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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26)] 사막에서 홀로 살아가기 

풍요를 버리니 ‘창조’의 본능 되살아나 

문명의 이기 최소화하고 원시의 생존본능에 의지한 삶의 터전
생활의 불편 커질수록 비우기보다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의 길


▎광활한 사막의 일몰이 타오르듯 하늘을 물들인다.
과연 인간이 고요히 앉아서 눈 감고 있다고 해서 어떤 초월적 경지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좌선 그 자체를 어떤 신비적 실체로서 접근하는 사유에 나는 깊은 흥미를 느껴보지 못했다. 사막에서 최초로 나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처음으로 그 고독한 환경 속에서 야망에 넘치는 자세로 선정을 시작했지만 몇 초 후에 나의 정신자세는 무너지고 말았다. 파리가 윙윙 내 주변을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눈을 감고 선정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귓바퀴 주변을 손으로 휘젓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꼬마 시절부터 한국의 불교사원에서 가르치는 명상 테크닉을 배워 알았지만, 명상의 좋은 수행자는 될 수 없었다. 나의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한국의 많은 유서 깊은 절에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사원에 가면 꼭 수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런 좋은 환경 속에서도 나는 좌선을 하는 척만 했지 심취해보질 못했다.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선 수행은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사막에서 윙윙거리는 파리와 함께 선정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집중력을 지니지 못했다. 마음을 비워야 할 텐데, 끊임없이 날 괴롭히는 이놈의 파리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파리를 쫓아버리려 했을 때, 나는 파리가 단지 한 마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 마리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들을 죽여야 할까? 그래도 부처님 말씀대로 살생은 나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도대체 파리가 왜 여기까지 와서 날 괴롭혀? 이 사막의 고지대엔 정말 먹을 것도 없고, 물조차 없는데. 아마도 내가 등반을 했을 때 날 따라온 놈들일지도 몰라.

명상을 방해한 불청객


▎주위에서 구한 나뭇가지와 철사로 만든 문패. 물질적 풍요가 사라지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본질이 드러난다.
이런 하찮은 상념들이 내 마음을 꽉 채우고 있었다. 몇 분 후에 나는 메디테이션이라는 발상 자체를 포기하고 말았다. 파리 몇 놈 얼씬거리는 것만으로 사유가 없는 의식의 세계로 진입할 기회가 봉쇄되고 있었다. 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내가 서재라고 명명한 오피스 지역에서 경험한 바대로, 사막의 파리는 내내 나를 괴롭히는 존재였다. 지난 2012년 여름 내가 아우데의 엄마 텐트에서 3주를 보냈을 때, 그곳에는 정말 파리가 많았다. 어디에나 있었고, 특별히 대낮에는 극심하게 많았다. 결국 나는 파리가 내 얼굴에 착륙해도 그것들을 쫓는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적응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제야 나는 개발도상지역의 어린이들을 그린 다큐멘터리 사진들, 흔히 그들의 얼굴에 파리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으로써 그 지역의 극도의 빈곤과 기근을 상징하는 그런 사진들이 매우 조작적이며 부정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파리가 많은 지역에서 살다 보면 파리와 더불어 사는 지혜를 배우는 것 외에는 딴 방도가 없다. 파리를 쫓아버리거나 그것을 박멸하기 위해 애쓰는 수고를 하는 대신에 파리에 대해 근원적으로 신경을 꺼버리면 오히려 우리의 삶의 질이 개선된다. 얼굴에 착륙하는 파리와 극도의 빈곤이라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도시에서, 그러니까 문명권에서 자라 나온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그러한 곤충들과 공존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나의 고독한 실존을 체험하기 위하여 타야의 캠프로 왔을 때, 나는 암암리에 ‘문명화된(civilized)’ 삶의 수준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비록 광야에서 프라이버시를 즐기는 특혜를 누리면서도, 삶의 기초적인 안락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생활하는 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막의 산꼭대기에 정좌하고서 고요함을 즐기거나 그늘에서 점심을 먹을 때, 몇 마리의 파리가 윙윙거리는 것은, 실제로 평상시에 수백 마리가 윙윙거리는 것보다도 더 인내하기 어려운 위협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느끼다 보니 파리에 대해 인내심을 상실했고 또 분노의 감정마저 들었다. 부엌을 깨끗이 치우고 난 후로는 캠프 주변으로 파리가 현저히 줄었는데도 말이다. 단 한 마리의 파리가 윙윙거리는 것조차도 그러한 사막의 정적 속에서는 도버해협을 건너는 나치의 비행단보다 더 막대한 산란을 일으킨다. 열대지역 사람들이 흔히 하듯이 비닐봉지에 물을 담아 매달아두면 빛의 산란이 생겨 파리를 내쫓을 수 있다기에, 그런 방법도 취해 봤지만,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결국 나는 도시에서 파리채를 하나 사 왔고, 파리를 파리채로 짓눌러버려 열반시키는 데 도사가 되었다.

