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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18)] 이성계, 권좌 문턱에서의 망설임 

“나의 마음은 다른 뜻이 없는데 왕이 어찌 죄 주겠는가?” 

군권 장악한 이성계, 정치적 고비처마다 사직상소로 王 압박하고 국면 전환
성리학 근거한 군주가 될 운명이란 확신과 공양왕의 견제란 공포가 교차


▎전주에 위치한 경기전은 조선의 창업자 이성계의 영정을 보관했던 곳으로 세종 때 건립됐다.
1391년은 정몽주가 본격적으로 이성계파와 대결에 나선 해다. 그 결과 정도전이 유배되고 남은이 사직했다. 조반도 유배됐다. 조반은 1388년 무진정변이 발생하는 단초를 열고, 위화도회군 뒤는 이성계파의 대중국 외교를 담당해 온 인물이다.

이성계는 공양왕의 조용하지만 깊은 적대감, 반대파의 끈질긴 비난, 그리고 정몽주의 이반에 상심해 정치에 회의를 느낀 듯하다. 그는 사직하고 동북면의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조용히 마치고 싶어 했다. 사태가 점점 악화하는 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사태가 흘러가는 대로 방치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이성계파는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위화도회군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반(反)이성계파는 세자 왕석을 명나라에 보내 조회를 하도록 했다. 명의 공인을 받음으로써, 왕조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이색이 일찍이 창왕대에 취한 방책이었다.

한편, 공양왕과 이성계파 사이에 불교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공양왕은 과격한 척불론을 개진한 성균생원 김초를 죽이고 싶어 했다. 고려 조정에서 척불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정쟁의 대상이 된 것은 고려 역사 500년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 이상 영화를 바란다면 화를 초래할 것”

1390년에는 윤이·이초 사건, 김종연 사건, 심덕부 사건이 숨돌릴 틈 없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성계파는 이를 통해 이색을 위시한 문신들은 물론 의심되는 무장들도 광범위하게 제거했다. 9공신, 즉 우왕·창왕을 축출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킨 장군들 중 심덕부·지용기·박위조차 유배됐다. 이렇게 이성계파는 병권을 확고히 장악했다. 11월에는 국가의 군대 전체를 이성계에게 통할하도록 했고, 여러 원수들의 인장을 회수해 지휘권을 박탈했다. 1391년 1월에는 군사 편제를 개혁해 5군을 3군으로 바꾸고, 새로운 총지휘부로 도총제부를 설치했다. 이성계가 도총제사가 되고, 배극렴이 중군총제사, 조준이 좌군총제사, 정도전이 우군총제사에 임명됐다.

또한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은 품관(受田品官)을 모두 3군에 소속시켰다. 이들은 지방 토착사회의 유력자들이었으므로, 전국적인 군사 네트워크를 구성한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국가의 군대 지휘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2월에는 삼군총제부에 통속된 군사를 사열하고 번을 나눠 궁궐을 지키게 했다.

이처럼 가혹한 옥사와 병권 일원화를 통해 이성계파의 권력은 요지부동의 철옹성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변안열이 처형되고, 1390년이 저물기 전에 조민수가 유배지에서 죽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성계파의 줄기찬 공세에도 불구하고 고려 수호파의 수장격인 이색과 우현보, 이임은 처형되지 않았다. 1 390년 6~7월부터 시작된 정몽주의 이반이 이성계파의 공세를 무디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몽주를 따라 유력한 무장인 박위가 돌아섰고, 심덕부도 방향 전환을 조심스럽게 모색했다. 1390년 11월 윤귀택의 고변에 의해 그들이 제거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힘을 얻은 공양왕도 좀 더 과감해졌다. 1391년 1월에 우인열·이숭인·하륜·권근·이행·원상 등 반이성계파 인물들을 대거 사면하고, 경외에 편리한 대로 거처하도록 했다. 또한 공양왕은 경연에서 “지금 사람이 중국의 고사만 알고 본조의 일을 몰라서야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정몽주가 실록 편찬을 건의했는데, 왕은 이색과 이숭인을 복권시켜 실록 편찬을 맡기고자 했다.

간관들의 동향도 심상치 않았다. 도당은 김종연의 이성계·정몽주 암살 음모를 고변한 서경천호 윤귀택에게 관직을 하사했다. 그러나 간관들은 그 임명장인 고신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일로 간관 진의귀·정습인 등 9인이 유배됐다.

