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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이상한 나라의 봉준호’를 만나는 7개의 문 

욕망이 과녁을 비껴갈 때 펼쳐지는 지리멸렬의 세계 

심영섭 영화평론가
사람이 개가 되고, 괴물이 되고, 기생충이 되는 세상… 가면 쓴 속물들이 벌이는 희비극에서 빈틈과 균열을 찾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5월 25일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한국영화 가운데 최초다. 불쑥 벌어진 일이 아니다. 칸 영화제는 2006년 [괴물]을 시작으로 봉 감독을 다섯 차례 초대했다. 깐깐한 비평가들을 설득해낸 매력이 뭘까. 그의 단편 데뷔작 [지리멸렬]부터 [기생충]까지 봉준호 월드를 지탱하는 일곱 가지 키워드를 짚었다. - 편집자 주

1. 장르의 거장, 그러나 단단한 사회적 시선


▎5월 25일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 / 사진:연합뉴스
봉준호에게 장르는 그의 영화 세계와 하나가 돼 진화해 왔다. 그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의 블랙 코미디를 시발점으로, [살인의 추억]의 범죄물, [괴물]의 괴수물, [마더]의 스릴러, [설국열차]와 [옥자]에서 보여주는 재난 상황과 판타지 등등 한 장르를 감독하면서 배운 노하우를 다시 다른 장르에서 되돌려 주는 반복을 거듭했다. 그리고 2019년에 개봉한 영화 [기생충]은 이 모든 봉준호의 장르가 집대성돼 관객들을 제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달관의 경지에 그가 들어섰음을 알리는 증명서 같은 것이다. [기생충]은 관객과의 두뇌 게임에서 여유 있게 완승한다. 반전은 갑자기 들이닥치고, 한 영화 안에 블랙 코미디·사기극·스릴러·공포 영화가 아말감 돼 관객들의 피부 밑에서 영화에 대한 예측을 모두 빨아들인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는 스토리의 반전과 추격의 속도감과 시각적 스펙터클 같은 장르적 쾌감 이상의 것들이 또한 존재한다. 그것은 ‘봉준호 월드’라는 아주 낯선 영화 세계에 진입하는 기이한 꿈을 꾸는 것 같은 것.

데뷔작 [지리멸렬]에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도색잡지를 훔쳐보는 심리학과 교수와 새벽마다 남의 집 앞 우유를 훔쳐 먹는 신문사 논설위원과 길거리에서 응가를 하려다 경비원에게 들킨 검사가 등장한다. 인간의 뱃속부터 차오른 속물근성과 자기 중심성이 사회적 가면을 쓰고 광대춤을 출 때의 우스꽝스러움. 한순간 경계와 의식을 넘어서는 광기가 뜻밖의 파국으로 치달을 때의 속수무책. 여기에 필연적으로 자기 모멸적인 연민이 더해진다. 봉준호의 모든 영화에는 정치적 알레고리가 숨겨져 있고, 그가 뿌린 블랙 유머는 섬뜩한 사회적 통찰이라는 부메랑으로 보는 이의 의표를 찌른다.

2. 앞과 뒤, 위와 아래 공간으로 보여주는 계급성


▎봉준호 감독은 2000년 영화 [플란다스의 개]로 장편 데뷔했다. 올해 개봉한 [기생충]까지 총 7개 장편 작품을 연출했다.
봉준호 영화의 공간과 방향은 단지 스토리를 담은 그릇이 아니다. 그의 세계관이 드러나는 계급적 장치의 토대가 된다. 즉 봉준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공간을 보는 것이며, 시골길과 논두렁, 도시의 저택과 시골의 담벼락, 강의 밑바닥과 지상의 계단이 은유하는 앞과 뒤, 위와 아래의 계급성을 들여다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중에서도 영화 [설국열차]의 기차 꼬리 칸과 앞 칸, [기생충]의 반지하와 지하 그리고 지상이 대비되는 공간은 수평과 수직의 좌표로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질 대로 벌어진 계급과 부의 격차를 그대로 드러낸다. 설국열차의 꼬리 칸은 한정된 공간과 자원으로 완강히 닫혀있다. 빛도 들지 않는 곳에서 꼬리 칸 사람들은 삼시 세끼 바퀴벌레를 재료로 한 단백질 바를 먹는다. 꼬리 칸 사람들이 앞 칸으로 나아가면서 경이롭게 느끼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얼어붙어 버려 사멸했는데도 여전히 남아있는 먹거리들, 앞 칸 사람들이 소유한 먹거리의 풍부함이다.