파리가 성가심을 일으키는 유일한 벌레는 아니었다. 타야의 캠프에서 잔 첫날 밤, 나는 전등을 들고 저녁을 만들기 위해 따로 떨어져 있는 부엌 동으로 갔다. 그곳에서 카운터 위에 베두인들이 남겨놓고 간 뜯어진 설탕 봉지 속으로 들락거리고 있는 수천 마리의 개미행렬을 목격했다. 실제로 사막의 개미들은 우리가 흔히 보는 개미들보다 사이즈가 훨씬 크다.

설탕 봉지 속 개미, 더러운 이불


▎바위산 중턱에 마련한 고인돌 책상과 탁 트인 전경. 휴대용 태양광 충전기를 통해 노트북과 스마트폰도 사용할 수 있다.
해가 가라앉으면서 나는 뭔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최초로 완벽한 고독과 정적이 어둠 속에 찾아왔다. 그 순간 그토록 열심히 왔다 갔다 하는 개미군단을 갑자기 목격한다는 것은 비록 그들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을 알았어도 왠지 진저리가 쳐졌다. 음산한 느낌을 가중하는 것은 개미가 내는 소리였다. 도시생활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사막의 정적! 그 정적 속에서는 개미가 발을 옮기는 소리, 그리고 설탕가루의 결정들을 우적우적 씹어대는 소리가 꽤 크게 들린다.

나는 한참 그 장면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설탕 봉지를 통째로 들어서 재빨리 부엌 밖으로 멀리 던져버렸다. 그것을 천천히 들어서 쓰레기통에 털어내 버릴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러는 동안 개미들은 내 팔을 기어 올라오고 겨드랑이 속으로 진출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첫날의 저녁은 토마토와 오이를 다져 올리브오일과 저민 마늘에 볶은 요리와 빵 한 조각의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나는 저녁을 별도로 만들어놓은 투어리스트 라운지에서 먹었다. 그리고는 칫솔을 찾으러 텐트로 갔다. 우선 전등을 켠 채 욕실로 갔다. 첫날 밤 내내 나는 공연히 전등을 켜고 부지런히 왔다 갔다 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왜 무엇이 두려운지도 알지 못했다. 정적과 어둠이 나로 하여금 내 마음에 깔린 심오한 고뇌들을 대면케 하는 것일까? 그런 환상적 이야기는 철학가들이 지어내는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문제 되는 것은 ‘자아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아가 혼자 있다는 것, 또 나약하다는 것, 그런 원초적인 사실이 형성하는 의식이 이름 모를 불안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스님들은 혼자 토굴에 앉아있어도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다. 나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무방비의 이방의 땅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나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아우데 엄마의 캠프의 경우 노천에서 잤어야 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 타야의 텐트에서 자는 것은 호사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지만, 그만큼 불안감이 짙었다. 침대는 전혀 안락한 수준이 아니었다. 거기에 있는 담요나 베개나 매트리스가 모두 몇 달, 몇 년을 그곳에서 썩었는지, 다양한 관광객들이 얼마나 때를 묻히고 떠났는지, 그 더럽다는 느낌이 불안감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결국 곯아떨어지고 말았는데 정말 산송장처럼 의식을 잃었다. 너무도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침 일찍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작열하는 태양의 광선에 데워진 텐트 안의 후끈거리는 열기 때문이다.