“태양은 서쪽으로 지고, 달은 기운다”


▎태조 이성계가 사용했던 칼로 ‘전어도’라고 불린다. / 사진:고려대박물관
이런 일들이 모두 정도전을 비롯한 이성계파의 마음을 불편케 했다. 1391년 3월 이성계는 다시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이 다소 심각했다.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는 정치적으로 불만이 있을 때마다 사직 상소를 올려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회군 후 첫 사직 상소는 1388년 6월에 올려진 것이다. 당시 창왕의 인사에 대한 비토였다. 1390년 3월의 사직은 윤소종의 추방에 항의한 것이었다. 이성계는 전문을 올려 사양했는데, 이때의 내용은 결이 다소 달랐다. 사직의 이유로 자신이 더 이상 영화를 바란다면 재앙과 원망을 초래할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다만 덕을 헤아려 직위를 주는 것은 이것이 임금의 밝음이 되고, 총행(寵幸)으로써 공을 차지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의리에 합합니다. 만약 영화를 탐내어 함부로 나아가면 혹은 재화(災禍)를 맞이하고 원망을 초래합니다. 이로써 소공(召公)은 권세가 극성하면 있기 어려움을 근심했으며, 채택(蔡澤)은 공이 이루어진 사람은 떠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태조실록] 총서)

이성계는 미래를 놓고 깊이 고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용된 소공과 채택의 고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두 사례는 삶의 정상에 선 사람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공은 문왕의 아들로 주무왕과 주공의 동생이다. 무왕을 도와 은을 멸망시켰으며, 주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뒤 주공과 함께 국가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는 문왕부터 강왕까지 4대에 걸쳐 정치에 종사해 선정을 펼쳤지만, 자신의 권력이 너무 높은 것을 경계했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큰 위업을 이루면 역사에 이름이 빛날 것이다. 그러나 위업은 역설적으로 정치가의 사적인 삶을 위협한다. 공민왕 때 제2차 홍건적의 난을 승리로 이끈 장군 정세운·안우·김득배·이방실이 처형된 것은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이 장살된 것이나 이순신 장군이 처형될 뻔한 것도 같은 사례이다. 소공 역시 주나라 초기에 그런 위험을 겪었을 것이다.

채택의 고사는 더 인상적이다. 그는 연나라 출신의 유세가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불우했다. 그러나 진나라 재상 범수(范睢)의 인정을 받아 재상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채택이 범수의 인정을 받은 것이 바로 ‘물러남의 지혜’였다. 범수는 위나라 사람이다. 그 역시 처음에는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그의 재능을 질투한 수가(須賈)의 고자질로 심한 매질을 당하고, 거적에 싸여 변소에 버려진 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진나라로 탈출한 그는 소양왕(昭襄王)의 지우를 받아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유력한 귀족들을 제거해 왕권을 확립하고, 진나라의 대외정책을 바꿨다. 근교원공책을 원교근공책으로 바꾸어 위나라와 한나라를 공격했으며, 조나라 군대 40만을 전멸시켰다. 그가 인생의 절정에 올랐을 때, 그가 추천한 정안평과 왕계가 진나라를 배신했다. 정안평은 범수가 변소에서 탈출했을 때 도운 벗이었고, 왕계는 그를 진나라로 탈출시켜 소양왕에게 소개한 인물이었다. 진나라 법은 추천한 인물이 죄를 범했을 때 추천자를 같은 죄로 처벌했다. 곤경에 처한 범수가 고민하고 있을 때 채택이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네 사람의 역사적 사례를 들었다. 진나라의 상앙(商鞅)과 백기(白起), 초나라의 오기(吳起), 월나라의 대부종(大夫種)은 국가를 위해 헌신하여 공은 일월처럼 빛나고 천하에 신망에 얻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몸이 찢겨 죽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 반면 범려(范蠡)는 월나라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큰 공업을 세웠지만 일생을 잘 보존했다.

군막에서 '대학연의' 읽은 이성계의 대망론


▎현실정치와 이상 사이에서 조광조의 꿈은 좌절됐다.
공은 같은데 삶의 결말이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이렇다. “네 사람은 공을 이루고도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입어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소위 펼 줄만 알고 굽힐 줄을 몰랐고, 나아갈 줄만 알았지 되돌아갈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려는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초연히 세상을 버리고 물러나 도주공(陶朱公)이라 불리며 몸을 길이 보전했다.” 채택은 이것을 보편적 인생철학으로 요약했다. “속담에 ‘태양이 높이 솟았다가 서쪽으로 지고, 달도 차면 곧 기운다’고 한다. 사물이 활짝 피어 끝에 이르면 바로 시든다. 이는 천지만물의 보편적 법칙이다. 나아감과 물러남을 때에 적절하게 맞추는 것이 성인의 당당한 도리이다.”

