앙 기자 heo.inhoe@joongang.co.kr
삼성·SK·LG “예의주시할 뿐 할 수 있는 게 없어”
전문가들 “협상 타결돼도 美, 화웨이 숨통 끊을 가능성 높아”


▎사진:gettyimagesbank
"말을 아끼는 상황이다.”

“미·중 무역분쟁과 관련해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다. 그냥 하던 대로 할 뿐이다.”

미국이 중국 IT 기업인 화웨이 제재에 나선 뒤로 삼성전자는 이에 대한 언급을 극도로 꺼린다. 대(對)언론 관계에 적극적이고 매끄럽기로 소문난 홍보팀 관계자들도 이렇듯 원론적 답변에 그치는 실정이다. 미국의 화웨이 제재를 놓고 지구촌이 미국 편과 중국 편으로 갈라지는 상황에서 자칫 말이 헛나가는 경우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미국과 중국에 모두 핵심적 이익을 가진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주요 IT기업들은 내부 단속에 나서는 등 몸을 사리는 모습이다. 그래서 어떤 각도에서 질문을 던져도 돌아오는 대답은 거의 천편일률적이다.

“직접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기는 있다. 하지만 기업 차원에서 나서서 어떤 입장을 밝힐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아직 구체적인 조치가 내려지기 전이다.”

“업계에서 여러 전망이 나오는 건 알지만 우리가 직접 내놓을 의견은 없다. 기존에 하던 대로 사업을 하는 정도다. 그 정도로 이해해달라.”

대신 몸이 바빠졌다. 토요일이던 지난 6월 1일 경기 화성 사업장에서 소집된 ‘전자 관계사’ 사장단 간담회가 대표적이다. 이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단기적인 기회와 성과에 일희일비하면 안 된다“며 ”투자계획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 달라”고 분위기를 다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일각에서는 지난 1월 디바이스솔루션(DS) 및 디스플레이 부문 경영진과의 사업 전략 회의 이후 약 5개월 만에 소집된 사장단 간담회는 이 부회장이 현 상황을 엄중하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다른 기업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재계 서열 5위 안에 드는 기업 관계자들도 “기업 차원에서 드릴 말씀이 없다. 양해를 구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소기업도 몸을 사리기는 마찬가지. 반도체·통신네트워크 장비를 납품하는 중소기업들은 언론과의 접촉 자체를 꺼리는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 불똥이 애꿎은 한국 기업에게 튈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고객이자 경쟁자의 위기를 지켜보는 삼성


▎중국 시안시 곳곳에 설치된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건설을 환영하는 입간판. ‘삼성과 당신이 함께 약속하는 매력 시안’이라고 적혀 있다.
“5G 네트워크에서 사이버 보안은 동맹국의 통신을 보호하기 위한 핵심 요소다. (중략) 단기적인 비용 절감은 솔깃할 수 있지만 신뢰할 수 없는 공급자를 선택한다면 장기적 리스크와 비용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

“사드 이후 양국 관계가 정상적인 발전으로 가는데 새로운 변수가 생기면 안 될 것이다. (중략) 그냥 미국이 바라기 때문에 동참하는 것인지, 옳고 옳지 않은 것을 한국 정부·기업이 판단해야 한다고 본다.” (중국 외교부 당국자)

미국은 미국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자기 줄에 서라고 다그치는 양상이다.

화웨이 발(發) 후폭풍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는 국내 핵심 산업(반도체, 통신)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화웨이는 연간 106억5000만 달러(약 12조6000억원) 규모의 한국산 부품을 구매하고 있다. 대부분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스마트폰 부품에 해당한다. 화웨이는 국내 네트워크 시장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다. 2002년 한국에 상륙한 화웨이는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통신인프라는 물론 금융권 등 네트워크 분야에 발을 넓혀왔다