[기생충]에서는 먹거리보다는 공간이 주는 안락함과 청결함, 밝음, 사생활이 보장되는 은밀함 같은 것들이 상류사회의 기표로 제시된다. 커튼과 방문이 달려 사생활이 보장되고, 정원이 있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곳. 결국 언덕 위의 집을 적신 빗물은 상류층에게는 미세먼지를 없애 주는 상쾌함을 주지만, 그 물은 흘러 흘러 낮은 곳으로 모여 저지대에 있는 기택의 집을 수몰시킨다. 위에서 아래로 끝없이 부서져 내리는 비, 물의 추락과 하강은 이어지는 기택네의 몰락과 맥을 같이 한다.

흥미롭게도 [설국열차]와 [기생충]의 스릴은 이 공간적 좌표가 역행하는 대극적(對極的) 상황에서 극대화된다. [설국열차]에서는 기차의 맨 앞에 있는 호화롭고 비밀스러운 공간들이 하나하나 노출될 때 흥분감이 커졌지만, 기생충에서는 은밀하게 자리한 지하실에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이들은 전진하거나 계단을 오르거나 내리락거린다. 이러한 이동은 말 그대로 계급적인 전복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고난의 행군이나 다름없다.

이 와중에 [설국열차]나 [기생충]이나 계급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자들은 대극의 계층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어진 자리에 있으라. [설국열차]에서는 아예 대놓고 확성기를 통해 꼬리 칸 사람들에게 명령조로 전달되며, [기생충]의 박 사장은 좀 더 예의 바르고 부드럽게 비언어적으로 이 사실을 전달할 뿐이다. 반지하의 퀴퀴한 곰팡내를 예민하게 인식하는 박사장이 얼굴을 찌푸릴 때, 사실 박사장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냄새조차 자신이 그은 가상의 선을 넘지 말라는 것이기도 하다.

기차와 집이라는 폐소공포증적인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계급적 사투는 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거나, 위로 올라가는 것 외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 처절함으로 도배돼 있다.

3. 봉준호의 가장 의미심장한 공간, 지하


▎봉준호 감독의 작품 세계에서 지하실은 계급성과 동시에 계급성의 균열을 보여주는 장소로 등장한다. [기생충]의 한 장면. / 사진: CJ ENM
이러한 방향의 좌표 안에서도 ‘지하’는 봉준호가 숨겨놓은 가장 의미심장한 기표로, 말끔한 현실 속에 숨겨진 빈틈과 균열을 대표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봉준호 월드에서 지하는 지상의 상징계적 질서가 통하지 않는 무질서의 악몽이 꽃처럼 피어나고, 근대적 질서가 비껴간 전근대적인 혼란의 공기가 넘나든다. 빈자들이 활개를 치고 은신하는 비밀의 낙원이자 괴물에게 사로잡힌 인질들이 널브러져 여린 숨을 쉬는 곳.

[플란다스의 개]에서 실종된 개는 주변 사람들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존재다. 옥상에 무말랭이를 너는 할머니에게는 유일한 가족이고, 이웃집 꼬마 아이에게는 다정한 동생이며, 시간 강사인 윤주에게는 신경의 마디 마디를 끊어놓는 소음 유발자였다. 그러나 그 개가, 그 개의 사체가 지하에 내려오면 강아지일지라도 반려동물의 지위를 잃고 단백질의 공급자로 육질 자체가 인간의 목표가 된다.

