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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7)] 섬 문명이 낳은 ‘최초의 근대인’ 페데리코 2세 

성전(聖戰)의 땅에서 신사협정을 이끌어내다 

교황 파문 무릅쓰고 술탄과 인문 교류… 예루살렘 무혈입성 발판
가톨릭·이슬람 공존한 ‘코즈모폴리스’ 시칠리아 정체성의 표상


▎팔레르모 시 한가운데 있는 대성당. 1185년 건립에 들어간 뒤 700여 년간 확장하면서 비잔틴·고딕·이슬람· 르네상스 양식이 공존하는 건축물이 됐다.
시칠리아와의 첫 만남은 2001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여행의 최대 목적은 막시모(Teatro Massimo) 오페라하우스였다. 시칠리아의 주도(州都)인 팔레르모에 있다. 프란시스 코플라 감독의 영화 '대부'(1972) 덕분이겠지만, 막시모 일등석에 앉아 이탈리아 예술의 진수를 맛보고 싶었다.

막상 경험한 것은 이탈리아 작곡가가 아닌, 독일의 바그너였다. 그의 ‘링(Ring) 4부작’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발퀴레(Die Walküre)’가 상연되고 있었다. 어색한 조합이지만, 오페라 하우스 바로 앞 노포(老鋪) 디저트 가게에서 즐긴 카놀리(Cannoli)는 바그너 오페라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맛으로서의 풍경이다. 21세기 첫해의 겨울 방문 이후 막시모를 포함한 시칠리아의 모든 것이 인생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후 2, 3년에 한 번씩 들리는 필수 여행지가 된 것은 물론이다.

시칠리아에선 대중교통보다 자동차를 빌리는 편이 한층 더 싸고 효율적이다. 도로나 철로 대부분이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탓이다. 섬 내부로 들어가는 교통수단이 드물다. 시칠리아 대도시는 전부 바닷가에 있다. 고대 그리스 이래 카르타고 로마 아랍 점령기 때 발전했던 곳이다. 내부지역은 13세기 말 시작된 스페인 통치 때부터 부분적으로 개발된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해안선 고대도시도 좋지만, 시칠리아 내륙에서 맛보는 중세와 근세의 흔적도 지나치기 어렵다. 한국 물가보다 거의 절반, 아니 3분의 1수준이기에 오래 머물러도 부담이 없다. 자동차로 섬 전체를 완전히 횡단, 또는 종단한다 해도 대략 5시간이면 족하다.

최근 시칠리아를 찾은 것은 올해 4월이다. 한 달가량 머물렀다. 시칠리아 특유의 부활절 가두행진인 ‘파스콰(Pasqua)’ 경험이 계기였다. 더불어 시칠리아 13세기 역사를 공부할 겸 평소보다 오랜 시간 머물렀다.

‘유럽 사상 최초의 근대적 인간’

시칠리아 13세기 역사의 핵심은 페데리코(Federico) 2세(이하 페데리코)다. 시칠리아 밖에선 프레드릭(Friedrich) 2세로 불린다. 18세기 독일 계몽주의 군주의 이름이기도 해서 시칠리아·독일까지 표기한다. 필자가 페데리코에게 주목한 이유는 간단하다. 현지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시칠리아 역사의 하이라이트이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로 치면, 광개토대왕의 무(武)와 세종대왕의 지(知)·덕(德)을 망라한 인물이 페데리코다.

가리발디 장군과 문학가 단테는 이탈리아 어디를 가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입상 기념물이다. 시칠리아는 다르다. 두 사람 모두 드물다. 간혹 있더라도 도시 외곽에 들어서 있다. 거리 이름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GPS에 가리발디나 단테 이름을 검색하면 99% 시내 중심지로 안내한다. 시칠리아는 다르다. 중심지 입상, 중심지 지명의 대부분은 페데리코로 채워져 있다. 보통 왕관을 쓴 무장(武裝) 차림에다, 매(Falcon)가 반드시 어딘가에 들어선 대형조각이다. 여행객 대부분은 ‘시칠리아=마피아’로 생각하겠지만, 현지인들에게 시칠리아는 곧 페데리코다.

‘왕의 역사를 통틀어 최초로 등장한 근대인.’