화웨이 제재를 바라보는 삼성전자의 속내는 복잡다단하다. 반도체를 화웨이에 공급하는 부품 업체이자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화웨이는 삼성전자의 5대 주요 고객사 중 하나다. 이 중 상당 비중은 화웨이가 생산하는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메모리반도체·OLED 디스플레이 등의 부품 공급이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비중은 높지 않다. 삼성전자의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주요 매출처(애플·베스트바이·도이치텔레콤·화웨이·버라이즌)가 총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14% 수준이다. 2019년 1/4분기를 봐도 주요 5대 매출처(애플·AT&T·도이치텔레콤·화웨이·버라이즌)에 대한 매출 비중은 12%다. 화웨이 비중이 한 자릿수라 추정해볼 수 있다. 그래도 거래 규모가 약 8조원 정도 된다는 점에서 타격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공급 축소로 매출 감소가 예상되지만 스마트폰 시장으로 눈을 돌려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송명섭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대규모 수혜를 예상한다. 송 연구원은 “삼성전자가 지난해 화웨이 스마트폰 출하 기준으로 약 3700만 대를 뺏어올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지난해 화웨이 하이엔드 스마트폰 해외 출하량은 3400만 대다. 이 가운데 적어도 50%인 1700만 대 가량이 삼성전자 하이엔드 스마트폰으로 대체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해외 시장에서 구글 서비스 중단으로 화웨이 스마트폰의 경쟁력이 급락하는 가운데 고가 안드로이드 폰 시장에서 화웨이의 경쟁사는 삼성전자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난해 화웨이가 5700만 대를 판매한 동유럽, 중남미, 중동·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추가 수요가 발생할 수 있다. 해당 지역의 삼성전자 시장 점유율(26~37%)을 감안할 때 약 2000만 대의 신규 중저가폰 판매가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시장의 전망도 비슷하다. 시장조사 기업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A)는 화웨이 제재 여파가 계속될 경우 삼성전자 스마트폰 세계 시장 점유율은 2019년 23.0%, 2020년 24.5%(3억4340만 대)로 증가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지난해 2억대 선으로 떨어졌던 스마트폰 출하량도 올해 3억 대 선으로 회복될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지난해 14.4%(2억580만 대)였던 화웨이 스마트폰 세계 점유율은 올해 12.1%(1억6520만 대), 내년에 9.2%(1억2960만 대)로 추락할 것으로 예상됐다. SA는 화웨이가 출하량의 절반 정도를 소화하는 중국 시장에서는 수성하겠지만 유럽과 남미, 아시아 등 해외 시장에서 판매 하락세를 기록할 수 있다고 봤다. 2020년 삼성전자를 제치고 세계 스마트폰 1위 석권을 천명했던 화웨이 점유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김용균 정보통신기획평가원 수석도 “전반적으로 보면 국내 기업들에게 이득인 상황”이라며 “반도체, 스마트폰 등 우리나라 주력 수출상품에 대한 중국의 추격과 성장을 늦출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바라봤다.

SK하이닉스, 내년으로 반등 미뤄지며 초조


▎올 4월, 중국 우시에서 열린 SK 하이닉스 중국 우시 확장팹(C2F) 준공식. / 사진:SK 하이닉스
외견상 삼성은 화웨이 파동 국면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삼성 관계자는 “타사(화웨이)와 관련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되풀이했다. 그나마 속내를 가늠해볼 수 있는 얘기는 이런 것들이다. “화웨이 이슈 등 외부 요인에 의해 휘둘리는 상황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잘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잘 판단하는 것이 문제이지 할 수 있는 게 없다.”