그 점은 [옥자]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지하실에 꾸며진 실험실과 도축실은 제아무리 허울 좋은, 전 세계에 안전한 먹거리 공급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도 유전자 조작이 판치는 육식 경제의 민낯이 드러나는 도살의 장소이다. [괴물]에서도 수직으로 10m 넘게 위압적인 형상으로 우뚝 서있는 한강의 다리 교각 가장 밑바닥에 괴물들의 먹잇감으로 숨겨놓은 소녀와 아이가 가느다란 생명줄을 부여잡고 누워있다. [살인의 추억]의 취조실은 지하의 보일러실과 함께 혼재하는데, 이 공간에서 가장 전근대적이고 폭압적인 방식으로 죄도 없는 무고한 용의자들이 취조되고, 얻어맞고,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없는 사람들에게는 지하실도 궁궐이다. [플란다스의 개]의 지하실엔 각종 시계가 걸려 있어서 세계 표준시각을 알 수 있고, 아파트 주민들이 버린 물건들이 여기저기 뭉텅이로 쌓여있고 러닝머신마저 구비돼 있다.

봉준호의 영화는 바로 이 지하와 지하의 비밀이 드러나고 폭로되는 지점에서, 주인공이 이 공간의 문을 열고 나가면서 벌어지는 모험에서, 주인공과 지하 혹은 핵심 공간과의 분리와 해체가 이루어지면서 스토리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경비원 자신만의 은밀한 사적 공간으로 여겼으나, 여기에도 어김없이 노숙자가 잠복해 경비원이 정성스럽게 끓여놓은 소중한 찌개(성분은 무엇일까)를 죄다 훔쳐 먹는다.

[기생충]에서는 이러한 비밀이 더 극적인 반전을 통해 지상 밑의 은신처로 연결된다. 사채업자에게 쫓겨 지하에서 4년간이나 살았던 가사도우미의 남편은 아예 자신이 ‘지하에서 태어난 것처럼’ 편안하다며 ‘이곳에서 살게 해달라’고 기택에게 구걸한다. 그리고 일련의 소동 끝에 다시 그 장소에는 기택이 스며들어가 도피 생활을 이어 나간다.

지하라는 공간과 그 공간 속의 주인공들을 통해 봉준호는 지하가 자신의 진기하고 변태적인 상상력의 전부이자 전체라고 고백하는 듯 보인다. 봉준호 월드에서 지하야말로 내면의 그림자 자아들이 숨을 쉬고 손에 손을 잡고 윤무를 출 수 있는 무의식적 공간으로 비밀병기처럼 숨겨져 있다.

4. 현실과 초현실의 부정교합


▎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선 “개들을 납치한 놈이 개보다 더 못한 개새끼”란 대사가 등장한다. 인간과 개의 위치를 전도시키는 블랙 유머다.
이렇듯 봉준호 월드에서는 익숙한 것이 낯설게 되고, 낯설고 변태적인 것이 익숙해지며, 기억해내야 할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기억하는 상태가 공존한다. 또한 절대 만나거나 섞일 수 없는 것들이 한 화면에 존재하며 각각의 인물을 밀고 끈다. 지상과 지하를 넘나들고, 농촌과 도시를 넘나들고, 해외와 국내를 넘나들며 현실의 민낯을, 시대의 공기를 들추어내도 여전히 영화의 일부분은 생경하고 낯설고 초현실적이다.

전근대적인 공간인 농촌 한복판에서 일어난 근대적인 연쇄 살인사건이 주는 시행착오와 무수한 오인들. 대낮에 완전히 몸체를 드러내고 한강가를 날뛰는 괴물을 속절없이 쳐다보는 악몽. ‘그래 이 맛이야’를 외쳤던 국민 엄마의 광기와 집착. 임신한 아내를 위해 호두를 깨던 망치가 부부싸움의 도구로 유리창을 깨부수고, 강아지 납치와 살해의 경험이 있는 시간 강사가 개 주인이 돼 실종된 개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부조리. 유력 언론사 논설위원이 골목길에서 신문 배달 청년과 마주치는 곳.

좀처럼 만날 수 없는 대극의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는 이 지점에서 피어나는 기묘한 긴장감이 예측 불허한 스토리의 흡인력을 배가시킨다. 영화 [기생충]에서 애초에 반지하에 사는 기택의 집안과 상위 1%에 속하는 박사장의 가족 전체가 만날 일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명문대생을 사칭하는 위조 서류는 과외라는 사건을 통해 자연스럽게 두 그룹을 마주치게 한다.