페데리코가 어떤 인물인지, 한마디로 압축한 말이다. 19세기 문화·문명사 연구의 권위자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가 남긴 말이다. 혈육관계로 유지된 중세형 왕들과는 달리, 페데리코는 특출한 교양·견문·언어·행동·세계관으로 자신의 권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출발점은 15세기 피렌체 메디치가(家)다.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은 학자와 예술가 집단이 전개한 사상문예 운동이 르네상스다. 바티칸과 세속 권력자들은 한참 뒤에야 동참한다. 그런데 남부, 그것도 섬에 불과한 시칠리아에서 본토보다 200여 년 앞서 르네상스형 군주가 등장했다. 부르크하르트가 왜 페데리코를 극찬하는지, 그가 1860년 발간한 저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통해 알아보자.

‘이슬람교도들을 지척에 두고, (주변으로부터의) 배신과 위험 속에서 자란 페데리코지만, 왕으로 있으면서도 일찍부터 객관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지키고 키워 나간다. 유럽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인간’으로 지칭될 만한 군주다. 더불어 이슬람 국가들의 내부 사정과 행정에 관한 깊고도 폭넓은 지식에 근거해, 바티칸 교황을 상대로 한 존망을 건 전쟁에 나서면서 ‘근대적 인간’으로 한층 더 진화하게 된다. (페데리코 주도 하의) 수많은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페데리코의) 모든 힘과 수단이 총동원되면서 마침내 ‘근대적 인간상’이 굳어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화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상식인이라면 누구나 평화적 수단으로 갈등을 해결하려 들게 마련이다. 무식하면 힘으로 버틴다. 평화적 해결은 무식과 무지를 뛰어넘은, 혜안을 가진 자만이 가능한 세계관이다. 전부·전무가 아니라, 최고 ‘50대 50’으로 서로 주고받는 것도 기본이다.

그러나 간과하기 쉬운 것은 그러한 해결 방안의 전제다. 두 가지가 떠오른다. 먼저 지도자의 역량이다. 무기력을 감추기 위한 평화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둘째는 지지기반이다. 다수 국민을 설득해 내야 평화적 해결에 전념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어떤 위치에서 평화에 매달리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다.

두 가지 잣대를 만족하는 지도자로 필자는 페데리코를 꼽는다. 13세기 유럽사에 등장한 페데리코의 행적을 이해한다면 한국 대통령의 어제와 오늘은 물론, 내일까지도 점칠 수 있을 듯하다.

동·서 문명 교차한 국제도시, 팔레르모


▎카르타고와 고대 그리스의 유적지로 유명한 시칠리아 아그리젠토. 기원전 10세기 이래 시칠리아는 아프리카·스페인·그리스·이탈리아를 연결하는 중개무역지로 번성한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평화의 사신’은 페데리코를 정의하는 최적의 키워드다. 동(東)의 이슬람과 서(西)의 가톨릭 사이의 혈전을 끝낸, 중동 평화사 초유의 인물이 바로 페데리코다. 페데리코는 생전에 수많은 타이틀을 지녔었다. 시칠리아 왕(재위기간 1198년~1250년)뿐 아니라 이탈리아 왕(1212년~1250년), 로마 왕(1212년~122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1220년~1250년), 그리고 예루살렘 왕(1225년~1228년)까지 맡은 13세기 유럽 최강의 군주였다. 시칠리아 인은 물론 역사학자 모두가 찬미하는 타이틀은 예루살렘 왕이다. 당대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갈채를 받는 역사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왕 페데리코에 관한 이야기는 1197년부터 시작한다. 그가 불과 3살 나이에 시칠리아 왕위에 오른 때다. 파란만장한 생애의 출발점이다. 뒤를 봐준 것은 로마 교황이다. 시칠리아군의 십자군전쟁 참여가 조건이었다. 십자군 지휘관은 페데리코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그는 왕의 자리에 오른 뒤 독일에 머물면서 라틴·독일·이탈리아·아랍어를 비롯한 9개 언어에 통달한다. 인문과학과 더불어,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통해 아랍 문명에 관심을 가진다. 당시 시칠리아는 가톨릭은 물론, 그리스정교·이슬람교·유대교가 혼재하는 코즈모폴리턴 도시였다. 종교를 초월한 생존의 역사가 당시 시칠리아의 일상적 공기였다.