일부 언론에 따르면 삼성 측은 “화웨이 제재에 따른 반사이익을 삼성이 얻을 것이라는 해석도 달갑지 않다”고 손사래를 치는 형국이다. 화웨이 건이 아니더라도 삼성은 안팎의 여러 가지 문제로 머리가 아플 지경인 건 분명하다. 익명을 요구한 수도권의 한 경제학과 교수는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관련 재판이 현재진행형인 상황에서 화웨이 사태까지 엎친 데 덮친 격”이라며 “삼성으로서는 133조 반도체 투자 계획을 차질없이 진행할 것이라는 신호를 정부 측에 꾸준히 보내면서 해외 변수까지 꼼꼼히 살펴야 하는 처지”라고 풀이했다.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미·중 무역분쟁의 유탄이 한국에게 날아온 것은 미 국무부가 화웨이에 대한 거래제한 조치에 한국의 동참을 요청하면서부터다. 특히 화웨이 장비를 쓰고 있는 특정기업(LG유플러스)까지 언급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중국 정부도 가만있지 않았다. [뉴욕타임스(NYT)]는 중국 정부가 6월 4~5일 글로벌 IT기업들을 불러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과 거래금지 조치에 협조하면 ‘심각한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6월 8일 보도했다. 이 자리에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와 델, 영국 반도체 설계기업인 암(ARM)과 함께 화웨이에 반도체를 공급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의 상황은 삼성보다 더 다급해 보인다. SK하이닉스는 화웨이가 생산하는 스마트폰과 PC에 D램과 낸드플래시를 공급한다. 뿐만 아니라 중국 스마트폰 제조사인 샤오미, 오포 등에도 메모리를 공급한다. 매출에서 화웨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10~15% 내외로 중국 거래선 중에선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진다.

D램 비중이 높은 SK하이닉스에게 외부 요인도 악재가 되고 있다. 글로벌IT기업의 데이터센터 투자 감소와 스마트폰 성장 둔화 등으로 핵심 제품인 서버 D램과 모바일 D램 모두 수요가 줄어 급격한 가격 하락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기관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5월 D램 고정거래가격은 3.75달러로 전달 대비 6.25% 하락했다. D램은 올 들어서만 48.3%나 급락했다. 3달러대로 추락한 것은 2016년 9월 이후 처음이다. SK그룹 관계자는 “반도체 경기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지난해부터 예견됐던 일”이라며 “이 상황이 얼마나 오래갈지 우려스럽다”는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D램익스체인지는 6월 초 보고서를 통해 올 3분기 D램 전체 평균가격을 최대 15%까지 하락할 수 있다고 관측했다. 지난 3월말 ‘10% 하락’에서 낙폭을 더 크게 잡은 것이다. 화웨이 제재로 인한 화웨이의 스마트폰·서버 제품 출하량 감소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 보고서는 2020년이 돼서야 D램 가격이 반등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SK하이닉스는 화웨이에 대한 D램 매출액 비중이 큰데 3분기 후반부터는 화웨이발 수주 절벽 위험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오도 가도 못하는 LG유플러스, 속수무책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6월 5일 “5G 통신 장비는 보안 측면에서 신뢰할 수 있는 공급자를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며 화웨이를 연상시키는 발언을 했다. / 사진:연합뉴스
특히 SK하이닉스에 화웨이는 델(Dell)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고객이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특정 고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현재로서는 주문량 축소나 취소는 없는 상황이며 단기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의 화웨이 사태가 올 하반기부터 반도체 시장 상황이 호전될 것이라는 시장전망에 찬물을 끼얹는 악재로 작용하지 않을까 경계하는 기류가 엿보이기도 한다. 이 관계자는 “미·중 분쟁이 장기화될 경우 업황 개선이 더딜 수 있다는 점에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만 말했다. 최근 방한한 화웨이 고위 임원과 최태원 SK회장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통상적으로 고객사와의 만남은 꾸준히 있어왔다”고 설명했다.