그리고 범수에게 이렇게 권유했다. “나는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추측할 수 있다’고 들었다. 옛 책에는 ‘공을 이룬 곳에는 오래 머물지 말라’고 했다. 저들 네 사람이 받은 재앙을 군께서 왜 또 이어받으려고 하는가? 군은 어째서 이 기회에 재상에서 물러나 다른 유능한 사람에게 물려준 다음, 바위 밑에서 살면서 물가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살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한다면 백이·숙제같이 고결하고 아름다운 명성을 들을 것이고, 오래도록 응후(應侯)라는 작위를 누리면서 대대로 깨끗했다는 칭찬을 들을 것이다. 허유와 연릉(延陵) 계자(季子)와 같이 사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칭송 받을 것이며, 왕자 교(喬)와 적송자와 같이 장수할 것이다.”([사기열전])

여진족과 잡거하는 영흥에서 태어나 22세에 개성에 온 이성계 역시 고려말의 숱한 전장을 전전하며 일생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고려 정계의 정상에 섰다. 그 역시 이제 범수와 같은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성계는 40대 말이나 50대 초부터 대망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학대사는 석왕사에서 이성계를 만나 왕이 될 것을 예언한 그 유명한 꿈풀이를 해줬는데, 그때가 1384년(우왕 10)이었다. 이성계가 50세 때였다. 1388년 무렵 이성계는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고 있었다. [대학연의]는 성리학의 제왕서다. 당시는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초기로서, 이 책의 존재를 아는 사람조차 드물 때였다. 그런데 평생 전장을 누비며 살아온 무장이 군막에서 성리학 제왕서를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성리학으로 새로운 국가이념을 세우는 나라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 역시 1388년 이후 끝없이 고뇌하고 방황하면서 살얼음 밟듯이 역사의 길을 걷고 있었을 것이다. 왕이 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나, 반드시 왕이 되고야 말겠다는 불타는 야망보다도 아마 고뇌와 회의, 불안감과 공포감이 더 깊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해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에게 채택의 논변은 얼마나 강력하고 명쾌한가? 범수에게도 그러했다. “이것과 화를 입고 일생을 마치는 것 어느 쪽이 낫겠습니까? 군께서는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만일 지금의 지위를 떠나는 것이 아까워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신다면 틀림없이 그 네 사람과 같은 화를 당할 것입니다. [역경]에 ‘끝까지 올라간 용은 뉘우칠 날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오르기만 하고 내려올 줄 모르고, 뻗을 줄만 알고 굽힐 줄을 모르며, 나아가는 것만 알고 돌아설 줄을 모르는 사람을 비유한 말입니다. 이를 숙고하시길 바라옵니다.”([사기열전])

임금과 신하는 서로 만나기 어렵다


▎조선시대 어연의례의 재현. 조선은 요순시절의 복원을 꿈꿨지만 왕과 신하는 추구하는 바가 근원적으로 달랐다.
이성계는 1391년 3월에도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는 첫째, 군신관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나라는 대소가 있고 일은 고금이 다르지만, 그 임금과 신하의 서로 만나기가 어려운 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성계는 공양왕과의 관계에 절망감을 느낀 것이다. 군신관계는 왜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법가에 따르면, 임금과 신하의 이익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임금은 계산으로 신하를 기르고, 신하 또한 계산으로 임금에게 일을 한다. 군신이 서로 계산을 한다. 자기 몸을 해쳐서 나라를 이롭게 하는 일은 신하는 하지 않는다. 나라를 해쳐서 신하를 이롭게 하는 일은 임금은 하지 않는다.([한비자])

하지만 유가는 반대로 생각한다. 임금과 신하가 공공의 목적을 위해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최선의 정치, 완전한 국가가 가능한가? 조광조는 그렇다고 믿는다. 하늘과 사람이 하나의 근본 이치, 즉 천리(天理)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종의 질문에 조광조는 이렇게 답했다.