어릴 때부터 열린 세계관으로 무장한 페데리코는 시칠리아의 그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결론은 공존공영이다. 비록 로마 가톨릭 교황의 권위로 왕위에 올랐지만, 가톨릭이 바라는 식의 차별적 종교정책은 시행하지 않았다. 페데리코의 거점은 시칠리아 팔레르모다. 무려 8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볼 수 있지만, 팔레르모를 대표하는 구시가지 건축물의 공통점은 가톨릭과 이슬람, 그리스정교 건축양식의 융합과 조화에 있다. 페데리코가 주도한 공존공영 문화다.

그러나 페데리코의 평등주의·평화주의 세계관은 교황을 화나게 한다. 특히 이슬람 자연과학에 열중하는 과정에서 무신론자로 낙인찍힌다. 대가는 종교적 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56살 전 생애를 통틀어 전부 3번의 파문을 당한다. 교황 발(發) 파문에 관한 한 신기록 보유자다.

십자군전쟁은 1096년부터 시작됐다. 그가 시칠리아 왕위에 오르기 100여 년 전이다. 십자군전쟁은 이슬람 점령 하에 있던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유럽 초유의 다국적 연합작전이었다. 프랑스 왕이 주축이 된 1차 원정(1096년~1099년) 때 예루살렘을 탈환하지만, 곧이어 이슬람이 다시 차지한다. 2차, 3차 모두 실패로 끝나는 와중에 페데리코도 엉키게 된다.

4차 십자군전쟁(1202년~1204년)이 시작되지만, 출발 단계에서 페데리코는 여러 이유를 대면서 불참한다. 시칠리아에게 이슬람은 적이 아닌, 코즈모폴리턴 도시를 구성하는 상수(常數)였다. 예루살렘 탈환도 좋지만, 이슬람을 적으로 돌릴 경우 시칠리아 내부도 혼란에 빠진다. 페데리코는 당시 이슬람 신자를 주축으로 한 정예 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교황의 파문이 내려진 상태에, 페데리코는 5차 십자군 전쟁(1217년~1221년)의 선봉 역할을 맡게 된다. 결과는 전쟁이 아닌, 평화적 외교 담판을 통한 무혈입성이다. 교황은 물론 유럽 왕 모두를 놀라게 한, 평화의 사신 페데리코의 수완이 120% 드러난 결과다. 예루살렘 왕위는 성지 탈환 후 내려진 전과(戰果)에 해당한다.

술탄과 아랍어로 대화한 가톨릭 황제


▎십자군전쟁을 다룬 영화 [킹덤 오브 헤븐](2005)에서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있다.
어떻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스라엘에 입성했을까. 답은 페데리코와 당시 이스라엘을 장악했던 이슬람 술탄 알카밀(Al Kamil)과의 오래된 교류와 우정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페데리코의 평판을 알고 있었기에 미리 편지로 안부를 전한다. 페데리코는 술탄 편지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주된 이야기는 이슬람이 자랑하는 위생학·해부학·건축학에 관한 지식 교환이었다. 이 과정에서 페데리코의 이슬람 역사와 문명에 대한 남다른 지식과 지혜가 술탄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로마 교황의 전쟁 참여 요구가 거세지면서 페데리코는 자신의 상황과 심정을 알리면서 술탄의 조언을 구하게 된다. 놀랍게도 이 모든 과정은 아랍어로 이뤄진다. 어릴 때부터 배운 특별한 언어능력을 십분 발휘해 술탄과의 마음을 튼 대화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이슬람 알라신에 대한 존경과 찬사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유럽 군주의 99%는 가톨릭 원리주의에 기초한 종교 지상주의자였다.

술탄 알 카밀은 페데리코의 인격·지식·지혜에 감동한다. 122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 주도 하의 5차 십자군전쟁에 앞서, 이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신뢰감이 두 사람을 연결해주고 있었다. 다국적 십자군의 출발 직후 가톨릭 대표 페데리코, 이슬람 대표 술탄 알 카밀은 상호 신뢰에 기초한 신사협정에 들어간다. 현재의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이뤄진 ‘야파 협정(Jaffa Treaty)’이다. 크게 보아 5가지 조항으로 압축된다.

