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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1부)] 진흥왕, 한강 유역을 점령하다(7) 불국토(佛國土) 사상 확립 

부처님이 보호하는 신성한 나라에 사느니 

고승들, 국가비전 창출해 낼 사명 안고 중국에서 유학
신라인들이 외침 대비하고 자긍심·호국사상 갖는 데 기여


▎불국토를 꿈꾸던 신라인들은 경주 남산 서쪽에 발코니처럼 튀어나와 장엄한 전망을 가진 화강암 바위 위에 석탑을 조성했다.
법흥왕과 진흥왕 시대를 거치며 신라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두 왕은 가야 전역은 물론 한강 중·상류와 한강 하류까지 점령하는 등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영토가 확장되는 만큼 신라의 국가의식과 국가체제도 성장했다.

반면, 성장에 따른 갈등과 진통도 없지 않았다. 새로 편입된 신라 영토에는 가야·일본·백제·고구려·말갈인 등 다양한 이방인들이 살았기에 변동에 따른 마찰이 불가피했다.

신라부터가 많은 부족으로 이뤄진 국가였다. 본래 신라는 진한(辰韓) 12국 중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했다. 그렇게 출발한 사로국이 주변의 진한 소국들을 모두 통합하고 신라의 형체를 갖춘 때는 지증왕에 이르러서였다. 당연히 지증왕 때만 해도 사로국에 흡수된 진한 소국 출신들에게 부족(部族) 의식이 없지 않았다.

그런 지증왕 시대를 뒤이은 법흥왕과 진흥왕은 가야와 한강 중·상류, 한강 하류를 정복했다. 그곳의 이방인들에게도 부족신앙 또는 토착신앙이 있었다. 그 이방인들이 정복자 신라에 적대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부족과 이방인들을 진정한 신라인으로 통합해 내려면 무력 점령만으로는 부족했다. 정치·문화적으로도 통합해야만 진정한 통합이 될 수 있었다.

법흥왕과 진흥왕은 골품제도와 전륜성왕 사상을 이용해 피정복 부족과 피정복 이방인들을 정치·문화적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골품제도는 피정복 부족과 피정복 이방인들을 현실적 역량에 따라 신라에 편입하는 정책이었다.

예컨대 금관가야의 경우 신라에 버금가는 국가로 평가해 그 왕족을 신라 왕족인 진골로 편입하고, 그 이외의 부족장은 현실적 역량에 따라 6두품 또는 5두품 등으로 편입하는 정책이었다. 전륜성왕 사상은 법흥왕과 진흥왕을 전륜성왕에 견줌으로써 정복전쟁을 정당화하는 사상이었다. 이 같은 골품제도와 전륜성왕 사상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법흥왕과 진흥왕은 정복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진흥왕이 대가야를 정복한 이후 한반도와 만주에는 신라·백제·고구려 3국만 남았다. 3국 모두 불교를 기반으로 하는 고대국가였으며 강국이었다. 그런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해 승리하려면 기왕의 전륜성왕 사상보다 진일보한 사상이 필요했다.

전륜성왕 사상은 말 그대로 전륜성왕을 위한 사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정복자 중심의 사상이었고, 전쟁을 위한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전륜성왕 사상은 정복전쟁 후의 국가비전까지 명확하게 설정될 때만 완벽해질 수 있었다.

당시 신라 상황에서 정복전쟁 이후의 국가비전을 창출해 낼 사명은 스님들에게 있었다. 진흥왕과 그 이후의 신라 국왕들이 적극적으로 스님들을 중국에 파견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신라의 미래를 고민하며 중국에 유학한 스님들은 귀국 후 신라의 현실과 미래에 필요한 국가비전을 창출해냈다. 대표적인 스님이 바로 원광법사, 안함(安含)법사, 자장(慈藏)율사 등이었다. 이 스님들에 의해 중·고기 신라의 문화적 창조력이 폭발했다.

수·당의 흥망성쇠 목도하면서 국가비전 고민


▎신라 선덕여왕릉에서 진평왕릉으로 향하는 길. 길이 끝나는 곳, 아름드리 나무 사이에 진평왕이 누워 있다.
그런데 당시 중국 대륙은 한반도 이상의 격변기였다. 서기 221년 후한(後漢)이 멸망하면서 중국 대륙은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대륙은 수백 년간 분열과 갈등을 되풀이했다.