“천하를 함께할 수 있는 도(道)로써 나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인도하고, 천하를 함께할 수 있는 마음(心)으로써 나와 하나가 될 수 있는 마음을 감동시키면 천하의 마음들도 내 마음의 정당함에 감화돼 감히 그 바름에 같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요, 이를 인도하여 내 도에 인도하면 천하의 사람들은 내 도의 큼을 좋게 여겨 감히 선한 데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리학의 이론적 추론이다. 조광조는 아직 젊었다. 실제 역사에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조광조 자신이 그 역사적 사례이다. 지치(至治)와 왕도정치를 열망했던 그는 중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율곡은 군신의 만남이 어려운 이유를 임금과 신하 양쪽에서 찾았다. 그러나 압도적인 이유는 임금 때문이다. 좋은 임금이 거의 없는 것이다. ‘좋은’과 ‘임금’은 형용모순이다. 왜 좋은 임금은 그토록 불가능에 가까운가? “도학(道學)에 밝지 못하고, 행하지 못함이 그 원인이다.” 율곡이 34세에 저술한 [동호문답]의 ‘군신이 서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논의(論君臣相得之難)’에서 그렇게 지적했다. 나쁜 임금은 폭군, 혼군(昏君), 용군(庸君) 세 종류가 있다. 욕심이 마음을 흔들고 숱한 유혹이 밖에서 침입하며, 백성의 힘을 다해 자신을 봉양하고 충언을 배척하여 자기만이 성스러운 체 하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자가 폭군이다. 정치를 잘하려는 마음은 있으나, 간사한 자를 분별하는 지혜가 없어 일마다 실패하고 어지러워지는 자가 혼군이다. 나약하여 분명히 지향하는 바가 없고, 과단성이 부족해 만사를 방치하는 것이 용군이다. 삼대 이후 가능성이 있었던 임금은 삼국지의 등장하는 유현덕, 즉 소열제(昭烈帝) 뿐이었다. 그는 세 번이나 제갈량을 찾아가며 지성을 다했다. 한국 역사에는 세종만이 그런 임금이었다. “나라를 편히 하며 비 오고 개는 것이 공평했고, 유교를 숭상하고 도를 중하게 여겨 인재를 기르고, 예악을 제정해 후손에 법을 보였으니, 우리나라 만 년의 복조는 세종에서 처음 터를 잡은 것이다.”([동호문답])

이율곡이 볼 때 조광조는 어떠했는가? 연산군의 폭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중종은 성의를 다해 현인을 구했다. 조광조 또한 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몸을 잊어 나라에 바쳤으며, 세도를 돌이켜 삼황오제를 따를 뜻을 가지고 있었다. 사림이 진동하고 백성들이 우러러보아 모두 태평 시대가 열릴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출세가 너무 일러 실용할 학문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그의 동료 중 충현도 많았지만 명예를 추구하는 자도 섞여서, 의논이 너무 날카롭고 일하는 데 순서가 없었다.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격군(格君)을 기본으로 삼지 않고, 헛되이 겉치레만 앞세웠다. 이 때문에 간인들이 이를 갈며 틈을 엿보는 줄도 모르고, 기묘사화로 현인들이 모두 한 그물에 걸렸다. 이때부터 선비의 기운이 심하게 상하고 국맥이 거의 끊어졌다.

하지만 이율곡의 정치적 삶을 보면, 그 역시 선조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선조는 요순의 정치를 역설하는 이율곡이 “본래 오활(迂闊: 실상 없이 큰 소리만 하는 것) 한 사람”이며, ‘교격(矯激: 성질이 굳세고 과격)’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한 문제의 신하 가의(賈誼)를 빗대 율곡을 풍자했다. 즉, 가의는 “글을 읽어서 말은 잘했으나 실제로 쓸 만한 재주가 못되어, 한 문제가 가의를 쓰지 않은 것은 참으로 본 바가 있다”고 말했다.([율곡전서]) 선조는 또한 삼대의 정치를 몽상으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는 한 문제의 말을 빌려 “너무 높은 이론(高論)을 논하지 말라”고 말했다. 또한 이이에게 “내가 지난 역사를 보건대, 시대가 점점 변하여 하나라가 요순시대만 못하고, 은나라가 하나라만 못하며, 주나라가 은나라만 못하였으니, 오늘날 삼대의 정치를 회복하기란 진실로 어렵다.”([선조실록] 선조 8년 10월 25일)고 주장했다.

