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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김대중의 동반자’ 故 이희호 여사의 역사적 장면들 

“좋은 분 만나 일생 값있고 뜻있게 살았다”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부산 피란 중 여성문제연구회 일군 ‘1세대 여성운동가’
DJ 납치·내란음모 사건 거치며 민주화운동가로 성장해


▎2009년 4월 전남 신안군 하의도를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 / 사진:연합뉴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부인 이희호 여사가 6월 10일 밤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 한국의 민주주의, 평화, 인권 신장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자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빈소가 마련된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기자가 빈소를 찾은 시각은 11일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유족의 건강을 감안해 오전 9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조문을 받는다’는 취지의 안내문이 빈소 앞 안내판에 붙어있었다. 그런데도 빈소 내부는 지방에서 올라온 듯한 조문객들이 고인을 회상하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 여사의 빈소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유력인사들의 조화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주요 헌법기관장은 물론이고 국무위원, 국회의원, 재벌총수, 언론사 사주, 주요 기관·단체의 장 등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빈소의 풍경은 이 여사가 생전에 쓴 자서전 [동행](2008)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했다. 1962년 5월 10일, 남편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치른 결혼식 장면이다. 두 사람은 지금의 사직공원 근처 이 여사의 외삼촌댁에서 식을 올렸다. 자서전에서 이 여사는 “청첩장을 돌리지 않았는데도 친지와 YMCA 동료 100여 명이 대청마루를 가득 메웠다”고 돌이켰다.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 측 하객은 동생 두 명뿐이었다.

오늘날에 와선 입장이 뒤바뀐 듯하다. 이 여사를 ‘김대중을 충실히 내조한 현모양처’로 기억하는 이가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을 옥바라지하며 신앙으로 고독을 인내한 아내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김대중 옥중서신](2000)을 보면 그녀는 양심수, 사형수를 구명하기 위한 민주화운동의 화신이기도 했다. 그녀 자신도 “불의에 굴하지 않은 그를 헌신적으로 도운 것은, 단지 그가 내 배우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동행]과 [김대중 자서전](2010)을 ‘사초(史草)’로 삼아 이희호 여사의 생애를 복기했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두 기억을 좇다 보면, 시대를 이끈 여성운동가로서, 민주화운동가로서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두 사람이 펜팔을 나누는 듯, 내밀한 즐거움마저 든다.

1.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 ‘무일푼 정치인’의 미래 내다본 선구안

“나는 당시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백수였다. 할 일이 없으니 종로 화신백화점 5층에 있는 극장에서 영화를 곧잘 봤다. (…) 버스비가 없어 쩔쩔매기도 했고, 생활비가 없어 대학생 후배의 등록금을 빌려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깊이 이해해줬다.” ([김대중 자서전 1], 147쪽)

김대중은 1961년 5월 13일 인제 재보궐 선거에서 민의원(民議院, 양원제 국회에서 하원에 해당)에 당선됐다. 첫 국회 입성이었다. 그러나 불과 사흘 뒤 일어난 5·16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고 만다.

이때 이희호는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YMCA전국연합회 총무로 일하고 있었다. “5·16 군사 쿠데타로 다시 실업자가 된 그는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이후로 만남이 잦아졌다. 곤궁하고 울적한 그는 퇴근 무렵이면 YMCA가 있는 명동으로 찾아왔다.” ([동행], 68쪽)

두 사람의 교재는 어땠을까. 김대중은 “만나면 하는 게 세상 얘기였다”고 회고한다. “주로 정치 얘기를 많이 했다. 아기자기한 대화를 나눈 기억은 별로 없다. 서로 나이가 들어선지 연인보단 동지로서의 유대감이 더 강했다. (…) 함께 있으면 편했다. 바로 사랑이었다.” ([김대중 자서전 1], 148쪽)

그런데도 김대중은 머뭇거렸다. 그의 처지 때문이었다.

“사랑이 무르익었지만 나는 수동적이었다. 제대로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날 바라보는 눈에 사랑이 담겨 있음을 확인했으면서도 나는 머뭇거렸다. 그러던 3월 어느 날 저녁, 아직 한기가 감도는 탑골공원에서 결혼해달라고 말했다.” (같은 책, 149쪽)

이희호는 그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단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었다고 술회했다. 두 사람이 공유한 꿈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정치였다. “그에게 정치가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겐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 중 하나였다.”([동행], 69쪽)

