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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대기자의 사랑학개론(19)]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포르투갈 소네트' 

늦은 만큼 뜨거웠네, 불멸의 시로 남은 불꽃사랑 

불혹의 엘리자베스, 6세 연하 로버트와 운명적 만남
여성 입장 ‘밀당’의 설렘·두려움, 연애시 44편에 담아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판화(1859). 토머스 올덤 발로(1824~1889)의 작품. / 사진 :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시집(1871)
영어로 한 단어를 우리말로는 여러 단어로 표현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메리엄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elopement(일로프먼트)’의 뜻은, “보통 부모의 승낙 없이 결혼할 의향으로 몰래 달아나다(to run away secretly with the intention of getting married usually without parental consent)이다. 최대한 줄이면 ‘사랑의 도피’ ‘애인과 달아나기’다.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의 도피’ ‘야반도주’ 사건은 단연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과 로버트 브라우닝이 주인공이다. 두 인물을 우리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렇게 소개한다.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에 대해 이렇게 나와 있다. “영국의 시인(1806~1861). 로버트 브라우닝의 아내로 작품에 시집 [포르투갈인이 보낸 소네트] 따위가 있다.”


▎영국 사진작가 허버트 로즈 바로드(1845~1896)가 찍은 로버트 브라우닝의 사진(1888년경). / 사진 : 본햄스
로버트 브라우닝에 대해서는 이렇게 나와 있다. “영국의 시인(1812~1889). 테니슨과 함께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광범위하게 제재를 구하고, 강건하고 활달한 시풍을 보였다. 작품에 무운시(無韻詩) ‘반지와 책’이 있다.”

조금 아쉬운 소개다.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에 대해 ‘로버트 브라우닝의 아내’라고 했으나, 로버트 브라우닝 항목에서는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남편’이라고 하지 않은 점이다.

지금은 몰라도 당시에는 엘리자베스가 더 유명했다. 영국 계관시인(桂冠詩人, Poet Laureate)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가 1850년 사망하자, 두 명이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앨프리드 테니슨(1809~1892)과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이었다. 결국 테니슨이 월계관을 차지했다. 여성으로서 영국 최초로 10년 임기 계관시인 자리를 차지한 시인은 캐럴 앤 더피(2009~2019)이다.

여자 시인이 남자 시인 칭찬하자 싹튼 사랑


▎영국 화가 에드먼드 레이턴 (1852~1922)이 그린 ‘사랑의 도피 (The Elopement)’(1893). / 사진 : 소더비
엘리자베스는 6세 혹은 8세부터 시를 썼다고 한다. 간단한 시구는 4세 때에도 만들었다. 6세부터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영국사, 서양 고대사, 셰익스피어(1564~1616)를 섭렵했다. 이탈리아어·라틴어·그리스어 원전을 읽었다. 구약 성경을 원전으로 읽기 위해 10세부터 히브리어를 배웠다. 거의 독학으로 이룬 학력이었다.

미국의 시인·소설가·평론가 에드거 앨런 포(1809~1849)는 [갈가마귀와 다른 시들(The Raven and Other Poems)](1845)을 엘리자베스에게 헌정했다. 미국의 천재 시인 에밀리 엘리자베스 디킨슨(1830~1886)은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초상화를 침실에 걸어두고 엘리자베스를 롤모델로 삼았다.

엘리자베스와 로버트의 사랑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복기(復棋)해보면, 모든 사랑은 운명적이라는 게 재확인된다.

엘리자베스는 [시(Poems)](1844)에서 로버트를 칭찬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로버트는 1845년 1월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서신을 엘리자베스에게 보냈다. “나는 내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의 시를 사랑합니다. 친애하는 미스 배럿이여… 그리고 나는 당신도 사랑합니다.(I love your verses with all my heart, dear Miss Barrett... and I love you too.)”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답신을 보냈다. “친애하는 브라우닝 씨,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으로 감사합니다.(I thank you, dear Mr Browning, from the bottom of my heart.)” 이후 둘은 20개월 동안 573통의 연서를 주고받았다.

둘은 양쪽 지인의 소개로 1845년 5월 20일 엘리자베스의 방에서 만났다. 1846년 9월 12일 세인트 매릴번 사목구 성공회 성당에서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모르게 결혼할 때까지 91차례 만났다. 둘은 결혼식 1주일 뒤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감행했다. 분노한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엘리자베스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그의 상속권을 박탈했다.