절벽 아래의 열린 카페와 서재


▎바위 절벽 아래 그늘에 만든 서재. 책상 옆에 넓은 바위 조각으로 고인돌 모양의 탁자를 만들었다.
평상시대로 내가 해야만 하는 첫 과업은 부엌에 가서 커피를 만드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진짜 간 커피콩 가루와 필터와 원뿔형의 용기를 갖추었지만, 그때만 해도 인스턴트 커피밖에 없었다. 인스턴트라 해도 아침에 커피 한 잔 마시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는 일과였다. 중국이나 인도에서 건너온 싸구려 찻잎으로 사막의 사람들이 만드는 짜이는 모닝커피 한 잔의 맛을 영원히 대체할 길이 없었다.

나는 커피 컵과 낡은 아마존 킨들(디지털 독서용 태블릿)을 들고 내가 ‘모닝 카페’로 지정한 구역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늘에 앉아 제임스 솔터(1925~2015, 미국의 소설가, 단편 작가)의 소설을 펼쳤다. 커피를 마시면서 소설을 읽으려고 했지만, 막상 몇 페이지 읽고 나니 자세가 매우 불편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독서에 편리한 환경을 새롭게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테이블의 탑으로 쓸 수 있는 구들장같이 생긴 평평한 돌이 눈에 띄었다. 이내 나는 그 돌을 활용하면 하나의 작은 독서용 테이블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침 내내 아주 작은 고인돌같이 생긴 예쁜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돌들을 날랐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후미진 곳에 두 개의 굄돌을 만들어 그 위에 덮개 석판을 놓으면 굄돌 사이로 다리를 뻗을 수 있다. 덮개석 두 개를 직각으로 연결해 절벽에 붙였기 때문에 왼쪽으로 팔걸이 책상이 둘러쳐진 L자 모양이 된다. 그리고 물론 자연절벽은 나의 등받이가 된다. 꽤 쾌적한 고인돌 책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책상에서 내다보는 사막의 풍경이 장쾌하다.
이 고인돌 책상의 앉는 곳에 좀 허리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는 방석 같은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텐트로 돌아가 베개 방석을 찾아보았다. 적당한 것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고인돌 책상을 거의 완벽함에 가깝게 세팅해놓고 보니,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요가를 하는 곳으로 정해놓았던 평평한 곳에 잔돌들이 널려있었다. 캠프로 다시 내려가 빗자루를 하나 구해왔다. 그리고한참 동안 모닝 카페 구역을 깨끗이 쓸어냈다.

생각해보라! 아시아라는 먼 이방에서 온 작은 여인이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끼고 바윗돌을 굴리는가 하면, 평평한 너럭바위 위를 깨끗이 쓸고 하는 모습을 베두인들이 본다면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있는가, 얼마나 이상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각할 것인가? 일련의 작업이 끝난 후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또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아하! 뜨거운 물 때문에 저 부엌까지 뛰어갈 필요가 있겠어? 바로 여기 카페에다 물 끓이는 장치를 만들자! 그럼 커피를 여기서 바로 만들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어.”

그래서 나는 캠프로 내려가서 불을 지필 수 있는 죽은 나뭇가지들을 수집하려고 이곳저곳을 다녀보았다. 하지만 캠프 주변을 멀리 벗어날 수는 없었다. 혼자서 방향을 상실하면 미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캠프 주변에는 장작이 될 만한 관목이 거의 없었다. 몇 시간을 걸어 헤매어야만 며칠 커피 물을 끓일 수 있는 장작개비들을 긁어모을 수 있었다.