조광조와 이율곡의 좌절


▎율곡 이이의 초상화. 당대의 대학자인 그조차도 선조에 의해 핍박 받은 시절이 있었다.
그런 선조도 뒤늦게 율곡의 충정을 인정하고 그를 중용하고자 했다. 1583년 9월, 선조는 율곡을 이조판서에 임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의 상소를 보니, 아, 하늘이 우리나라를 평치(平治)하려 하지 않으심인가. 어찌하여 경과 같은 인물이 시대에 뜻을 얻지 못한단 말인가. 생각건대 이는 하늘이 경의 심성을 단련시켜 능하지 못한 점을 더 보충하게 함으로써, 장차 후일에 주즙(舟楫)과 임우(霖雨)의 책임을 맡기려고 함일 것이니, 하늘이 경에 대해 곡진하게 이루어 줘, 옥처럼 다듬어 완성시킬 뜻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 경은 속히 와서 나를 보고, 품고 있는 생각을 모두 말하라. 많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으니, 경은 다시 고사하지 말고 속히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선조실록] 선조 16년 9월 5일)

마침내 왕과 신하가 진심으로 만날 드문 기회가 왔다. 주즙과 임우의 책임이란 [서경]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 큰 내를 건넌다면 너를 써서 배(舟)와 노(楫)로 삼으며, 만약 큰 가뭄이 든 해에는 너를 써서 3일의 장맛비를 짓게 하리라.” 주즙과 임우란 큰 내를 건널 때의 배와 노, 큰 가뭄 때 사흘 내내 내리는 비(霖雨)처럼 큰 어려움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뜻한다. 은나라 고종이 부열(傅說)을 재상으로 발탁할 때 한 말로서, 국가 대사를 모두 맡기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율곡의 심신은 이미 병들었다. 그는 불과 넉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이성계가 동경한 장량과 엄자릉의 처세


▎한나라 개국공신 장량의 초상화. 이성계는 장량의 처세를 이상적으로 생각했다.
왕도정치가 가능하려면 도학을 알고 실천하는 임금과 신하가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역사상 그런 시대는 요순시대밖에 없었다. 율곡에 따르면, 그런 시대는 뜻있는 임금은 반드시 존경하고 믿는 신하가 있어 서로 친한 것이 아버지와 아들과 같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 고기와 물과 같았으며, 조화가 음률의 화음과 같고, 서로 들어맞는 것이 도장과 문서와 같았다. 그리하여 신하의 건의가 쓰이지 않음이 없고, 도가 행하지 않음이 없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율곡이 한탄하는 바처럼, 그런 일은 역사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법가와 유가의 의견이 다르지만, 현실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다만 법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것이고, 유가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다.

이성계가 바라는 것은 율곡의 왕도정치처럼 고매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죽음을 당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그는 공신에 대한 한고조와 광무제의 처사를 비교했다. 한고조는 창업군주로서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의 공신들은 거의 모두 피살 당했다. 광무제는 중흥군주로서 호걸들과 함께 한나라를 광복시켰다. 뿐만 아니라 공신들을 잘 대우해 종말을 보전케 했다. 이런 점에서 이성계는 광무제는 한고조보다도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제왕이 공신을 잘 보존한 것을 칭송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치 세계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간 공신의 처세를 더 높이 평가했다. 그는 한나라의 창업공신 중 주발과 장량을 비교했다. 주발(周勃)은 한 고조 사후 황후 여씨 일족이 찬탈하자 그들을 제거하고 한 문제를 추대해 한실을 회복했으며 승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역시 만년에 모반 혐의로 투옥됐으며 불안 속에서 삶을 마감했다. 하지만 주발의 일생은 한신과 경포, 팽월 등 다른 창업 공신의 비참한 최후에 비하면 행복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성계는 주발이 아니라 장량을 칭송하고 있다. “한신과 주발도 마침내 장량의 보전한 것만 같지 못하다.” 장량은 춘추전국 시대 5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한나라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진나라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장량은 복수를 다짐하고 진시황 암살을 시도했다. 장량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담대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암살 계획이 실패한 뒤 은거한 그는 한 고조 유방의 농민반란에 참여했다. 장량은 뛰어난 지략의 소유자로서, 천하를 쟁패한 한고조의 전략이 모두 그에게서 나온 것이다. 한고조는 “군막에서 모략을 세워 천리 밖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내가 장량만 못하다”고 장량을 높이 평가했다. 천하를 통일한 뒤 한고조는 장량에게 제나라의 좋은 땅을 영지로 하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장량은 이를 사양하고, “내가 폐하와 처음 만났던 유(留) 땅을 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여 유후(留侯)로 봉해졌다. 이로써 한고조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시켰을 뿐 아니라, 공신들에 대한 한고조의 의심을 피해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평소 몸이 약했던 그는 병을 칭탁하고 집에 틀어박혀 정치에 대한 관심을 끊고 신선술을 공부했다. 그는 한고조 사후 9년 뒤 죽었으며, 아들 장불의(張不疑)가 뒤를 이었다.