분노한 아버지 죽을 때까지 딸 용서 안 해


▎엘리자베스와 그의 아들 펜 / 사진 : 이튼칼리지
엘리자베스는 8남 4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모든 자식의 결혼을 금했다. 오늘의 관념으로는 좀 이상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는 ‘독재자’가 아니라 자식들을 진정으로 사랑한 자상한 아버지였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엘리자베스와 로버트는 성공회 성당에서 결혼했기에 둘은 다음과 같은 혼인 서약을 했을 것이다.

“나 (아무개)는, 그대 (아무개)를, 배필로 맞이하며, 오늘부터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더 좋을 때나 더 나쁠 때나, 더 부자일 때나 더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변함없이 그대를 사랑하고 보살피며,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부부로 살아갈 것을 약속합니다. I, N., take thee, N., to be my wedded (wife) (husband), to have and to hold from this day forward, for better for worse, for richer for poorer, in sickness and in health, to love and to cherish, till death us do part, according to God’s holy ordinance; and thereto I (plight) (give) thee my troth.”

혼인의 맹세를 지키는 게 쉬운 사람이 있을까. 브라우닝 부부는 실제로 혼인 서약대로 살았다. 그 첫 결실은 엘리자베스의 시집 [포루투갈 소네트]의 탄생이었다. 영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의 시집이다. 구애 기간(courtship)에 엘리자베스가 로버트를 생각하며 쓴 44편의 시다. 1845~46년에 쓴 이 시들을 1847년 남편에게 보여줬다. 남편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었다. 남편은 출간을 바랐지만, 엘리자베스는 사적인 내용이라 출간을 꺼렸다. 남편이 아이디어를 냈다. 포르투갈어로 된 시에서 번역한 것처럼 ‘위장’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엘리자베스의 출세작인 [시]의 개정판(1850)에 실렸다.

‘Sonnets from the Portuguese’에는 이중 의미가 있다. ‘포르투갈 사람이 보낸 소네트’나 ‘포르투갈 말에서 옮긴 소네트’로 번역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포르투갈 소네트’로 두 의미를 통합했다. 엘리자베스는, ‘카타리나가 카몽이스에게(Catarina to Camoens)’라는 시를 썼다. 루이스 바스 드 카몽이스(1524~1580)는 포르투갈 최고의 시인이다. 이 시를 읽은 남편이 아내를 ‘내 작은 포르투갈 아가씨(my little Portuguese)’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소네트(sonnet)를 이렇게 소개한다. “14행의 짧은 시로 이루어진 서양 시가. 각 행을 10음절로 구성하며, 복잡한 운(韻)과 세련된 기교를 사용한다. 13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단테와 페트라르카에 의하여 완성되었으며, 셰익스피어·밀턴·스펜서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정열적인 ‘소네트 43번’ 결혼식서 단골 낭독


▎1 ‘포르투갈 소네트’가 수록된 한글판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사랑시]표지 2 아일랜드 예술가 피비 애나 트러퀘어(1852~1936)가 만든 [포르투갈 소네트]의 채색본. / 사진 : 스코틀랜드국립도서관
당시까지만 해도 소네트 작시(作詩)는 남자 시인들의 전유물이었다. [포르투갈 소네트]의 문학사적 가치는 소네트 형식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사랑 초기의 ‘밀고 당김’을 다룬 데 있다.

[포르투갈 소네트]는 불혹(不惑) 나이에 갑자기, 또 뒤늦게 찾아온 사랑에 대한 여인의 심정, 감정 변화를 그린다. 엘리자베스는 나이가 40이었다. 사랑 고백에 감사하면서도, 자신이 6년 연상인데다가 건강 문제가 있어서 로버트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소네트 6번에서는 “내게서 떠나가십시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그대의 그림자 속에 서 있을 거라 느낍니다.(Go from me. Yet I feel that I shall stand henceforward in thy shadow.)”라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점차 정열적으로 변한다. 그의 초기 작품인 ‘사랑(Love)’에 나오는 사랑은 논리적이고 일반적이며 추상적이다. 개인적인 뜨거운 사랑 체험은 없었다. 하지만 [포르투갈 소네트]에 나오는 사랑은 유행가 가사만큼이나 정열적이다. 첫 키스의 달콤함을 노래했다. 실은 입술이 아니라 손가락에 한 첫 키스였다.

[포르투갈 소네트]에서 가장 유명한 시는 ‘소네트 43번’이다. 결혼식에서 단골로 낭독된다.