대지를 거실 삼고, 절벽을 지붕 삼아


▎면포를 소독하기 위해 모닥불에 삶는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베두인들은 픽업트럭을 몰고 멀리 다니면서 큰 나무들을 베어 트럭에 꽉 채워 온다고 한다. 그러니까 싹쓸이를 해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하나둘 가지를 주워 모은 것이 얼마나 유치한 행위였는지, 그들은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내 행동이 얼마나 비효율적이었든지 간에, 장작개비 저장소를 꾸미고, 네 군데 돌을 놓고 작은 솥을 걸어 밑에 불을 지켜 물이 보글보글 끓는 것을 쳐다보았을 때 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즐거움을 느꼈다.

그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나는 장작개비를 반대편의 책상이 놓여있는 서재 쪽으로도 날랐다. 그곳에다가도 커피 끓일 수 있는 시설을 만들었다. 장작개비들을 움푹진 곳에 쌓아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했다. 그리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그리곤 생각했다. 이 의자 뒤쪽에 방석을 하나 놓고 전체를 담요로 덮으면 꽤 편한 의자가 되겠지. 나의 뇌리는 주어진 사물을 어떻게 새롭게 조합함으로써 나의 삶의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가 하는 창조적인 충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나의 욕구는 절대로 감소하지 않았다. 매일 캠프 주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변형시켜 새로운 장치를 발명해냈다. 그것은 나의 기예적 소양을 테스트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1일에 나는 태양광 배터리를 활용해 랩톱이 온종일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고, 그러한 설치로써 서재가 기능적으로 돌아가도록 잘 꾸며놓았다. 그리고 방석과 담요를 활용해 새롭게 꾸민 플라스틱 의자는 내가 몇 시간을 계속 앉아있어도 허리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책상 옆에 사각의 바위와 평평한 판석을 결합해 물건을 놓기에 편리한 스탠드를 하나 만들었다. 나는 그 위에 배낭이나 책이나 기타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바닥에 놓으면 먼지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서재 쪽의 산을 올라 그 꼭대기 어느 지점에서 가장 정확하게 인터넷과 전화 시그널이 연결되는지를 찾아냈다. 그 작업에만도 여러 시간이 걸렸다.

많은 시간을 소요했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작업은 식품관리에 관한 것이었다. 그곳에는 우선 냉장고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음식물이 상하는 것을 막는 창조적인 방안을 고안해 내야만 했다. 채소와 음료는 개방해 박스에 담고 그 위에 천을 덮어 끊임없이 물을 뿌리는 것이다. 천에서 물이 마르는 기화열이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시원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4일에는 모든 빵에 곰팡이가 슬어 내버려야만 했다. 토마토와 오이는 다 먹어서 썩을 겨를이 없었다. 그렇지만 크래커류와 깡통 음식이 남아있어 며칠간은 더 버틸 수 있었다.

어릴 적 향수 일깨운 천 삶는 냄새

그런데 신선한 음식의 결여보다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나의 생리에 전혀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월경이 시작되었어도 패드나 탐폰이 준비되어 있질 않았다. 그래서 월경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을 고안해내야 했다. 나는 우리의 할머니들이 지금같이 간편한 일회용 패드가 있기 전에는 목면포를 개어 쓰고 또 빨아 다시 쓰곤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런 용도로 쓸 만한 목면포가 있는지 급히 알아보았다. 내가 발견한 유일한 포대기는 곰팡이가 핀 침대 덮개였는데, 그것은 부엌의 한구석에 구겨 처박아 놓은 것이었다. 물론 곰팡이 핀 천을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또 그것을 표백할 수 있는 세제도 없었다.