그러다가 581년 수나라가 건국되면서 바야흐로 통합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결국 589년 수문제(隋文帝)가 남조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했는데, 후한 멸망 후 장장 368년 만의 재통일이었다. 하지만 수나라는 제2대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실패로 단명하고 618년 당나라에 의해 재차 통일됐다.

원광법사·안함법사·자장율사가 중국에 유학하던 때가 바로 수나라와 당나라에 의해 중국이 재통일되던 시대였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재통일한 중국 대륙에는 한반도보다 훨씬 많은 이방인들이 있었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그 많은 이방인들을 정치적·문화적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중국에 유학한 원광법사·안함법사·자장율사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흥망성쇠를 보고 겪으면서 통일에 실패한 국가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 통일에 성공한 국가비전은 어떤지를 실감했다.

이런 경험으로 원광법사·안함법사·자장율사는 공히 국가 중심의 불교사상을 갖게 됐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안함법사와 자장율사의 불국토 사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세속오계나 불국토 사상은 공히 호국(護國)을 강조하는 국가 중심의 불교사상이라는 점에서 같았다. 특히 불국토 사상은 중·고기 신라는 물론 통일신라의 호국불교를 대표하는데, 그 불국토 사상을 신라에서 처음 제창한 스님은 안함법사였다.

각훈의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안함은 안홍(安弘)이라고도 불렸다. 안함법사는 23세 되던 601년(진평왕 23) 국비 유학승으로 선발돼 수나라에 유학했다.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귀국한 지 1년 후였다. 안함법사가 공부하던 수나라는 통일 직후로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당시 수문제(隨文帝)는 불교의 밀교(密敎) 사상을 이용해 중국을 정치적·문화적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수문제는 인도 출신의 밀교 고승들을 초청해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수행하게 했다. 대표적인 스님이 북인도 출신의 나련제려야사(那連提黎耶舍)였다. 그 스님은 589년 입적할 때까지 대흥선사에 머물며 [일장분호탑품(日藏分護塔品)] [월장분건립탑사(月藏分建立塔寺)] 등 초기 밀교 경전을 한역(漢譯)했다.

[일장분호탑품]은 불보살 또는 고승이 거주하는 성지(聖地)를 천신과 용왕들이 보호한다는 내용이고, [월장분건립탑사]는 절과 탑을 천신과 용왕들이 보호한다는 내용이다. 안함법사가 유학하던 601년 즈음 수나라에서는 나련제려야사가 한역한 불경들이 유행하고 있었다.

수문제는 대흥선사에 밀교 고승들을 모아 수나라의 축복을 기원하고 나아가 국가의 재난도 극복하고자 했다. 또한 수문제는 외국에서 온 유학승들도 대흥선사에서 공부하게 했다. 그 결과 대흥선사는 수나라 최고의 사찰로 부상했으며, 중국 밀교의 발상지로 자리 잡았다.

수나라에서 유학하게 된 안함법사 역시 대흥선사에서 공부했다.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안함법사는 대흥선사에서 5년 동안 진문(眞文)·십승비법(十乘秘法) 등을 두루 공부했다고 한다. 진문은 불교 다라니 즉 주문(呪文)이고, 십승비법은 열 가지 관법(觀法)으로서 공히 밀교의 수행법이었다. 즉 안함법사는 대흥선사에서 주로 밀교를 공부한 것인데, 당연히 나련제려야사가 한역한 밀교 경전도 공부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안함법사의 귀국 시점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해동고승전]에 서로 다른 기록이 셋이나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576년(진흥왕 37) 조(條)에 “이때 안홍법사가 수나라에 들어가 불법(佛法)을 구하다가 호승(胡僧) 비마(毘摩), 나등(羅等)의 두 스님과 함께 귀국했는데 그들은 [능가경(稜伽經)] [승만경(勝鬘經)] 불사리(佛舍利)를 왕에게 바쳤다”고 해 진흥왕 때인 576년에 귀국한 것으로 기록됐다.

반면 [해동고승전]에는 605년(진평 27)에 우전국(于闐國) 스님 비마진체(毘摩眞諦), 농가타등(農加陀等)과 함께 귀국한 것으로 기록돼 [삼국사기]와 29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해동고승전]에서는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義相傳)을 인용해 625년(진평왕 47) 의상대사가 태어나던 해에 안홍법사가 서역 스님과 더불어 귀국했다고 기록돼 있어 [삼국사기]와 49년이나 차이 난다.