이희호는 이미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라고 직감하고 있었다. “운명은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 곧 거세게 노크했다. 결혼한 지 열흘 만인 5월 20일 그는 반혁명 혐의로 체포됐다.” 민주당 간부들이 모여 군사정권 타도를 모의했단 혐의였다. 김대중은 한 달 동안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정치활동 금지는 이듬해 2월 풀렸지만 군사정권과 오랜 악연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2. “요정이 아니면 정치를 못하나요?” | ‘40여 년 만의 가족법 개정’ 이끈 여성운동가


▎이희호 여사는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재판이 있는 날마다 피고인 가족들과 함께 보라색 한복을 입고 참석했다. / 사진:연합뉴스
결혼으로 여성 운동가의 길에 마침표를 찍은 건 아니었다. 1960년대까지 여성문제연구회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여성문제연구회는 1952년 황신덕·박순천·이태영 등 여성 지도자들 중심으로 설립된 단체였다. 이희호는 단체 창립 실무를 맡았었다. 남녀차별과 가부장적 가족 문화는 이 단체의 집중 성토 대상이 되곤 했다.

“다른 여성단체와 공동으로 1967년 4월 4일 4·4 심포지엄을 열고 그 당시 만연한 요정(料亭)정치 반대 운동을 벌였다. (…) 어느 날 남편에게 도발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

‘남자들은 요정이 아니면 정치를 못하나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젠가 남자들 큰코다칠 겁니다.’

취한 모습을 별로 보이지 않는 그의 말도 사실인지라 그쯤에서 그쳤다. 그러나 요정정치의 실상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1970년 요정 아가씨 정인숙 피살 사건이 일어나 최고위층 정치인들이 크게 곤욕을 치렀다.” ([동행], 76쪽)

이희호의 열정에 김대중도 호응했다. 그는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섰다. ‘40대 기수론’에 걸맞은 개혁 공약을 쏟아냈다. 여성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편은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당선되면 여성지위향상위원회를 두겠다는 공약 발표를 시작으로 대선과 총선, 모든 선거에서 가장 앞선 여성 정책을 제시한 페미니스트 후보였다.”(같은 책, 292쪽)

시간이 흘러 1989년 12월, 이희호의 노력은 가족법 개정으로 결실을 맺는다. 당시 가족법은 남편 쪽은 8촌까지 친족으로 인정하면서도, 아내 쪽은 4촌까지만 인정했다. 재산권 행사나 상속에서도 남편과 아들에게만 유리했다.

“어느 날 박영숙 (민주평화당, 이하 민평당) 부총재가 나한테 전화를 했다. (민평당 소속 홍영기) 법제사법위원장이 회의 소집을 안 한다고, 도와 달라고. 나는 다른 정치 문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만, 가족법 개정 문제만큼은 내 생각을 남편에게 전했다.”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

민평당 총재였던 김대중은 아내의 말을 존중했다. 법사위원장을 교체한 것이다. 그리고 1988년 12월 노태우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제5공회국 비리’ 청산을 매듭짓는 조건으로 가족법 개정을 요구했다. 결국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12월 19일 가족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3. “남편은 입가가 터져 피가 엉겨있었다” | 김대중 구명 최전선에 나섰던 민주화운동가


▎1973년 8월 8일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씨가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온 뒤 이 여사가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모습.
“‘오셨어요!’ ‘의원님이 오셨어요!’ 여러 사람이 외치며 우르르 대문으로 몰려갔다. 급히 현관으로 나가니 남편이 들어서는 게 아닌가. 모두 함께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렸다. 눈물이 흘러 목과 가슴을 적셨다.”(같은 책, 136쪽)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실종된 김대중이 129시간 만에 동교동 집 앞에 불쑥 나타났다. 중앙정보부 소행이었다. 다리에 무게추를 달아 동해상에 수장(水葬)하려는 찰나,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이 접근해 저지한다. 사건이 발각될까 우려했던 요원들이 계획을 바꿔 김대중을 자택 앞에 풀어줬다. 박정희 정권에서 벌어진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말이다.

앞서 이희호는 김대중의 행방을 파악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김대중의 재일교포 친구 김종충씨의 연락을 처음 받고서 무작정 일본 대사관저로 갔다. 경찰에게 가로막히자, 진정서를 갖고 국무총리실을 찾았다. 아무 답이 없었다. 행방불명 6일째 되던 날인 13일 저녁에 마지막 방법으로 국제적십자사에 호소하기로 했다. 여권 발급을 요청할 참이었다.