① 이스라엘에서의 크리스천과 이슬람의 공존을 약속.

② 1229년부터 10년간 예루살렘을 크리스천에게 반환.

③ 골고다 언덕 예수 무덤(Anastasis)의 반환.

④ 이슬람의 성지에 해당하는 ‘바위의 돔(Qubba alŞakhra)’에 크리스천 난입 금지.

⑤ 상호 간 군사시설 건립 금지.

페데리코는 술탄 알 카밀과의 약속에 따라 1229년 2월 예루살렘에 무혈 입성한다. 당시의 모습을 동행했던 이슬람학자가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슬람 모스크 바위의 돔에 들어올 때 바이블을 들고 함께 들어오려던 크리스천 성직자에게 (페데리코가) 크게 화를 냈다. 이어 바위의 돔 입구에 걸쳐진 그물망을 보면서 무슨 이유로 만들었는지 (페데리코가) 주변에 물었다. 새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자, ‘그렇다면 신이 돼지는 들어올 수 있다고 허락한 것인가요’라고 되물었다. 크리스천 신자를 돼지에 비유해 던진 질문을 듣고 깜짝 놀랐다. (무슬림인 나는, 페데리코가) 가톨릭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상(偶像)이 이성을 집어삼키다


▎라마단을 맞은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 ‘바위 돔(Dome of the Rock)’ 밖에서 기도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예루살렘 무혈입성은 모두가 손뼉을 치고 기뻐해야 할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배신·비겁·투항이란 낙인이 페데리코에 붙으면서 이슬람에 동조하는 이단 군주라는 비난이 일어났다. 흑백이 분명하지 않은 회색분자라는 것이 악담의 근거다. 악의 화신인 이교도 무슬림을 몰살시키지 않고, 애매하게 처리해서 나중에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란 저주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교황도 페데리코를 냉대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왕위에 올랐지만, 크리스천 사제단의 거부로 즉위식도 미뤄진다. 결국 나중에 자기 손으로 왕관을 머리에 올리는 사태까지 맞이하게 된다. 예루살렘 내에서도 반대의견이 비등하면서 그는 결국 시칠리아로 발길을 돌린다.

그러나 귀환 길에 앞서 비보가 엄습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페데리코를 몰아내려고 군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이다. 페데리코는 천신만고 끝에 교황의 군대를 물리친다. 그러나 곧이어 롬바르디아(현 이탈리아 북부)를 통치하던 페데리코의 아들, 하인리히 7세가 페데리코 영향권에 있던 독일 지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 아버지에 대한 반역이다. 로마 교황이 뒤에서 사주한 것이다. 페데리코는 이탈리아 북부로 달려가, 아들에 맞선 전쟁에 들어간다. 결과는 아들의 자살과 교황 영향권에 있던 롬바르디아군의 대패다.

페데리코의 복수가 두려웠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1239년 두 번째 파문을 내린다. 페데리코가 45살에 접어들었던 시기다. 파문에도 불구하고 페데리코는 교황을 상대로 한 전쟁에 돌입한다. 직속 이슬람군대가 주력군이다. 1243년 인노켄티우스 4세가 교황 자리에 오르지만, 페데리코와의 반목은 한층 더 깊어진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크리스천의 10년 기한 점령이 끝나면서 성지는 다시 이슬람의 손에 넘어간다. 이슬람 자체에 대한 편견과 불신 탓에 이후 유럽 전체를 통틀어 평화협정을 맺으려는 가톨릭 군주는 단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페데리코와 교황과의 갈등은 1250년 페데리코가 56살 되던 해 끝난다. 페데리코가 갑자기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워낙 갑작스럽게 터진 일이라, 당시 시칠리아·이슬람·로마 모두 믿지 않았던 죽음으로 기록된다. 일부러 죽음을 가장해 어딘가로 떠났다는 식의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시칠리아의 상징인 에트나(Etna) 화산 주변 동굴에 숨어 살면서 훗날을 기약했다는 식의 소문도 있다.