안함법사 귀국 시점의 비밀


▎1.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초상. 선덕은 아들이 없었던 진평왕의 딸로 신라의 첫 여왕에 올랐다. / 2. 김부식 등이 지은 [삼국사기]. 신라·백제·고구려의 역사가 기전체(紀傳體) 방식으로 기술됐다.
이 때문에 안함법사와 안홍법사를 다른 사람으로 보기도 하지만 함께 귀국한 서역스님이나 활동 등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안함법사와 안홍법사는 동일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에서 안함법사의 귀국 시점이 다르게 기록된 이유는 고려의 묘청 반란 후 밀교에 대한 극심한 기피 때문으로 생각된다. 주지하듯 김부식은 묘청 반란을 진압한 주인공이었다. 김부식은 도참사상을 이용해 서경천도를 주장하던 묘청을 황당무계한 사기꾼이라 생각해 진압했다.

그런데 묘청의 도참사상은 연원을 따져 올라가면 도선선사의 풍수지리를 거쳐 안함법사의 밀교로 연결된다. 당연히 김부식은 안함법사의 밀교사상도 황당무계한 이론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신라에 밀교를 처음 들여온 안함법사를 아주 생략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마치 다른 사람인 듯이 의도적으로 진흥왕 부분에 기록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김부식은 안함법사가 수나라에서 유학하다가 576년 귀국했다고 기록함으로써 그 기록이 의도적인 오류임을 스스로 노출했다. 576년 당시는 아직 수나라가 건국되기도 전이므로 그때 귀국한 안함법사가 수나라에서 유학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의 기록, 즉 625년(진평왕47) 의상대사가 태어나던 해에 안홍법사가 서역 스님과 더불어 귀국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보다 신빙성이 훨씬 높다. 신라 당대의 기록이고 최치원이 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625년(진평왕 47)이면 수나라가 아니라 당나라 때였다.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을 신뢰한다면 안함법사는 수나라 유학 5년 만인 605년(진평 27)에 일단 귀국했다가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된 후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중국으로 갔다가 서역 스님들과 함께 625년(진평왕47) 귀국했다고 봐야 한다.

처음 귀국하던 시점인 605년은 아직 27세의 젊은 시절이었는데, 그런 안함법사를 믿고 서역 스님들이 신라로 왔을 가능성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의 기록대로 625년에 서역 스님들이 안함법사를 따라 신라로 왔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안함법사는 47세의 나이였고, 나아가 진평왕의 밀명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아들이 없었던 진평왕의 고민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 신라·백제·고구려의 역사가 편년체(編年體) 방식으로 기술됐다.
625년은 진평왕 재위 47년이었다. 진평왕은 출생연도가 확인되지 않아 당시 몇 살인지 알 수 없지만 재위 기간으로 볼 때 연로한 나이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단지 딸만 둘 있었다. 따라서 625년 즈음 진평왕의 가장 큰 고민은 후계자 확정이었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신라 역사상 여성이 국왕에 즉위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진평왕 후계자로 남성을 세워야 할지, 아니면 진평왕 큰딸을 세워야 할지를 놓고 크나큰 논란이 있었다.

당시 진평왕은 내심 큰딸을 후계자로 확정하고, 반대 여론을 제압하고자 안함법사의 밀교를 이용하려 한 듯하다. 그래서 안함법사를 당나라에 밀파해 밀교의 최신 동향을 탐문하게 하는 동시에 서역 스님들을 초빙하게 했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 625년에 안함법사가 서역 스님들과 귀국하게 됐을 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신라에서 밀교가 본격 확산됐다.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에 의하면 안함법사와 함께 온 서역스님은 비마라진체(毘摩羅眞諦), 농가타등(農加陀等), 불타승가(佛陀僧伽)였다. 이들이 신라 경주를 방문한 최초의 서역스님들이었다. 불교신앙이 만연하던 경주에 등장한 서역 스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거리였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그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부처님이나 보살의 말이나 행동처럼 신비화됐을 것이다.