공양왕의 원초적인 불신

이성계는 또한 광무제의 공신들을 비교했다. “구순(寇恂)과 등우(鄧禹)도 오히려 엄자릉(嚴子陵)의 고절(高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구순과 등우는 광무제를 도와 동한을 세운 28명의 장군들, 즉 운태28장(雲台二十八將)의 일원이다. 문무를 겸전한 등우는 숱한 전공을 세워, 중국의 역대 명장 반열에도 올랐다.

그러나 이성계는 그들의 전공과 영화도 엄자릉의 높은 절개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엄자릉은 은자(隱者)와 일민(逸民)으로서, 도연명처럼 하나의 전설이 된 인물이다. 엄자릉의 본명은 엄광(嚴光)이고 자릉은 자(字)이다. 그는 소시에 광무제 유수와 동문수학했다. 유수가 황제가 되자 엄광은 이름을 바꾸고 칩거했다. 그 재능을 아깝게 여긴 광무제는 초상화를 그리고 전국에 행방을 찾게 했다. 부춘산 동강에서 양가죽 옷을 입고 낚시하던 그는 장안에 초빙됐다. 광무제는 그의 숙소를 찾아가 같은 침대에서 잤다. 그런데 엄광은 황제의 배에 발을 걸치고 깊은 잠을 잤다. 이튿날 신하들이 엄광의 불경을 탄핵하고 처벌을 주장했다. 그러나 광무제는 옛 친구와 함께 잤을 뿐이라면 문제 삼지 않고 간의대부의 관직을 하사했다. 그러나 엄광은 이를 사양하고 부춘산으로 돌아가 은자의 삶을 마쳤다. 황제가 되어서도 권력보다 친구로서의 우정을 귀중하게 생각한 광무제의 도량, 권력에 주눅 들지도 아부하지도 않고 부귀영화를 부운처럼 여기며 자연 속의 삶으로 돌아간 엄광의 풍도는 전설이 됐다.

이성계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비록 배우지 못했지마는 장량과 엄자릉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광무제와 같이 하기를 원합니다.” 이성계가 자신의 높은 고절과 풍도를 과시하기 위해 공연한 겉치레를 했을 수 있다. 또한 공양왕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한 연막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성계의 진심이었을 수도 있다. 뒤에 이성계가 개성을 떠나고자 하자 정도전이 만류했는데, 이에 이성계는 “옛날에 장량이 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르겠다고 하니, 고조가 이를 죄주지 않았는데, 나의 마음은 다른 뜻이 없으니, 왕이 어찌 나에게 죄주겠는가?”라고 답했다.([태조실록])

다만 이성계가 공양왕의 신뢰를 요청하는 것은 다소 과도한 것일 수 있다. 즉위 자체가 공양왕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안락하게 살아온 그는 즉위에 임해 눈물을 흘렸다. 무력하게 운명의 수레바퀴에 끼인 자신의 처지를 슬퍼한 것이다. 그런데 즉위한 날 저녁, 사위 강회계의 부친 강시가 내전에 들어와서 왕에게, “여러 장상들이 전하를 왕으로 세운 것은 다만 자기의 화를 면하기 위한 것이지 왕씨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삼가시고 친신(親信)하지 마시어 스스로 보전할 것을 생각하소서”라고 충고했다. 이성계를 믿으면 안 된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이 말이 이성계의 귀에도 들어가, 9공신들은 왕에게 강시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공양왕은 신하를 돌아보고 잠잠히 말이 없었다. 공양왕은 이성계를 두려워하고 증오했다. 왕조의 운명은 물론 자신의 생명조차 이성계의 뜻에 달려 있으니 당연한 것이다. “태조가 공(功)이 높고 또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으니, 공양왕이 이를 꺼렸다. 또 구가세족들은 사전 혁파를 원망하고 있었으므로, 공양왕이 태조를 꺼려하는 것을 알고서는 온갖 방법으로 무함하고 훼방하였다. 우·창의 당이 왕실에 인척관계를 맺어 조석으로 참소하니, 공양왕이 도리어 참소하는 말을 믿고 밤낮으로 좌우의 신하와 더불어 몰래 태조를 제거하려고 도모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공양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공양왕을 추대한 이성계로서는 공양왕의 이런 태도가 억울하고 분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907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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