“남편은 입가가 터져 피가 엉겨있었다. 손목에 피멍이 들고 옷이 구겨져 무척 초췌해보였다. (…) 박 정권은 이번에도 김대중의 자작극이란 소문을 퍼뜨렸다. 아,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같은 책, 138쪽)

10·26사태에 이어 또 한 번의 군사 쿠데타로 신군부가 들어서자, 김대중은 내란 음모의 주모자가 됐다. 김대중이 광주항쟁의 배후 조종자라는 명목이었다. 남산으로 끌려간 그는 40여 일 취조를 받으면서도 “(신군부에) 협력할 수 없다, 죽음이 곧 삶이다”라고 버텼다.([김대중 자서전 1], 400쪽)

“남편은 한참 후에 말했다. ‘나도 인간인데 어찌 살고 싶지 않았겠소. 해외로 나가 가족들과 조용히 살까 하고 마음이 흔들릴 때 제일 먼저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동행], 205쪽)

이듬해 1월 16일 이희호는 온 가족을 대동해 육군교도소가 있는 남한산성으로 갔다. 군사법원에서 김대중에게 내란음모 등 혐의로 사형을 선고한 시점이었다.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긴다고 말하고 시멘트 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아이들도 따라서 꿇었다. 우리는 눈물로 기도했다.”(같은 책, 220쪽)

이희호는 그가 당시 받은 감동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전한다.

“나는 그때만큼 아내를 존경하는 눈으로 본 적이 없다. 정말로 아내를 중심으로 한 가족의 단결과 지원이 없었더라면 나는 20여 년 동안 지속돼 온, 인간으로서 차마 견디기 힘든 시련들을 이겨낼 수 없었을 거다.”

4.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섰다” | 사형수의 아내에서 대통령의 영부인으로


▎문희상 국회의장이 고(故) 이희호 여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헌화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김영삼 41%, 김대중 33%, 정주영 16%.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고배를 마셨다. 1992년 12월 19일 새벽 3시 김대중은 일어나 불을 켰다. 이내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말이 떨어졌다.

“그의 비장한 결정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정서를 하는데 눈물이 주르륵 종이 위에 떨어졌다. 한번 시작된 눈물은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고개를 숙이고 우는 내 모습이 처연했던지 남편이 내 손을 잡았다. ‘여보, 우리 1980년 사형선고받았을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웃을 일 아니오.’ 그는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같은 책, 302쪽)

5년 뒤인 1997년 12월 19일,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이희호는 “기쁘면서도 허탈했다”고 말했다. 선거 직전 몰아닥친 외환위기 사태 때문이었다.

“김대중과 이희호의 운명에는 아마도 ‘호사’는 없나보다. 오랜 핍박으로 인해 궁핍한 생활이 익숙한 데다 타고난 성격 또한 둘 다 검소한 편이었다. 우리는 청와대에서조차 안녕과 풍요로움을 결코 누리지 못했다.” (같은 책 325쪽)

영부인으로서, 여성운동가로서 이희호가 가장 빛난 순간은 2002년 5월 6일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을 때가 아니었을까. 한국 여성으로서 최초로 유엔총회 임시의장을 맡아 기조연설에 나선 것이다.

“그해 한국이 유엔 의장국이었다. 남편이 참석해야 하는데, 의료진이 대통령의 장거리 여행을 만류했다. 아이들 문제로 힘들 때였다. 외교안보수석실에서 대통령보다 내가 아동총회에 어울린다고 해서 대한민국 정부대표단 수석대표를 맡았다.” (같은 책, 348쪽)

미국으로 떠나는 날 김대중은 격려를 잊지 않았다.

‘당신이 나보다 더 잘할 거예요.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잖아요. 미국에서 유학한 실력을 이번에 발휘하고 오세요.’

[동행]에서 고령의 몸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했던 남편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남편은 태어날 때 몸에 탯줄을 칭칭 감고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그에겐 평생 동안 영일(寧日)이 없었다.”(같은 책, 381쪽)

[김대중 자서전]에서도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짙게 뱄다.

“아내의 류머티즘 관절염이 심해졌다. 손목과 무릎이 아프다고 호소했다. 지난 세월 아내는 영일이 없었다. 1976년부터 6년 동안 내 옥바라지를 하고 미국에선 수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집에서 대접했다….” ([김대중 자서전 1], 494쪽)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로 시작한 두 사람의 관계는, 세월이 흘러 어느 새 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익어 열매를 맺은 듯했다. 이희호는 2009년 8월 23일 김대중을 떠나보내며 말했다.

“우리는 정말 서로 인격을 존중했어요. 늦게 결혼했고 결혼할 때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참 좋은 분을 만나서 내 일생을 값있고 뜻있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 고락을 같이 하던 두 사람은 지난 10년간의 ‘짧은’ 헤어짐 끝에 이제 영원히 만나게 된 것 아닐까.

201907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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