그런 서역 스님들이 안함법사와 함께 황룡사에 머물며 [전단향화성광묘녀경(栴檀香火星光妙女經)]이라는 불경을 번역했다고 한다. 이 불경은 중국에서 한역되기도 전에 신라에서 먼저 한역된 최초의 불경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이 불경은 실전(失傳)돼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제목으로 볼 때 여성과 관련된 것이 분명하고, 궁극적으로 선덕여왕의 즉위를 예언 또는 정당화하는 논리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와 관련해 안함법사가 서역 스님들과 함께 귀국할 때 가져온 불경이 [능가경(稜伽經)]과 [승만경(勝鬘經)]이라는 [삼국사기] 기록 역시 의미심장하다. [능가경]은 여래장(如來藏) 사상 즉 모든 중생에게 여래의 씨앗이 있다는 사상을 설파하는 불경이다. 여래장 사상에 의하면 남성은 물론 여성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고, 그래서 여성이 국왕에 즉위하는 데 문제될 게 없다고도 주장할 수 있다. [승만경]은 제목 그대로 승만 부인이라는 여성이 주인공인 불경이다.

이 같은 [능가경]과 [승만경] 역시 여성인 선덕여왕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안함법사가 가져왔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진평왕은 자신의 큰딸인 선덕여왕의 즉위를 위한 사전공작 차원에서 안함법사의 밀교, 서역 스님들 그리고 [전단향화성광묘녀경] [능가경] [승만경] 등을 적극 이용했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 안함법사가 귀국 후 참서(讖書) 1권을 지었다는 [해동고승전]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참서는 신비한 말 또는 현상을 이용해 미래를 예언하는 책이다. 한국사에는 [도선비기] [정감록] 등 수많은 참서가 있지만, 최초의 참서가 바로 안함법사의 참서다. 이런 면에서 안함법사는 신라 밀교의 시조일 뿐만 아니라 한국 예언서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안함법사의 참서는 글자를 분할하기도 하고 붙이기도 해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웠다고 한다. 안함법사가 지은 참서의 제목이 무엇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삼국유사]에는 안함법사의 저서로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 라는 책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안함법사의 참서는 일단 [동도성립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현재 [동도성립기]는 실전돼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제목으로 내용을 유추해 보면 [동도성립기]는 경주 역사에 가탁(假託)한 예언서일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에서는 황룡사 9층탑과 관련해 [동도성립기]가 인용돼 있는데 저술 시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만약 선덕여왕 즉위 이전에 저술됐다면 그 내용은 예언으로 해석해서 “신라 제27대 왕은 여왕일 것이다. 그 여왕은 비록 도(道)는 있겠지만 위(威)는 없을 것이므로 구한(九韓)의 침략을 받을 것이다. 만약 용궁(龍宮)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주변 국가의 재난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로 될 수 있다.

반면 선덕여왕 즉위 후에 저술됐다면 “신라 제27대 왕은 여왕이므로 비록 도(道)는 있지만 위(威)가 없어 구한의 침략을 받고 있다. 만약 용궁(龍宮)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주변 국가의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안함법사가 귀국 후 참서 1권을 저술했다고 하는데 그 시점은 아무래도 서역 스님들과 함께 귀국한 직후로 판단된다. 참서를 지은 목적이 선덕여왕의 즉위를 정당화하는 데 있었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당시 서역 스님들이 한역한 [전단향화성광묘녀경] 그리고 안함법사가 가져온 [능가경]과 [승만경]은 궁극적으로 여성은 부처도 될 수 없고 그래서 왕도 돼서는 안 된다는 반대론을 제압하는 데 유용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즉위 후의 여왕이 정말 훌륭한 왕이 될 수 있다고까지 보장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안함법사의 참서 즉 [동도성립기]는 그런 불안을 없애기 위해 저술됐다고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서 참서 내용 중 하나로 기록된 “제일여주(第一女主) 장도리천(葬忉利天)”이라는 참문이 의미심장하다. 이는 “첫 번째 여왕은 도리천에 묻힐 것”이라는 뜻인데 선덕여왕과 관련해 두 가지를 예언하고 있다.

첫째는 장차 신라에 많은 여왕이 즉위할 것인데, 그중에서 제27대 선덕여왕이 첫 번째 여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둘째는 선덕여왕은 승하 후 도리천에 묻힐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런데 불교 맥락에서 도리천에 묻힌다는 예언은 함축적이다. 불교 이론에 의하면 도리천에 묻힌다는 것은 사후에 도리천에 환생한다는 뜻이다. 도리천에 환생하려면 현생에 전륜성왕이거나 아니면 전생에 큰 공덕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선덕여왕이 승하 후 도리천에 묻힌다는 예언은 현실의 여왕은 전륜성왕이라는 의미와 같다.