그러나 겉으로는 하늘과 땅 같은 이들의 신분 차이도 인간의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닮았다. 배우 송강호는 [설국열차] [괴물]에 이어 이번에도 잠을 자다 깨어 일어나서 화면에 등장하고, 부잣집 마나님인 연교 역시 마당의 테이블에서 자다가 깨어난다. 아무리 수천만원 하는 소파도 기껏해야 잠을 자는 데 쓰이고, 이 소파에서 기택네 식구들도 낮잠을 자고 연교네 부부도 밤잠에 든다. 비 때문에 캠핑을 망치고 부랴부랴 집에 와서 먹고 싶어 하는 것도 인스턴트 혼종 음식인 ‘짜파구리’다.

[살인의 추억]에서도 “향숙이”를 외치던 범죄 용의자와 형사가 한 장면에서 나란히 짜장면을 먹으며 같은 TV 프로그램인 [수사반장]을 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형사든 용의자든 밥은 먹어야 살고, 계급은 달라도 인간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욕망의 동등성이 주는 부박함은 이제 막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용의자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질문을 남긴다. 살인자든 형사든 모든 인간이 밥은 먹고 다녀야 한다는 자각, 즉 인간 욕망의 등가성으로 인해 이 모든 계급적 차이가 없어지면서 터져 나오는 블랙 유머는 주인공들이 존재론적인 망연자실의 쇼크에 빠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다.

5. 숙명적 실패와 난장의 지리멸렬


▎영화 [마더]에서 ‘혜자’(김혜자 역)는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잊기 위해 혈 자리에 침을 놓곤 춤을 춘다. 봉준호의 영화 가운데서도 최고의 엔딩으로 꼽힌다. / 사진 : CJ ENM
그들의 욕망은 결국 과녁을 비껴간다. 봉준호의 세계에서 주인공들의 욕망은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채워지는 법이 결코 없다. [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과 [마더]에서 미치도록 진짜 범인을 잡고 싶은 주인공들의 욕망은 처절히 부서진다. 엉뚱한 노숙인이 수갑을 차고, 부모도 없이 살아가는 아웃사이더 소년이 살인의 누명을 쓰고 주인공 대신 감옥에 간다. 특히 영화 [기생충]의 기택 가족의 욕망,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 아니 부자에게 기생해서라도 돈을 벌고 싶은 욕망은 가장 절절하고 일반인들도 한번쯤은 품는 현실적 욕망일 수 있다.

기택의 욕망은 처음엔 계획대로 착착 진행돼 가는 듯 보인다. 마치 [오션스 11] 류의 사기극이 한 치의 착오 없이 계획대로 먹혀들어 가는 것처럼. 영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대사인 ‘계획’은 그러나 [살인의 추억]에서 “향숙이”를 외치는 덮쳐라 백씨의 막내아들처럼 일종의 맥거핀일 뿐. 아들을 외상에서 구해주고 싶은 연교의 욕망도, 지하실에서 그대로 살고 싶었던 문광 내외의 바람도, 부잣집 사위가 되고 싶었던 기우의 소망도 무계획이 차라리 나아 보일 정도로 혼돈의 도가니 속에 삼천포로 빠져나간다.

봉준호의 인물들은 자신의 순진함, 자신의 멍청함, 자신의 허술함을 모르기 때문에 더 ‘웃프고’ 더 끔찍하고 더 지독하게 통제 불능에 가까운 운명의 직격탄을 맞는다.

그래서 봉준호의 영화 세계 속 사람들은 장엄한 실패를 달성하는 영웅적 인물이라기보다 갑자기 망연자실한 얼굴로 코피가 나고, 걷다가도 넘어지고, 얼굴에 피가 묻은 것도 모른 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자동차 백미러를 부수다 미끄러지는 지질함의 연속으로 등장한다. 그들이 특별히 나빠서라기보다 인간이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체육관 바닥에 몸부림치면서 가족의 상실을 아파하는데도 차 빼달라는 사람의 목소리와 언론의 카메라 플래시가 끼어드는 현실감. 서류를 믿었던 서울 형사는 서류 한 장에 광기에 빠져 용의자를 총으로 겨눈다. 박사장 집에서 멋지게 거품 목욕을 했던 기정은 결국 검은 오물이 분출하는 변기 위에 앉게 된다.