내가 그대를 어떻게 사랑하느냐고요? 그 방법들을 헤아려 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 완벽한 은혜의 끝을 어루더듬을 때,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와 넓이와 높이까지 그대를 사랑합니다.
햇빛 속에서나 촛불 속에서나,
나 그대를 일상의 가장 조용한 욕구 수준에서도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권리를 얻으려고 애쓰듯이, 나는 그대를 자유로이 사랑합니다.
그들이 칭찬 따위는 외면하듯이, 나는 그대를 순수하게 사랑합니다.
나의 오랜 슬픔을 이기는데 쓸모 있던 정열, 그리고 내 어릴 적 믿음으로
나 그대를 사랑합니다.
나는 그대를 내가 성자들의 믿음을 잃어버리면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삶 전체의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만일 하느님이 선택하신다면,
나는 죽은 후에도 그대를 더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다음은 영어 원문이다.

How do I love thee? Let me count the ways.
I love thee to the depth and breadth and height
My soul can reach, when feeling out of sight
For the ends of Being and ideal Grace.
I love thee to the level of every day’s
Most quiet need, by sun and candlelight.
I love thee freely, as men strive for Right;
I love thee purely, as they turn from Praise.
I love thee with the passion put to use
In my old griefs, and with my childhood’s faith.
I love thee with a love I seemed to lose
With my lost saints,—I love thee with the breath,
Smiles, tears, of all my life—and, if God choose,
I shall but love thee better after death.


‘하늘만큼, 땅만큼’ 죽을 때까지 사랑


▎이탈리아 피렌체 영국인 묘지에 있는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무덤. / 사진 : 루카렐리
한마디로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 것이다. 결혼한 다음에도 부부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다(live happily ever after)’라는 관용구처럼 살았을까. 그랬다. 15년간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 집안에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로 둘도 없는 말동무였다. 서로 사랑했고 서로의 시를 사랑했다. 서로의 시에 영향을 주고 받았다. 엘리자베스가 강신론(降神論)에 심취한 것, 정치적 입장 차이 같은 ‘마찰’은 있었다.


▎브라우닝 부부의 사랑을 다룬 브로드웨이 연극 ‘윔폴스트리트의 배럿 가문 사람들(The Barretts of Wimpole Street)’(1931)의 한 장면. / 사진 : 시어터매거진
15세에 크게 다친 엘리자베스는 당시로써는 병명 파악조차 안 되는 중병에 걸렸다. 아마도 척추를 다쳐 잘 걷지 못했다. 나중에는 폐 질환을 앓았다. 아편이 포함된 약물을 복용해야 했다. 원래 뛰어난 감수성이 약물 때문에 증폭됐다는 주장도 있다. 5차례에 걸친 임신 중에는 아편을 끊고 버텼다. 1849년 외아들 펜이 태어났다. 43세에 초산을 한 것이다. 아들 출산 전 1847년, 1848년과 출산 후 1849년, 1850년에는 유산했다.

결혼 직전과 결혼 이후 몸 상태가 호전됐지만, 1856년 이후에 건강이 악화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에게 밖으로 나가 파티 참석 등 사회생활을 하라고 독려했다. 엘리자베스는 1861년 6월 29일 남편의 품에서 세상을 떴다.

부부는 꼭 껴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3시에 깨어난 엘리자베스는 “나의 로버트, 나의 하늘, 나의 연인이여… 우리의 삶은 하느님이 쥐고 있어요.(My Robert, my heaven, my beloved... Our lives are held by God.)”라고 했다. “편안해요?”라고 남편이 묻자 아내는 “뷰티풀(Beautiful.)”이라고 답했다. 아내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로버트는 아내 사별 후 28년을 더 살았으나 재혼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친정은 1655년부터 자메이카에서 사탕 농장을 경영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조상 중에 흑인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때 영국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는 배럿 가문에서 200여년 만에 영국에서 처음 태어난 자식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노예제와 아동노동에 반대했다. 이탈리아 통일에 찬성했다. 시원적 페미니즘 작품인 [오로라 리(Aurora Leigh)](1856)는 일과 사랑을 모두 쟁취하는 강한 여성이 주인공이다.

※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서울대 외교학과와 스탠퍼드대(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에서 공부했다. 중앙일보에 지식전문기자로 입사, 심의실장과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서강대·한경대·단국대 등에서 강단에 섰다. 지은 책으로 [따뜻한 종교 이야기] [CEO를 위한 인문학] [대한민국을 말하다: 세계적 석학들과의 인터뷰 33선] [마음고전] [아포리즘 행복 수업] [하루 10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말하다] 등이 있다.

201907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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