미 국무부가 우리 정부에게 화웨이 제재 동참을 요청하면서 거론된 LG유플러스는 좌불안석이다. 미 국무부 관계자는 최근 우리 외교부 측에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는 LG유플러스가 “한국 내 민감한 지역에서 서비스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LG유플러스 측은 “미국 정부와 우리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시나 입장을 전달받은 것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6월 5일에 이어 7일에도 연일 화웨이 관련 발언을 하면서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해리스 대사는 7일 제27회 국방·군사 세미나 기조연설에서 “5G 네트워크가 한국 전역에 어떤 사례를 남길지(instantiated) 우리(미국)가 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그러나 동맹이자 친구로서, 나는 우리가 이 모든 이슈를 함께 헤쳐 나갈 것이라고 자신한다. 우리에겐 해내야 할 일이 있고 함께 그 일들을 해나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시장에서 화웨이 퇴출까지 의미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최근 우리 외교부 측에 미 국무부 관계자가 말한 “당장은 아니더라도 최종적으로 한국에서 화웨이를 전부 아웃(out)시킬 필요가 있다”는 발언과도 맥을 같이 하는 모습이다.

LG유플러스 측은 미군 주둔 지역으로 추정되는 ‘민감 지역’에는 예전부터 화웨이 장비를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LG유플러스 관계자는 “미군이 주둔하는 곳에는 LTE부터 유럽의 에릭슨을 쓰고 있고, 5G도 마찬가지다. 원래 화웨이 장비를 쓰지 않았고 앞으로도 쓸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원숭이 길들이려 닭 피 보여주는 게 중국”


▎지난해 12월, 하현회 LG유플러스 부회장이 간담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화웨이 사태로 인해 LG유플러스 5G 앞날에 먹구름이 꼈다. / 사진:연합뉴스
미국이 ‘화웨이 제재’ 카드를 꺼내기 전부터 제기되던 문제는 보안이다. 화웨이가 몰래 스파이칩(Chip)를 심거나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다양한 정보를 중국으로 빼돌릴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LG유플러스 관계자는 “고객 정보를 식별하고 관리하는 코어망 장비에는 화웨이 장비를 활용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LG유플러스는 코어장비에 삼성 장비를 활용 중이다. 일부에서 지적되는 고객정보 보안 사항은 화웨이 장비가 활용되는 기지국 장비와는 무관한 내용이다.” 영국 등 유럽 주요 국가들과 동일하게 무선분야 기지국 장비에만 화웨이 장비를 도입하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더구나 올 4월 5일부터 5G 상용화를 시작한 이동통신사들은 5G 주도권 잡기에 한창이다. 업계에서는 미국의 전방위적 압박에 화웨이의 통신장비 조달에 차질이 생길 경우 LG유플러스의 5G망 구축에도 영향을 주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 이에 LG유플러스 측은 “5G 장비 수급에는 문제가 없다”고 자신했다. 내년까지 필요한 물량은 이미 확보한 상태여서 올 상반기까지 5만 개, 연말까지 8만 개 5G 기지국 구축이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2022년까지 전국망 구축을 완료하겠다는 게 LG의 구상이다. 5G 기지국 구축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 LG유플러스 측의 설명이지만 미국 측의 화웨이 퇴출 압박이 거세질수록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LG는 교체 계획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현재 5G는 NSA 표준이 적용된다. NSA 표준은 5G 기지국과 LTE 기지국을 호환해 사용하는 규격이다. 따라서 5G 기지국 장비는 4G LTE 기지국 장비와 동일한 회사의 제품을 활용해야 한다. LG유플러스측은 “5G 장비를 타사 장비로 교체하는 경우에는 4G 장비까지 교체해야 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이와 관련해 통신사 고위 임원을 지낸 한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웨이는 한국 진출 이래 기존 가격보다 최소 30% 가량 싼 가격경쟁력을 내세워 국산망을 다 걷어내고 자신들의 장비를 깔아왔다. LG유플러스의 경우 지금 LTE망을 들어낼 수도 없고 교체한다 한들 막대한 손실이 발생한다. 궁극적으로 5G 시장 자체를 놓쳐버릴 수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한 경제학과 교수는 “여러 조건을 종합적으로 판단했겠지만 결과적으로 7년 만에 송부된 화웨이 ‘청구서’ 봉투를 LG유플러스는 차마 열어보기가 두려울 것”이라며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을 질타한다. 최 교수에 따르면 “정부는 2012년 당시 국가 보안과 관련된 통신망 장비를 새로 설치할 때 제대로 감시하고 통제했어야 했다”고 말한다. 당시 정부는 공무원의 본분을 잊고 나몰라라는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당시 정부는 할 일을 하지 않은 셈”이라며 “지금도 정부는 기업이 알아서 대처하라고 하는데 무책임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사태를 다소 낙관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미·중간 긴장이 고조되더라도 위축될 필요가 없다고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은 말한다. 그는 “원숭이를 길들이려고 닭을 잡아 피를 보여주는 것이 중국”이라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렇게 중국이 엄포를 놔도 겁먹을 필요가 없다. 사드(THAAD)는 한국과 중국의 일대일 문제였지만 화웨이 제재는 다대일 구도다. 급한 건 화웨이다. 제품을 못 만들 수 있는 상황인데 하청업체에게 협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겉으로는 큰소리치지만 속은 타들어갈 것이다.”