이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너 부모님은 계시니? 엄마 없어?”라며 슬픔과 죄의식이 뒤범벅된 질문을 던지는 어머니가 차창 밖으로 불쑥 나타날 것이다. 경운기가 범인의 발자국을 밟고 지나가면 가짜 발자국을 만들면 된다. 심지어 무모증인 남자가 연쇄 살인범인 것 같기도 하다. 농약으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어머니를 기억하는 아들은 지금도 같은 이불에서 엄마의 가슴을 만지며 잠이 든다.

미신·소문·조작이나 고문 같은 폭력적이고 전근대적 문제 해결책, 야매로 침을 놓고 야매로 주사를 놓는 여자들, 부조리한 사회 조직, 난장판, 춤판, 피로 얼룩진 생일 파티, 괴물이 나오는 강, 혼동과 광기와 부조리와 통제 불능의 운명이 뒤죽박죽돼 실수하고 불쑥 침범해 사람들을 뿌리째 뒤흔드는 저개발과 미성숙의 기억들. 마치 윤리 교과서의 페이지를 넘겼더니 윤락의 집이 나오는 것 같은 아이러니. 봉준호의 영화를 보다 보면 두려움과 연민과 슬픔과 죄의식과 유머와 자기모멸의 정서가 범람하는 과거 우리 사회, 지리멸렬의 한복판에 서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밖에 없다.

6. 파타피직스의 세계, 메타포에서 파타포로

봉준호의 상상력이 초현실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와 내가 몸담은 이 사회의 어떤 단면이 초현실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성의 질 속에 복숭아를 여덟 조각 넣은 연쇄 살인범을 잡지 못한 과거 전력이 있고, 보신탕 문화와 반려견 문화가 아직도 혼재해 있으며, 주한미군은 200ℓ의 포름알데히드를 하수구에 무단 방류했다.

어찌 보면 봉준호가 보여주는 자기모멸적인 메타포들은 단순한 메타포를 넘어서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철학을 통해 현실을 풍자하는 파타피직스(편집자 주 :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로 가득 찬 사이비 철학)의 방법과 닮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처럼 장기판 위의 왕과 군사와 장수들 같은 장기 돌을 진짜 사람이 대신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살인의 추억]의 농수로 속 여성들의 시체는 농수로, 즉 질 속의 복숭아나 볼펜처럼 어디에 처박힌 존재로 스크린에 처음 등장한다. 영화 [괴물]의 원제는 ‘숙주(the host)’인 바, 사람들은 괴물의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산 강두가 이 사회의 괴물이 되고 숙주로 의심받는 과정을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작두를 썰며 손에 묻은 피로 상징되는 어머니는 그 발음처럼 마더이자 머더, 즉 어머니이자 살인자임이 밝혀진다. [옥자]의 미란도라는 대기업은 슈퍼돼지 옥자보다 훨씬 더 탐욕스럽다.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개들을 납치한 놈이 개보다 더 못한 개새끼’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기생충 역시 그 작명을 보면 감독의 속내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기택·기우·기정·충숙. 이들의 이름은 명백히 기생충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에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는 봉준호의 모든 영화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소독약의 이미지. 뿌연 안개처럼 스크린을 덮는 소독약의 불투명성은 영화 [기생충]에 와서는 반지하에 사는 바퀴벌레나 곱등이를 없앤다며 기택의 집에 깊숙이 스며든다. 안개처럼 퍼지는 소독약품에 기침을 하는 그들이, 그들 자체가, 기생충이라는 검은 농담.

이 외에도 ‘덮쳐라 백씨’나 ‘저주받은 관자노리’ 같은 기발한 별명들이나 강아지 이름이 순자이고 슈퍼돼지 이름이 옥자라는 트릭을 통과하면, 사람이 곤충이 되고, 개가 되고, 돼지가 되고, 괴물이 되고, 시체가 되고, 기생충이 되는 봉준호의 세상에 마침내 도달할 것이다.