“황룡사에 9층탑 세운다면 재난 진압할 수 있다”


▎경주 구황동 황룡사 터. 담장 내 면적이 동서 288m, 남북 281m에 이르는 동양 최대 사찰이었다.
그럼에도 정말 선덕여왕이 전륜성왕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혹과 불안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의혹과 불안을 없애기 위해 안함법사가 제시한 대안이 바로 황룡사 9층탑과 불국토 이론이었다.

사실 당시의 백제·고구려 그리고 동북아 국제정세로 볼 때 선덕여왕이 성공한 전륜성왕이 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당장 신라인들로부터도 의혹과 불신을 받는 여왕인지라 적지 않은 곤란과 실패를 겪으리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안함법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왕은 비록 도(道)는 있겠지만 위(威)는 없을 것이므로 구한의 침략을 받을 것이다”는 예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구한의 침략을 받을 것이다”는 예언은 그 여왕이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모순됐다. 진정한 전륜성왕이라면 구한의 침략을 받을 것이 아니라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함법사는 여왕으로서 겪게 될 곤란과 실패가 분명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그 곤란과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한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는 논리와 증거가 필요했다. 그 논리와 증거가 바로 경주의 불국토 이론이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옥룡집(玉龍集)] [자장전(慈藏傳)] [제가전기(諸家傳紀)]에 “신라 월성 동쪽의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으니, 그곳은 즉 과거 부처님 때의 절터다. 지금 황룡사 터는 7처가람의 하나다”는 내용이 있다고 했다.

이런 논리를 경주의 ‘7처가람설(七處伽藍說)’이라고 하는데, ‘7처가람설’의 요지는 먼 과거에 경주는 부처님들이 머물던 곳 즉 불국토였고, 현재도 부처님들이 머무는 불국토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경주 불국토 이론의 핵심이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7처가람설’은 도선선사의 [옥룡집] 자장율사의 [자장전]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전기에 두루 실렸다고 하는데 여러 사람들의 전기에는 안함법사의 저술도 당연히 포함된다. 즉 ‘7처가람설’의 창시자는 안함법사인 것이다. 안함법사는 경국 불국토의 핵심으로서 황룡사의 가섭불 연좌석을 지목하고, 구한의 침략을 제압하자면 9층탑을 세워야 한다고 제안했는데, 그 제안은 바로 밀교에 근거하고 있다.

‘7처가람설’이 핵심인 ‘불국토 사상’의 확산

밀교는 불보살이 머무는 절이나 탑을 천신과 용왕이 보호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안함법사는 선덕여왕이 비록 여왕이어서 곤란을 겪을 수는 있지만, 경주가 불국토이기에 천신과 용왕들의 보호를 받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예언했던 것이다. 아울러 경주가 불국토임을 사람들이 잘 믿지 않으니 믿도록 하려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 같은 안함법사의 제안은 자장율사에 의해 완성됐다. 선덕여왕 9년(640) 안함법사는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3년 후인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자장율사는 당나라에 있을 때 오대산의 문수보살로부터 “신라 황룡사는 곧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講演)하던 곳으로 연좌석이 아직 남아 있다”는 말과 “신라 국왕(선덕여왕)은 인도 크샤트리아 종족”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 언급은 사실 안함법사의 ‘7처가람설’ 및 ‘제일여주 장도리천’ 예언과 같은 내용이다. 즉 자장율사가 오대산에서 만났다는 문수보살은 사실 안함법사의 예언이었던 것이다. 이는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만난 후 들었다는 태화지(太和池)의 신인(神人) 이야기에서 좀 더 분명해진다.

자장율사가 태화지 옆을 지날 때 문득 신인이 나타나 “신라는 여성이 국왕이어서 덕(德)은 있지만 위(威)가 없어 주변국에서 침략하니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라”고 했다. 태화지 신인의 이 언급은 안함법사가 [동도성립기]에서 했던 예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만난 문수보살과 신인은 사실상 안함법사가 [동도성립기]에서 언급한 예언들에 다름 아니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를 구하고자 당나라에 갔던 자장율사는 안함법사의 경주 불국토 사상에서 그 해답을 찾았던 것이다. 귀국한 자장율사는 안함법사의 제안에 따라 황룡사 9층탑 건립을 제안했고, 그 제안에 따라 9층탑이 건립됐다.

이로써 경주에서는 ‘7처가람설’을 핵심으로 하는 ‘불국토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됐다. 이런 불국토 사상은 모든 신라 사람에게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부처님이 상주하며 보호하는 신성한 나라에 산다는 자부심을 심어줬고, 그 자부심은 호국사상으로 연결됐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907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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