페데리코 죽음과 함께 십자군전쟁에서 보여준 시칠리아의 주도적인 역할도 소멸한다. 1266년 프랑스 왕족 샤를 1세가 페데리코의 아들을 쫓아내고 시칠리아 왕에 오르면서 주인 자체가 바뀐다. 더불어 후임 군주들은 교황의 말에 절대복종하면서 이슬람 전멸에 앞장서는, 가톨릭 원리주의자로 채워진다. 10년간에 걸친 크리스천-이슬람 사이의 평화조약은 마치 일장춘몽처럼 피었다가 한순간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필자가 최초로 페데리코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시칠리아가 아닌, 나폴리에서다. 나폴리 중앙역에서 서쪽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에서 만난 유럽 최고(最古)의 공립 교육기관, 나폴리 대학이다. 정식 이름은 나폴리 페데리코 2세 대학(The University of Naples Federico II)으로, 1224년에 건립됐다. 나폴리 대학은 이름에서 보듯 페데리코 2세가 직접 건립한 대학이다. 1088년 세워진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Bologna)의 법과대학, 1222년 베네치아 근처 파두아(Padua)의 법과대학에 이어, 유럽 전체를 통틀어 3번째로 오래된 곳이다. 공립 교육기관이란 기준에서 본다면, 역사상 초유의 대학이다. 볼로냐 파두아 두 대학은 대중을 상대로 한 무차별 공립대학이 아닌, 소수 특권층을 위한 사립대학이란 성격이 강하다.

최초 공립 교육기관도 그의 손에서


▎팔레르모 대성당 안에 페데리코 무덤이 안치돼 있다. 시칠리아 인들의 추모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대학과의 첫 만남은 도로변 대학 본관 입구에 들어선 검은 대리석 스핑크스에서 시작됐다. 뭔지도 모른 채 대리석 조각 물에 반해 건물 안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페데리코 2세와 만났다. 대학 배지의 디자인 자체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앉아있는 페데리코 2세의 모습인 데다, 곳곳에 페데리코 조각상이 들어서 있다. 대학 본관 로비의 경우 여신 아테네 입상과 더불어, 페데리코 2세 입상이 주인공이다.

13세기 당시 페데리코의 정치적 영향력은 시칠리아만이 아닌 나폴리와 이탈리아 남부 전역에 미쳤다. 나폴리 대학은 남부 이탈리아 통치를 위한 엘리트 양성기관으로, 교회 주도하의 특권층 교육기관과 무관하다. 신학이 아닌, 약학·위생학 같은 자연과학에 주목하는 세속적 차원의 교육기관이란 점이 13세기 다른 대학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800년 가까이 흘렀지만, 나폴리 대학 8만여 명 학생의 역할은 초창기 설립 취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페데리코가 원래 기획했던, 이탈리아 남부를 책임지는 최고의 엘리트 양성소가 나폴리대학의 21세기 위상이다.

팔레르모는 시칠리아를 찾는 여행객들의 필수코스다. 더불어 팔레르모 구시가지 한가운데를 지키는 대성당 두오모(Duomo)는 최고의 명소로 통한다. 1185년 처음 건립된 이래 무려 700여 년에 걸쳐 확장된 시칠리아의 산 역사가 두오모다. 눈이 부실 정도로 너무도 화려하다. 크기도 엄청나지만, 비잔틴·고딕·이슬람·르네상스가 복합적으로 맺어진 공존·공영 건축물로 유명하다. 단 하나의 건축물이지만, 시칠리아 역사 전부가 드리워진 작품이다.

페데리코 무덤은 그의 요청에 따라 두오모 내부에 보관돼 있다.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바로 왼쪽에 곧바로 들어서 있다. 최고의 권위로 통하는 붉은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길이 3m, 높이 1m의 무덤이다. 내부에 잠자는 시신을 확인했다고 한다. 두오모 내 다른 공간과 달리 유료지만 찾는 사람이 많다. 옆에서 지켜보면, 시칠리아 인이라면 모두가 들르는 신전으로 느껴진다. 페데리코 무덤은 3개의 언어로 평생의 업적을 기술하고 있다.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고 아랍어다. 종교와 정파를 넘어서, 자신을 지킬만한 강력한 힘에 기초해 평화를 구축한 군주 페데리코. 2019년 한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리더는 아닐지.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907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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