이때, 나는 어릴 적부터 엄마로부터 배운 예지를 또 생각해냈다. “면포를 소독하거나 표백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물에 넣고 삶는 거란다.” 곧장 큰 솥을 걸어 물을 붓고 곰팡이 슨 천을 넣었다. 그리고 장작을 지폈다. 가루비누를 약간 뿌리고 오랫동안 푹푹 삶는 것이다. 약한 비눗물에 면포가 삶아지는 내음,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가 천을 부풀리다가 푹푹 내뿜는 기운의 독특한 향기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어머니는 전통적인 요와 이불로만 생활하셨기 때문에 요나 이불을 감싸는 면포를 때때로 삶고 말리고 풀을 먹여 다리는 과정을 주기적으로 반복하셨다. 그 내음은 나의 노스탤지어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삶을 때의 내음이나 햇볕에 말린 것을 거두어드릴 때의 내음은 엄마라는 존재의 향기였다. 아니 나의 뿌리 전체를 물들이는, 어느 것도 대신할 수 없는 나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그 내음은 어떠한 것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러한 강력한 초시공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나의 존재 전체를 과거 어느 시공간의 삶의 자리로 이동시키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텐트에 부착한 명패. ‘누라(NOORA)’는 사막에서 쓰는 필자의 유목민식 이름이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 프랑스의 소설가, 비평가, 수필가.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의 한 사람. 대표작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의 마들렌 케이크 한 조각이 던져주는 온갖 추억에 대해 그토록 유명한 문장을 남겼듯이, 나에게 이 내음은 새로운 우주의 발견이었다. 마들렌 케이크 한 조각이 홍차 찻잔 속에 담겼다가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어릴 때의 기억으로 여행을 떠났다. 프루스트에게는 그 매개체가 맛이었지만, 나에게는 아주 토속적인 내음이었다. 프루스트에게는 아기자기한 문명의 환경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문명이 초극되는, 모든 개념적 인식이 거부되는 원초적 내음뿐이었다.

한참을 삶았으니 면포는 아주 깨끗해졌고 완벽하게 살균됐다. 사막에서 면포를 말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말리면서 또 살균되는 것이다. 완벽하게 뽀송뽀송해진 면포대기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이상적인 형태로 접어 여러 개의 면포 위생대를 만들었다. 이렇게 완벽한 자연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한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그런데 이후 아우데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 문제를 언급하자, 그는, “내 처는 때가 되면, 빌리지에 있는 상점에서 패드를 사다 써요. 당신도 필요할 때 전화하면 사다 드릴게요.” 그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내뱉었을 때, 하루를 소비한 나의 작업이 괜한 짓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이런 작업이 위대한 ‘만듦’의 결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플라스틱과 화학소재로 만들어진 일회용 패드를 사용하지 않고 낡은 면포를 재활용하는 것은 환경에도 좋고 나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좋다.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삶이 아니고 또 무엇이랴!

수만 년 동안 성취해 온 문명의 작업을 모방하다


▎텐트 한 쪽에 휴대용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해 간단한 전자제품을 쓸 수 있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행한 나의 비효율적인 작업의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업은 사막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고안해내고 또 배워가는 과정의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가치였다. 처음에는 도시생활의 편리함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이 제작한 물건들을 포기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과연 어떤 것인지 별로 정확한 감각을 갖지 못했다.