장기적으로 화웨이 의존도 낮춰야


▎화웨이 선전 본사 전경(위)과 화웨이 하이엔드 스마트폰 P30 광고판(아래). 화웨이 제재가 현실화될 경우 화웨이 하이엔드 스마트폰 수요를 삼성전자가 상당 부분 흡수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 사진:화웨이, AP/연합뉴스
IT업계에서 가장 우려하는 상황은 미국의 ‘IT판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제재)이다. 다른 나라 기업이 화웨이와 거래하는 경우 제재를 가하는 형식이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세컨더리 보이콧은 그룹과 연결된 계열사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치”라며 “나아가 한국 경제에 엄청난 충격파를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중 무역 분쟁이 타결의 실마리를 찾더라도 화웨이에 대한 제재는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김연학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 전략가의 발언을 근거로 삼았다. 배넌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으로, 최근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화웨이 사용금지 행정명령이 무역협상 테이블을 떠나는 것보다 10배는 더 중요하다. 화웨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안보에 큰 위협이기 때문이다. 화웨이를 미국은 물론 유럽 등 서방세계에서 몰아내야 한다.”

김 교수는 “화웨이 이슈는 미국에서 여·야는 물론 보수·진보 언론도 한마음 한뜻”이라며 “미국 IT 업계의 질서와 위상을 무너뜨리는 화웨이에 대해 대부분 아주 비판적”이라고 제재의 장기화·영구화 가능성을 언급했다.

전병서 소장도 비슷한 의견이다. “미국이 중국 통신장비업체 ZTE(중국명 중흥통신)처럼 어설프게 화웨이를 제재했다가는 중국의 각성만 불러올 수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중국은 4차 산업 관련 핵심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미국은 화웨이의 숨통을 끊어놓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對)이란 제재법 위반혐의로 ZTE에 이번 행정명령과 비슷한 제재를 내렸으나 지난해 돌연 해제했다. 배넌은 SCMP와의 인터뷰에서 ZTE 제재 해제는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전문가들은 이번 참에 국내 기업들이 본질적인 대책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연학 교수는 “소나기만 피하고 보자는 식의 대책은 무의미하다”면서 “기업들은 신규 화웨이 물량을 최대한 줄이는 등 장기적인 대책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시점”이라고 봤다.

기업의 기민한 대처를 주문하는 목소리도 있다. 문병기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미국과 중국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고 정치적 문제가 연결된 문제라 정부가 일괄적으로 대책을 얘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산업자원통상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은 6048억 달러를 수출했다. 이 가운데 대(對)중국 수출은 1621억 달러로 전체 수출의 26.8%를 차지했다. 대(對)미국 수출은 727억 달러(12%)로 뒤를 이었다. 두 국가가 지난해 우리나라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에 육박한다. 문 수석연구원은 “기업마다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흐름 속에서 생산 네트워크나 수출 시장 전략을 기민하게 가져가는 준비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이 국면을 컨트롤할 수 없는 탓에 촉각이 곤두세워져 있는 상태”라며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이라는 것이 재계의 공통된 인식”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201907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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