그때 사람들 내면에 침잠한 심리적 외상은 깊숙이 잠복해 있다가 일순간 수면 위에 떠오른다. 엄마가 농약으로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떠올린 아들 앞에서. 귀신을 봤다고 생각한 어린 아들 앞에 다시 귀신 같은 형상의 살인자가 나타날 때, 찢어지는 비명은 울려 퍼지고 우발적인 범행으로 살인 충동이 주인공을 덮친다. 때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처럼 [기생충]의 기택은 후반부로 갈수록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면서, 의미와 의식과 이성이 통하는 상징계에서 깔끔하게 사라져 버린다.

7. 그러나 모스 부호처럼

봉준호의 주인공들이 국가나 사회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괴물이 출현해도 격리되고 조롱되고 통제되고 감시된다. ‘괴물’을 잡기 위해 출동한 군대, 경찰, 방역시스템과 ‘옥자’를 잡기 위해 출동한 사설 군대는 이들의 아픔을 조장하고 이들의 삶을 제약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개인과 사회의 소통은 가능한가. 그러나 적어도 감독은 관객과의 소통마저 포기하진 않는다.

한강변에 나타난 괴물과 싸우다 그 피가 얼굴에 튄 사실을 국가 방역팀에 가감 없이 얘기하는 바람에 유력한 바이러스 보균자로 지목돼 격리된 강두는 “제발 말 좀 할 수 있게 해줘,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라고 세상에 외친다. 그리고 [기생충]에서 박사장에게 리스펙트를 외치며 밤마다 스위치에 머리를 박아도 전달이 되지 못했던 모스 부호가 아들과 아버지를 소통하게 하는 은밀한 도구로 관객들에게까지 그 의미가 해독된다.

봉준호의 세상에서 때론 강아지와 슈퍼돼지는 천신만고 끝에 구출이 되기도 하고, 가족을 잃고도 다시 컨테이너 박스를 집으로 삼아, 반지하 월세방을 지상 위의 저택처럼 여기면서 남은 가족들은 다시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정 잊히지 않는다면 기억의 수인으로 남기보다 자신의 허벅지 안쪽의 용한 혈 자리에 스스로 침을 놓는 것은 어떨까. 자위처럼 자학처럼 자조처럼 허벅지에 스며드는 침의 통증으로 어머니는 기억을 지워내고 덩실덩실 관광버스 안에서 넋을 놓고 춤을 춘다.

그래서 봉준호의 주인공들은 결코 운명에 농락당하는 그저 우스꽝스러운 광대의 역할에서 끝나지 않는다. 처연하고 부박하지만, 뭉클하게 불가능한 꿈을 꾸는 그들. 그것이 아무리 비현실적이어도 언젠가 저 커다란 저택을 사서 지하에 사는 아버지와 만나고 싶은 간절한 바람까지 외면당할 수 없지 않은가.

만약 칸에서 상을 받지 못했더라도 [기생충]은 봉준호 월드의 결정판으로 당대의 영화로 계속해서 호명됐을 것이다. 그리고 봉준호의 영화답게 [기생충]을 보고 나오신 어르신들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서 집을 사려고 하는 기특한 아들의 효심을 맘에 들어하시는 관람 후의 해석을 듣고 봉준호 감독도 진정 좋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아직 잡히지 않은 연쇄 살인범은 [살인의 추억]을 보러 반드시 극장을 찾았을 것이다. 아마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이 궁금한 대저택의 사모님도 [기생충]을 보러 극장을 찾았을 것이다. 봉준호의 힘은 여기에 있다. 누구나 봉준호의 영화를 보길 원한다. 일부는 반복해서 그의 영화를 보는 연쇄 관람범이 되고 싶어 하기도 한다. 비평과 흥행이라는 모든 감독이 바라마지 않는 성취를 이룬 그가 이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오지 않기를. 글로벌 프로젝트도 좋고 영화를 띄울 수 있는 플랫폼을 시험하는 것도 좋지만, 적당한 예산을 갖고 대한민국이란 자장 안에서 오히려 더 대중적인 열광을 얻어낼 수 있는. [기생충]은 봉준호 자신에게도 대한민국 국민에게도 극히 드문 해피엔딩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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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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