당연히 나는 미니멀리스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해오(解悟)를 얻을 때까지 몇 시간이고 앉아서 넋 놓는 명상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나의 의식세계로부터 개념적 물체들이 하나둘씩 제거되고 텅 빈 공(空)으로 진입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은 정확히 반대의 방향으로 달려갔다. 내가 당면한 ‘원시적’ 상태로부터, 나는 수만 년 동안 호모 사피엔스가 성취해 온 많은 문명의 작업들을 모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지만 삶의 안락을 조금이라도 개선해보려고 환경을 끊임없이 개선시키는 나의 욕구, 자연에서 획득될 수 있는 물건들로써 생활에 유용한 장치들을 발명해내는 노력, 예를 들면 고인돌 책상이나 돌멩이 화덕과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나의 욕구는 사막에서 보내는 시간 내내 조금도 줄어들지를 않았다. [예기] ‘악기(樂記)’ 편에는 “만드는 자가 성인이다(作者之謂聖)”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문명 진보의 계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가치를 극상으로 높인 유가적 발언이겠지만, 사실 불교가 말하는 ‘해탈’이라는 표현도 근원적으로 문명을 거부하는 작업 속에만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당한 ‘집념’이나 ‘애착’에 대한 경고일 뿐, 문명을 근원적으로 거부함으로써만 공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아니다. ‘만드는’ 프로세스 속에서 망아의 경지를 과시할 수도 있다. 해탈이라는 것이 문명 밖에 떠 있는 실체는 아닐 것이다. 인간 존재의 본질은 역시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데 있지 않을까?

나는 인류 역사의 시작 이래로 인간이라는 종자가 항상 본성적으로 품어왔던 창조적 과제의 본질을 다시 습득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제4일, 그러니까 위생대를 만든 다음 날, 나는 가지와 철삿줄을 사용해 ‘N.O.O.R.A.’라는 5개의 글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굳건하게 나의 텐트 정문에 부착했다. 그것은 마치 태곳적 인간들이 동굴벽화를 그린 후에 한구석에 서명 대신 손가락 모양을 그려 넣어 그것이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을 말한 것과도 유사했다. 누라는 사막에서의 나의 이름이었다. 그것은 나의 영역, 내가 텐트와 주변 지역에 가한 인위적 작품에 대한 어떤 주체성을 표현하는 선포였다.

사막에서 만난 반가운 이방인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포르투갈 여행자와 필자.
캠프에 내 이름을 걸어놓는 작업을 마쳤을 때, 나는 겨우 이곳이 내 집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베두인들이 옆에 있지 않은 한 이 작은 영역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긴 소매에 옷깃과 단추 달린 셔츠를 입고 있는 두 서양 백인 청년들이 내 서재가 있는 산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나는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함이었다.

내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나의 영역, 아니 나의 작은 코스모스에 걸어 들어온 사람은 그들이 최초였다. 베두인들은 보통 차로 다닌다. 그리고 특별한 목적으로 초대되지 않은 이상, 자기의 집 이외의 다른 캠프에는 얼씬거리지 않는다. 내가 추측건대 이 침입자들은 유럽으로부터 온 관광객임이 분명했다. 미국인이나 오스트레일리아 관광객이라면 당연히 머리 위에 푹 뒤집어쓰는 티셔츠를 입는다. 캠핑하거나 집 밖에서 무엇을 할 때, 단추 달린 포멀한 와이셔츠를 입을 까닭이 없다. 문화가 역시 다른 것이다.

나는 갑자기 그들에게 친근감을 느껴 “헬로우”란 인사를 건네고, 나에 대해 소개했다. 평소 나의 삶의 궤도 속에서는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좀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타는 편이다. 그러나 나흘간의 절대적인 고독 속에 감금되어 있던 나의 심적 상태가 말 많은 여인으로 나를 변모시켰던 것 같다. 낯선 사람들과 그토록 많은 수다를 떨어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이 젊은이들은 포르투갈에서 휴가를 이용해 관광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와디 럼 한가운데서 홀로 살고 있는 뉴욕 거주의 동방의 한국 여인을 우연히 만났다는 사실에 좀 경이감을 느끼는 듯했다. 나는 그들을 나의 서재 오피스로 데리고 가서 나의 책상과 새롭게 꾸민 의자를 보여주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그 책상이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초의 시간을 거쳤는지 체험이 공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책상이 사막에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로만 인식하는 것이다. 실망스러웠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서재 산꼭대기로 데려갔다. 그곳에서는 광활한 일몰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될 수 없는 지상의 예술작품이었다.

※ 김미루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907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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